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우제츠 절멸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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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우제츠의 물품분류장(아래 수용소 구조를 나타낸 지도에서 17번 건물) 앞에서 촬영한 존더코만도들. 여타 절멸수용소들처럼 베우제츠도 내부 구조물을 찍은 사진자료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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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우제츠 추모지.
'''Obóz zagłady w Bełżcu''' (SS-Sonderkommando Belzec, Dienststelle Belzec der Waffen SS) (폴란드어)
'''Das Vernichtungslager Belzec''' (독일어)
'''Bełżec extermination camp''' (영어)
1. 개요
베우제츠 절멸수용소[1] 는 제2차 세계대전기 나치 독일의 라인하르트 작전에 따라 세운 절멸수용소 중 한 곳으로 르부프(현 우크라이나 리비우) 근교 베우제츠에 위치했다.[2] 나치의 폴란드 유대인 절멸 계획인 라인하르트 계획에 따라 지어진 첫번째 절멸수용소로서 1942년 3월부터 1942년 12월까지 단 9개월간 최소 43만 4천명의 유대인을 학살했으며 1943년 6월 완전히 해체되어 사라졌다. 베우제츠는 다른 절멸수용소들과 마찬가지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의 악명에 가려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트레블링카처럼 소련군이 당도하기 한참 전에 폐쇄되었기 때문에 증거가 거의 인멸되었고 남아있는 구조물이 없다. 그리고 베우제츠로 이송된 유대인 중 전후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존더코만도로 일하던 7명 뿐이었기 때문에 수용소에 대한 증언도 적을 수 밖에 없었고 베우제츠는 그 엄청난 희생자 수에도 불구하고 세간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비단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경향이 비슷한데, 증거가 철저히 인멸되었던 라인하르트 절멸수용소들은 종종 '잊혀진 죽음의 수용소(Forgotten Camp)'라 불린다.
- 절멸수용소는 노동수용소나 강제수용소와는 달라서 오로지 유대인 절멸을 목적으로 세워진 곳이었다. 절멸수용소 역시 넓게는 강제수용소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나치는 절멸수용소(Vernichtungslager), 또는 죽음의 수용소(Todeslager)라는 용어를 혼용해서 사용하며 행정적으로도 이들 절멸수용소와 기타 강제수용소를 구분했다. 또한 다른 강제수용소의 존재는 필사적으로 숨기거나 하지 않았지만 절멸수용소만큼은 그 존재를 일급 기밀로 다뤘고 적이 당도하기 전에 어떻게든 없애버리려 했다. 대부분의 경우 절멸수용소에선 '분류작업'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존재하더라도 소수만 노동가능인원으로 선발하던 곳이었다. 아우슈비츠의 경우,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노동 가능인원으로 분류되는 인원은 10~20%에 불과했던 데다 최종적으로 사망률이 85%에 이르렀기 때문에 절멸수용소에 훨씬 가깝다. 분류작업이 아예 없던 소비보르의 사망률은 99.98%, 베우제츠의 경우 99.989%, 트레블링카의 경우 99.993%, 헤움노의 경우 99.996%였다. 절멸수용소가 아닌 노동/강제수용소의 사망률은 15~59%였고, '노동을 통한 절멸'을 시행하던 곳으로서 유대인과 함께 정치범 등 '바람직하지 못한 자', 피지배 지역의 엘리트들, 전쟁포로 등도 주된 수감자였다.
- 아우슈비츠는 절멸수용소이면서도 노동수용소의 기능도 겸해서 잠시동안이라도 많은 사람을 수용하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수용소 규모가 크고 건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구조물을 모두 파기하는데 어려움이 많아서 나치는 소련군 당도 전까지 미처 증거물들을 다 파기하지 못했고(또한 아우슈비츠는 소련군이 당도하기 불과 1주일 전까지 학살을 저지르고 있었기에 증거 파기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아우슈비츠의 간부들은 전후 신속하게 조사를 받고 제거될 수 있었다. 그러나 순수 절멸수용소들은 유대인들이 들어오는 즉시 모두 학살했기 때문에 이런 구조물이 필요가 없었고 소수의 존더코만도와 주둔군만 수용할 시설, 그리고 학살장만 갖추었기 때문에 증거 파기가 무척 쉬웠던 데다 여유시간도 많았다.
