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조약

 




'''언어별 공식 명칭'''
'''한국어'''
조일수호조규 (朝日修好條規)
'''일본어'''
日朝修好条規
'''해당 실록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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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경과
4. 회담의 대략적인 진행
4.1. 운요호 사건과 조일 단교 문제
4.2. 개항 문제
5. 조정의 논의
5.1. 일본의 의도에 대한 논의
5.2. 최익현의 반대 상소
5.3. 서계 문제에 대한 조선의 공식적 입장 표명
5.4. 통상 허락
6. 조약 내용
6.1. 부록
6.2. 무역 규칙
7. 조선의 입장
8. 일본의 입장
9. 기타
10.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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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는 1876년[1] 2월 27일[2] 조선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한국사 교육과정의 영향으로 정식 명칭보다는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이라는 통칭이 더 널리 알려져 있다.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이라고도 부른다.
1875년 자국 군함을 동원하여 영해에 불법 침입한 뒤 무력 시위를 일으킨 일본은 이를 빌미 삼아 이듬해 강화도 연무당[3]에서 조선 외교 대표와 조약을 체결한다. 이것은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으나, 당시 쇄국과 척화의 영향으로 국제법(만국공법)에 밝지 못했던데다 군사적 협박까지 받고 있었던 조선은 일본이 깔아 놓은 독소 조항을 걸러내지 못했고, 결국 주권과 국익 침해의 소지가 있는 '''불평등 조약'''이 성사되기에 이른다. 이는 일본이 대륙으로 나아가려는 제국주의 야욕을 드러낸 본격적 사건이기도 하다. 일본은 이 조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미국에 개항한 계기인 페리 제독쿠로후네 사건을 연구해 모방했다.
학자마다 학설이 갈리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한국 근대사의 시작점으로 본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조선은 통상 거부 정책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이미 근대화에 발을 담가 질적 성장을 이뤄낸 주변국들에 비해 뒤늦은 시작이었고, 동아시아 세력 경쟁의 장으로 희생된다. 거문도 사건(1885), 청일전쟁(1894), 러일전쟁(1904~1905) 등이 그 산물.

2. 배경


기유약조를 맺은 이래로 조선과 일본은 각각 조선 국왕과 일본 쇼군을 우두머리로 하여 외교관계를 맺고 국서를 교환하고 있었다. 그러나 1867년, 대정봉환으로 막부 체제는 사라지고 이듬해 무진전쟁에서 막부군을 상대로 조슈, 사쓰마 번 출신 무사들이 승리하여 이들이 정권을 잡게 된다. 메이지 신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일본은 관련 사실을 통지하는 서계(書契)를 쓰시마 번주를 통해 보낸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잡고 있던 당시 조선에서는 황(皇), 칙(勅)과 같이 외교 문서의 형식과 표현이 종전과 다른 점, 다른 인장을 사용한 점을 문제삼아 문서를 반환·거부한다. 쓰시마 번주는 계속하여 서계를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나 조선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이후 대조선 외교권을 신정부가 직접 관할한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일본은 분개하고, 해결책 중 하나로 신정부에서는 정한론이 대두된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조선과의 국교를 바로 잡기 위해 자신이 사절로 갈 것을 제안하였다. 자신이 사절로 가면 십중팔구 조선에서 죽임을 당할테니 개전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마침 신정부에 의한 정책으로 인해 기득권을 잃어버린 무사들의 불만이 누적되었으니 전쟁으로써 불만을 바깥으로 돌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와쿠라 도모미, 오쿠보 도시미치 등의 각료들은 전쟁을 일으키기보단 내치에 집중을 하는 것이 좋다는 이유로 사이고의 조선 사절 파견을 반대하였다. 정치 파벌 싸움에서 진 사이고 다카모리와 정한론파들은 정부에서 사의하고 낙향한다. (메이지 6년 정변) 한편 조선에서도 대일 강경파였던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잃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여 정치적 변화가 일어난다. 이에 일본은 다시 조선과의 외교를 재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품으나 여전히 조선은 서계 접수를 거부하고 있었다.
결국 무력으로 밖에 외교를 재개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한 일본은 1875년 5월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통해 조선과 외교 관계를 재개함과 동시에 조선 내에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도록 통상을 시도하고자 하였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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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요호 사건 일지'''
1
군함 운요호가 무단으로 조선의 부산 해역에 접근
2
함장 이노우에는 "일본과 조선 간의 상호 통상을 위해 방문했으며, 조선의 해안을 탐사하러 왔다"고 주장
3
운요호가 남해안을 둘러 서해안의 강화도에 이름
4
일본군이 운요호에서 보트를 내려 강화도로 접근함
5
조선군이 일본군을 발견하고 "물러가라"며 경고 사격
6
경고 사격을 받은 일본군의 보트가 운요호로 돌아감
7
운요호가 강화도에 접근하여 함포를 발사하고 조선 수군과 교전을 벌임
8
영종도에 상륙하여 근대식 대포와 무기로 조선 수군을 궤멸하고 현지 양민들을 학살·약탈하고 불을 지름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기 전에 먼저 모리 아리노리(森有禮) 공사를 청에 파견해 청 공사와 이홍장을 각각 만나, 조선은 청의 속방이지만 내정과 외교는 조선에 맡기고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종주권 부인)는 답변을 듣는다. 신정부는 청이 조선에 군사적으로 개입할 의향이 없음을 확인했다.
당시 청은 미얀마를 둘러싼 영국과의 마찰(1874년 마가리 사건, 1876년 체푸 조약), 베트남을 둘러싼 프랑스와의 마찰(1874년 사이공 조약, 1884년 청프전쟁), 러시아와의 전쟁 직전까지의 위기(1871년 ~ 1881년 이리 분쟁)로 수많은 분쟁에 시달리고 있어 조선에 신경쓸 틈이 없었다. 굳이 일본과 분쟁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방치하면 속방 조선이 일본에게 공격당할 것이 명약관화했으므로, 조선이 일본과 수호 조약을 체결하는 선에서 전쟁을 방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다. 이에 1876년 1월 10일 이홍장이 영의정 이유원에게 일본과 조약을 맺도록 종용하는 서한을 보낸다.
일본은 청과의 교섭을 종료하고 1876년 1월 30일 구로다 기요타카를 전권 대사, 이노우에 가오루를 부대신, 마야모토 고이치, 모리야마 시게루를 이사관으로 해 일진(日進), 맹춘(孟春), 제이정묘(第二丁卯) 3척의 군함으로 부산에 보낸다. 일본은 입항하며 기선 제압을 위해 무력 시위를 벌인다. 부산으로 시위 행진하며 예포를 쏜다는 구실로 대포를 쏘아댔고, 무장한 해병대 50명으로 공관 관문, 성문을 부수었다. 부산진 첨사 임백현이 왜관에 항의하나 관장은 책임을 회피했고, 군, 민을 동원해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해병대의 발포, 총검 돌격으로 조선인 중, 경상자 12명이 발생했다.
일본은 부산에서 이같은 만행을 저지른 다음 강화도로 곧바로 향하고, 모리야마 시게루를 시켜 예비 교섭을 하게 했다. 조선 정부는 긴장하여 시원임대신회의를 개최하고 대책을 토의한 뒤에 신헌을 접견 대관, 윤자승을 부관으로 임명하여 교섭에 대처하게 하여, 강화도를 회담 장소로 결정하고 정식 회담을 열었다.

3. 경과



강화도 조약
좌의정 이최응이 서계 사본을 본 후 일의 가부(可不)를 결정하자는 시간끌기 대책을 내놓았으나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1876년 2월 9일(고종 13년 1월 15일), 구로다 전권 일행은 강화도에 기항해, 예포라고 하며 각 군함으로부터 위협 발포를 하면서 400명의 의장병을 이끌고 강화도에 상륙했다. 조선은 청에 도움을 청했으나, 청은 알아서 해라라고 하며 회피했다. 조약을 체결하기 전에 이미 부산에서의 일본 해군의 행패와 난동, 구로다 일행의 위용, 청국의 소극적 무관심 등 조선이 일본에 외교적으로 맞설 만한 요소는 없었다.[5]
모두 세 번의 회의를 열었는데, 일본의 횡포와 막무가내적 태도, 운요호 사건에 대한 억지 등에 조선 측은 이리저리 휘둘렸다. 이 때 조선 정부에선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적극 지지하던 위정척사 세력과 대외 개방을 주장하는 개화파 세력의 대립으로 의견이 제각각이었으나 이유원, 박규수, 오경석 등 개화파의 주장과 이홍장의 권고[6]로 바뀐 고종의 적극적 개항 의사에 따라 '''개국(開國)'''을 결정하게 됐다.
하지만 회담 내내 조선이 일방적으로 휘둘리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 측 대표 신헌이노우에 가오루의 각종 공격에 매우 논리적으로 답변하면서 조금도 꿀리지 않았다. 운요호에 발포한 군인들을 처벌하라는 요구에도 "낯선 배가 쳐들어오는데 변방을 지키는 신하가 제 임무를 한것에 어떻게 벌을 주느냐?"라고 단호하게 거절했고 나중에는 이노우에 가오루가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배에 있는 우리 군사들이 어떻게 굴지 모른다고 군사적 옵션으로 위협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신헌은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싸늘하게 "이젠 무력으로 위협까지 하는구만, 이게 이웃나라 사이의 예의냐?"라고 대답하여 뻘쭘해진 이노우에가 "내가 잘 타일러 놨으니 군사들이 가만있을 것이다."라고 물러서기도 했다.
강화도 조약이 불평등 조약이 된 것의 결정적 이유는 일본이 두려웠다기보다는 고종의 개항 의지가 은근히 강했고, 근대적 조약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다보니 자신들의 도장 찍는 내용이 얼마나 심각한지 감을 못잡았던 것이 컸다. 오히려 조선은 일본에게 '중국에서 산 신문을 보니까 너네가 우리를 너네 속국이라고 했던데 이쯤되면 막 가자는 거죠?'라고 격렬히 항의했고, 일본에선 '기레기들의 말을 다 믿으면 전쟁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면서 웃고넘어가면 될 뿐'이라고 둘러댔다.

