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종(독립운동가)

 


성명
박원종(朴元鍾)
본관
무안 박씨
생몰
1891년 3월 13일 ~ 1968년 6월 7일
출생지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1]
사망지
경상북도 영덕군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대통령표창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박원종은 1891년 3월 13일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16일 남계병으로부터 18일 경북 영덕군 영해면 영해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할 계획이니 도곡동 주민들을 동원해 달라는 제의를 받고 적극 찬성하였다. 이후 그는 17일 동리의 각 집을 돌며 매 호당 1명씩 깃발을 만들어 영해 장터로 나오도록 연락하고, 18일 장터로 나가 2,000여 명의 시위군중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때 영해경찰주재소에서 주임 순사가 출동하여 해산을 명하자, 그는 솔선하여 일본 경찰을 구타하고 제복과 모자, 칼 등을 훼손하였다. 이어 군중들과 함께 주재소를 습격하여 지붕과 기둥 일부만 남기고 거의 파괴하였다. 군중들은 계속하여 소방소, 재향군인회 분회, 공립보통학교, 심상소학교, 면사무소, 우편소 등을 차례로 습격하여 건물과 비품을 파괴하고 공문서를 파기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급보를 접한 영덕경찰서에서 서장 시게요시 마고하치(茂義孫八)가 부하 4명을 인솔하여 현장으로 출동하였다. 서장이 몇 차례 해산을 명령하였으나, 시위군중은 기와장과 돌을 던지며 곤봉으로 대항하였다. 시위군중의 기세에 눌린 서장 등이 본서로 돌아가려고 할 때 그는 군중들과 함께 서장 일행을 포위하여 그들이 소지하고 있던 칼과 총기를 빼앗고 제복과 모자를 찢어 버리는 등 격렬하게 항쟁하였다.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 공무집행방해, 상해, 건물 파괴, 기물 파손, 공문서 훼손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영덕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8년 6월 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박원종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무안 박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박경종·박익찬·박종태·박재각·박재송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