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수
1. 창녕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재수
박재곤은 1894년 8월 26일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창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만주로 이주했고, 1928년 5월 중국 봉천성 청원에서 이만엽(李萬葉)의 권유로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정의부(正義府)에 가입하고 정의부의 지방기관인 해원(海原) 제5구장으로 선임되었다. 그해 11월 26일 경 정의부의 이만엽과 함께 다구(茶溝) 임성률(林成律)의 집에서 이영구·이영백·이영순 등으로부터 각각 봉천표(奉天票) 300원씩을 징수하였다.
또한 음력 8월 15일 경에는 2명의 정의부원과 함께 봉천성 서풍현 개신구 김상배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려 하였으나 응하지 않자, 김상배의 동생 김연배로부터 봉천표 500원을 모금하였고, 박규벽으로부터 봉천표 4원을 모집하는 등 군자금 모집활동에 종사하다 붙잡혔다. 1929년 7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과 강도죄로 징역 7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창녕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6년 12월 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박재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 진주시 출신 독립운동가, 박재수
박재수는 1895년 12월 10일 경상남도 진주군 나동면 삼계리에서 박주형(朴周衡)과 진사(進仕) 하재원(河載源)의 딸 사이에서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 박주형은 통정대부 비서감승을 역임했으며, 큰 형 박재호(朴在鎬)는 경남일보 1911년 6월 2일자에 의하면 축곡면 산기동 주민 중에 어려운 이웃의 호세 40원을 대납했다고 하며, 1921년 11월 일신여고와 진고를 설립할 때 발기인 겸 초대 이사장을 맡았고, 진주고등보통학교 초대 기성회장을 맡아 고대 문화재를 진주고와 서울대에 기증하였다.
1919년 4월, 박재수는 나동면 삼계리에서 박재룡의 주도로 유생을 규합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일 계획에 찬동하였다. 그리하여 독립선언서 등 여러 격문을 만드는 데 협력하고, 동년 5월 20일과 30일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진주군 진주 유일여관(唯一旅館)에서 강대익(姜大翼)에게 박재룡이 국권회복을 위해 몸을 희생하는 데 함께 이바지하자는 뜻을 전하고 금일 우리가 독립만세시위를 함은 국민의 의무로서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당시 그와 동지들이 작성한 격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얼마 후 일제 경찰이 그와 동지들의 활동을 감지하고 전격 체포했고, 그는 1919년 8월 1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제령 제7호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공소하여, 10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다시 징역 6월을 받아 상고하였으나 11월 1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2일 가석방된 후 자택에 은거했고, 1929년 6월 15일에 사망했다.슬프다. 우리 2천만 동포여 황제 폐하께서 돌아가시어 천수를 마치지 못했는데 통탄함이 만배라 오직 널리 거느린 바, 이 어떤 시대이며 어떤 기회인가. 지난 날 나라가 멸망하고 사람은 노예가 되는 액운과 역경이 차츰 지나서 장차 쾌할한 세계 독립무대의 위에서 우유함이 어찌 큰소리로 나무라지 않겠는가.
진실로 굴레를 벗어 메고 권리지책을 회복함이니 오직 우리 반도는 오래도록 강한 이웃의 압전으로 스스로 면월의 부끄러운 발자취를 밟아 오지 이제 몇 해 이던가 행시 주육하면서 부질없이 함생(含生)의 무리에 더하니 참으로 슬프도다. 동포 중에 유림일파가 나아와 참으로 나라의 원기를 점유하고 사민의 우두머리에 처하면서 어떤 사업가인가를 논하지 말라 선비의 그 범주를 그만두고 지금 전국에 민심이 일변하고 있으니 학교와 사회가 그리고 종들과 하인들이 담력을 펴지 아니함이 없다.
기노를 토하면서 스스로 혀를 깨물고 마침내 독립만세를 외치느니라. 오직 두렵건대 혹 뒤에서 우리 유림 중에 이제까지 고요하게 소문이 없다면 어찌 선비가 타고난 천성을 지키는 마음이 없이 그리하겠는가. 평일에 허다하게 성현의 글을 읽어 의리를 다소 강구하고 그 스스로 허락함이 과연 어떠하며 이 시대를 당하고 이 기회를 당하여 돌아보건대 다른 사람에게 양여하여 나라가 스스로 회복함을 기다리겠는가. 아, 이 세상에는 가치없는 영웅이 없을 것 같으면 그리고 뿌리가 옅으면서 쉽게 뽑히고 바탕이 얕으면 쉽게 무너짐은 이치와 형세의 필연함이라.
그러므로 대양의 열국들이 독립의 기초로 나아감으로 혹은 열혈로 혹은 칼로 혹은 필설로 그 모습은 한결같지 않다. 하물며 요사이 비율빈 파란제국이 모두 독립을 얻고 스스로 공인이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일은 실제가 귀하니 가히 허명에 힘쓰지 아니하고 국가에 도움이 없는 치분사는 폐모하는 폐단이다. 지금을 위하여 계책을 먼저 시역의 흉당을 토역하여 백일하에 용납할 수 없다.
총독부 소속 관리와 보병고원으로 하나같이 아울러 해임하고 물러나 한사람도 그 사이에 축적함이 없다. 비로소 우리 새 정부건설에 종사하여 마침내 그 충군하고 애국하는 직분으로 돌아감이 옳을 것이다. 각자가 깊이 반성하고 방탕한 생각을 하여 천재일시의 기회니 천만번 소홀함이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박재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사단법인 충효예실천운동본부 진주지회는 그를 기리기 위해 진주항일투사추모비를 세웠고 국가의 현충시설물로 등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