4. 회담의 대략적인 진행


이하 내용의 출처는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내용이다. 해당 연도, 날짜의 기록은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4.1. 운요호 사건과 조일 단교 문제


구로다 기요타카 : "두 나라에서 각각 대신(大臣)을 파견한 것은 곧 큰 일을 처리하기 위한 것이고, 또 이전의 좋은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신헌 : "300년 간의 오랜 좋은 관계를 지금 다시 회복해서 신의를 보이고 친목을 도모하는 것은 참으로 두 나라 간의 훌륭한 일이므로 매우 감격스럽고도 감격스럽습니다."
구로다 기요타카 : "이번 사신의 임무는 바로 그 전에 히로쓰 히로노부〔廣津弘信〕가 별함(別函)에서 언급한 문제입니다. '''이웃나라를 사귀는 도리로써 어찌하여 화목하게 지내지 않고 이렇듯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입니까?''' "[7]
신헌 : "일본과 사귀어온 이래 언제나 늘 '''격식 문제를 가지고 서로 다투는 것이 그만 오랜 전례로 되어버렸습니다.''' 당신네가 이미 이전의 격식을 어긴 상황에서 변경을 책임진 신하는 그저 종전의 관례만 지키다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소한 말썽을 가지고 좋은 관계를 다시 회복하려는 이 마당에서 무슨 장황하게 말할 필요가 있습니까?"
구로다 기요타카 : "우리 배 운양함(雲楊艦)이 작년에 우장(牛莊)으로 가는 길에 귀국(貴國)의 영해를 지나가는데, 귀국 사람들이 포격을 하였으니 이웃나라를 사귀는 정의(情誼)가 있는 것입니까?"
신헌 : "남의 나라 경내에 들어갈 때 금지 사항을 물어봐야 한다는 것은 《예기(禮記)》에 쓰여 있는데, 작년 가을에 왔던 배는 애초에 어느 나라 배가 무슨 일로 간다는 것을 먼저 통지도 하지 않고 곧바로 방어 구역으로 들어왔으니, '''변경을 지키는 군사들이 포를 쏜 것도 부득이한 일입니다.''' "
구로다 기요타카 : " '''운양함에 있는 세 개의 돛에는 다 국기를 달아서 우리나라의 배라는 것을 표시하는데 어째서 알지 못하였다고 말합니까?''' "
신헌 : "그때 배에 달았던 깃발은 바로 누런색 깃발이었으므로 다른 나라의 배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설령 귀국의 깃발이었다고 하더라도 방어하는 군사는 혹 모를 수도 있습니다."
구로다 기요타카 : "우리나라의 깃발의 표시는 무슨 색이라는 것을 벌써 알렸는데 무엇 때문에 연해의 각지에 관문(關文)으로 알려주지 않았습니까?"
신헌 : "여러가지 문제를 아직 토의 결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것도 미처 알려주지 못하였습니다. '''그 때 영종진(永宗鎭)의 군사 주둔지를 몽땅 태워버리고 군물(軍物)까지 약탈해간 것은 아마 이웃나라를 사귀는 의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러한 득실에 대해서는 아마 양쪽이 양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먼저 동래(東萊, 부산)로부터 사신이 온다는 것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손님에 대한 예의로 접대하는 것이니 또한 양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표류해 온 배에 대해서까지 먼 지방 사람을 잘 대우해주는 뜻으로 정성껏 대우하여 주는데 어찌 귀국의 군함을 마구 쏘겠습니까?"
구로다 기요타카 : "이번에 우리들의 사명에 대하여 두 나라의 대신이 직접 만나서 토의 결정하려 하는데 일의 가부(可否)를 귀 대신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습니까?"
신헌 : "귀 대신은 봉명(奉命)하고 먼 지역에 나왔으므로 보고하고 시행할 수 없기 때문에 전권(全權)이라는 직책을 가진 것이지만, 우리나라로 말하면 국내에서 전권이라는 칭호를 쓰지 않는데, 하물며 수도 부근의 연해인 데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나는 그저 접견하러 왔으니 제기되는 일을 보고하여 명령을 기다려야 합니다."
구로다 기요타카 : "지난번에 히로쓰 히로노부가 우리 나라에서 전권 대신을 파견한다는 일을 보고한 것이 있고, 귀 대신이 이제 접견하러 왔는데, 어째서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겠습니까?"
신헌 : "우리나라에는 본래 전권이라는 직책이 없고, 또 어떤 사건이 있을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미리 품정(稟定, 조정에 올려 결정함)하여 올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구로다 기요타카 : "사신도 만나주지 않고 서계(書契)도 받아주지 않고 6년, 7년이라는 오랜 기간이 지났는데 이는 무슨 까닭입니까? 그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신헌 : "지난 정묘년(1867년)에 중국에서 보내온 신문지(新聞紙)를 보니 귀국 사람 야도 마사요시〔八戶順叔〕가 보낸 신문지상에, 조선 국왕이 5년마다 반드시 에도〔江戶〕에 가서 대군(大君, 쇼군)을 배알하고 공물(貢物)을 바치는 것이 옛 규례였는데, 조선 국왕이 오랫동안 이 규례를 폐하였기 때문에 군사를 동원하여 그 죄를 추궁한다고 하였습니다. 이후 우리나라의 조정과 민간에서는 모두 귀국에서 우리나라를 몹시 무고(誣告)하고 있다고 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또 《만국공보(萬國公報)》 가운데는 공물(貢物)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귀국이 우리나라를 정벌하려고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공물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제 환공(齊恒公)이 주(周)나라 왕실을 위하여 초(楚)나라의 왕을 꾸짖던 말이므로 비유하여 인용한 뜻도 맞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실 서계를 막아버린 첫째가는 근본 이유입니다. 이번에 관계를 좋게 하자는 이 마당에서 지나간 일을 들추어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구로다 기요타카 : "귀국에서 이러한 곡절이 있는 것을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이것도 떠도는 말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수백 년 동안 이어온 이웃 간의 두터운 의리를 어떻게 이것 때문에 끊어버릴 수 있습니까? 설사 이런 황당한 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 정부에서 귀국 정부에 통보한 일이 없는 이상 어떻게 믿고 이렇게 의절(義絶)할 수 있단 말입니까? 도리어 귀국을 위해서 개탄(慨嘆)할 일입니다."
신헌 : "신문은 귀국 사람이 간행하여 각국(各國)에 돌린 것인데 어떻게 황당한 것으로 돌려버릴 수 있겠습니까?"
구로다 기요타카 : "이른바 신문이라는 것은 비록 자기 나라 안의 고을에서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오히려 간혹 진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이 신문만을 믿는다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날이 없을 것이니 그저 한 번 웃고 넘어가면 그만일 뿐입니다."
신헌 : "우리 조정과 민간에서는 실상 의심을 품어온 지 오래됩니다. 그러나 대체로 이웃 나라를 사귀는 도리는 '성신예경(誠信禮敬)' 이 네 글자를 중요하게 삼고 있으니 피차간에 서로 예전의 좋은 관계를 회복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두 나라에 모두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
구로다 기요타카 : "그 당시 사실 여부를 우리나라에 물어왔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라고 회답하였습니다. 무슨 지금까지 의혹을 품을 것이 있겠습니까?"
신헌 : "이제부터는 설령 의심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서로 오가면서 의혹을 풀면 될 것입니다."
구로다 기요타카 : "전날에 서로 대치하였던 일과 연전에 새 서계를 받아주지 않은 사건에 대해서 다 뉘우칩니까?"
신헌 : "한 마디로 말해서 전날의 사건은 얼음이 녹듯 완전히 풀렸는데 다시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구로다 기요타카 : "득실(得失)을 따지지 말고 덮어두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것은 실로 부당한 말입니다. 설령 친구간의 약속이라도 저버릴 수 없는데 하물며 두 나라 사이에 좋게 지내는 우의(友誼)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헌 : "7년, 8년 동안 관계를 끊어버린 이유는 이미 남김없이 다 드러났습니다."
구로다 기요타카 : "이제 운양함이 우리 배라는 것을 알았으니 옳고 그른 것이 어느 쪽에 있으며, 그 때에 포격을 한 변경 군사들을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신헌 : " '''이것은 알면서 고의적으로 포를 사격한 것과는 다릅니다.''' "
구로다 기요타카 : "오늘은 이미 날이 저물었으니 다 말할 수 없습니다. 대체로 두 나라 간에 조약을 체결해서 영구히 변치 않게 된 다음에야 좋은 관계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두 대신이 면담하지 못하게 될 때에는 수원(隨員, 수행원)들을 시켜 서로 통지할 것입니다."
신헌 : "책임진 관리가 있는데 무슨 필요가 있어서 수원들을 시켜 왔다 갔다 하면서 만나겠습니까?"
구로다 기요타카 : "나의 수원들은 각기 봉명(奉命)한 직무가 있으며, 모두 공무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귀 수원들도 공무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로써 서로 만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신헌 : "나의 수원들은 봉명한 것이 아니라 사신인 내가 임의로 데려온 사람들입니다."
구로다 기요타카 : "그렇다면 나의 수원이 귀국의 부관(副官)과 서로 만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신헌 : "서로 만나기에는 서로의 지위가 맞지 않지만, 만약 오갈 일이 있으면 내왕(來往)하도록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구로다 기요타카 : "무방할 것입니다."
신헌 : "간단하게 다과(茶果)를 준비하였으니 좀 들어보십시오."
구로다 기요타카 : "호의는 감사하나 그만두는 것이 대단히 좋겠습니다."
신헌 : "이미 준비해 놓은 것이니 되도록 드십시오."
구로다 기요타카 : "이렇게까지 권하니 감히 사양하지 못하겠습니다."
1876년 1월 19일의 보고.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해당 기사(고종실록 13권)

