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1942)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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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비서관
문민 정부
국민의 정부
4대
신우재

초대
박지원


2대
박준영

대통령비서실 정책기획수석비서관
국민의 정부
4대
김성재

5대
박지원


6대
한덕수



<color=#373a3c> 대한민국 국회의원 (전남 목포시)
제17대
이상열

제18~20대
박지원


제21대
김원이

제35대 국가정보원장
박지원
朴智元 | Park Jie-won

<colbgcolor=#002267><colcolor=#ffffff> 출생
1942년 6월 5일 (81세)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거주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본관
밀양 박씨

우석(雩石)
현직
국가정보원장
김대중이희호기념사업회 부이사장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재임기간
제36대 문화관광부 장관
1999년 5월 23일 ~ 2000년 9월 19일
제25대 대통령비서실장
2002년 4월 15일 ~ 2003년 2월 24일
제35대 국가정보원장
2020년 7월 29일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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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12060><colcolor=#ffffff> 부모
아버지 박종식
형제자매
3남 1녀 중 막내
배우자
이선자[61]
자녀
슬하 2녀[62]
학력
문태고등학교 (졸업)
광주교육대학 (초등교육학 / 전문학사)
단국대학교 (상학 / 학사)
목포해양대학교 (정치학 / 명예박사)
병역
육군 병장 만기전역
종교
천주교(세례명: 요셉)
소속 정당
[63]
의원 선수
4
의원 대수
14, 18, 19, 20
경력
럭키금성상사 근무
동서양행 뉴욕지사장
데일리팻숀스 대표이사
뉴욕한인회 회장
미주지역한인회 총연합회 회장
민주당 통일국제위원회 부위원장
제14대 국회의원(전국구 21번)
민주당 수석부대변인
민주당 대변인
민주당 당무위원
새정치국민회의 기획조정실장
새정치국민회의 총재특별보좌역
대통령인수위원회 위원
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비서관
제36대 문화관광부 장관
대통령비서실 정책기획수석비서관
대통령비서실 정책특별보좌관
제25대 대통령비서실장
제18대 국회의원(전남 목포시)
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
민주당 원내대표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
제19대 국회의원(전남 목포시)
민주통합당 원내대표
민주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
제20대 국회의원(전남 목포시)
국민의당 원내대표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
국민의당 대표
민생당 상임고문
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
광주김대중컨벤션센터 이사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사업회 이사
김대중이희호기념사업회 부이사장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제35대 국가정보원장

1. 개요
2. 생애
2.1. 재미 사업가
2.2. 정치 활동
2.2.1. 김대중(DJ)의 오른팔
2.2.2. 대북송금 특검
2.2.3. 재기와 분당
2.2.4. 문재인 정부 시기
2.2.5. 낙선 후
2.2.6. 제35대 국가정보원장
3. 뛰어난 정치력과 처세술
5. 소속 정당
6. 선거 이력
7. 어록
8. 여담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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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정치인, 관료, 기업인.

2. 생애


1942년 6월 5일,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독립운동가박종식(朴鍾殖, 1910년 ~ 1948년)으로 1993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2.1. 재미 사업가


1948년 아버지를 여의고 진도에서 목포로 이주해서 문태고등학교, 광주교육대학, 단국대학교 상학과를 졸업하였다. 1970년 대학 졸업 후 LG상사(당시 럭키금성상사), 동서양행 등 기업에서 근무했다.[1] 이후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피혁과 가발 수출 사업을 운영하면서 80년대 초 뉴욕 한인회장을 지냈다.[2]
사실 박지원은 당시부터 정계 진출에 꿈이 있었는데, 그래서 만났던 사람이 놀랍게도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었다. 박지원은 전경환과 가깝게 지냈고, 실제로 1981년 11대 총선 당시 전경환의 도움으로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여 전국구(지금의 비례대표) 공천을 받으려고 했었으나 전두환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그러던 중 1983년, 미국으로 망명한 김대중김경재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고, 박지원은 5.18 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전해들은 뒤, 통렬하게 반성했고[3], 그 후 김대중의 후원자로 활동하였다. 이후 1987년 민주화가 이루어지며 김대중이 사면되자, 박지원 역시 미국에서의 사업을 모두 정리한 후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2.2. 정치 활동



2.2.1. 김대중(DJ)의 오른팔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돼 등원하였다.[4] 1996년에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5]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는데, 그 당시 상대가 다름아닌 김문수였다.
하지만, DJ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부터 대변인으로 대언론 소통창구를 맡았으며, 김대중 정부 출범 후에는 공보수석, 문화관광부 장관,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중용돼, 기존의 동교동계 가신[6]들이 관여하기 어려운 부분에[7] 뛰어들어 틈을 메꾸는 역할을 맡았다.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식 때는 북한 측이 조의화환과 함께 공개적으로 보내온 편지의[8] 수신자 두 사람(임동원[9], 박지원) 중 1인이었을 만큼 DJ의 최측근으로 간주되었다.[10]
2019년 서거 전까지 이희호 여사의 병세를 가장 먼저 관심갖고 지켜보는 입장일 정도로, DJ 사후에도 10년째 완벽한 DJ의 심복임을 행동으로 자처하고 있다.

2.2.2. 대북송금 특검


불법 대북송금 사건에서 현대로부터의 150억 원 수뢰에 대해선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SK그룹에서 7,000만 원, 금호그룹에서 3,000만 원을 받고(알선수재죄) 직권남용, 외국환거래법남북교류협력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과 추징금 1억 원을 선고받았다. 당시 2004년 최후진술에선 “입으로는 변화를 부르짖으며 관행에 젖어 잘못한 것은 처벌받겠다.”고 했다. 대북송금사건 당시 구속되어있는 동안 지병인 녹내장이 악화되어 왼쪽 눈에 이어 오른쪽 눈을 실명할 뻔했다.[11] 박지원 본인도 재판 당시 '남은 한쪽 눈마저 실명될 위기다'라며 선처를 호소하며 구속집행정지 신청을 했고 받아들여졌다.#
이후 집행정지와 재구속을 끊임없이 반복하다가, 2007년 2월 사면을 받아 징역 3년 중 1년 5개월 정도를 채우고 출소하게 된다.
  • 2003년 6월 18일 구속 후 2004년 2월 구속집행정지(8개월 구속)
  • 2004년 3월 재구속 후 2004년 5월 4일 구속집행정지(2개월 구속)
  • 2004년 6월 재구속 후 7월에 다시 구속집행정지(1개월 구속) 연속 2번
  • 2004년 11월 2일 재구속 후 16일 다시 구속집행정지(14일 구속) 2번에 2005년 3월에 보석
  • 1년 뒤인 2006년 5월 25일 파기환송심 최종 선고로 재구속
  • 2006년 11월 3일 형집행정지로 3개월 만에 석방(5개월여 구속)
  • 2007년 2월 9일 석방된 상태에서 사면.[12]
  • 2008년 1월 1일 특별복권.

