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만

 

[image]
변영만(卞榮晩, 1889년 음력 6월 23일 ~ 1954년).
대한민국의 법률가, 법조인, 한학자, 영문학자, 시인, 문필가.
1889년 경기도 부평군에서 태어났다. 10대 초반에 신채호와 함께 성균관에서 수학했다.
1905년 법관양성소(현 서울대학교 로스쿨)에 제4기로 입학하였다. 법관양성소를 다니면서 야간에는 보성전문학교(現 고려대학교) 법과에서 공부를 했고, 보전 법과를 우등으로 졸업하였다.
1906년 7월에는 재판소 서기가 되었다가 1906년 12월 검사채용시험과 판사전고시험에 합격했다. 1906년 12월 17일 목포구재판소 판사로 임명되어, 1909년 12월까지 근무하였다.
그 후 한국 정부의 사법권이 일본 통감부로 이양되자, ‘왜놈의 사냥개 노릇은 죽어도 못 한다’고 법복을 벗어던지고 상경하였다. 그때 일제에 타협하고 판사로 살았으면 평생을 호의호식할 수 있었을텐데, 그 편한 길을 마다하고 신의주로 가서 조선인 인권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초대 총리를 암살하자 그의 변호에 참여하려 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정근이 변호사회에 여비 50원을 보내고 변호사 한 사람을 추천하여 달라고 부탁하자, 거기에 선정되어 여순법원으로 출발하려 하였던 것. 그러나 안정근이 한국변호사는 변호 불허하므로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해 안중근 의사를 변호하지 못하게 되었다.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변호 불허의 결정에 대하여 여순고등법원에 청원까지 났음에도 허가는 안 되고, 일본인 2명의 관선변호사를 선정하여 재판을 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세계삼괴물'(1908)과 '이십세기의 참극 제국주의'등 일제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서적을 번안하거나 직접 써서 발간하기도 했다. 이들 책은 후일(1910) 일제가 치안에 방해가 된다는 명목으로 '황성신문' 등과 함께 금서로 묶어 발간과 배포를 금지시켰다.
1908년 1월에 만들어진 기호흥학회에 관여했으나, 그 학회는 일제에 의해 탄압을 받다가 1910년 해산되었다.
이후 1912년 중국으로 넘어가 오랫동안 머물면서 변호사로서 기자생활을 했다. 1914년 중국공사가 총독부 외무대신에게 보고한 기밀문건을 보면 '중국인이 경영하는 신문사에 입사해 배일(排日) 기사를 게재하고 각지의 불령선인(항일 인사)에게 배포하고 있다'고 그의 항일 활동을 그리고 있다.
1918년에 중국에서 돌아온 후, 1920년대에는 '동명', 1930년대에는 '동아일보' 등에 글을 남겼다. 전공인 법학뿐만 아니라 국문학, 중문학, 영문학, 한학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해방 후 반민특위 재판장을 했으나,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좌절을 맛보았다. 1946년에는 명륜전문학교(현 성균관대학교)장을 역임하였다. 원래 천성이 그래서였는지, 일제 치하에서의 법률의 왜곡과 법률가의 수난에 진절머리가 나서였는지, 학생들에게 법학을 가르치지 않고 한학과 영문학을 가르쳤다. 이후 1952년에는 사법부 법전편찬위원을 지냈다. 1954년 사망했다.
동생 변영태는 외무부 장관을 거쳐 국무총리로 활약했고, 또 다른 동생 변영로는 민족시인으로 명성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