4.2. 개항 문제


구로다 기요타카 : "오늘은 어제 끝맺지 못한 말을 다시 계속하겠습니다. 야도 마사요시〔八戶順叔〕의 일과 신문 등의 일에 대해서 귀국(貴國)의 신하와 백성들치고 분개해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이로 인해 300년 동안 이어온 이웃 간의 우의(友誼)를 끊어버리게 되었다고 말하였는데, 참으로 알 수 없는 처분입니다. 신문지는 애초에 우리 정부에서 귀국 정부와 교환한 것도 아닌데 무엇에 근거하여 믿는단 말입니까? 무진년(1868년) 이후 우리의 나라 제도가 크게 바뀌었다는 것을 이웃나라에 알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사신을 시켜 공문을 가지고 동래부(東萊府, 부산)에 가서 만나줄 것을 청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요시오카 히로타케〔吉岡弘毅〕·히로쓰 히로노부〔廣津弘信〕도 동래부에 갔다가 역시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연전에 외무성(外務省)에서 새로 서계(書契, 외교문서)를 만들어가지고 올 것을 허락한 일이 있었으나 아직까지 만나주지 않고 있으니 이전의 좋은 관계를 다시 회복하려는 이 마당에서 어찌 변명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신헌 : "신문 일은 어제 이미 이야기하였으므로 오늘 다시 끄집어낼 필요가 없으며, 그 동안의 정형을 낱낱이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종전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려 하는 오늘 그저 화목하고 사이좋게 하면 그만입니다."
구로다 기요타카 : "이번에 수호(修好, 우호를 닦음)하고자 하는 의도는 이미 잘 알았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 사신을 여러 차례 보냈으나 접견하지 못하였으므로 그 이유를 귀국에 물어보기 위해 이번과 같은 사명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귀국에서 우리 사신을 배척한 것 때문에 우리 조정에서는 논의가 분분하였으며, 심지어는 '''대신(大臣) 4원(員)[8]이 교체되거나 파면되었고, 한 명[9]은 죽음을 당하게까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해군·육군과 백성 등 수만 명이 히젠〔肥前〕주(州)와 사가〔佐賀〕현(縣) 등지에 모여 반드시 귀국에게 무력 행사를 하자고 한 것이 바로 재작년 일입니다. 그때 내무경(內務卿) 오쿠보〔大久保〕를 시켜 사가현에 가서 군사와 백성들을 무마시켰는데 이런 호의를 알아주기나 합니까?''' 귀 대신은 지나간 일을 가지고 다시 논의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들의 사신(使臣)의 일도 돌아가서 보고할 말이 없게 될 것입니다. 뉘우쳤는가 그렇지 못한가에 대해서는 자세히 딱 잘라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신헌 : "귀국의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분하게 생각하면서도 무력 행사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는데, 그에 대해서는 매우 감사히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단지 접견하러 온 것이니 이에 대하여 어떻게 확답할 수 있겠습니까? '''뉘우친다(悔悟)는 두 글자는 어제도 말하였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우격다짐으로 물을 문제가 아닙니다.''' "
모리야마 시게루 : "무진년(1868년)에 우리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서계를 바치려고 한 일은 자세히 알고 있습니까? 대마도주(對馬島主)와 동래부(東萊府)가 교환한 문건은 무진년부터 경오년(1870년) 12월까지 한 두 건이 아니었으며, 또 내가 요시오카 히로타케·히로쓰 히로노부와 함께 신미년(1871년)에 동래부를 거쳐 서계를 바치려고 하다가 또 바치지 못하고, 부본(副本)을 베껴서 전 훈도(訓導)에게 준 것이 귀 정부에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부득이 구두로 진술한 문건은 두고 돌아왔습니다. 귀국에서는 단지 종전의 규례를 따르려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종전의 제도를 크게 고치고 대마도주(對馬島主)도 혁파하여 이때부터는 더 근거하여 탐문할 길이 없는 까닭에 외무대승(外務大丞) 하나부사〔花房〕와 함께 왔다가 또 바치지 못하였습니다. 표류하여 온 백성이 있는데도 돌보아주지 않았으며, 설문(設門)을 만들어 놓고 파수를 보게 한다는 전령(傳令)도 또한 마음에 거슬리는 어구가 있었습니다만, 우리들은 오히려 이웃나라와 사귀는 종전의 의리를 잊지 않고 왜관(倭館)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갑술년(1874년) 가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관계가 단절된 이유를 알고, 사신의 직무가 순조롭게 이행되기를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새 훈도가 내려온 다음 연전에 가지고 온 서계를 즉시 바치는 문제, 외무성(外務省)에서 새로 서계를 만들어가지고 오는 문제, 귀국 사신을 동경(東京)으로 초빙하는 문제, 이 3건 가운데서 1건을 지적하여 처분해 달라는 내용으로 훈도에게 주어서 조정에 삼가 품처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회답에서는 두 번째 문제, 즉 새로운 서계를 만들어가지고 오는 문제로 결정지었다고 하기 때문에 과연 외무성에서 새로운 서계를 만들어가지고 왔지만, 아직까지 만나주지 않아서 헛되이 객관(客館)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실로 좋은 대책이 없던 차에 특별히 관리를 임명해서 내려 보낸다고 했으나, 또 의복 문제를 가지고 의견이 대립하여 서로 만나보지 못하고 부득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가 오늘에 와서야 사리를 밝히는 조치가 있게 되었습니다."
신헌 : "대략 알만 합니다."
구로다 기요타카 : "꼭 귀국 조정의 확실한 대답을 받아가지고 돌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직무인 만큼, 바라건대 조정에 전달하여 우리들이 돌아가서 보고할 말이 있게 하여준다면 아주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신헌 : "조정에 알리기는 하겠습니다."
구로다 기요타카 : "이번에 귀국과 종전의 좋은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실로 두 나라의 다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신의와 친목을 강구하는 데서 특별히 상의해서 결정할 한 가지 문제가 있으니 '''초록(抄錄)한 13개 조목의 조약을 모름지기 상세히 열람하고 귀 대신이 직접 조정에 나가 임금을 뵙고 품처(稟處, 조정에 올려서 처리함)해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신헌 : " '''조약이라고 하는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10]
구로다 기요타카 : " '''귀국 지방에 관(館, 외교공관)을 열고 함께 통상하자는 것입니다.''' "
신헌 : '''300년 동안 어느 때라도 통상하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까? 오늘 갑자기 이런 것을 가지고 따로 요청하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바입니다.'''
구로다 기요타카 : '''지금 세계 각국에서 다 통행되고 있는 일이며, 일본에서도 또한 각국에 관을 이미 많이 열어놓고 있습니다.'''
신헌 : 우리나라는 바다 동쪽에 치우쳐 있어 갈대만 무성하고 척박한 땅으로써 단 한 곳도 물품이 집결되는 곳이 없습니다. 토산물로 말하더라도 곡식과 무명 뿐이며 금·은·진주·옥 같은 보물이나 능라(綾羅, 비단)나 금수(錦繡) 같은 사치품은 전혀 없습니다. 나라의 풍속이 검박하여 옛 습관에 푹 빠져 있고 새로운 법령을 귀찮아하니 설사 조정에서 강제로 명령을 내려 실행하도록 하더라도 반드시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만약 물품을 서로 무역하여 곳곳으로 분주하게 나돌게 된다면, 어리석은 백성들은 법을 어겨 반드시 이 일로 하여 번잡스럽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영원토록 좋은 관계를 맺으려던 계획이 다른 때에 가서는 화목을 깨뜨리는 계기로 쉽게 뒤바뀌지 않으리라고 어찌 알겠습니까? '''귀국에는 별로 이로울 것이 없고, 우리나라에는 손해가 클 것입니다.''' 뒷날의 이해관계를 생각해보면 이전과 같이 수백 년 동안 이미 실행해오던 동래부 왜관(倭館)에서 교역하는 것만 못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구로다 기요타카 : 두 나라의 관계가 그간에 막혔던 것은 바로 조례(條例)가 분명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조약을 체결해서 영원히 변치 않는 장정(章程)으로 삼지 않을 수 없으니, 그렇게 된다면 두 나라 사이에는 다시 교류가 끊어질 일은 없게 될 것이며 또 이것은 모두 없앨 수 없는 만국의 공법(公法)입니다. 이렇게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신헌 : 지금 관을 열어 통상하자는 이 같은 논의는 우리나라로서는 아직 있어본 적이 없는 일이며, 우리 백성들은 아직 듣도 보도 못한 일이니, 이와 같이 중대한 일을 어떻게 백성들의 의향을 들어보지 않고 승낙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우리 정부라 하더라도 즉시 자의로 승인하기는 어렵겠는데 하물며 파견되어 나온 사신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구로다 기요타카 : 귀 대신이 전권을 행사할 수 없다면 대사를 토의하여 결정하는 것이 아무래도 늦어지게 될 것입니다. 귀국의 정권을 잡은 대신이 와서 만나본 이후에야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헌 : 나 역시 대관인데, 이미 대신을 만나고 있으면서 어째서 다시 다른 대신을 청하여 와서 만나자는 것입니까? 결코 들어줄 만한 일도, 시행할 만한 일도 아니니, 다시는 이런 말을 하지 마십시오.
구로다 기요타카 : 이 일을 누구와 의논하여 결정해야겠습니까?
신헌 : 이 일은 조정에 보고한 다음에 가부를 회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로다 기요타카 : 그렇다면 두 분이 직접 올라가서 임금을 뵙고 보고하고 토의해서 회답해주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신헌 : 이미 명령을 받고 내려왔으며 마음대로 자리를 떠나기도 어려우니 문건으로 교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구로다 기요타카 : 문건이 오가는 동안에 날짜가 걸릴 것인데, 우리들의 형편이 실로 난감하니 며칠 안으로 회답해줄 수는 없겠습니까?
신헌 : 문건이 오고가고 의논도 하노라면 며칠 날짜가 걸릴 것입니다.
구로다 기요타카 : 우리들이 명령을 받고 나라를 떠나온 지도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또 배 한 척이 오로지 우리가 복명(復命)할 것을 재촉하기 위하여 왔으니 한시가 급합니다. 만일 또다시 늦어진다면 어떻게 여기서 지체할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속히 일을 도모하여 우리들을 속히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기 바랍니다.
신헌 : 이런 취지로 문건을 보내겠습니다.
1876년 1월 20일의 보고.
구로다 기요타카 : 우리 정부에서 우리 사신을 빨리 돌아오라고 보낸 화륜선(火輪船)이 제물진(濟物津, 인천)에 와 닿았습니다. 돌아갈 시일이 한시가 급하니 어제 말하던 서계에 대한 문제와 조약 문제를 속히 품달(稟達, 조정에 올려 도달하게 함)함으로써 혹시라도 지체되는 일이 없도록 해주기 바랍니다.
신헌 : 모두 품달하였으나, 조정의 처분을 알 수 없습니다. 통상 문제와 같은 것은 온 조정의 의견을 충분히 참작하고, 온 나라의 의향을 깊이 살피지 않을 수 없으니, 그 가부(可否)를 의논하는 것을 어떻게 쉽사리 며칠 사이에 할 수 있겠습니까?
구로다 기요타카 : 조약 책자의 등본은 귀 대신이 훈도(訓導)에게 분부한 것입니까?
신헌 : 원본은 감히 마음대로 받을 수 없으므로 갑작스럽게 훈도를 시켜 베껴오게 하였습니다. 귀 대신이 함부로 베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무엇에 근거하여 조정에 보고할 수 있겠습니까?
구로다 기요타카 : 귀 대신의 말이 이러하니 곧 역관(譯官)을 시켜 베껴가서 귀 조정에서 이 조약을 토의한 후 만약 승인하여 시행한다면 즉시 되돌아갈 것이지만, 만일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이번의 사명은 끝장나는 것이니 다시 만날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신헌 : 임금에게 보고는 하겠으나, '조정의 처분을 어떻게 미리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구로다 기요타카 : 오늘 또 말하는 것은 이전의 좋은 관계를 서로 보존하려는 의도에서입니다. 이 문제가 옳게 해결되지 못하는 것은 두 나라의 불행이니, 혹시 후회가 생기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만일 화목하던 관계가 나빠지게 된다면, 반드시 우리 군사들이 상륙할 염려가 있을 것이니, 이것을 미리 헤아려 이전의 좋은 관계가 변하지 말 것을 바라는 바입니다.'''
신헌 : 어제 이미 다 말하였는데 어째서 또다시 제기합니까? '''이전의 좋은 관계를 회복하자는 마당에 하필 군사를 발동하겠다는 말을 갑자기 남에게 하니 참으로 성실한 예의가 아니며 또 남과 잘 사귀자는 도리도 아닙니다.''' 그 잘못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아마도 잘 알 것입니다. 「뉘우친다〔悔悟[11]〕」는 두 글자로 여러 차례 추궁하는 것도 서로 공경하는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지난번에 들으니 귀 대신의 배를 뒤따라 온 군사들이 장차 인천(仁川)과 부평(富坪) 등지에 상륙하려고 한다고 하였는데, 비록 그 말을 다 믿지는 않더라도 이미 말한 사람이 있으니 이런 말을 어떻게 경솔하게 입 밖에 낼 수 있습니까? 연해의 황폐한 마을에는 원래 군사를 주둔시킬 수 없으며, 백성들이 만약 군사를 본다면 놀라서 흩어져 버릴 근심이 있는데, '''더구나 남의 나라에 들어오면서 그 나라의 금령(禁令[12])은 물어보지도 않고 경솔하게 마음대로 상륙한다면 그 잘못이 누구에게 있겠습니까?''' 그리고 혹시라도 방어 지역 근처에서 피차 뜻밖의 변란이 있게 된다면 어찌 걱정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귀하의 배에 특별히 신칙하여 변란을 일으킬 우려가 없게 하기 바랍니다.
구로다 기요타카 : 전번에 있었던 말들은 이미 귀 대신의 의견을 들었기 때문에 명하여 금지시켰으니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1876년 1월 21일의 보고.
일본이 이미 일본군의 조선 상륙 등 무력 시위를 예고하며 협박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5. 조정의 논의