무려 구속집행정지 6번(10개월)에 형집행정지 1번(3개월)을 받았으며, 보석으로 1년 2개월 이상을 나와 있었기에 총 2년 3개월을 넘게 쉬었고, 이 기간의 대부분을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을 받거나 통원치료를 했다. 파기환송심 당시 언론이 구속집행 정지 기간을 제대로 계산하지 않고 보도한 탓에 2년 정도 감옥에 있던 걸로 알려진 경우가 많으나, 실제로는 1년 반도 안 된다.
참여정부 시절 징역을 산 이후로는 친노 및 그 후신이라 볼 수 있는 친문계열 정치인들과 일정 거리를 두는 모습이 이 일과 관련이 있다고 추정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상술된 대로 박지원을 사면해 준 것은 노무현이기에 쉽게 단정짓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많다. 대통령 사면이 아니었다면 그 다음 대통령이 취임한 뒤에도 징역을 살다가 풀려날 뻔했다.[13] 근데 이미 당시 형집행정지 상태여서 사면 결정이 나기 전에 더 연장신청을 했을 가능성이 높아, 사면을 안 했다면 언제 다시 감옥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2.2.3. 재기와 분당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하자[14] 무소속으로 전라남도 목포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통합민주당에 복당했다. 그리고 복당인사였음에도 2010년 5월 원내대표에 당선되었다. 이후 2010년 7월 28일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하자 당시 대표였던 정세균이 사퇴를 했고 결국 임시로 다음 전당대회까지 비상대책위원장을 역임하게 되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15] 2012년 5월 민주통합당의 19대 첫 원내대표에 선출되었는데 이때 초대 지도부가 총선패배로 인해 모두 사퇴한 상황이었기에 역시 임시로 다음 전당대회까지 비상대책위원장을 역임하게 되었다. 전당대회를 통해 새롭게 당선된 이해찬 대표와의 담합 의혹이 있기도 했었다. 그리고 대선 패배 이후 원내대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2014년 7.30 재보궐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이 참패하자 김한길, 안철수 공동대표가 사임하고 뒤를 이었던 박영선 원내대표 겸 국민공감혁신위원장마저도 자리에서 물러나자 그 뒤를 이은 문희상 비상대책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당대표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선거에 뛰어들었으나, 2015년 2월 8일에 열린 새정치민주연합의 전당대회에서 결국 2위로 석패했다.
그리고 2016년 1월 22일에 민주당을 탈당하고, 3월 2일 국민의당에 합류했다.박지원, 국민의당 입당키로…18번째 현역
국민의당 합류 이후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당선되어 4선의 중진이 되었다. 2016년4월 27일 경기도 양평군에서 열린 국민의당 20대 국회의원 당선인 워크숍에서 러닝메이트인 정책위의장에 추대된 김성식 당선인과 함께 원내대표로 만장일치 합의추대되었다. 이로써 박 의원은 2010년 민주당, 2012년 민주통합당에 이어 이례적으로 3번이나 원내대표를 맡는 진기록을 세웠다. # 2016년 6월 29일 천정배, 안철수 공동대표가 사퇴하였고, 박지원은 만장일치로 원내대표를 겸하면서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2016년 12월 5일부로 김동철에게 비상대책위원장을 이임하였다. 곧바로 국민의당의 당대표 및 최고위원을 뽑는 선거에 출마하기위해 원내대표직도 사임하였다.
그리고 2017년 1월 15일, 국민의당 전국당원대표자회의에서 1인 2표제, 전국 당원 전체 투표로 200% 중 61.58%의 득표율로 국민의당의 2대 당대표로 선출되며 자신의 정치인생 중 처음으로 전당대회를 통해 선출된 정식당 대표가 되었다. 지금까지 당 대표 직함은 비상대책위원장직이 전부였으니 그야말로 말년에 성공한 정치인이 되었다.
2017년 5월 10일,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2기 지도부가 총사퇴를 결의하면서 박지원 본인 역시 당대표직에서 물러났다.

2.2.4. 문재인 정부 시기


2017년 9월 12일의 대정부질문에서는 무리한 주장을 펼치는 다른 야당 의원들과 달리, 이낙연 총리와 제대로 된 질의응답을 주고받아 그나마 좀 낫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사실, 이낙연 총리는 박지원의 후임 대변인으로 같이 한솥밥을 먹었고, 이 총리가 동교동 출입기자였을 때는 박지원 대변인이 자리를 종종 마련해 기자들과 만나곤 했기[16]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는 박지원이 민주당을 탈당한 후에도 그리 나쁘지 않았을 것로 추정된다.[17]
그러나 전날인 11일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임명동의안 부결로 인해 국민의당과 안철수 대표가 여론의 비판을 자초하고 있고, 박지원 본인도 언론 인터뷰에서 사태의 책임을 청와대와 여당에게 전가하는 발언[18]해서 그나마 훈훈한 이런 장면도 묻히고 있다.
2017년 추석 연휴 동안 전남 곳곳을 돌아보며 민생 행보를 펼쳤기 때문에 전남도지사 출마에 대한 마음을 굳힌 것 아니냐는 평가를 받았는데, 10월 10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국민의당이 지방선거에 승리하지 않으면 존폐가 의심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기왕에 말씀드린 대로 안철수, 손학규, 천정배, 정동영, 박지원. 이런 당대표급 인사들이 이번에는 전면에서 뛰는 것이 좋다. 그래서 한번 이끌고 가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준비하고 있다"며 강하게 출마 의사를 보였다. 그래서 민주평화당정의당의 공동교섭단체에도 부정적인 의사를 표출했는데, 교섭단체를 만들려면 자신이 의원직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 그러나 이후 입장을 선회해서 지사직에는 불출마하였다.
2018년 2월 민주평화당 창당 이후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문모닝을 보여주고 있는데, SNS나 인터뷰를 통해 문재인 정부의 정책, 특히 대북 정책에 든든하게 뒷받침 해주고 있다. 가끔가다 보면 남들 모르게 복당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 남북정상회담이 합의되자 ”저래서 문재인이 대통령됐구나, 역시 나보다 낫다고 인정한다“고 누가보면 민주당 논평이 아니고 싶은 정도로 극찬했다. 물론, 박 의원이 대북 송금 사건으로 처벌 까지 받았는데도 지금도 자신의 정치 목표는 햇볕정책을 통한 한반도 평화 정착이라고 하는 사람이지만, 외부적으로 봤을 때는 차기 전남지사 출마를 위한 포석이 아닌가 하는 분석이 압도적이다. 아무래도 호남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낮아도 80%의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는 상황이라...
실제로 문 대통령의 복심이자 최측근으로 알려진 양정철 전 비서관의 북콘서트 게스트로 등장해서 대놓고 민주당과의 연대를 말하며 민주당에 구애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박 의원의 이러한 행보에 넷상의 민주당 지지자들의 반응은 "응 안돼"로 종합 할 수 있겠다. 민주당 역시 내부적으로 일부를 제외하고는 합쳐서 재적 과반이 되는 것도 아니고 대통령과 당 지지율이 압도적인데 굳이... 하는 분위기로 알려졌다.
딴지일보 김어준 대표가 진행하는 TBS의 '김어준의 뉴스공장'과 TV조선의 시사프로그램인 강적들에 자주 게스트로 초빙되고 있다.
2019년 7월에 대안정치연대 소속 비당권파들과 민주평화당을 탈당하기로 했다. 2020년 1월 대안신당 창당일을 결정한 이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위해서는 대안신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이 합당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흩어져있는 옛 국민의당 세력들의 통합을 주장한 것이다.
2020년 1월 9일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윤석열 라인을 겨냥한 검찰인사에 대해서 "역시 추미애답게 통쾌[19]하게 했더라."면서 후속 인사는 차장, 부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제 (정권을 겨냥한) 수사 라인 차장, 부장들도 온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을 했다.# 다음날인 10일에는 추 장관의 "(윤 총장이) 내 명을 거역했다"라는 발언에 대해 "왕조시대도 아니고 지나친 표현이다."며 비판했고, "수사라인을 좌천성 승진이나 좌천시킨 것은 조금 무리가 아니었나"라고 평가했으며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해서는 대해서는 "버텨야 되고, 버티리라 본다"고 전망했다.# 앞선 2019년 12월에는 유재수·김기현 의혹 수사, 검찰 수사관 사망과 관련해 "마치 '제2의 국정원 댓글 사건'이 되는 것 같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어서는 안 될, 특히 청와대 사정 기관의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아니냐, 쉽게 간과될 일은 아니다", "감찰 무마 의혹은 조국 사태보다 더 중요한 문제로 갈 것"[20]이라며 "현재 검찰이 수사중이니까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말한바 있다.# 또한 자신도 많은 의혹을 받았지만 무죄로 밝혀진 경험이 있다며, 실체가 있는 의혹인지 검증이 필요하다고도 하였다.#
2020년 1월 안철수가 귀국해서 신당 창당을 선언하자 " 안철수는 새로운 인물이 아니다 " 라고 비판했다. #
21대 총선에서 민생당 후보로 다시 목포에 출마했으나 민주당 김원이 후보에게 패하며 결국 낙선했다. 아직도 화제성이 뛰어나긴 하지만 나이도 너무 많고 민생당 후보들이 다 떨어졌기 때문에 사실상 은퇴 수순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다.