- 말라 비틀어진 유대인의 시체가 가득 쌓인 수용소의 전경을 촬영한 비디오는 홀로코스트의 끔찍함을 보여줄 때 많이 활용되는 시각자료이다. 하지만 이 비디오들은 거의 전부 노동수용소에서 촬영된 것으로, 이 시체들은 죽을 때까지 노동하다 기아와 질병으로 결국 사망한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수용소 안에 시체가 쌓인 이유는 전쟁 막바지까지 운영되던 노동수용소가 미처 시체를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노동수용소보다 희생자 수가 월등히 많았던 절멸수용소들은 홀로코스트의 뼈대를 이루었음에도 나치가 증거를 집중적으로 파기한 탓에 남아있는 시각 자료가 거의 없다. 수용소의 참상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시각자료는 단 한가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서 존더코만도가 극비리에 촬영한, 나체로 가스실로 끌려가는 여성들, 시체를 화장하는 모습을 찍은 4장의 사진이 유일하다. 홀로코스트의 주된 방식은 죽을 때까지 일하다 말라 비틀어져 죽는 것이 아니라 수용소 도착 즉시 학살된 후 불태워져 그 재가 땅에 묻히거나 강물에 떠내려가는 것이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이 이 끔찍함을 시각자료 없이 상상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증거가 부족한 라인하르트 절멸수용소들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다.
2. 운영 역사
나치 치하의 유대인들은 바르바로사 작전 전까지 그 운명이 정해지지 않았다. 1933년 나치 집권 직후부터 나치 독일 치하의 유대인들은 탄압받아 왔지만 일부가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진 것을 제외하곤 직접적인 생명의 위협까지 받는 경우는 적었다. 나치는 반 유대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실현할 방법을 두고 고민했는데, 처음 나치는 점령지 내의 유대인들을 새로운 마을을 만들어 따로 격리시키거나[3] 마다가스카르 같은 오지에 대규모로 추방시키는 안을 선택하려 했다. 하지만 여러 행정적인 이유로 실행이 어렵게 되자 바르바로사 작전 직후부터 나치는 유대인을 절멸시키기로 가닥을 모았고 폴란드 이동의 지역에 아인자츠그루펜을 풀어 유대인 대량 학살을 지시했다. 그리고 기존 점령지에서도 학살이 계획되었다. 유대인을 직접 처형하던 아인자츠그루펜의 대원들이 정신적으로 심각하게 고통받자 기존 지역에서의 학살 방식은 가스처형을 주된 방식으로 한 산업화된 학살이 되었다. 먼저 직할령이었던 바르테란트 제국 대관구의 유대인 절멸을 목적으로 1941년 10월부터 헤움노 절멸수용소를 세우기 시작했고 10월 말엔 하인리히 힘러가 루블린의 총독부 SS 경찰 사령관 오딜로 글로보츠니크에게 절멸수용소 건설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루블린은 총독부 내의 약 200만에 달하는 유대인을 절멸하는 '라인하르트 작전'을 개시하고[4] 절멸수용소를 지을 자리를 물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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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란드에서 벌어진 홀로코스트. 확대 가능. 베우제츠 위치를 확인 바란다. 총독부는 지도에 총독부라 표시된 지역[5] 과 커즌 선(붉은 선) 너머 갈리치엔 구역을 합친 영역이다.[6] 하얀 두개골은 대규모 총살이 일어난 곳 중 몇 곳을 표시한 것이다.
베우제츠는 폴란드의 두 주요도시인 루블린과 르부프 중간에 있었다. 이 두 도시 주변은 폴란드 남부에서 가장 많은 유대인이 거주하던 지역이었고 베우제츠 마을엔 두 도시를 잇는 철도가 지나고 있었다. 따라서 나치에게 있어 베우제츠는 절멸수용소를 짓기 최적의 장소 중 하나였고 루블린 라인하르트 작전 사령부는 철도에서 불과 50m 떨어진 곳에 절멸수용소를 짓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베우제츠 절멸수용소는 1941년 11월 1일 착공되어 1942년 2월 말 세워졌다. SS 내에서도 사악하기로 악명높던 크리스티안 비르트가 12월부터 건설 지휘를 이어받았는데, 수용소 건설이 완료된 뒤 수용소장이 되어 8월까지 재직했다. 한편, 1940년 초 베우제츠엔 이미 노동수용소가 세워졌었는데, 이곳에 수용된 사람들은 유대인 뿐 아니라 근처의 폴란드인도 있었다. 이들은 소련과의 국경에 '오토' 라인'이라는 요새 건축에 투입되었고 1940년 10월 해산되었다. 이 수용소는 후에 지어질 절멸수용소와는 어떤 연관점도 없다.