5.1. 일본의 의도에 대한 논의


고종 : 일본과 300년 동안이나 좋은 관계를 맺어왔는데, 지금 서계(書契, 외교문서)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여러 날 서로 버티고 있으니 정말 모를 일이다. 의정부에서 미리 의논하여 적당한 대책을 세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영부사 이유원 : 신들이 날마다 의정부에 모여서 의논한 지 오래지만, 지금 저 사람들의 정상을 보면 귀순(歸順, 순순히 돌아감)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영돈녕부사 김병학 : 저 사람들이 좋은 관계를 맺으러 왔다고 말은 하지만,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좋은 관계를 맺으려는 것이 아니라 불화를 일으키려는 것입니다. 끝내는 어떻게 될지 아직 모르겠습니다만, 신들은 지금 날마다 모여서 의논하고 있습니다.
판중추부사 홍순목 : 적국의 외환(外患, 외국의 위협)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만, 조정이 옳게 처리하고 백성들의 마음이 굳건하다면 저절로 귀순하게 될 것입니다.
판중추부사 박규수 : 일본이 좋은 관계를 맺자고 하면서도 병선(兵船)을 끌고 오니 그 속셈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삼천리 강토가 안으로는 정사를 잘하고 밖으로는 외적의 침입을 막는 방도를 다하여 부국강병(富國强兵)해지는 성과를 얻는다면 어찌 감히 함부로 수도 부근에 와서 엿보며 마음대로 위협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분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영의정 이최응 : 신들이 등문(登聞, 올라와서 들음)한 장계(狀啓, 임금에게 올리는 보고자료)를 보니 저 사람들의 속셈은 매우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날마다 의정부에 모여서 처리할 방도를 의논해야 하겠습니다.
우의정 김병국 : 저들의 정상이 과연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겠습니까? 내려간 대관(大官)이 여러 날 그들을 만나고 있으니 그의 보고를 기다려서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고종 : 오늘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들을 입시(入侍)하게 한 것이 바로 이 일 때문이다. 여러 대신들은 충분히 의논하고 적당한 대책을 잘 세우도록 하라. 지금 심도(沁都, 강화)에서 온 장계(狀啓)를 보면, 저 사람들이 조약 13건이 있다고 하였는데 아직 보고가 오지 않았다. 아직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첫째 관(館, 외교공관)을 개설하여 통상하자는 것은 이미 동래부(東萊府, 부산) 왜관(倭館)에서 설치하고 시장을 열고 있는데 무엇을 또다시 설치하겠는가?
김병국 : 지금의 우환을 보면 어느 때가 지금과 같았겠습니까? 다만 그것을 사전에 대처하는 방도는 오직 재정 뿐입니다. 그러나 공납(公納)은 기일을 지체시키면서 이럭저럭 날을 보내고, 중앙과 지방의 저축은 도처에서 고갈되었으나 위급한 상황에 따르는 대책을 세울 길이 없습니다. 공적이건 사적이건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 실로 위태롭기 그지없습니다. 또한 항산(恒産)도 없고 항심(恒心)[13]도 없는 자들이 이런 일이 있는 때를 타서 작게는 도적질을 하고 크게는 강도질을 하여 수도로부터 시골에 이르기까지 가는 곳마다 소란하여 형세는 위급해지고, 가난한 사람이건 부유한 사람이건 모두 곤경에 빠져 엎치락뒤치락하니 이것은 다 기강이 서지 않아 두려울 게 없기 때문입니다. 무릇 기강이란 저절로 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세우는 사람이 있어야 서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쁜 사람은 내쫓고 좋은 사람을 등용하여 조정의 기강을 세우며, 표창과 책벌을 정확히 적용하여 온 나라의 기강을 세우는 것은 전하가 한 번 변경하기에 달려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힘쓰소서. 힘쓰소서.
고종 : 여러 가지 예비책은 묘당(廟堂, 의정부)에서 잘 의논하여 조처하기에 달렸지만, 지금 이처럼 힘쓸 것을 당부하니 어찌 감히 명심하지 않겠는가?