2.2.5. 낙선 후


고령의 나이인지라 다음 총선 출마도 불투명하고 민생당도 원외정당으로 전락했기에 사실상 정계 은퇴 수순이라는 추측이 돌았으나 일단 박지원은 '영원한 현역'을 선언하며 정계에 간접적으로나마 남아있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 워낙 언변이 좋고 유머가 뛰어나서 의원 시절에도 방송 출연이 잦았던 터라 방송 출연과 SNS 활동을 계속 진행할 것으로 보이고, 상황에 따라서 유튜브를 개설하여 원로 정치인으로서 할 말은 하고 살겠다고 한다.
실제로 낙선 후 공중파와 종편을 가리지 않고 정치 및 시사프로그램에 계속 패널로 출연하고 있다. 전반적으로는 문재인 정부를 옹호하는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지만, 민주당 윤미향 당선인과 관련하여 발생한 정의기억연대 위안부 피해자 이용 논란에서는 윤미향 당선자와 민주당을 비판하기도 했다.[21]
2020년 6월 1일 자로, 모교인 단국대학교 석좌교수에 임명되었다. 대북관계, 국제정세, 국내정치문제를 강의한다고 페이스북을 통해 밝혔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사건 이후 6월 17일 꽉 막힌 남북관계 해법을 논의하기 위해 문정인 특보, 고유환 통일연구원장, 임동원·박재규·정세현·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박지원 교수 등 원로들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오찬을 가졌다고 한다. #
이후, 일각에선 사의를 표명한 김연철 장관의 후임 통일부장관으로 임명하라는 목소리가 나왔고 총선 직후부터 입각설이 제기되었다. 추미애 법무부장관처럼 국회의원 선수나 그동안의 경력을 보았을 때, 진짜 남북관계가 악화되었을 때 최후의 카드로 쓸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2.2.6. 제35대 국가정보원장


2020년 7월 3일, 국가안보실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서훈 국정원장의 후임으로 차기 국정원장에 지명되었다.[22] 청와대 브리핑에서는 18~20대 국회 정보위원회 활동 시 보여준 뛰어난 정보력과[23] 국정원 기관에 대한 깊은 이해, 남북관계 조정에 대한 능력을 인정해 내정했다는 설명이 있었다. 또 비슷한 시기 동교동계 출신인 김한정 의원도 국민의 정부 시절 국정원에서 이종찬 국장의 대외협력보좌 역으로 근무했던지라, 일부 여당 의원들과의 원만한 관계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대해 박지원은 페이스북을 통해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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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이 국정원장에 내정된 것 자체도 상당히 파격적이라는 평이다. 어느 정도로 파격적이냐면, 박근혜정부 말기에서 유승민경제부총리로 내정하는 급의 파격 인사이다.[24][25]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당적 보유자가 아니라 야권인 민생당 당적 보유자를 입각시킨 탕평인사라는 점도 그렇고, 과거 참여정부 시절 진행된 대북송금 특검으로 인해 개인적으로 문재인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인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26] 지난 20대 국회의원 시절 문 대통령의 대북 정책에 줄곧 힘을 싣는 발언을 해왔고,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여 정치적 입지가 다소 줄어든 형국에서 본인 정치 인생의 마지막을 불태울 수 있는 기회이자 본인이 줄곧 주장해온 대북 정책과 정치적 신념을 관철하고자 국정원장직을 받아들였다 볼 수 있다.
다만 국회 정보위원장을 선출하기 위해서는 두 국회부의장의 협의 후 본회의 의결이 필요한데, 현재 미래통합당 몫 국회부의장 내정자인 정진석 의원이 부의장직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정보위원장을 선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미래통합당이 국회 복귀를 선언함에 따라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청문회가 준비될 것으로 예상된다.
사실 대표적인 북한통이기도 하다. 정치권에서 북한 사정을 잘 아는 북한통으로는 하태경, 태영호 정도가 언급되는데, 현재 그들은 미래통합당 소속이라 현역 의원직을 내려놓고 문재인 정부에 합류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리고 태영호는 탈북자 출신인데다 국정원에서도 자문위원 정도만 전담했고, 신변 위협의 가능성과 판단력에 의문이 있었기 때문에 여야 의원들 사이에서는 맡을만한 사람이 맡았다고 본다고 언급한 듯.
청문회를 위해 재산이 공개되었는데, 총 17억 원에 건물이 14억이다. 일반인 기준으로는 상당히 많은 게 맞지만, 박지원이 정계 입문 전에는 뉴욕에 건물 5채가 있었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재미 사업가였던 사람이었던 걸 생각해 보면 오히려 꽤나 적은 편이라는 얘기가 나온다.[27] 본인 말로는 그간 정치할 때 많이 썼다고 한다.
청문회의 주요 쟁점은 1965년 현역 사병으로 복무 중 부대장 배려로 단국대에 편입해 졸업한 과정, 2003년 대통령 비서실장 퇴임 당시 39억 9천만 원이었던 재산신고액이 2008년 13억 9천만 원으로 5년 만에 26억 원 급감한 경위 등이 될 전망이다.#
2020년 7월 27일, 정보위원회에서 인사청문회가 개최되었는데 개인 도덕성 검증에 초점을 맞춘 오전 청문회만 국민에게 공개되고, 본격적인 정책 및 현안 질의가 진행되는 오후 청문회는 비공개로 진행된다.#[28] 이때 청문회를 시작하기 전 국정원의 임무를 수행하다 산화한 '이름없는 별'들에 대한 추모의 의미로 묵념을 하고 시작했다.
미래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29]가 북한을 주적으로 인식하냐고 반복적으로 질문하자 "주적이라니깐요? 100번 말할까요? 아니면 광화문 가서..."라고 답했다.
2020년 7월 28일, 통합당의 불참 속에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박지원 국정원장 후보자에 대한 청문경과보고서가 채택되었다.# 오전에는 통합당 하태경 의원, 주호영 원내대표 등이 단국대학교 졸업 및 남북간 이면합의서 존재 여부##를 가지고 일단 임명을 유보하고 국정조사를 진행해야 된다고 주장했으나### 여당 간사였던 김병기 의원[30]이 이를 거부하자 오후에는 상임위 전체회의에 불참하였다.
2020년 7월 28일, 청문경과보고서 채택 직후 문재인 대통령이 박지원 국가정보원장 내정자에 대한 임명을 재가하여 29일부터 신임 국정원장으로 임기를 시작했다. 29일, 김창룡 경찰청장, 이인영 통일부장관 등과 함께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았는데, 행사장에는 딸과 더불어 어린 외손자도 동행해서 눈길을 끌었다.
2020년 11월 8일 스가 정부 출범 이후 대한민국 최고위급 인사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일본을 방문하여 니카이 도시히로 간사장을 9일에, 스가 요시히데 총리를 10일에 접견하였다.
2020년 12월 16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정원장·법무부 장관·행정안전부 장관 합동 권력기관 개혁 관련 브리핑에서 박지원은 “역대 정부에서 추진했지만, 미완으로 남았던 국정원 개혁이 비로소 완성됐다”, "국정원의 정치 개입은 절대 없을 것”이라며 “5·18, 세월호, 댓글 사건, 민간인 사찰 같은 국정원 관련 의혹이 두 번 다시 거론되지 않도록 진상 규명에도 끝까지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13일 국회를 통과한 국정원법 개정안에 대해 “1961년 중앙정보부 창설 이후 처음으로 국정원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확히 규정했다”고 의미를 부여했고, 국정원의 국내 정치 개입 문제에 대해 “(기존 직무 범위에서) ‘국내 보안정보’를 없앴고, 정치 개입이 우려되는 조직은 해체했으며 원천적으로 설치할 수도 없게 됐다”고 강조했다. 또한 “중대한 국가 안보 사안은 국정원이 국회에 보고함으로써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 의해 민주적 통제를 받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
2021년 1월 20일 국정원은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구성원들에게 문서보안 과정을 거쳐 세월호 침몰사고 관련 문건 64만건을 열람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3. 뛰어난 정치력과 처세술


