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베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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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mberger Symphoniker'''
'''Bamberg Symph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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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연혁
3. 역대 수석 지휘자
4. 특징
5. 관련 문서


1. 개요


독일 남부 바이에른의 밤베르크를 거점으로 하는 오케스트라.

2. 연혁


공식 창단 연도는 1946년이지만, 그 이전부터 사실상 직계 모체 악단이 존속하고 있었다. 1900년 체코슬로바키아에 살던 독일인들이 결성한 '프라하 독일 필하모닉 오케스트라(Deutsches Philharmonisches Orchester Prag)' 였는데, 1930년대 후반 나치가 체코슬로바키아를 강제로 병합하면서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하는 국책 관현악단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하지만 2차대전의 전세가 추축국의 패전으로 가닥이 잡히기 시작하면서, 독일군과 독일인들에게 특히 무자비했던 소련군이 체코슬로바키아로 진격하자 수많은 체코 거주 독일인들의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다. 물론 이는 프라하 독일 필 단원들에게도 마찬가지 문제였고, 결국 단원들의 대부분은 체코 국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바이에른의 작은 도시인 밤베르크로 피신해야 했다.
전후 생존 단원들이 이 도시를 거점으로 해서 밤베르크 톤퀸스틀러 관현악단(Bamberger Tonkünstlerorchester)을 창단했고, 1949년에는 이름을 밤베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로 바꾸고 초대 수석 지휘자로 프라하 독일 필 시절부터 악단을 이끌어온 요제프 카일베르트를 초빙했다. 지휘자와 악단 단원 대부분이 이미 예전부터 호흡을 맞춰왔기 때문에 그리 어렵잖게 악단의 재건이 이뤄졌고, 카일베르트는 1968년 뮌헨에서 급성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뜰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카일베르트 사후 공백기에는 오이겐 요훔이 예술 고문 자격으로 악단을 이끌었고, 요훔은 1973년 퇴임할 때까지 카일베르트의 독일계 음악 중심 노선을 이어받았다. 동시에 미국과 일본 등지에서 순회 공연을 개최해, 나치 악단에서 파생된 수상쩍은 단체라는 편견을 없애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요훔 퇴임 후에는 헝가리 출신의 이슈트반 케르테즈가 수석 지휘자로 부임할 예정이었지만, 그 해 이스라엘에서 해수욕 중 익사하고 말았다.
이후 6년 정도 수석 지휘자 공석 상태로 활동하다가 1979년에 영국 출신의 제임스 로프런이 제2대 수석 지휘자로 부임해 1983년까지 재직했고, 1985년 호르스트 슈타인이 제3대 수석 지휘자로 초빙되었다. 슈타인은 1996년까지 약 11년 가량 악단을 지휘했고, 퇴임 후에도 명예 지휘자 호칭을 받아 정기적으로 공연에 출연했다. 2000년 부터는 영국 출신의 조너선 놋이 제4대 수석 지휘자로 재직하고 있다. 2016년 9월부터 체코 출신의 야코브 흐루샤가 바통을 이어받을 예정이다.

3. 역대 수석 지휘자


예술 고문으로 활동한 지휘자는 기울임체로 표기했다.
•요제프 카일베르트 (Joseph Keilberth, 재임 기간 1949-1968)
•오이겐 요훔 (Eugen Jochum, 재임 기간 1969-1973. 예술 고문)
•제임스 로프런 (James Loughran, 재임 기간 1979-1983)
•호르스트 슈타인 (Horst Stein, 재임 기간 1985-1996. 퇴임 후 명예 지휘자 호칭 수여)
•조너선 놋 (Jonathan Nott, 2000-2016)
•야코브 흐루샤 (Jakub Hrusa, 2016-)
이외에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가 2006년부터 명예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2016년 10월의 내한 공연 역시 블롬슈테트가 지휘할 예정이다.