가스학살의 아이디어는 이미 T-4계획때부터 시험적으로 제시되었는데, 가스 처형은 헤움노 절멸수용소가 지어질 당시 절멸수용소로서는 처음으로 적용되었다. 하지만 헤움노에서는 가스실을 짓지 않고 가스 밴만 이용했기 때문에 ''학살 효율''이 좋지 않았다. 베우제츠 건설 담당자이던 크리스티안 비르트는 헤움노의 사례를 ''개선''하여 절멸수용소 처음으로 가스실을 지었고 이 가스실을 샤워실로 위장하는 아이디어 역시 비르트에게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헤움노는 해당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하나의 완결된 절멸수용소라 하긴 어려웠고 기존의 시설물 여럿을 절멸수용소로 '구성'한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베우제츠는 처음으로 희생자 하차, 학살, 시체 처리가 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완결된 절멸수용소로서 이후에 지어지는 절멸수용소의 표본이 되었다.
처음 지은 가스실은 나무 판자로 이루어진 오두막 같은 건물로 3개의 작은 가스실이 있었다. 학살속도는 가스 밴만 이용하던 헤움노보단 확실히 빨라서 3개월동안 8만명을 학살했지만 밀려드는 유대인을 모두 학살하기엔 여전히 너무 작았고 1942년 6월 구 가스실을 허물고 6개의 가스실을 가진 콘크리트로 된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하루 최대 15,000명을 학살하던 베우제츠는 1942년 말까지 맡은 구역의 유대인들을 거의 모두 살해했고 12월 11일을 마지막으로 베우제츠에서의 학살은 끝났다.
3. 구조, 학살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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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 5월 학살 첫 페이스 때의 수용소 구조. 확대 가능
베우제츠의 학살은 두 페이스로 나누어지는데, 나무로 된 구 가스실을 이용했던 1942년 3월부터 6월까지, 그리고 신설 가스실과 함께 수용소 구조가 크게 변한 1942년 6월부터 12월까지로 나뉜다.
베우제츠에 화차에 실려 도착한 유대인들은 하차한 뒤 역 앞 광장에서 수용소장 비르트가 확성기를 들고 하는 다음과 같은 연설을 들었다. 여기에 희생자들을 속이기 위해 악단을 동원해 환영음악회를 열었다는 증언도 있다[7]
희생자들이 탈의를 하고 여성들이 머리카락을 자르고 나면 탈의실에서 밀폐된 통로를 따라 거의 바로 옆에 붙어 있던 '샤워실'로 향했다. 경비병들은 저항의 가능성이 보이는 희생자들을 따로 끌어냈고 수용소 외딴 곳으로 끌고 가 총살했다. 여기까진 첫번째 페이스와 두번째 페이스까지 거의 같았다. 다만 두번째 페이스에선 희생자들은 나체로 탈의실에서 가스실까지 '튜브'를 따라 걸어야 했고 이 튜브는 길이 100m의 직선 통로였다."여긴 베우제츠입니다. 당신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전문 기술을 쓸 수 있는 작업장으로 가기 전에 여기 잠시 머무를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일거리가 주어집니다. 당신들 주부들도 당신네 가족들을 먹이고 집을 깨끗하게 하는데 필요할 겁니다. 먼저, 저는 여러분들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을 빨리 보낼 수 있으니까요. 질서를 지키고 위생검사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기 전에 먼저 여러분들은 목욕을 하고 여러분들의 옷을 방역처리 해야 합니다. 여성들은 머리를 잘라야 합니다."# #