오랜 정치 경력으로 인해 정치 9단, 족집게, 꾀돌이 등의 별명이 있는 수완가이다. MBC의 21대 총선 개표방송인 MBC 선택 2020에서는 아예 8선 같은 4선이라고 표현했다. 깔끔하고 명쾌한 메시지와 능수능란한 정치적 감각, 상대방의 약점과 흠결을 타격할 수 있는 정보력을 갖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국민의당 시절, 당대표는 안철수, 천정배였지만 국민의당이 제20대 총선에서 호남 표를 싹쓸이하고 제대로된 정당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원내대표로 활약하던 박지원의 공이라는 평이 많다.
실제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후 거대야당은 더불어민주당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의당 박지원 원내대표가 싱크탱크 역할을 하며 정국을 이끌었다. 권력의 곁에 있어보기도, 권력을 가져보기도 한 정치인으로써 그 생리를 잘 알고, 고령이지만 여전히 빠르고 맥을 잘 짚는 상황판단을 보여주고 있다. 2016년 12월 9일 헌정 사상 2번째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진행돼 가결된 후, SBS에서 박지원을 초청해 의견을 묻기도 했다.
정계의 원로로 이 나이까지 살아남은 여의도의 정치 9단이라는 이름은 결코 허풍이 아닌지라 시세를 파악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그 때문에 프로에서 초청되면 차분하지만 매우 예리한 면모를 보인다. 자유한국당/2.27 전당대회에서 모든 선거는 시대정신을 반영하기 때문에 당대표 선거 2위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일 것이라고 예측했고 실제로 맞아떨어졌다.
바른정당국민의당의 합당후 미래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으며 이후 바른정당이 국민의당에 이어 2차로 자유한국당과 합당하려 할 것이라고 예측을 내놓았다. 이후 바른미래당의 합당 결과가 그리 신통치 않으면서[31] 박지원의 예측이 맞았다는 것에 고무되어 이후 바른미래당이 과연 자유한국당과 합쳐질 것도 맞을 것인가에 대해 관심이 쏠렸는데, 결국 그 바른미래당에서 친유계가 새로운보수당 분당 후 21대 총선국면에서 자유한국당과 합당하여 미래통합당이 되었다는 점에서 사실상 맞춘 셈.
과거 김대중의 야당 총재시절부터 대언론소통을 맡아, 기자들과의 접촉이 잦았으며, 정동영이 갓 정계입문 후 DJ에게 아침보고를 올리고자 출근하면, 전날까지 기자들과 만난 박지원이 차 안에서 운전사와 졸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고 한다. 또한 기자들과도 곧잘 친근하게 지냈기 때문에, 일설에 따르면 뉴스 기사에서 "야권의 한 고위 관계자"라는 지칭이 나오면, 사람들이 대체로 박지원이라 간주한다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존경해서 그런지 MB정부 시절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정치공작으로 추정되는 혐의가 생기자 이명박을 공격하는 말을 쏟아내었다. MB정부의 국정원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있는지 뒷조사를 하고,[32] 노벨평화상 수상 취소 청원을 모의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자신의 SNS에 즉각적으로 "천하의 못된 짓은 다 모아 자행한 MB와 MB정부 주동자, 가담자는 철저히 발본색원, 처벌해야 한다"며 "이미 수상한 DJ 노벨평화상을 취소시키려 모의했다니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극렬한 반응을 쏟아냈다. 게다가 2017년 국정감사에선 "다스는 MB 거"라고 노골적으로 주장하며, 11월 1일에 출연한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선 "내가 미워하는 MB가 곧 구속되게 생기니 기분이 좋다"는 발언으로 대놓고 확인사살. 다만 그러면서도 김 전 대통령의 3남인 김홍걸의 "MB가 아버지의 국장을 마지못해 결정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전면부정하며 "MB가 국장에 적극 협조해줬으며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는 의견을 내비치기도 했다.@
한때 같은 정당에 몸담았던 문재인과도 사뭇 노선이 달랐다. 민주당 분당과 대북송금 특검 등으로 참여정부와 그다지 사이가 좋지 못했던 영향이 있는 듯. 19대 대선 시기에는 '문모닝'으로 대변될만큼 대립각을 세웠고, 후일에 스스로도 "반문의 괴수"였다고 시인할 정도. 19대 대선 당시 안철수 후보 유세중에 느닷없이 '문재인이 되어야 호남의 정치적 몫을 가져올 수 있다'라며 말실수를 해서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만큼 문재인을 매우 의식해서 나온 실수라고 볼 수 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해서는 때로는 지지, 때로는 비판을 하고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지지하는 모습이다. "지금 문재인 정부는 튼튼한 안보와 한미 동맹, 한미일 공조에 대해서 간과하고 있다."#, "DJ였다면 대일문제(강제징용)를 이렇게 악화시키지 않고 국익을 위해 결단을 내렸을 것."#, 최저임금 인상이나 소득주도성장, 탈원전 기조에 대해서는 "한국 경제는 항공모함인데 정부가 고무보트처럼 획 돌려 좌초될 위기."#라며 비판하기도 하였다. 일자리 문제에 대한 정부 대응에 대해서도 비판한바 있다.# #
2017년 4월 북한이 한반도 긴장상황에도 불구하고 열병식을 하면서 ICBM을 공개하자 "제 정신인 거냐"고 비판했다. # 앞선 2월에는 IRBM(중거리 탄도미사일), 3월초에는 사거리로 보아 ICBM(대륙간,장거리)으로 추정되는 미사일을 4발 시험발사하였다. 이에 3월31일 트럼프 정부의 첫 무더기 대북제재 법안이 발효됐으며 같은날 매티스 미 국방장관은 “북한은 이란보다 시급한 위협.”이라는 발언을 한 바 있다.[33]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선을 충실히 따르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햇볕정책을 기본으로 한 대북 문제에 대해선 상당한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다. 민주당 시절에는 물론이고 국민의당-민주평화당으로 당적을 옮긴 후에도 이 분야에서 박지원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후에도 야당 유력 인사 중에서는 이 대북 문제와 관련해 정부 및 여당과 밀접하게 접촉하는 인사이기도 하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DJ는 외교 강화론자이며 늘 국익을 생각하라 하셨다. DJ는 주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5년)한일회담 찬성, 일본 대중문화 개방, 비난을 감수하며 4대국 보장론을 주장하고 대만과 단교하고 중공과 외교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주창했다. 대중문화 개방으로 한류가 시작됐으며 중국과 외교관계 시작은 한국의 경제성장에 기여했고, 튼튼한 안보, 한미 동맹, 한미일 공조, 중러의 협력으로 햇볕정책을 이끌었다." 고 그를 회상했다.#
2010년초 김정일 건강이상설이 대두되며 보수진영을 중심으로 북한 붕괴 가능성이 제기되었는데, 언론인터뷰에서 박지원은 "북한 붕괴는 잘못된 판단이고, 북한이 붕괴되더라도 누군가는 북한을 이끌고 간다"고 주장했다. 이어 "남북 경제협력 경색으로 남한기업의 손실보다 더 우려되는 것은 중국의 입지"라며 북한이 중국과의 경협을 늘려가는 것에 대해 우려하며 당시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했다.# 12월에는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직접 “머지않아 통일이 가까운 것을 느낀다. 통일에 대비해야 한다”며 북한 붕괴와 흡수통일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이후 2011년 12월 김정일의 사망에 이어 김정은이 등장하였다.
2016년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북한의 5차 핵실험 직후 북핵문제에 대한 '햇볕정책 책임론'을 제기하자 "이명박, 박근혜 정부 동안 4번의 북한 핵실험이 있었고, 북한 미사일 기술의 진전을 알면서도 속수무책이던 대통령께서 '대화 위해 북에 준 돈이 핵개발 자금 됐다'며 햇볕정책에 책임을 떠 넘기고 있다.", "정부 말대로 하면 북한은 이미 망했거나 오늘 망해야 한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동안 준 돈이 없는데 북이 핵 SLBM 미사일 핵잠수함까지 건조해서 실험을 하는건 무엇인가. 경부고속도로에서 사고나면 동작동 국립묘지 박정희 대통령 묘소로 가서 항의하냐"고 반박한 바 있다.#
2017년 대선을 앞두고 JTBC 인터뷰에서 앵커가 "햇볕정책은 남북한이 자주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자는 차원에서 시작했던 것 아니었습니까?"라고 묻자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튼튼한 한미 동맹에서 출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후 미국에 가서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 대북정책을 이렇게 하자고 설득해서 그 결과를 가지고 어떤 의미에서 보면 클린턴 메시지를 가지고 6.15 정상회담을 통해 김정일 위원장에게 전달했던 겁니다. 그리고 북한의 핵문제는 남북 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북미 간의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지금도 주도권이 다시 미국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김대중, 클린턴 대통령 때는 클린턴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설득돼서 이제 대북정책의 운전석에 김대중 대통령이 앉고 자기는 조수석에 앉겠다, 이렇게 합의되어서 한 겁니다. 현재 햇볕정책의 추진이 별로 가능해 보이지는 않지만 미국 정책도 늘 고착되는 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력하는 거죠. 계속 우리는 미국에 대해서 설득을 해야 되고 북한에 대해서도 설득해야죠. 우리는 한미 동맹 속에서 북한과 전쟁을 막고 어떤 무력도발보다는 대화로 해결하자 하는겁니다. 남북 관계 개선은 2000년 6.15 정상회담 정신으로, 북한의 핵 문제는 6자회담 9.19 합의 정신으로 돌아가면 해결이 됩니다."라고 말했다.#
2018년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사안인 페미니즘 문제에 대해서는 '워마드를 이해해야 한다'(워마드의 탄생 원인을 고찰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추측)는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또한 극단적 페미니스트들의 비하적인 내용이 담긴 악질적 문자 테러를 받았고, 페미니스트들에게 비하성 문자 테러를 중단할 것을 경고했다.#
국정원장이 된 이후로도 이 정치력은 어디 가질 않은 모양인지,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와의 만남 이후 일본의 언론들은 "일본 총리 관저의 오산이었다" 라는 평가를 하고 있다고 한다. # 보통 해외국가정보기관과는 몰래 만나는 것이 통상적이다. 근데 박지원은 아주 대놓고 총리관저 정문으로 들어가 기자들과도 만났다. 아예 '일본 총리를 만나러 간다' 라고 언론에 방일 일정과 취지를 공개까지 했다. 이로 인해 일본 정부는 정보 관리도 제대로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일본의 정부 관계자들은 "어째서 벌써 언론 보도가 나갔는가" 라는 식으로 당황스러워 했다고 한다. 마이니치의 보도에 따르면 일본 총리실 관계자는 박지원 국정원장을 보고 "약았다" 라고 표현을 했다고 할 정도.

