박영규(1924)
그후 이들은 서로 민족적인 의기가 투합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독립이 되어야만 차별을 받지 않는다고 인식하였다. 또한 박영규를 비롯한 한국인 유학생들은 토론 끝에 다음과 같은 사안을 결론지었다.
박영규 등의 동경 유학생들은 이같은 주장으로 민족의식을 고양하고 동지를 규합하기 위한 항일적인 활동을 하다가 1942년 2월 1일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그해 7월 17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그후 1942년 11월 30일 박영규와 그의 동지인 장세종, 장동선은 기소유예 처분을 받을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이후 8.15 해방으로 일제강점기가 종식된 뒤 귀환한 그는 서울 용산구에서 조용히 지내다 1997년 3월 26일에 사망했다.1) 조선의 독립 없이는 조선민족의 행복은 없다는 것
2) 창씨제도와 한글의 폐지는 한국문화를 파괴한다는 것
3) 한국역사의 우수한 점을 찬미하고 민족의식을 고양할 것
4) 한국인은 체력과 두뇌 등이 일본인보다 열등하지 않다는 것
5) 한국민중의 무지를 지도 계몽하여 민족적 자각을 촉구할 것
6) 기독교 등의 종교단체를 통해 민중을 지도할 것
7) 태평양전쟁 중 일본의 혼란 상태는 필연적으로 도래할 것이므로 이러한 기회에 한국의 독립을 완수할 것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박영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7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320실 92호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