5.2. 최익현의 반대 상소


신(臣)은 적들의 배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의정부(議政府)에서 응당 확정적인 의논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여러 날 동안 귀를 기울이고 기다렸으나 아직도 들은 바가 없습니다. 항간에는 그들의 속셈이 화친을 요구하는 데 있을 것이라고 소문이 떠돌아 입 가진 사람은 모두 분격하며 온 나라가 뒤숭숭합니다. 이 소문이 시행된다면 전하의 일은 잘못되고 말 것입니다.
'''화친이 상대편의 구걸에서 나오고 우리에게 힘이 있어 능히 그들을 제압할 수 있어야 그 화친은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겁나서 화친을 요구한다면 지금 당장은 좀 숨을 돌릴 수 있겠지만, 이후 그들의 끝없는 욕심을 무엇으로 채워주겠습니까?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첫째 이유입니다.'''
그들의 물건은 모두 지나치게 사치한 것과 괴상한 노리갯감들이지만, '''우리의 물건은 백성들의 목숨이 걸린 것들이므로 통상한 지 몇 년 되지 않아서 더는 지탱할 수 없게 될 것이며, 나라도 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그들이 비록 왜인(倭人)이라고 핑계대지만 실제로는 서양 도적들이니, 화친이 일단 이루어지면 사학(邪學)이 전파되어 온 나라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그들이 뭍에 올라와 왕래하고 집을 짓고 살게 된다면 재물과 부녀들을 제 마음대로 취할 것이니''',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네 번째 이유입니다.
이런 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병자년(1636)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일을 끌어들여 말하기를, ‘병자년에 화친을 한 뒤로 두 나라가 서로 좋게 지내게 되어 오늘까지 관계가 반석 같은데, 지금은 왜 그렇게 할 수 없단 말인가?’라고 합니다. '''저들은 재물과 여자만 알고 사람의 도리라고는 전혀 모르는데, 그들과 화친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다섯째 이유입니다.
뒷날에 역사를 쓰는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하여 크게 쓰기를, ‘아무 해 아무 달에 서양 사람이 조선에 들어와 아무 곳에서 동맹을 맺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기자(箕子)의 오랜 나라가 하루아침에 오랑캐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순조(純祖) 때에는 서양 사람이 몰래 들어왔다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했고, 우리 헌종(憲宗)도 들어와서 염탐하는 자들을 모두 주륙하였으니 이것이 전하의 가법(家法)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기어든 왜인들은 서양 옷을 입고 서양 포를 쏘며 서양 배를 타고 다니니, 이는 왜인이나 서양 사람이나 한 가지라는 것의 뚜렷한 증거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들에게 속겠습니까?
감히 고려 때의 우탁(禹倬)과 선정신(先正臣) 조헌(趙憲)의 고사를 본받아 도끼를 가지고 대궐 앞에 엎드렸으니, 삼가 바라건대 빨리 큰 계책을 세우고, 조정 관리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팔아먹고 짐승을 끌어들여 사람을 해치려고 꾀하는 자가 있으면 사형으로 처단하기 바랍니다.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이 도끼로 신에게 죽음을 내리신다면 조정의 큰 은혜로 여기겠습니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저들이 대포를 겨누며 화친을 하자고 하니 이건 믿을 수 없는 화친이다.
  2. 저들이 파는 건 사치품이지만 우리가 파는건 생필품이니 민생에 해를 끼칠 것이다.
  3. 저들은 말이 왜인이지 서양인과 다를 바 없는 도적이다.
  4. 저들이 우리 나라에 올라오면 재물과 부녀자를 취할 것이다.
이에 조정은 최익현을 체포하여 위리안치[14]한다. 이어 전 사간 장호근도
추악한 무리들이 심도(沁都)에 불쑥 들어왔는데, 상륙한 자들의 수가 400명에 이릅니다. 몇 백 년 동안 요새였던 땅에 문을 열고 도적을 들여 놓았으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그들이 약속하여 결정하자고 하는 13건의 조약은 더욱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이런 지경에 이르러 위로는 임금과 아래로는 신하들이 오직 의리로써 죽기를 맹세하고 배척하여야 할 것입니다. 조정의 관리들은 날마다 의정부(議政府)에 모이지만, 시행할 만한 대책을 세웠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혹시 의견을 올렸다가는 도리어 파출(罷黜)되기 때문에 충심으로 간언(諫言)할 길이 막히고, 근본 대책이 아직 세워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현재 급선무는 군영(軍營)의 제도를 엄격히 단속하고, 특별히 인재를 가려 뽑아서 요충지를 굳게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양선(異樣船)을 소탕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어찌하여 ‘먼저 건드리지 말라〔不先犯〕’는 세 글자를 가지고 세월만 보내는 좋은 방책으로 삼는 것입니까?
올라온 포군들도 분개하여 하나같이 죽을 힘을 다해 싸우려 하니 모든 사람들의 심정은 의논하지 않아도 같습니다. 속히 애통한 명령을 내려 군사와 백성들을 격려하여 성(城)에 의지하여 한 번 싸운다면 위험한 고비가 도리어 안전하게 될 것입니다.
란 상소를 올렸지만 고종은 상소를 돌려보냈다. 즉 무시한 것이다. 고종은 곧이어 장호근도 귀양을 보냈다. 이어 윤치현 등도 계속 상소를 올려 통상에 반대를 했지만 고종은 어디서 임금을 협박하느냐?라고 강경히 유생들의 소를 물리쳤다.

5.3. 서계 문제에 대한 조선의 공식적 입장 표명


두 나라는 화목하게 지낸 지 300년이나 됩니다. 정분은 형제와 같으며 옛 제도를 준수하면서 각기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여 서로 다툰 적이 없었고, 서로 사신을 보내는 범절은 한계를 넘지 않았으며, 위로하거나 축하하는 인사는 서로 폐단이 없게 하였습니다. 가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오는 것이 있었고 주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보답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대마도(對馬島)에서 서신을 받아 사정을 전달하였으며 동래 왜관(東萊倭館)의 시장에서는 경계를 넘어 다니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길이 보존하는 길을 말한다면 바로 예의와 의리, 성의와 신뢰 이 네 가지뿐인데 어찌 근래에 들어 서계(書契) 문제를 갖고 두 나라가 서로 의심하고 멀리하는 단서가 되리라고 생각하였겠습니까?
여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으니 두 나라의 서계는 원래 신중하고 엄격하여 한 글자라도 격식에 맞지 않으면 꼬치꼬치 따져 밝혀내는 것이 두 나라의 옛 규례였습니다. 동래 수신(東萊守臣)과 임역(任譯)이 감히 선뜻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바로 이 규례에 의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일찍이 정묘년(1867년) 봄에 중국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이 전해져 왔는데 총리 각국 사무 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에서 천진(天津)과 상해(上海)의 통상 대신(通商大臣)이 보낸 신문(新聞)의 내용을 들면서 아뢰기를, ‘일본 객관(客館)의 야도 마사요시〔八戶順叔〕라는 사람이 보내온 신문 원고에 이르기를, 「근래에 일본국이 실제로 화륜 군함 80척을 가지고 있는데 조선을 치려는 뜻이 있다.」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조선 국왕이 5년에 한 번씩 꼭 강호(江湖)에 와서 대군(大君)을 배알(拜謁)하고 공물(貢物)을 바치는 것은 옛 규례인데 조선 왕이 규례를 폐지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군사를 일으켜 그 죄를 따지려 한다.」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지금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치려는 의도가 있으니, 그것은 조선에서 5년에 한 번씩 공물을 바치게 되어 있으나 지금 나라가 견고하다는 것을 믿고 복종하지 않아 이 규례가 오랫동안 폐지되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대체로 야도 마사요시가 귀국(貴國) 사람이기 때문에 귀국의 일을 잘 알고 있을 터인데 거짓말을 만들어내서 ‘배알하고 조공한다.’는 욕된 말로써 서로 관계를 맺고 공경하는 나라를 무함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군사를 일으켜 가서 치겠다는 말을 우호를 맺어 불화가 없는 나라 사이에 써서야 되겠습니까? 이와 같은 말을 국내외에 퍼뜨린 것은 과연 무슨 의도입니까? 우리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어찌 의아해하지 않겠으며 어찌 분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무진년(1868년)부터 경오년(1870년)까지 서계를 선뜻 접수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규식에 장애가 있어서였을 뿐 아니라 진실로 근거없는 말이 의심을 일으키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예의와 의리, 성의와 신뢰를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전령(傳令)을 강요한 동래 수신은 변방의 먼 곳으로 귀양 보냈으며 사실을 숨기고 거짓말을 한 훈도(訓導)는 효수(梟首)하였습니다.
그리고 귀국의 외무성(外務省)에서 새로운 서계를 만들어가지고 온 뒤에도 예복과 정문(正門) 출입 문제로 오랫동안 의견이 대립되었기 때문에 우리 나라 정부에서 동래 수신에게 소소한 의식 절차에 구애되지 말고 즉시 받아서 조정에 바치라고 관문(關文)을 띄워 신칙하였습니다. 때마침 외무성의 관리가 돌아갔으나 미처 관청 사무를 보기도 전에 도리어 귀 대신이 이 일을 처리하기 위하여 우리 나라에 도착하였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지금 귀 대신과 우리 나라 사신이 서로 문답한 것을 들으니 우리 나라가 귀국의 사신을 배척하였다고 말한다는데 서계가 지연된 이유를 위에서 다 이야기하였습니다. 어찌 조금이라도 사신을 배척할 의도가 있었겠습니까? 두 나라 사이에 서로 의심하고 멀리하게 된 것이 여기에까지 이르렀으니 부끄럽고 통탄스러움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조정의 의견이 분분하여 파면과 사형이 계속되고 군사와 백성들이 무력행사를 하려고 하면 관리를 파견하여 무마하였으니 귀국의 후의(厚意)는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천만 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동래 수신을 귀양 보냈고 훈도도 효수하여 우리의 도리를 다하기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귀국에서 야도 마사요시가 속이고 욕된 일을 한 데 대하여 어떻게 처벌하였는지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귀 대신은 우리 나라 사신과 접견하는 데서 말씨가 성실하고 온순하며 일의 처리를 명백히 하여서 두 나라 사이의 의심을 하루아침에 모두 풀리게 하였으며, 대인 군자(大人君子)로서 평화에 전심하고 나라를 위하여 신중하는 것을 보여 주었기에 존경을 금할 수 없습니다.
서계나 예물 같은 것을 다시 의좋게 교환하는 것은 응당 300년간의 옛 규례에 근거해서 하되 큰 문제는 귀국 정부와 우리 나라 정부에서 하고 작은 문제는 귀국 외무성과 우리 나라의 예조에서 동등하게 주고받음으로써 영원토록 우호를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혹시 조약을 새로 정할 것이 있으면 두 나라의 이해에 각기 관계되는 것은 반드시 두 나라 사이에 다 편리하도록 강구할 것이며 만일 한쪽에만 이롭고 다른 쪽에는 해롭다거나 한쪽에만 통하고 다른 쪽에는 막히게 된다면 사리로 보아 응당 고려할 점이 있을 것이니, 원컨대 인서(仁恕)를 가지고 추론하여 충분히 의논하기 바랍니다. 조선국 의정부에서 일본국 판리 대신에게 보냅니다.
대조선국 개국(開國) 485년 병자년(1876년) 정월(正月)