4. 비판과 논란




5.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81
정계 입문

1981 - 1987
탈당

1987 - 1991
창당

1991
당명 변경

1991 - 1995
합당[34]

1995
신당 창당을 위한 탈당

1995 - 1998
창당

1998 - 1999
공직 취임으로 인한 탈당

1999 - 2000
복당

2000 - 2001
합당[35]

2001 - 2003
대통령 비서실장 임명

2003 - 2004
복당

2004 - 2008
제명

2008
복당

2008
합당[36]

2008
총선 공천 탈락 불복으로 인한 탈당

2008 - 2011
복당

2011 - 2013
합당[37]

2013 - 2014
당명 변경

2014 - 2015
합당[38]

2015 - 2016
당명 변경

2016
국민의당 합류를 위한 탈당

2016 - 2018
창당

2018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2018 - 2019
창당

2019 - 2020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2020
창당

2020
합당[39]

2020 -
국가정보원장 취임으로 인한 탈당

6.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6,004,578 (29.20%)
당선 (21번)
초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부천 소사

31,786 (37.25%)
낙선 (2위)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전남 목포

45,415 (53.59%)
당선 (1위)
재선[40]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63,705 (71.17%)
3선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58,630 (56.38%)
4선[41]
2020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47,528 (37.34%)
낙선 (2위)


7. 어록


날카로운 촌평과 깔끔한 메시지로 정평이 나있다.

정치는 생물입니다.

본래는 김대중이 처음으로 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박지원이 자주 이 말을 사용해왔다. 이제는 여러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쓰이는 용어가 되었다. 문재인 정부의 인사정책도 이 논리가 적용되어 결국 국가정보원장으로 등용되었으며, 박지원을 비판하던 사람들도 대북 발언에 대해서는 옹호하고 박지원에 대해 대북 전문가로 기대를 거는 모습을 보인 것도 이 때문이다.

"위장전입, 병역기피, 부동산 투기, 탈세. 이 4가지 다 지키면 뭐가 되는 줄 아십니까?"

"장관!"[42]

이명박 정부 시절 어느 유세 현장에서.

