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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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館'''
'''Seonggyungwan[1], Sungkyunkwa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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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명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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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배치도
1. 개요
3. 캠퍼스
3.1. 출입문
3.2. 제향 영역
3.3. 강학 영역
3.4. 관리 영역
3.5. 외부 부속 건물
4. 위패 배치도
4.1. 현재의 배치
4.2. 조선에서 모셔졌지만 해방 후 출향
4.3. 조선시대에 출향
5. 직제
5.1. 고려, 조선 초 성균관의 직제
5.2. 경국대전에 명문화된 성균관 직제
6. 입학자격
7. 석전대제
8. 반촌(泮村)
9. 유소(儒疏)
10. 개성 성균관
11. 기타
12. 유사기구
12.1. 한국
12.1.1. 국립
12.1.2. 사립
12.2. 외국
13. 관련 문서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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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전에서 명륜당 구역을 바라본 전경
성균관 홈페이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로 31 (명륜3가)에 위치한 조선의 고등교육기관이자 최고학부이다. 공자를 위시한 성현들이 모셔진 유교의 사당인 문묘도 함께 있다. 면적은 81,673㎡. 태학(太學), 문묘(文廟), 반궁(泮宮), 행단(杏壇)이라고도 한다. 1964년 11월 10일 사적 제143호로 지정되었으며 문화재로서의 공식 명칭은 '서울 문묘와 성균관(Seoul Confucian Shrine and Seonggyungwan National Confucian Academy)'이다.
'성균관'이라는 이름에서 '성균(成均)'은 성인재지미취(成人材之未就), 균풍속지부제(均風俗之不齊) 각각의 앞 글자들을 따온 것으로, '인재로서 아직 성취하지 못한 것을 이루고, 풍속으로써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고르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소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2007년)과 이를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2010년)로 인지도를 얻었지만, 사실 세계문화유산종묘와 비교하면 여러 모로 콩라인이다. 게다가 중국의 종묘는 문화대혁명으로 개박살나서 한국에 있는 것이 세계 유일이라지만, 성균관은 그와 비슷한 성격의 세계 문화 유산 공묘가 버젓이 중국에 존재한다. 물론 공묘가 성균관처럼 국가적 고등 교육을 수행하던 기관은 아니지만, 워낙 그 규모와 위상이 대단한지라 대개 성균관의 우위에 둔다.
매년 봄과 가을마다 유교의 성현들을 제사하는 석전대제가 거행됨에 따라 한국에서 유일하게 팔일무와 더불어 종묘제례악에 비견되는 문묘제례악이 정기 연주되는 장소이며, 이것은 중국으로 역수입되어 문화대혁명#s-5으로 실전되었던 공묘의 제공대전을 가까스로 재현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 성균관은 경학원, 명륜전문학교 등으로 격하되었고 1943년에는 그마저 폐교당했다. 1945년에 광복이 되면서 명륜전문학교가 부활하고[3] 경학원이 성균관으로 명칭을 회복했다.[4] 같은 해 11월 김창숙이 전국유림대회를 열어 전국에서 천여명의 대표 유림들이 성균관 명륜당에 모였으며, 김구가 위원장을 이승만이 고문을 역임했다.[5] 이 자리에서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의 수립을 위하여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었으며, 종전의 명륜전문학교 재단을 통합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설립하였다. 여기에 전국 유림들이 기부금을 모았으며 학봉 이석구가 재단법인 학린사의 거대한 토지재산을 희사하였다. 이후 1946년 9월 25일 문교부로부터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인가되었고, 김창숙이 성균관대 초대 총장 및 성균관장으로 취임했다. 1953년에는 종합대학 성균관대학교로 승격되었다.
1963년 사학법 시행 이후 학교법인 성균관대학과 재단법인 성균관으로 분리되었다.[6] 성균관대는 삼성그룹 창업주 호암 이병철 회장이 1965년부터 1977년까지 재단 이사장을 맡아 대학을 지원했고, 1979~1991년 봉명재단 시절을 거쳤다. 이후 1996년 삼성그룹이 다시 재단에 참여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7] 성균관은 유교 및 전통 문화 전문 교육 기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2. 역사



'''고려 시대'''
986년
태학 설립(성종)
992년
'''국자감으로 확장'''(성종)
1275년
국학으로 격하(충렬왕)
1298년
성균감으로 개칭(충렬왕)
1308년
성균관으로 격상(충선왕)
1356년
국자감으로 격상(공민왕)
1362년
'''성균관으로 개칭'''(공민왕)
'''조선 시대'''
1398년
한양으로 이전(태종)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선조)
1606년
종전 이후 중건(선조)
1887년
성균관의 교육 기능이 '''경학원으로 분리'''(고종)
1894년
경학원 폐지(고종)
'''일제강점기'''
1911년
남아있던 성균관이 '''경학원으로 개칭'''
1930년
경학원 부설 명륜학원 설립
1939년
명륜전문학교로 확장
1944년
명륜연성소로 개편
'''미군정기'''
1945년
명륜전문학교로 환원
1946년
'''성균관대학 발족'''(김창숙)
'''대한민국'''
1953년
성균관과 성균관대학 통합
1963년
문화 체육 관광부 소관의 교육 기관으로 독립