베우제츠는 라인하르트 작전에 따른 첫 절멸수용소였던 만큼 초기엔 ''학살 과정에 문제가 많았다.'' 위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첫 가스실은 나무로 이루어진 오두막이었는데, 이 시설은 희생자들에게 목욕시설로 속이는 데엔 좋았지만 밀폐가 제대로 되지 않아 처형 때마다 건물 주위로 연기가 가득했다고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매번 문을 닫은 뒤 문틈 앞에다 모래주머니를 쌓아 올렸다고 한다. 또한 각 가스실로 들어가는 호스가 막혀 건물 내 3개의 가스실 중 한 두개를 못 쓰는 경우도 있어 수용소에 도착한 유대인을 한번에 학살하지 못해 유대인을 실은 기차를 근처에 대기시키기도 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시도 빠짐없이 가동되었기 때문에 이 완벽하지 못한 가스실로도 3개월만에 8만명을 학살했다. 유대인들이 학살되면 존더코만도들은 가스실 반대편에서 시체를 꺼내 수레에 태웠고 좁은 철길을 따라 수레를 매장 구덩이로 가져간 뒤 시체들을 매장했다. 초기엔 적은 수의 구덩이에 지나치게 많은 시체를 넣었는데, 급속히 부패하는 시체에서 나온 액체로 인해 시체들이 떠올라 구덩이 밖으로 굴러 떨어지는 극도로 끔찍한 일도 일어났다고 한다.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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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 12월 두번째 페이스 때의 수용소 구조. 확대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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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용소에서 가장 핵심적인 시설인 베우제츠 신설 가스실. 나치는 이 시설에 어이가 없을 정도로 기만적인 위장을 쳐놓았다. 입구의 양 옆에는 제라늄 꽃을 꽃은 단지 두 개를 놓아두었으며, 시나고그처럼 외부엔 다윗의 별을 달았고 내부는 샤워실로 위장하였다. 외벽에는 '하켄홀트[9] ''자선'' 재단'이란 뜻의 'Stiftung Hackenholt(슈티프퉁 하켄홀트)'라는 문구를 적어 놓아 희생자들을 안심시켰다. 건물 북쪽엔 처형용 디젤 엔진이 있는 나무 오두막이 있었다.
4. 수용소장 크리스티안 비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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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 Wirth (1885. 11. 24 ~ 1944. 5. 26)'''
크리스티안 비르트는 대단히 잔혹하고 끔찍한 인물로 ''일'' 자체를 매우 즐긴 것으로 평가된다. 절멸수용소 간부들에 대한 재판 당시 그를 상관으로 두었던 전 간부들은 모두 이 인간의 끔찍함에 대해 증언했는데 수천명의 시체가 썩어가는 지옥도 앞에서도 유머를 터트리고 웃어대는 인간이었다고 한다. 그런 한편 부하들에게 대단히 가혹한 상관이기도 했다. 또한 학살효율을 어떻게든 끌어올리려 고심했던 인물로, 베우제츠 절멸수용소 건설을 지휘할 때 이후에 지어질 모든 절멸수용소들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가스실을 샤워실로 위장하는 방법, 그리고 절멸수용소들을 더 멀리 떨어진 노동 작업장으로 가는 중간에 들르는 기착지로 속이는 아이디어가 비르트에게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이 괴물이 수용소장으로 재직한 기간은 짧은 편으로 1942년 8월까지 5개월간만 소장으로 있었다. 그 이유는 나치가 이 괴물의 ''능력''에 감탄해서 수용소장 자리가 아니라 라인하르트 수용소들 전체의 검사관으로 영전했기 때문인데, 그는 라인하르트 수용소들이 폐쇄될 때까지 각 수용소를 돌아다니며 학살 시퀀스를 개선하고 ''조언''을 해주고 다녔다. 하지만 이 인간은 베우제츠의 학살 시퀀스, 더 나아가 모든 라인하르트 절멸수용소들의 학살과정을 완성해 준 괴물로 비르트의 뒤를 이은 책임자도 그가 만든 시스템을 따르기만 했다. 아우슈비츠의 수용소장도 루돌프 회스 뿐이 아니었지만 학살 과정을 완성했던 회스가 아우슈비츠의 소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크리스티안 비르트도 베우제츠를 아는 사람들에겐 베우제츠의 소장으로 인식된다. 나치는 이 악마를 어떻게 써야하는 지 잘 알아서 사악한 짓을 해야 할 때면 항상 이 인간을 썼는데, 라인하르트 작전 전이었던 T-4 작전때도 이 인간이 작전 전체의 검사관을 맡았다.