4. 특징


나치에 이용당한 악단이 전신이었던 탓에, 처음에는 꽤 비판적인 여론도 많았다. 하지만 이후 독일연방공화국이 수립되고 콘라트 아데나워 정권이 과거 청산보다는 경제 재건에 주력하면서 비판적인 논조도 다소 후퇴했고, 악단 측에서도 이미 1949년에 피점령국이었던 프랑스에서 공연할 정도로 이미지 개선에 상당한 신경을 썼다.1
재정 자립을 지향하면서 녹음 활동도 일찍부터 시작했는데, 카일베르트 시대에 이미 텔레푼켄을 통해 음반이 출반되기 시작했다. 이외에 페르디난트 라이트너나 루돌프 켐페 같은 객원 지휘자들도 도이체 그라모폰이나 EMI의 독일 지사인 EMI 엘렉트롤라 등에 관현악곡이나 오페라 녹음을 취입했고, 요훔도 만년에 독일 음반사 오르페오에서 모차르트의 후기 교향곡을 비롯한 관현악 작품을 녹음했다.
이외에 전후 돈이 궁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악단을 매의 눈으로 포착하고 적극적으로 녹음에 기용한 복스 같은 미국 음반사들도 수많은 녹음 세션을 가졌고, 슈타인은 슈베르트와 브람스의 교향곡 전집 같은 표준적인 레퍼토리 외에 막스 레거의 관현악곡 거의 전부를 코흐에 녹음해 화제가 되었다.
1980년대 후반 부터는 기존의 독일 레퍼토리 위주 노선을 계승하면서도 근현대나 동시대 음악들을 꾸준히 연주하고 있고, 잉고 메츠마허의 지휘로 하르트만의 교향곡들이나 마르티누, 쇤베르크, 노노의 홀로코스트 추도곡 모음집 같은 음반들이 제작되어 간접적인 흑역사 청산의 뜻을 보인 바 있다.
놋 재임기인 2000년대 부터는 스위스 음반사인 투도어와 전속 계약을 맺고 재차 슈베르트 교향곡 전집을 발표했고, 이어 창단 최초로 말러의 교향곡 전집 녹음에 도전하고 있다. 동시에 그 동안 듣보잡으로 치부되었던 낭만 시대 작곡가인 요아힘 라프[1]의 교향곡 전집과 관현악/협주곡 선집 같은 진귀한 음반도 선보이고 있다.
비교적 작은 도시가 근거지인 악단이라 제대로 된 상주 공연장을 잡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초기에는 실내 체육관이나 학교 강당 등을 사용하다가 뮌헨의 헤르쿨레스잘 처럼 시내 수도원의 부속 건물이었던 도미니카너바우를 상주 공연장으로 삼아 활동했다. 하지만 정규 콘서트 홀이 아니라 음향에 문제점이 많았고, 결국 1993년에 연주회 전문 신축 공연장인 콘체르트 운트 콩그레스할레(애칭 '신포니 안 데어 레그니츠')가 완공되자 옮겨가 활동하고 있다.
악단 부속 합창단으로 밤베르크 심포니 합창단(Chor der Bamberger Symphoniker)이 1983년에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으며, 2010/11년 시즌부터 젊은 음악가들의 관현악 활동 교습을 위해 관현악 아카데미를 창설해 운영하고 있다. 악단 재정은 창단 이래로 밤베르크 시 당국과 바이에른 주 정부, 후원자들의 기금으로 충당했고, 2003년에는 바이에른 주가 재정 지원에서 손을 떼는 대신 바이에른 국립 필하모닉 협회 산하 악단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악단 공식 명칭에 'Bayerische Staatsphilharmonie' 가 병기되고 있다.
2004년에는 3년 주기로 개최되는 구스타프 말러 국제 지휘자 콩쿠르를 신설했고, 첫 회 1위로 입상한 베네수엘라의 구스타보 두다멜이 한창 인기몰이를 하면서 새로이 떠오르는 신예 지휘자의 등용문으로 화제가 되고 있다. 2회에는 한국의 성시연이 1위 없는 2위로, 3회에는 라트비아의 아이나르스 루비키스가 1위로 입상해 활동하고 있다.

5. 관련 문서



[1] 총 12곡의 교향곡을 작곡해 9번 교향곡의 저주를 최초로 돌파한 작곡가 중 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