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곡령
防穀令
1. 개요
조선 말기에 시행된 식량 정책. 특정 지역의 식량 부족 사태가 일어났을 경우 원활한 식량 공급을 위해서 타 지역으로 식량을 반출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명령을 말한다. 방곡령을 선포할 권한은 해당 지역을 관할하는 지방관에게 있으며 그 행정 관할 구역 내에서 가뭄이나 수해, 민란이나 병란과 같은 각종 천재지변으로 인해 흉년이 닥쳤을 시 곡식의 가격이 폭등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에 있다. 개항 이후 이따금 외국 상인이 사들이는 가격보다 국내에서 사들이는 식량 가격이 턱없이 낮아 농민들이 곡물을 시중에 풀지 않아 흉년이 아님에도 식량이 부족해지는 사태가 일어났을 때(...)에도 시행되었다. 이와는 정반대로 방곡령으로 인해 지방 간 원활한 거래가 이루어지지 못해[1] 한성의 곡물 가격이 치솟는 사태가 일어나자 중앙 정부에서 방곡령 금령을 내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방곡령 금령의 대표 사례로는 고종 13년이었던 1876년에 있었다. 방곡령은 식량 부족 사태가 심각해진 조선 후기에 여러 차례[2] 시행되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례는 1889년(고종 26년)에 함경 감사였던 조병식이 일본에 곡물 수출을 금지한 방곡령이다.[3]
2. 1889년의 방곡령
1876년 체결된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한 이후 일본인 상인들은 전근대적인 물품 화폐 경제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조선 농촌에서 쌀 ·콩 등을 매점하고 이를 일본으로 반출하였다. 그렇잖아도 지방관과 아전들의 수탈과 높은 조세 비율[4] 로 인해 곤궁했던 당시의 농촌 상황에서 이런 막대한 반출이 누적되면서 곡물의 비축량이 부족해지자 식량난은 가중됐고, 결정적으로 1888년 흉년이 들면서 농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전국적으로 소요사태가 일어난다.
이에 따라 일본으로 곡물을 수출하는 주요 항구 중 하나인 원산을 관할하던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은 1889년 9월 조일통상장정 제37관을 근거로 방곡령을 발포한다. 그러나 예고 기간[5] 이 부족[6] 하여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무역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독판 교섭 통상 사무를 맡고 있던 민종묵은 일본에게 1년간 곡물 수출 금지를 허용해줄 것을 부탁했지만 일본은 한일 수호 조약에 위배된다면서 고자세로 일관했고 할 수 없이 조정은 조병식에게 방곡령을 해제할 것을 명령한다. 하지만 조병식은 굴하지 않고 방곡령을 밀고 나갔다.[7] 이에 일본은 조병식의 처벌 및 일본인 상인들이 입은 손해 배상을 요구했고 조정은 이러한 일본의 요구에 굴복하여 조병식을 강원도 관찰사로 전출시키는 한편 함경도 지방의 방곡령을 해제하였다.
그러나 상황이 워낙 나빴던지라 새로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한 한장석도 원산항의 방곡령을 다시 시행하였고, 이어서 황해도에서도 방곡령이 선포된다. 방곡령은 이후에도 부분적으로 시행되다가 1894년 1월 조정의 방곡령 금령(防穀令 禁令)으로 전면 해제되었다. 한편 조선은 1893년 4월 일본 측에 배상금 11만환을 지불하면서 이전 방곡령 선포에 따른 피해를 배상한다.
[1] 보통 외국으로 곡식을 수출하는 행위만 금지하는 것으로 아는 경우가 많은데, 국내 타 지역으로 반출하는 판매도 금지되는 경우도 허다했다.[2] 1884년부터 1901년까지 27회 발표. 이는 개항 후 값싼 조선의 쌀이 당시 산업화로 인해 한창 식량이 모자란 일본으로 죄다 수출되었기 때문이다.[3] 결과는 보상금을 내게 되었다. 조일 통상 장정에 따라 1개월 전 통보를 하였으나, 이를 어기고 시행령 이후 즉시 적용했기 때문.[4] 5두락 ~ 6두락당 4섬을 세금으로 내야했다.[5] 규정상 방곡령을 내리기 한 달 전에 통보해야했다.[6] 다만 실제로 부족하였을 지는 알 수 없다. 조선 측에서는 1개월 전 통보를 하였으나, 일본 측에서 지연시키고 트집잡았다는 시점도 있기 때문이다.[7] 심지어 일본 상인들의 곡물을 압수하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