그의 끔찍한 성품에 대한 증언이 대단히 많은데, 그는 항상 채찍을 들고 다니면서 경비병, 부하 간부, 존더코만도들을 언제나 때리고 다녔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인 경비병이 처형용 엔진을 다루는데 애를 먹자 그의 얼굴을 채찍으로 후려치기도 했고 간부 회의때면 휘하 간부 누군가는 비르트에게 주먹으로 얼굴을 맞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수용소 간부들은 비르트를 "끔찍한 비르트", 또는 "야만인 비르트"라 불렀고 경비병들은 그를 슈투카라 불렀다고 한다. 증언이 여기서 그친다면 비르트는 그냥 쓰레기 상관 정도에 불과했겠지만 그는 수천명의 유대인이 눈앞에서 처형되는 와중에도, 불어터진 수천 구의 시체가 쌓인 그 자체로 지옥이 되어있는 상황에서도 웃으며 농담을 던지는 진정한 악마로서 같은 학살자였던 다른 수용소 간부들 사이에서도 엄청난 공포감을 주는 사악한 인간으로 악명높았다.
트레블링카의 소장이었던 프란츠 슈탕글의 증언에 따르면, 나치는 T-4계획을 저지르면서도 되도록 고상한 표현을 써 가며 이 계획을 위선적으로 포장했는데 슈탕글 역시도 그렇게 '교육'받았다. 그러나 비르트만은 그런 '교육'을 비웃으면서 T-4작전을 언제나 '필요없는 입을 없애는 일'이라고 칭했다고 했으며 대단히 역겨운 인간이었다고 했다. 1942년 8월 슈탕글이 트레블링카 수용소장으로 부임할때 트레블링카는 전임 수용소장의 ''무능''으로 시체 처리가 되지 않아 도처에 수천구의 시체가 쌓인 상황이었는데 비르트는 이 끔찍한 광경을 보면서 슈탕글에게 '이 쓰레기들을 어떻게 처리할까?'하고 물었다고 한다. 같은 학살자였음에도 학살 행위를 자신의 '일'로서 감정을 배제하고 처리하려 했던 다른 괴물들에게도 비르트는 정상이 아닌 존재로 보인 듯 하다.[10]
게르슈타인 보고서에도 그에 대한 무서운 이야기가 있다.
이 모든 설명을 종합할 때 크리스티안 비르트는 라인하르트 작전의 수행에 너무나도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가 라인하르트 작전에서 차지하던 비중은 트레블링카에서 근무했던 전 SS 하급분대지도자[12] 프란츠 수호멜(Franz Suchomel)[13] 이 1964년의 트레블링카 재판 당시 했던 증언으로 짐작할 수 있다.하켄홀트 하사(Unterscharfuhrer. SS 하급분대지도자)는 엔진을 움직이려 했으나 실패했다. 비르트 대위(Hauptmann)가 다가왔다. (''중략'') 나는 스탑워치를 보았는데 50분, 70분이 지나도 엔진은 가동되지 않았다. (''중략'') 분노한 비르트 대위가 하켄홀트 하사를 돕던 우크라이나인 경비병 얼굴에다 12, 13회 채찍질했다. 2시간 49분 후 디젤 엔진이 가동되었다. (''중략'') 28분 뒤 소수만이 살아 있었고 32분 뒤 모두 사망했다. 치의사들이 들어와 금니와 치관을 빼냈다. 그 시체들 한가운데에 비르트 대위가 서 있었다. 그는 물 만난 고기가 되어 희생자들의 금니와 귀금속으로 가득한 통을 들고서 이렇게 말했다. "이 황금의 무게를 느껴보시오! 이게 어제랑 그제 얻은 것들이오. 당신은 우리가 매일 얼마나 얻는지 모를 거요. 돈, 다이아몬드, 황금들 말이오. 직접 와서 보시오!" 게르슈타인 보고서[11]
라인하르트 계획이 종료된 후 1944년 그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토벌의 지휘관 중 한명으로서 트리에스테로 발령받았다. 부임한지 얼마되지 않아 휴가를 가던 중 슬로베니아에서 파르티잔의 습격을 받고 제거되었다.[14]'''''만약 누군가 크리스티안 비르트를 죽일 용기가 있었다면 라인하르트 작전은 진작에 엎어졌을 것이다. 베를린은 그토록 역겹고 사악한 에너지를 가진 인간을 더 이상 찾지 못했을 것이다.'''''