5.4. 통상 허락


1876년 1월 24일의 의정부 토론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방금 접견 부관(接見副官)의 등보(謄報)를 보니, ‘일본 사신이 수호 통상을 하자는 일로 베껴 올린 조규 책자(條規冊子)를 묘당(廟堂)으로 하역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는 일본과 300년 동안 믿고 화목하게 지냈으며, 왜관(倭館)을 설치하고 상호 간에 저자를 열었습니다. 그러다가 몇 해 전부터 서계(書契) 문제로 서로 대립하여 왔으나, '''지금은 계속 좋게 지내자는 처지에서 반드시 통상을 거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수호 조약(修好條約) 등 문제는 충분히 더 토론하여 양측에서 서로 편리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이런 내용으로 접견 대관(接見大官)에게 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876년 1월 25일에 의정부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수호(修好)하고 통상(通商)하는 일로 계품(啓稟)하고 관문(關文)을 띄웠습니다. 조규(條規) 등 모든 강정(講定)을 매번 번거롭게 묘당(廟堂)에 공문(公文)을 올려 보내니 자연 날짜가 지연됩니다. 그러니 백성들에게 편리하고 나라에 이익이 있다면 전결(專結)하여도 괜찮을 것입니다. 옛 가르침도 그러하니, '''편리한 대로 일에 따라 재량하여 처리하도록 접견 대관(接見大官)에게 통지하소서'''.

6. 조약 내용


대일본국은 대조선국과 본디 우의(友誼)를 두터이 하여온 지가 여러 해 되었으나 지금 두 나라의 정의(情意)가 미흡한 것을 보고 다시 옛날의 우호 관계를 닦아 친목을 공고히 한다.
이는 일본국 정부에서 선발한 특명 전권 변리 대신 육군 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陸軍中將兼參議開拓長官) 구로다 기요타카와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 의관 이노우에 가오루가 조선국 강화부(江華府)에 와서 조선국 정부에서 선발한 판중추부사 신헌(申櫶)과 부총관 윤자승(尹滋承)과 함께 각기 받든 유지(諭旨)에 따라 조관(條款)을 의정(議定)한 것으로서 아래에 열거한다.
제1관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15] 이후 양국은 화친의 실상을 표시하려면 모름지기 서로 동등한 예의로 대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상대방의 권리를 침범하거나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선 종전의 교제의 정을 막을 우려가 있는 여러 가지 규례들을 일체 혁파하여 없애고 너그럽고 융통성 있는 법을 열고 넓히는 데 힘써 영구히 서로 편안하기를 기약한다.
제2관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국 경성(京城)에 가서 직접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사신(該使臣)이 주재하는 기간은 다 그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조선국 정부도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국 동경(東京)에 가서 직접 외무경(外務卿)을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사신이 주재하는 기간 역시 그 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제3관 이후 양국 간에 오가는 공문(公文)은, 일본은 자기 나라 글을 쓰되 지금부터 10년 동안은 한문으로 번역한 것 1본(本)을 별도로 구비한다. 조선은 한문을 쓴다.
제4관 조선국 부산(釜山) 초량항(草梁項)에는 오래 전에 일본 공관(公館)이 세워져 있어 두 나라 백성의 통상 지구가 되었다. 지금은 종전의 관례와 세견선(歲遣船) 등의 일은 혁파하여 없애고 새로 세운 조관에 준하여 무역 사무를 처리한다. 또 '''조선국 정부는 제5관에 실린 두 곳의 항구를 별도로 개항하여 일본국 인민이 오가면서 통상하도록 허가'''하며, 해당 지역에서 임차한 터에 가옥을 짓거나 혹은 임시로 거주하는 사람들의 집은 각각 그 편의에 따르게 한다.
제5관 경기(京畿), 충청(忠淸), 전라(全羅), 경상(慶尙), 함경(咸鏡) 5도(道) 가운데 연해의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 두 곳을 골라 지명을 지정한다. 개항 시기는 일본력(日本曆) 명치(明治) 9년 2월, 조선력 병자년(1876년) 2월부터 계산하여 모두 20개월로 한다.
제6관 이후 일본국 배가 조선국 연해에서 큰 바람을 만나거나 땔나무와 식량이 떨어져 지정된 항구까지 갈 수 없을 때에는 즉시 곳에 따라 연안의 지항(支港)에 들어가 위험을 피하고 모자라는 것을 보충하며, 선구(船具)를 수리하고 땔나무와 숯을 사는 일 등은 그 지방에서 공급하고 비용은 반드시 선주(船主)가 배상해야 한다.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지방의 관리와 백성은 특별히 신경을 써서 가련히 여기고 구원하여 보충해 주지 않음이 없어야 할 것이며 감히 아끼고 인색해서는 안 된다. 혹시 양국의 배가 큰 바다에서 파괴되어 배에 탄 사람들이 표류하여 이르면 곳에 따라 지방 사람들이 즉시 구휼하여 생명을 보전해주고 지방관에게 보고하며 해당 관청에서는 본국으로 호송하거나 가까이에 주재하는 본국 관원에게 교부한다.
제7관 조선국 연해의 도서(島嶼)와 암초는 종전에 자세히 조사한 것이 없어 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 항해자들이 수시로 해안을 측량하여 위치와 깊이를 재고 도지(圖志)를 제작'''하여 양국의 배와 사람들이 위험한 곳을 피하고 안전한 데로 다닐 수 있도록 한다.
제8관 이후 일본국 정부는 조선국에서 지정한 각 항구에 일본국 상인을 관리하는 관청을 수시로 설치하고, 양국에 관계되는 안건이 제기되면 소재지의 지방 장관과 토의하여 처리한다.
제9관 양국이 우호 관계를 맺은 이상 피차의 백성들은 각자 임의로 무역하며 양국 관리들은 조금도 간섭할 수 없고 또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도 없다. 양국 상인들이 값을 속여 팔거나 대차료(貸借料)를 물지 않는 등의 일이 있을 경우 양국 관리는 포탈한 해당 상인을 엄히 잡아서 부채를 갚게 한다. 단 양국 정부는 대신 상환하지 못한다.
제10관 '''일본국 인민이 조선국이 지정한 각 항구에서 죄를 범하였을 경우 조선국에 교섭하여 인민은 모두 일본국에 돌려보내 심리하여 판결'''하고, 조선국 인민이 죄를 범하였을 경우 일본국에 교섭하여 인민은 모두 조선 관청에 넘겨 조사 판결하되 각각 그 나라의 법률에 근거하여 심문하고 판결하며, 조금이라도 엄호하거나 비호함이 없이 공평하고 정당하게 처리한다.
제11관 양국이 우호 관계를 맺은 이상 별도로 통상 장정(章程)을 제정하여 양국 상인들이 편리하게 한다. 또 현재 논의하여 제정한 각 조관 가운데 다시 세목(細目)을 보충해서 적용 조건에 편리하게 한다. 지금부터 6개월 안에 양국은 따로 위원(委員)을 파견하여 조선국의 경성이나 혹은 강화부에 모여 상의하여 결정한다.
제12관 이상 11관 의정 조약은 이날부터 양국이 성실히 준수하고 준행하는 시작으로 삼는다. 양국 정부는 다시 고치지 못하고 영원히 성실하게 준수해서 화호(和好)를 두텁게 한다. 이를 위하여 조약서 2본(本)을 작성하여 양국 위임 대신이 각각 날인하고 서로 교환하여 신임을 명백히 한다.
대조선국 개국(開國) 485년 병자년(1876년) 2월 2일
대관(大官) 판중추부사 신헌
부관 도총부 부총관 윤자승
대일본국 기원 2536년 명치(明治) 9년 2월 6일
대일본국 특명 전권 변리 대신 육군 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 구로다 기요타카
대일본국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 의관(議官) 이노우에 가오루
일본은 제1관을 통해 조선이 청으로부터 독립된 자주국임을 선언하게 하여 청으로부터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제4관과 제5관을 통해 부산 이외의 2개의 항구를 더 개항하도록 했다. 개항지는 인천(1883년)과 원산(1880년)으로 결정되었다. 인천은 한성과 가까운 지역이었고, 원산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결정되었다. 제7관은 대표적인 불평등 조약 조항으로 일본인들이 마음대로 조선의 해안을 측량하도록 허락한 내용이다. 제10관은 불평등 조약의 백미인 치외법권 조항이 되겠다.

