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식(1911)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박종식'''
'''朴鍾殖'''

[image]
<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911년[1] 12월 20일
전라남도 진도군 고일면 지막동
(현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지막리)
<color=#fff> '''사망'''
1948년 10월 20일
전라남도 진도군
<color=#fff> '''본관'''
밀양 박씨
<color=#fff>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color=#fff> '''상훈'''
건국포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제35대 국가정보원장 박지원의 부친이다.

2. 생애


박종식은 1911년 12월 20일 전라남도 진도군 고일면 지막동(현 진도군 고군면 지막리)에서 아버지 박원배(朴元培)[2]와 어머니 곽동순(郭東順)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래로 박종극(朴鍾克)·박용식(朴鎔殖)·박종기(朴鍾琦)·박종윤(朴鍾允) 등 4명의 남동생과 박성심·박성금 등 2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그는 전남 목포공립상업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9년 11월, 광주에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여 많은 학생들이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그는 최창호(崔昌鎬) 등 동교 학생들과 여러차례 회합한 끝에 목포에서도 11월 19일을 기해 동조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이재실(李在實)이 「피감금학생 즉시 탈환」, 「총독부 폭압정치 절대 반대」, 「피압박민족해방 만세」 등의 구호를 쓴 붉은 목면(木棉) 대기(大旗) 3개와 붉은 색종이로 된 소기(小旗) 약 120개를 만들어 배부하고, 정찬규(鄭燦圭) 등이 등사판으로 격문 약 1,500매를 인쇄하여 서로 나누어 가짐으로써 시위 준비를 마쳤다. 박종식 역시 이에 가담하여 태극기 140매를 제작했다.
거사 당일인 11월 19일 아침, 박종식 등은 정명여학교(貞明女學校) 앞에 집결하여 일제히 소기를 흔들고 격문을 살포하면서, "싸우자 2천만 동포여! 광주학생을 탈환하라. 우리는 정의를 위하여 싸운다"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30년 3월 2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동년 6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10개월여의 옥고를 치렀으며, 목포공립상업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출옥 후 진도군으로 돌아와 조용히 지내다 1948년 10월 2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박종식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1910년생이라는 기록도 있다.[2] 호적명은 박봉진(朴鳳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