정치하면서 자기 가족하고 친구하고 밥 먹는 사람은 자격이 없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삼시 세끼를 기자하고 먹는 것이 제일 좋다.

2016년 5월 3일 국민의당 초선 국회의원 당선자를 대상으로 한 워크숍에서 특강을 하면서.

정권이 끝나면 저처럼 불행한 사람이 안 나와야 한다. 순간은 막아도 영원은 막을 수 없다.

2016년 10월 21일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미르·K스포츠재단 관련 의혹에 대해 방어하던 안종범 청와대 정책수석에게.

골프하고 선거는요, 고개 쳐들면 그 순간 집니다.

썰전 244화에서 전라남도지사 당선 가능성에 대한 답변.[43]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께서 21세기 정치인이 하지 말아야 할 3가지 중 2가지를 이행하셨다. 삭발, 단식투쟁 다음에는 국회의원직에서 사퇴하는 법인데 의원직이 없으니 당대표직에서 사퇴하게 될까 우려스럽다.[44]

2019년 11월 20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게시물 中

제게 재판장처럼 말하지 말아주세요.

2019년 12월 30일 추미애 법무부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中[45]

나는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지만 와신상담을 할 수는 없다.

2020년 1월 8일, 이동욱은 토크가 하고 싶어서[46]

국가를 위해서 정치인은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누웠다 일어날 줄도 알아야 한다.

이동욱은 토크가 하고 싶어서 中, 기회주의자라는 세간의 평판에 대해 물었을 때.

정치인은 천의 얼굴을 가져야 한다. 또 정적을 폄훼해야 할 때에는 사정없이 해야 한다.

이동욱은 토크가 하고 싶어서

이분은 비대위원장이 직업인 것 같아요. 그런데 비대위는 공천권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으니까 제가 하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2020년 4월 23일 KBS 더 라이브


8. 여담


  • TV에 출연해 농담삼아 자뻑스러운 멘트를 칠때가 있다. JTBC 적과의 동침에서는 혼인을 앞둔 딸들을 두고 "너희 엄마 눈만 닮아라. 엄마 눈을 닮아서 좋은 남자가 있으면 잡아라" 라는 개드립을 날리기도 했다.[47] TV조선 전원책의 이것이 정치다에서는 TV조선에 입사한 전원책 변호사에게 다짜고짜 "블라인드 채용제가 (실시)됐으면 제가 TV조선 기자됐습니다"라며 축하해주기도 했다. 가끔 스스로를 칭하면서 3인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 성수대교 붕괴 사고 당시에 김영삼이 내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지어진 것인데 책임이 나한테 있는게 아니지 않냐고 하자 "경복궁이 무너지면 대원군 책임이냐?" 라고 한방 먹였다.
  • 무소속강길부 의원과 생년월일이 같다. 2019년 기준 77세로 둘 다 20대 국회 내에서 최고령 의원이었다.
  • 2021년 현재로서는 문재인 정부 차관급 이상 고위공직자들 중 최고령이다. 전임 인사들까지 포함하면 1941년 출생인 김덕룡이 최고령이다.[48]
  • 광주 개새끼들아 발언이 논란과 동시에 밈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 국민의 정부 시절에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경력 때문인지 현직은 국회의원이지만 사석에서는 의원님이 아닌 '장관님'으로 불린다. 일종의 예우 차원인 듯 싶다.[49] 비슷한 사례로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의원 또한 국무총리를 지낸 경력 때문에 사석에서는 의원님이 아닌 '총리님'으로 불린다고 한다. [52][53] 이제 이해찬 의원이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되면서 대표님으로 불리게 된다. 사실 이해찬 대표는 예전 2012년에도 대표를 지낸 적이 있었으나, 18대 대선을 위해 안철수 세력과 합당하면서 합당 조건으로 이해찬의 대표직 사퇴를 내걸어 관철해 몇 달 만에 금방 물러났다. 더군다나 당시 야당 + 집단지도체제에서의 당대표였으니 여당 + 단일지도체제에서의 당대표직에 비해 확연히 밀린다.
  • 친문 지지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안철수와 관련한 짤방이 있다. 실제 장면은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직후 열린 당선자 대회 및 중앙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 당시 안철수와 박지원이 대화하는 장면이다. 이때 박지원은 피로 때문인지 안경을 벗고 눈을 주무르는 모습을 보였다. 이걸 친문 지지자들은 안철수의 행동 때문에 박지원이 열받은 내용으로 패러디하는 경우가 많다.
  • 이명박 前 대통령의 둘째 형인 이상득 前 국회의원과 사돈이라는 얘기가 인터넷에 퍼져 있는데, 실제로는 사돈의 사돈 지간이라고 한다. 다만, 그래서 그런지 서로 인맥관계는 있는 듯 하다.
  • 방송에서 본인이 말한 바로는, 19대 대선 당시 바른정당 김무성 측과 안철수-유승민 연대를 추진하다가 실패한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 김무성이 본인에게 말하길 "유승민이 대통령 후보자 토론의 힘으로 지지율을 더 올려볼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다는데, 박지원은 "야, 토론만 잘해서 대통령되는 거였으면 유시민이랑 진중권이가 진작 대통령했다!"며 화를 냈다고 한다.
  • 2017년 10월 경부터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목요일 고정 출연으로 능구렁이 같은 입담을 뽐내고 있다. 특히 처음 출연했을때는 김어준이 "민주당 시절에 그렇게 대표를 하시고 싶어 하셨는데 드디어 대표[54]가 되셨네요" 라고 축하의 말을 전하자 추억에 젖었는지 "하...내가 그때 친노들한테 맞아가지고"라고 답변해서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 이후로도 출연했다 하면 빵빵 터뜨린다.
  • 2017년 12월 11일에 나온 뉴스에 따르면 호남에 갔다가 달걀을 맞고 왔다고 한다. 다만 이때 "내가 맞아서 다행이다." 라고 말하고 쿨하게 넘어갔다고.
  • 2018년 4월 27일에 개최되었던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 만찬에 야당 정치인으론 유일하게 초청[55]되었다. 국민의 정부 시절에 대북특사를 전담하다시피 하였고, 현재 문재인 정부의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 자문위원이기에 원로자격으로 포함 된 것. 그리고 2018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서도 수행원 자격으로 초청되어 정부가 북한 문제로 박지원을 신임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 보수 정치인 중에서는 유승민 의원을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 "그분은 분명한 자기 정체성과 이념, 철학을 얘기하잖아요. 나는 보수다. 대북문제에 대해서도 안 된다. 그러한 보수가 있어야 됩니다. 또 저처럼 진보개혁적인 사람도 있어야 되고. 그렇게해서 상호경쟁하면서 발전해야죠. 유승민 대표는 그러한 면에서 보수를 대표하는 가장 훌륭한 정치인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 2018년 10월 15일 부인상을 당했다. 아내 이선자는 2017년 말부터 뇌종양 투병중이었다고 한다.[56] 박 의원도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임종 며칠 전 자식들을 모두 불러모아 아내의 임종을 함께 지켜봤다고 한다. 아내가 투병 생활을 할 당시 세브란스병원 화재 사고가 일어나서 아내와 본인이 대피하는 소동도 있었는데 다행히 큰 탈은 없었다.
  • 2019년 3월 29일, 4월 5일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 V2에 김구라의 조력자로 출연해 김무성 의원, 박원순 서울특별시장, 이낙연 국무총리 등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다 실패하는 굴욕을 당했다. 또 방송 도중 의원내각제를 언급하자 채팅방에서 매우 거친 반응이 나와 그 후로 다시는 내각제를 언급하지 않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여담으로, 해당 방송에서는 총 500만원의 기부금[57]을 모아야 했는데, 김구라의 방에서는 40만원밖에 모으지 못 했고, 심지어 그 중 4분의 1인 10만원은 박 의원의 딸이 보낸 거였다고 4월 12일 자 방송[58]에서 안유진이 조심스레 말을 꺼내고 김구라가 이어받아 밝혔다.
  • 박 의원 관련으로 역대급 가짜뉴스가 있는데 바로 김대중과 박지원이 일본에게 400조를 받고 독도를 팔아먹고는 그 돈으로 IMF를 극복했다는 내용이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엔 여기서 더 추가돼 400조 중 190조가 남아서 참여정부에 물려졌고 이걸 문재인이 관리했다는 데까지 뻗친다.
  • TV와 라디오 출연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강적들에선 고정 게스트급으로 출연하기도 하였고 예능에도 진출하고 있다.
  • 2020년 1월 8일에 방송된 이동욱은 토크가 하고싶어서 5회 방송분에서 김영란법 이후의 정치인 출연료 가이드라인에 대해 밝혔다. 라디오 전화연결은 건당 3만원 , 라디오 게스트 출연은 5~10만원. TV 출연은 30만원 이하, 프로그램 길이가 1시간이 넘으면 50만원을 받는다고 했다.
  • 2020년 1월 8일 방송분에는 정치 생초보 입장에서의 돌직구 질문들이 많이 나왔는데 차기 대권주자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2022년에는 범진보진영 후보로 유시민 전 장관이나 손석희 사장이 적합하다고 언급했고 우파 진영 후보에 대해서는 박근혜가 석방되면 직접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59]
  • 18대부터 20대 국회까지 의원회관에서 사용한 방이 615호이다. 21대 국회에서는 김대중의 삼남 김홍걸이 방을 이어받았다.
  • 손자 사랑이 매우 각별한 듯 하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국정원장 임명장을 받을 때에도 손자가 동행하여 손자가 대통령에게 꽃다발을 받기도 했다.[60]
  • 조 바이든이 김대중 대통령과 친밀한 관계였다고 하여 대한민국 국정원장인 박지원과 더불어 대북문제를 잘 풀어갈 수 있겠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박지원이 소싯적에 뉴욕에서 일한 적이 있어 바이든과 개인적인 친분도 있을 거라는 예상이 나와 기자들이 김홍걸 의원에게 질문했더니 그건 아니라는 답을 들었다.