6.1. 부록


강화도 조약을 맺은 이후 그 해 7월 부록과 무역 규칙을 통해 세부적인 내용을 확정하게 된다.
일본국 정부는 지난번에 특명 전권 변리 대신(特命全權辨理大臣) 육군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陸軍中將參議開拓長官)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와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特命副全權辨理大臣) 의관(議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파견하여 조선국에 가서 조선국 정부에서 파견한 대관(大官)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신헌(申櫶)과 부대관(副大官) 도총부 부총관(都總府副總管) 윤자승(尹滋承)을 강화부(江華府)에서 만나, 일본력(日本曆) 명치(明治) 9년 2월 26일, 조선력(朝鮮曆) 병자년(1876년) 2월 2일에 협의하여 타당하게 처리하고 상호간에 조인(調印)하였다.
이번에 그 수호 조규 제11관의 취지에 비추어 일본국 정부는 이사관(理事官) 외무대승(外務大丞) 미야모토 쇼이치〔宮本小一〕에게 위임하여 조선국 경성(京城)에 가서 조선국 정부에서 위임한 강수관(講修官)인 의정부 당상(議政府堂上) 조인희(趙寅熙)를 만나 정한 조관을 논의하여 아래에 열거한다.
제1관 : 각 항구에 주재(駐在)하는 일본국 인민의 관리관(管理官)은 조선국 연해 지방에서 일본국 배가 파선되어 긴급할 경우 지방관에게 알리고 해당 지역의 연로(沿路)를 통과할 수 있다.
제2관 : 사신(使臣) 및 관리관이 발송하는 공문, 서신 등 우편을 통한 비용은 사후에 변상한다. 인민을 고용하여 보낼 때에는 각각 그 편의에 따른다.
제3관 : 의정(議定)된 조선국 각 통상 항구에서 일본국 인민이 택지를 빌어 거주하는 자는 땅 주인과 상의하여 금액을 정해야 하며 관청에 속한 땅에 있어서는 조선국 인민과 동등하게 조세를 바친다. 부산(釜山) 초량항(草梁項)의 일본관(日本館)에 종전에 설치한 수문(守門)과 설문(設門)은 지금부터 철폐하고 새로이 정한(程限)에 의하여 경계상에 푯말을 세운다. 다른 두 항구도 이 규례에 따른다.
제4관 : 이후 '''부산 항구에서 일본국 인민이 통행할 수 있는 도로의 이정(里程)은 부두로부터 기산(起算)하여 동서남북 각 직경 10리로【조선의 이법(里法)】 정한다.''' 동래부(東萊府) 중의 한 곳에 있어서는 특별히 이 이정 안에서 오갈 수 있다. 일본국 인민은 마음대로 통행하며 조선 토산물과 일본국 물품을 사고팔 수 있다.
제5관 : 의정된 조선국 각 항구에서 일본국 인민은 조선국 인민을 고용할 수 있다. 조선국 인민이 그 정부의 허가를 받은 경우 일본국에 가는 데에도 장애가 없다.
제6관 : 의정된 조선국 각 항구에서 일본국 인민이 병으로 죽었을 때에는 적당한 땅을 선택하여 매장할 수 있으나 초량(草梁) 부근에 의거한다.
제7관 : '''일본국 인민은 본국의 현행 여러 화폐로 조선국 인민이 소유한 물품과 교환할 수 있으며, 조선국 인민은 그 교환한 일본국의 여러 화폐로 일본국에서 생산한 여러 가지 상품을 살 수 있다.''' 이러므로 조선국의 지정된 여러 항구에서는 인민들 사이에 서로 통용할 수 있다. 조선국 동전은 일본국 인민이 운수 비용에 사용할 수 있다. 양국 인민으로서 감히 사적으로 전화(錢貨)를 주조한 자에게는 각각 그 나라의 법률을 적용한다.
제8관 : 조선국 인민이 일본국 인민으로부터 사들인 상품이나 받은 각종 물건은 마음대로 사용해도 무방하다.
제9관 : 수호 조규(修好條規) 제7관의 기재에 따라 일본국 측량선이 작은 배를 띄워 조선국 연해를 측량하다가 혹 비바람이나 썰물을 만나 본선(本船)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는 경우 해처(該處)의 이정(里正)은 부근 인가(人家)에 안접(安接)하게 하며, 소용되는 물품이 있을 때에 관청에서 지급하고 추후 계산하여 갚아준다.
제10관 : 조선국은 해외의 여러 나라들과 통신(通信)을 한 적이 없으나 일본은 이와는 다르다. 수호(修好)한 지 1년이 되었고 동맹을 맺어 우의가 있다. 이후 여러 나라의 선박이 풍랑을 만나 연해지방에 표류해 오는 경우 조선국 인민은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된다. 해당 표민(漂民)이 본 국으로 송환하기를 희망하면 조선국 정부는 각 항구의 일본국 관리관에게 넘겨주어 본 국으로 송환하고 해당 관원은 이를 승낙해야 한다.
제11관 : 이상 10관의 장정(章程) 및 통상 규칙은 다같이 수호 조규와 동일한 권리를 가지며, 양국 정부는 이를 준수해서 감히 어기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 그러나 이 각관(各款) 가운데 양국 인민이 교제 무역을 실천함에 있어 지장이 있다고 인정될 경우에는 개정치 않으면 안 된다. 양국 정부는 속히 의안(議案)을 작성하여 1년 전에 통보하고 협의하여 개정한다.
그러나 이 각관(各款) 가운데 양국 인민이 교제 무역을 실천함에 있어 지장이 있다고 인정될 경우에는 개정치 않으면 안 된다. 양국 정부는 속히 의안(議案)을 작성하여 1년 전에 통보하고 협의하여 개정한다.
대일본국 기원(紀元) 2536년 명치(明治) 9년 8월 24일
이사관(理事官) 외무 대승(外務大丞) 미야모토 쇼이치〔宮本小一〕
대조선국 개국(開國) 485년 병자년(1876년) 7월 6일
강수관(講修官) 의정부 당상(議政府堂上) 조인희(趙寅熙)
부록을 통해서 일본인들의 거류지가 설정이 되었으며, 일본 화폐의 사용도 허용이 되었다.