'''''If only someone had had the courage to kill Christian Wirth, then Aktion Reinhard would have collapsed. Berlin would not have found another man with such energy for evil and nastiness.'''''
5. 폐쇄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던 나치 입장에서 증거물인 절멸수용소는 되도록 빨리 없애야 했다. 라인하르트 절멸수용소들은 엄청난 속도로 폴란드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있었기 때문에 1943년 중순이 되면 폴란드에서의 ''절멸 ''이 어느정도 ''완료''되어 있었고 나치는 라인하르트 계획을 점진적으로 종료하기로 한다. 이에 따라 1943년 봄부터 가장 먼저 지어졌던 베우제츠를 먼저 폐쇄하기로 했고 약 4~5개월에 걸쳐 수용소 각 건물들을 완전히 해체해 없앴다. 그리고 나치군이 카틴 학살의 현장을 발견한 직후였기 때문에 그동안 땅에 매장했던 시신을 모두 꺼내어 소각했다. 매일같이 시체를 소각했기 때문에 일대는 연기로 가득했다고 하며 주변 민가의 창문에는 인간의 지방질이 들러붙었다고 한다. SS는 수용소 해체를 마친 300명의 존더코만도들을 독일의 노동수용소에서 일하게 될 것이라고 속인 뒤 소비보르 절멸수용소로 보내 처형했다.[15] 수용소가 해체된 자리에는 농가가 세워졌고 이곳에 우크라이나인 SS 한 명을 가족과 함께 상주하게 했다. 이 방식은 트레블링카와 소비보르 수용소가 해체된 뒤에도 사용되었다.
6. 희생자 수, 생존자
폴란드의 대표적인 광역권이던 크라쿠프, 르부프 인근의 유대인들이 거의 대부분 베우제츠로 이송되었다.[16] 따라서 베우제츠는 아우슈비츠, 트레블링카에 이어 희생자 수가 세번째로 큰 절멸수용소로 알려져 있다. 전쟁 직후부터 2000년대까지 베우제츠에서의 희생자 수는 50만~60만으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2000년 회플러 전보(Höfle Telegram)[17] 가 공개되면서 최소 수치는 더 낮아졌다. 회플러 전보에 의하면 1942년 12월 31일까지 베우제츠로 보내진 희생자 수는 434,508명인데,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에 따르면 1942년 12월 11일에 마지막으로 유대인들이 들어왔다고 하니 이 숫자는 베우제츠의 희생자 수로 가장 낮게 언급되는 수치이다. 하지만 이 수치에는 비 폴란드 유대인, 비유대인 숫자가 누락되어 있기에 보통 43만 4천명보다 좀 더 높은 수치를 인용한다. 현재 폴란드의 베우제츠 추모 박물관에서는 45만명을 인용하고 이스라엘 야드 바셈 박물관은 60만을 인용한다.