9. 둘러보기











[1] 그래서 스스로 가끔 "금성(LG전자의 전신)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2] 방송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맨해튼에 투자를 해서 건물 5채를 매입할 정도의 자산가였고 이것을 팔아 정치 밑천으로 요긴하게 썼다고 한다.[3] 그 전 까지는 12.12와 5.17을 찬양하는 인물이었지만, 실상을 알고 반성한 것이다. 그만큼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4] 이 당시 명언 아닌 명언을 남겼는데,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당시 여당 인사들이 '삼풍백화점은 군사정권 시절에 허가받고 지어졌는데 현 정부가 거의 모든 책임을 지는 것은 억울하다'라는 발언을 하자, 경복궁이 무너지면 대원군 책임이냐라는 말로 되받아쳐 침묵하게 만들었다.[5] 현재의 부천시 병.[6]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 한광옥, 김상현[7] 친분관계에 있어서는 DJ가 젊었을 때부터 동고동락하며 호형호제까지 하는 권노갑, 김상현보다 못하지만 일하는 수완이 뛰어나, 한광옥을 제외한 권노갑, 김상현, 한화갑(언변을 인정받은 측근), 김옥두(민주화 투쟁 시절, 징역과 고문을 견딘 사람) 등이 대통령이 된 DJ에게 부담지우지 않고자 당무에만 전념할 때, 대통령이 믿고 일을 맡기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언론에 자주 오르내렸다.[8] 명목상 수신인은 이 두 사람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뭔가 전하는 메시지가 있을 것으로 보고, 언론에서 그 함의를 추정하기도 했다.[9] 국민의 정부의 대북정책 바탕을 기초한 사람이다.[10] 김대중은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특사 역할도 주무부서가 아닌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맡길 정도였다. 이 때문에 당시 정가에선 박 장관을 두고 “대통령을 가장 먼저 만나고 가장 오래 얘기하는 사람”, "명실상부한 권력 제2인자”라는 말이 자주 나왔다. 종종 언론에선 그를 대신할 대(代)를 써서 '代統領'이라는 칭호로 부르곤 했다.[11] 왼쪽 눈을 실명하고 의안을 착용하게 된 이유가 대북송금사건 구속 때문이라고 와전되기도 하는데, 왼쪽 눈은 이미 그전에 실명된 상태였다.[12] 법적으로는 2007년 2월 3일에 재구속되었다가 6일 만에 풀려났어야 되지만 실제로는 구속되지 않았는데, 사유에 대해 자세히 공개된 보도 정보가 없다. 아마 그 재구속될 시기에 이미 특사여부가 결정됐기 때문에 형집행정지 연장을 형식적으로라도 했는데 언론이 보도를 안 한 것으로 보인다.[13] 2007년 2월 사면 기준으로 2008년 9월 석방 예정.[14] 당시 통합민주당은 전과기록이 있는 후보는 공천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었다. 이로 인해 출마를 준비하고 있던 안희정, 김민석 등이 출마를 포기하고 이인제는 반발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했었다.[15] 부천 소사 지역구는 포기하고 당시 비례대표 의원이였던 김상희(정치인)에게 물려주게 된다. # [16] 정치권에서는 이를 기름칠한다고 표현한다. 언론과 소통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하는 한편, 실력이 괜찮은 언론인은 정계로 끌어들이는 경로가 되는 경우도 있다고.[17] 실제로 이날 박지원 의원은 거창하고 강한 어조로 시작하기는 했지만, 실제 질의응답은 상식선에서 세간이 정말 궁금해할만한 내용으로 채워졌으며, 이낙연 총리가 답변 괜찮게 한다 싶은 대목에서는 박지원이 살짝 웃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람들의 비판을 받은 백악관 발언 신뢰 관련 발언 역시 자세히 보면, 미국에서 사업을 하며 그쪽 사람들의 생리를 경험한 박지원이 후배 정치인에게 충고하는 내용에 더 가까운 대목.[18] 요약하자면, 박성진 장관 내정자, 류영진 식약처장, 탁현민 비서관을 인사조치하는 조건부로 김이수 표결에 협조해주겠다고 제안했었다는 말.[19] 맥락을 보면 지지발언은 아니고 평소 소신이 뚜렷한 추미애답다는 의미.[20] TV조선 시사프로 강적들에서는 조 前 장관이 조국 일가의 비리인 '조국 사태' 보다도 '유재수 건'으로 더 곤혹스러워질 것으로 내다보면서 '권력형 비리 게이트'로 확산되지 않을까 예상한다고 말했다.#[21] 유시민의 스탠스와 비슷한데, 유시민의 알릴레오를 통해 현재 여당이 여론몰이를 했던 그 역할을 맡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유튜브 채널보다는 종편이나 지상파의 출연이 잦은 편. [22] 참고로 지명 당일에 발표 직전 MBC 2시 뉴스외전에 출연하고 있었다.[23] 국회의원 활동 당시 국정원은 박지원의 정보력 원천 중 하나로 꼽혔다.[24] 왜냐면, 박지원은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부터 문재인 대통령을 그렇게 비판했던 걸로 유명했고, 기어이 호남계를 이끌고 탈당해 국민의당을 창당했던 핵심인물 중 하나가 박지원이었기 때문이다. 안철수의 국민의당이 호남계에 돌풍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는 박지원의 역할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다만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시간이 좀 흐른 뒤로는 문재인에게 화해와 협력의 제스처를 가끔 취하기도 했다.[25] 국가정보원은 경찰청, 검찰청, 국세청, 감사원과 함께 5대 권력기관 중 하나로 꼽히고 대한민국 정보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막강한 기관인만큼 대통령이 통제하기 쉬운 여당 정치인을 임명하는 경우가 대다수지 통제가 다소 어려운 야당 정치인을 임명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으므로 박지원과 문재인의 관계 개선을 감안하더라도 파격인사인 건 맞다. 