6.2. 무역 규칙


강수관 조인희(趙寅熙)는 일본 이사관 미야모토 쇼이치〔宮本小一〕와 일본 인민들이 조선국 여러 항구에서 무역하는 규칙을 아래와 같이 의정하였다.
제1칙(則) : 일본국 상선이【일본국 정부 소관의 군함 및 통신 전용의 모든 배들은 제외한다.】 조선국에서 승인한 모든 무역 항구에 들어올 때에는 선주나 선장은 반드시 일본국 인민 관리관이 발급한 증서를 조선국 관청에 제출하되 3일을 넘어서는 안 된다. 이른바 증서라는 것은 선주가 휴대한 일본국 선적(船籍)의 항해 증명서 같은 것인데, 항구에 들어온 날부터 나가는 날까지 관리관에게 교부한다. 관리관은 곧 각 문건들을 접수하였다는 증표를 발급해준다. 이것이 일본국의 현행 상선(商船) 규칙이다. 선주는 본 항구에 정박하고 있는 동안에 이 증서를 조선국 관청에 제출하여 일본국 상선임을 밝힌다. 이때에 선주는 그 기록부도 제출한다. 이른바 기록부라는 것은 선주가 본 선박의 이름, 본 선박이 떠나온 지명, 본 선박에 적재한 화물의 돈수(噸數), 석수(石數),【선박의 용적에 대해서도 함께 산정(算定)한다.】 선장의 성명, 배에 있는 선원수, 타고 있는 여객의 성명을 상세히 기록하고 선주가 날인한 것을 말한다. 이 때에 선주는 또 본 선박에 적재한 화물에 대한 보단(報單)과 배 안에서 사용하는 물품의 장부를 제출한다. 이른바 보단이라는 것은 화물의 이름 혹은 그 물품의 실명(實名), 화주(貨主)의 성명, 기호 번호를【기호 번호를 쓰지 않은 화물은 이 규정에서 제외한다.】 상세히 밝혀 보고하는 것이다. 이 보단 및 제출하는 여러 문서들은 모두 일본 국문으로 쓰고 한역(漢譯) 부본(副本)은 첨부하지 않는다.
제2칙 : 일본국 상선이 항구에 들어온 배의 화물을 부릴 때에 선주나 화주(貨主)는 다시 그 화물의 이름 및 원가(原價), 무게, 수량을 조선국 관청에 보고해야 하고, 관청에서는 보고를 받으면 곧 화물을 부리라는 준단(准單)을 속히 발급해주어야 한다.
제3칙 : 선주, 화주는 제2칙의 승인을 받은 다음에 그 화물을 부려야 하며, 조선국 관리가 검열하려고 하면 화주는 감히 거절하지 못한다. 관리도 조심스럽게 검열하여 혹시라도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제4칙 : 출항(出港)할 화물의 화주는 제2칙의 입항 때의 화물 보단 양식에 따라 화물을 실을 배의 이름과 화물 이름, 수량을 조선국 관청에 보고한다. 관청에서는 속히 허가하고 항구에서 나가는 화물에 대한 준단을 발급해야 한다. 화주는 준단을 받으면 즉시 화물을 본 선박에 싣는다. 관청에서 그 화물을 검사하려고 하는 경우 화주는 감히 거절하지 못한다.
제5칙 : 일본국 상선이 항구에서 나가려 할 때에는 전날 오전에 조선국 관청에 보고하고 관청에서는 보고를 받으면 전날에 수령한 증서를 돌려주고 출항 준단을 발급하여야 한다. 일본국 우편선(郵便船)이 규정된 시간 안에 출항할 수 없을 때에도 관청에 보고해야 한다.
제6칙 : 이후 조선국 항구에 거주하는 일본 인민은 양미(糧米)와 잡곡을 수출, 수입할 수 있다.
제7칙 : 항세(港稅) - 연외장(連桅檣) 상선 및 증기(蒸氣) 상선의 세금은 5원(圓)이다.【모선에 부속된 각정(脚艇)은 제외한다.】 단외장(單桅檣) 상선의 세금은 2원이다.【500석(石) 이상의 화물을 실을 수 있는 것이다.】 단외장 상선의 세금은 1원 50전(錢)이다.【500석 이하의 화물을 실을 수 있는 것이다.】 ''' 일본국 정부에 소속된 모든 선박은 항세(港稅)를 납부하지 않는다.'''
제8칙 : 조선국 정부나 인민들이 지정된 무역 항구 외의 다른 항구에서 각종 물건을 운반하려고 일본국 상선을 고용할 때, 고용주가 인민이면 조선국 정부의 준단을 받은 후에야 고용할 수 있다.
제9칙 : 일본국 선척이 통상을 승인하지 않은 조선국 항구에 도착하여 사사로이 매매할 경우에는 해처(該處) 지방관이 조사하여 부근의 관리관에게 교부한다. 관리관은 모든 돈과 물품을 일체 몰수하여 조선국 관청에 넘겨준다.
제10칙 : 아편과 담배의 판매를 엄격히 금지한다.
제11칙 : 양국에서 현재 정한 규칙은 이후 양국 상인의 무역 형편 여하에 따라 각 위원이 수시로 참작해서 협의하여 개정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양국 위원이 각각 날인하면 그 날부터 준행한다.
조선국 개국(開國) 485년 병자년(1876년) 7월 6일
강수관(講修官) 의정부 당상(議政府堂上) 조인희(趙寅熙)
대일본국 기원(紀元) 2,536년 명치(明治) 9년 8월 24일
이사관(理事官) 외무대승(外務大丞) 미야모토 쇼이치〔宮本小一〕
제6칙을 통해 양곡의 무제한 유출이 허용되었으며, 제7칙을 보면 항세의 규정만 있을 뿐, 관세의 규정이 없어서 일본 상인들은 무관세로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7. 조선의 입장


일본의 무력(운요호 사건)에 굴복, 강요되기는 했으나,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다. 강화도 조약의 체결은 조선이 쇄국정책을 버리고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지배층은 주자학적, 소중화(小中華)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국제 사회의 대열에 참여하기를 반대해, 강화도 조약은 후에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기고 세계 사회에서 도태되는 계기 또한 되었다.
또한 불평등 조약이므로 일본의 입장이 엄청나게 유리해졌고[16], 제국주의 열강들이 일본과 동등한 대접을 받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후에 조인되는 타국과의 조약도 전부 다 불평등 조약이 되었다. 이는 조선이 망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17]
다만 강화도 조약 자체가 무기력하게 시키는 대로 예예하며 도장 찍은 것은 아닌데, 조선측 전권대사로 나온 신헌이라는 인물이 별군직부터 시작한 무관 출신이라는 것이나 상기된 대로 일본의 '한성으로 들어가겠다' 등의 노골적인 요구는 일체 거부한 것 등이 그 예이다. 외교 수사적 기술만은 근대화되있던 일본 측의 함정에 빠져들었을 뿐, 조선 측에서는 할 수 있는 방어는 다했다 볼 수 있다.

8. 일본의 입장


강화도 조약은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로 나가는 첫걸음이었고, 이것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일본은 조약 체결 과정 내내 무력 시위와 행패를 부려 일본이 조선보다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음을 내내 표현했고, 조선이 근대적 조약을 처음 맺는다는 점을 이용해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했다. 후진 일본이 무지한 탓으로 당한 불평등 조약을 이웃 조선의 무지를 이용하여 적용한 것이다. 강화도 조약의 내용은 일본이 미국에게 당했던 미일수호통상조약과 거의 흡사하다. 즉 자기들이 당했던 것을 그대로 조선에게 행한 것.
이로써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간섭이나 방해없이 조선 시장을 완전 독점적으로 지배할 수 있게 되었고, 늦게나마 제국주의 열강의 대열에 끼어 대륙 침략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9. 기타


1876년 7월, 일본과 조선을 조일 수호 조규 부록과 조일 무역 규칙을 추가로 조인했고, 조선은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했다. 이 때 체결한 조일 수호 조규엔 일본 상인의 내륙 진출 범위 확대, 조선에서 일본 화폐와 조선 화폐의 혼용 등이 추가되었고, 조일 무역 규칙은 관세 철폐, 양곡 수출을 가능하게 하는 조항의 추가로, 조선의 전통 산업의 몰락과 방곡령의 배경이 되었다. 그리고 조선은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선 관세 조항을 집어넣는다.
조선왕국과 청나라의 관계를 속국 관계로 보는 관점에서는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이 '독립'했다고 보기도 한다. 물론 조선과 청이 종속국관계였다는 주장은 한국 사학계에서 지지받는 주장은 아니다. 또한 이것은 외국 영향력으로부터의 독립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의미의 독립과는 다르다.
일본인들은 이 강화도 조약의 내용을 핑계로 '조선은 원래 중국에 조공-책봉을 받던 주권이 없던 나라로, 일본 덕분에 독립하기 시작한 것.'이라는 논리를 펼치기도 한다. 일본 넷우익같은 답없는 극우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작 이런 자들은 무로마치 시대 일본이 중국()에 조공한 것 등등을 물으면 무지해서 궤변을 늘어놓는다.

10. 같이 보기




[1] 고종 13년[2] (음력 2월 3일)[3] 현 강화읍 북문길9번길 은혜교회 자리[4] 이전에는 쓰시마 상인만이 조선에서 왜관에서만 상업 활동을 할 수 있었다.[5] 채중묵, 제3장 개국 외교 조일 수호 조약[6] '만약 조선이 일본과 싸워서 질 경우 일본은 조선을 무력으로 먹을 것이고, 이렇게 되면 청나라가 위태로워진다. 그렇기에 조선이 일본과 조약을 맺도록 하는 게 안전하다.'[7] 서계 문제로 양국의 외교 관계가 사실상 끊어졌던 것을 말한다.[8] 사이고 다카모리, 이타가키 다이스케, 고토 쇼지로, 소에지마 다네오미 등[9] 에토 신페이(江藤新平). 일본 내에서 정한론과 관련한 정쟁에서 패한 후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은 인물이다. 한편으로는 일본 근대 사법제도의 성립에 큰 영향과 족적을 남긴 (일본의) 위인이기도 하다.[10] 말 그대로, '조약' 체결 회담장에 온 관료가 '조약' 이 뭔지 모른다는 소리다. 다만 이건 비난받을 만한 사항은 아닌데, 애초에 조약이라는 말 자체가 'pact' 나 'pactum' 을 일본에서 번역하면서 만들어낸 말이기 때문이다. 사회(society), 과학(science), 소설(novel), 행정(administration), 민족(nation) 등 오늘날 한국에서 아주 익숙하고 널리 쓰는 한자 단어 가운데에는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의 단어를 번역하면서 만들어내거나 이전까지는 다른 의미로 쓰이던 단어를 차용한 것이 많다. [11] 회오. '(잘못을) 뉘우치고 깨달음'이라는 뜻이다.[12] 어떤 행위를 하지 못하게 막아놓는 법령. 오늘날 우리말에 가깝게 한자를 풀어 말하자면 '''금(禁)'''지 명'''령(令)'''.[13] 맹자의 항산, 항심에 관한 이야기. 나무위키에 해당 내용을 검색하면 거리가 먼 넘겨주기 문서만 되어있으므로, 이에 대한 내용은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무항산무항심을 참조할 것을 권함.[14] 참조.[15] 이는 청나라의 개입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넣은 조항이다.[16] 물론 이런 불평등 조약이 치루어진 이유는 그냥 조선 측이 일본이 주장한 근대적 외교수사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불리해서 억지로 쓰게 된 것은 아니다.[17] 바다 건너 청나라아편전쟁 이후 영국에게 강제 개항을 당하며 여러 서구 열강들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게 되고 결국 청나라도 멸망할 때까지 서구 열강들에게 조리돌림당하다가 결국 혁명으로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