베우제츠에서는 소비보르와 트레블링카에서와 달리 대규모 봉기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8] 살아남은 사람들은 간헐적으로 탈출한 사람들 뿐이었다. 1942년 3월 여성들이 가스실에 들어가는 걸 거부하고 저항하면서 혼란이 일어난 틈을 타 두 명의 존더코만도가 탈출한 것을 시작으로 희생자들의 물품을 실은 화차에 숨어 탈출하거나 하수구에 숨었다가 탈출하는 등 약 50여명이 베우제츠에서 탈출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부분 추적당해 살해당하면서 전쟁 끝날 때까지 7명만이 살아남았다. 이들 중 폴란드 인민정부의 나치 전쟁범죄 수사 위원회에 자신들의 경험을 증언한 사람은 단 두명, 루돌프 레더와 하임 히르슈만이었다. 하지만 히르슈만은 전후 인민정부의 안보부서에서 일하다 반 공산주의 레지스탕스에 의해 암살되면서 베우제츠에 대해 증언하는 사람은 레더 한 사람만 남게 되었다. 트레블링카에서는 67명의 존더코만도가 살아남아 그나마 증인이 많았지만 베우제츠의 경우엔 증인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7. 전후
첫번째 수용소장 크리스티안 비르트는 상술했듯 전쟁 중에 제거되었고 두번째 수용소장 고틀리프 헤링(Gottlieb Hering)은 전후 1945년 10월 슈투트가르트 근처의 슈테틴 성[19] 에 마련된 임시 병원에서 알 수 없는 원인으로 병사했다. 나머지 간부들에 대한 재판이 뒤따라야 했겠지만 이 재판은 다른 라인하르트 절멸수용소 간부들의 경우처럼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다. 베우제츠의 경우, 증거가 거의 완벽히 인멸된데다 당시의 경험을 증언해 줄 생존자가 절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화장된 재를 묻은 엄청난 크기의 구덩이를 발굴했음에도 한동안 잊혀졌다. 현장을 보호하려는 노력도 없어서 화장 구덩이가 파헤쳐진 채로 그대로 방치되었는데, 베우제츠 마을의 선생님과 학생들이 이곳을 깔끔하게 정리하며 보존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50년대 말 동서독 정부가 나치 전범에 대한 본격적인 추적을 개시하면서 마침내 베우제츠는 세간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1963년 8월 서독 뮌헨 1구역 재판소에서 처음으로 그때까지 살아있던 간부들을 대상으로 베우제츠 재판이 열렸다. 재판은 1965년 1월까지 진행되었는데 놀랍게도 기소된 8명 중 7명이 상부의 압박에 의해 악행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무죄 훈방되었고 SS와 경찰 간 중재자였던 요제프 오베르하우저(Josef Oberhauser)만이 4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훈방된 7명 중 5명은 1965년 9월 시작된 소비보르 재판에도 기소되었는데, 5명 중 2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1960년대에 베우제츠의 터는 울타리로 둘러졌고 처음으로 추모비가 세워졌다. 하지만 여전히 자료가 부족해서 울타리는 베우제츠의 영역을 제대로 두르진 못했다. 게다가 베우제츠가 있던 자리에 상업 개발이 시작되기도 하는 등 터 일부가 훼손되었고 사람도 거의 찾지 않았다. 1960년대부터 제대로 관리되기 시작한 트레블링카 추모 박물관과 달리 베우제츠의 터는 공산정권 시절 내내 잊혀지고 방치되었다.
공산정권이 붕괴된 뒤 상황이 바뀌었는데 많은 폴란드인이 홀로코스트에 점차 관심을 가지면서 베우제츠의 위치도 알아내 개인적으로 방문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폴란드 정부에 수용소 터가 방치된 것에 대해 항의했고 1990년대 말에야 절멸수용소의 터를 정확히 파악하는 작업과 더불어 베우제츠의 상세에 대한 제대로 된 조사가 시작되었다. 전후 수용소 터에 세워진 건물들은 보상을 해준 뒤 철거했다. 2004년 이곳은 마이다네크 추모 박물관의 분관으로 지정되었고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관이 세워졌다. 홀로코스트 당시 베우제츠에서 가족을 잃은 미국의 유대인 생존자 마일즈 러맨(Miles Lerman)[20] 은 추모관 건립 당시 무려 5백만 달러를 기부해 폴란드 정부에 도움을 주었다. 이밖에도 어린 아이로서 르부프 게토에 살다 베우제츠에 끌려갈 뻔 했으나 '정의로운 폴란드인들(Polish Righteous)'이 숨겨준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캐나다의 유대인 생존자 아니타 엑스타인(Anita Ekstein)[21] 역시 거금을 기부해 주는 등 수많은 유대인 생존자들의 도움을 받아 추모관이 완공되었다. 현재 추모관의 입구에는 히브리어, 폴란드어, 영어로 이렇게 적혀있다.[22]
'''이곳은 50만명이 살해된 학살의 현장 베우제츠 절멸수용소이다.'''
'''학살을 목적으로 세워져 나치 독일에 의해 1942년 2월부터 12월까지'''
'''유럽의 유대인들이 야만적으로 살해되었다.'''
'''땅이여, 내 피를 숨기지 말고'''
'''그 피가 나를 위해 계속 부르짖게 해 다오.'''
'''욥기 1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