그리고 박지원의 정치 경력이 문재인보다 많이 앞서는 만큼 문재인 휘하의 기관장으로 일한다는 것을 예상하기 쉽지 않았다.[26] #1#2[27] 이는 3년 전 탈북한 태영호보다 재산이 적은 수치다.[28] 이는 다들 알다시피 국정원이 다루는 업무가 주로 기밀에 해당하는 업무이기 때문이다.[29]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박지원 후보자를 적과 내통하는 사람이라고 발언하면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30] 국정원 인사처장을 맡았던 만큼 국정원 업무에 대한 전문성이 커 여당 민주당의 정보위 간사로 선임되었다.[31] 2018년 지방선거에서 안철수가 김문수에게도 밀리는 3위에 그치면서 크게 타격을 입었다. 결국 해당 선거에서 바른미래당은 1석도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전패하였다.[32] 비자금은 찾지 못했고, 해당 국정원 간부는 구속되었다. #[33] 긴장이 더욱 고조되어 8월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에 대해 "미국을 위협하면 지금껏 전 세계가 보지 못한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며 군사적옵션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고, 실제 미군의 전략자산이 한반도에 전개되며 그러한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34] 민주당과 신설 합당[35]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36] 대통합민주신당과 신설 합당[37] 시민통합당과 신설 합당[38] 새정치민주연합에 흡수 합당[39]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과 신설 합당[40] 2008.8 민주당 복당[41] 2018.02.05 국민의당 탈당
2018.02.06 민주평화당 창당
2019.08.12 민주평화당 탈당
2020.01.12 대안신당 창당
2020.02.24 민생당 합당
[42] 그가 문광부 장관직을 역임했던 것을 두고 역공한 것.[43] 이후 247회에서 유시민유승민제일 고개 뻣뻣하게 들고 다니시는 분이라며 반 농담삼아 이 발언을 디스했다. 사실 썰전 이외에도 판도라, 강적들, 외부자들 등 온갖 시사 평론 프로그램에 여러 번 나왔는데 나올 때마다 저 말을 했고, 김어준의 뉴스공장 같은 곳에서도 하고 심지어 YTN의 뉴스프로그램 같은 진지한 곳에 나와서도 "제가 선거에 대해 항상 하는 말이 있어요"라고 말하면서 저 똑같은 말을 했다. 20대 국회의원이 되고, 당대표 생활과 대통령선거가 끝난 이후부터 2년 6개월간 TV방송에 일주일 평균 출연횟수 1회(뉴스보도나 국회 내, 야외에서 한 인터뷰 같은 걸 모두 제외한 순수 방송국 스튜디오 출연만 따질 때)가 넘을 만큼 많이 출연하기 시작했는데, 방송에서 본인이 직접 말한 것만 10번은 무조건 넘고, 수십 번 정도 된다.[44] 제21대 총선에서 낙선하며, 당대표직도 사퇴해버려, 3가지를 다 이행한 셈이 됐다. 그리고 박지원은 황교안이 재기불능이라고 예언했다.[45] 실제로 판사 출신인 추미애의 긴장을 풀어주면서 추미애가 전임자 조국 교수와는 다르다는 것을 청자들에게 상기시키는 언사라고 해석할 수 있다.[46] 한쪽 눈을 실명하고 의안 수술 후유증으로 수감생활 중 쓸개를 잘랐는데 그래서 그의 건강을 이유로 폄훼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한 것이다.[47] 이에 대한 아내의 대답은 "그러다 네 남편도 감옥 갈라" 였다고...[48] 다만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사실상 무실권 명예직임을 고려하면 박지원을 역대 최고령으로 보는 관점도 아예 틀린 건 아니다.[49] 이정현 前 새누리당 대표의 흑역사인 충성충성충성 사건 때도 이정현이 박지원을 '장관님'으로 칭하였다.[50] 뉴스에서 눈에 자주 보이는 의원들이 주요직책을 맡은 다선 의원들이라서 그렇지, 따지고 보면 그 얼굴이 그 얼굴로 50명 이내다. 눈에 잘 띄지 않을 뿐더러 정치덕후나 자신과 연관이 있는 동네들의 지역구 의원이 아니면 '그런 사람도 있었어?'하는 초선, 재선 의원이 훨씬 많다.[51] 정부 부처의 숫자는 정권마다 정부조직법이 바뀌면서 조금씩 다르지만 대강 15~20개 내외다.[52] 평균적인 국회의원[50]보다 평균적인 장관이[51] 권력과 희소성이 큰 부분이 있어서 그렇게 부르는데, 원내교섭단체 정당의 당대표(당대표 대행 및 비대위원장은 제외하고, 전당대회로 뽑힌 정식 당대표만)는 의전서열 고민할 필요없이, 희소성 뿐만 아니라 정부 독립성에서 장관보다 훨씬 강하고, 권력은 비슷하거나 실제로는 좀 더 클 수도 있으므로 (원내교섭단체 지선, 총선 공천권이나 내부경선 주도 권력은 의회정치에서 엄청나게 큰 권력이다) 보통 장관을 했어도 원내 당대표를 했으면 장관 대신 대표로 부른다.[53] 국민의힘 김종인 비대위원장의 경우 장관직을 관둔지 30년이나 되었는데도 일부에서 장관님이라고 불린다.[54] 19대 대선 당시 국민의당 대표를 지냈다.[55] 같이 초청된 국회의원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당 대표, 우원식 원내대표, 그외 도종환, 김현미 의원도 참석하였으나 이 둘은 부처 장관 자격으로 참석[56] 본인의 언급으로는 병중인 아내를 간호하기 위해 전남도지사에 불출마했다고 한다. 실제로는 본인이 출마할 경우 공동교섭단체가 깨지는데, 재보선에서 민주평화당 후보의 당선을 장담할 수만은 없어 리스크가 컸다는 점도 고려 대상이었을 것이다.[57] 강부자, 김구라, 정형돈, 김풍, 셔누의 방송에서 모인 기부금 총합.[58] 이 날 방송에는 박 의원 없이 김구라만 출연.[59] 하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파기환송심 등의 재판이 남아있고 법정다툼이 길어져 확정된 형만 받고 2021년 4월 출소하더라도 검찰에서 박근혜를 구속 수사할 가능성이 높다.[60] 보통의 경우 임명장을 수여할 때에는 그 배우자가 꽃다발을 받지만, 박지원의 경우에는 이로부터 2년 전에 상처#s-2해서 아내가 이 세상에 없기에 대신 손자가 꽃다발을 받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