3. 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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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위에 올라와 있는 성균관 지도에 나와 있는 시설들은 2013년 5월 현재 제한적으로 관람 가능하다. 개방 시간은 오전 9시부터 하절기에는 5시 반까지, 동절기에는 4시 반까지.[8] 입장료는 따로 없기에 성균관대학교 학생들이 통학 지름길로도 사용하고 있다.[9]

3.1. 출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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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삼문(神三門)'''
문묘의 정문으로 대성전 남쪽에 위치하며 대성전과는 신도(神道)로 이어져 있다. 성현들의 넋이 드나든다고 해서 신문(神門)이라 불리는데 외삼문(外三門)이라고도 한다. 태조 7년(1398년)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7년(1604년)에 중건하였다.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평삼문(平三門)이고 좌우로는 문묘 외곽을 두르는 담장과 연결되어 있다. 정면의 돌계단을 통해 기단에 오르내리도록 되어 있다. 석전대제 때에만 좌우문이 개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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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말문(東末門)·서말문(西末門)'''
대성전 뜰의 동남쪽과 서남쪽 끄트머리에 위치한다. 태조 7년(1398년)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7년(1604년)에 중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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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삼문(東三門)'''
대성전 동쪽에 위치하며 대성전과는 어도(御道)로 이어져 있다. 임금이 성균관에 드나드는 문으로 어삼문(御三門)이라고도 한다.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평삼문(平三門)이고 남쪽으로 동무와 연결되어 있으며 북쪽으로는 동고와 연결되어 있다. 정면의 돌계단을 통해 기단에 오르내리도록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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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大門)'''
성균관 관람시 실질적으로 출입이 가능한 문으로 명륜당 뜰의 동남쪽 끄트머리에 위치한다. 명륜당 대문이라고도 한다. 정면 2칸에 측면 1칸의 평삼문(平三門)이고 정면의 돌계단을 통해 기단에 오르내리도록 되어 있다. 남쪽으로는 동고와 연결되어 있으며 북쪽으로는 동재와 연결되어 있다.
閒人勿入 / 볼일 없는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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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향문(前香門)·후향문(後香門)'''
성균관 관람시 실질적으로 출입이 가능한 문으로 전향문은 동재와 식당 사이에 위치하고, 후향문은 명륜당 서쪽에 위치한다. 전향문을 통해 성균관으로 들어가면 동재 앞을 지나서 정록청에 이르고, 후향문을 통해 성균관에서 나가면 비천당 앞에 다다른다.

3.2. 제향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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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전(大成殿)'''
공자를 비롯한 유교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문묘 행사를 거행하는 곳이다. 태조 7년(1398년)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5년(1602년)에 중건하였다. 현판은 한호(韓濠)가 썼다. 정면 5칸에 측면 4칸으로 정면 1칸을 퇴칸으로 개방하여 향사시의 동선으로 사용한다. 기단에는 양 측면으로 계단이 있고 또한 전면에도 동서로 계단이 있는데, 이 가운데 서쪽은 빈계(賓階)라 하여 신삼문에서 신도(神道)를 타고 들어온 성현들의 넋이 오르는 계단이고 동쪽은 조계(阼階)라 하여 향사시 제관들이 오르는 계단이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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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東廡)·서무(西廡)'''
중국 94현과 한국 18현의 위패를 모시던 공간으로 대성전 뜰의 동서에 위치한다. 태조 7년(1398년)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7년(1604년)에 중건하였다. 1949년 유림 대회의 결정으로 한국의 18현을 대성전으로 올리고 중국의 94현은 땅에 매안(埋安)하여 현재 동무와 서무는 비어 있다. 각각 정면 11칸에 측면 2칸으로 정면 1칸을 퇴칸으로 개방하여 향사시의 동선으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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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東庫)'''
동삼문과 대문 사이에 있는 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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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정비(廟庭碑)'''
문묘의 연혁을 기록한 비석으로 대성전 뜰 동남쪽에 위치한다. 태종 10년(1410년)에 처음 묘정비를 세웠는데, 비문은 왕명을 받들어 변계량(卞季良)이 지었다. 중종 6년(1511년)에는 비각을 세웠다. 임진왜란 때 훼손되자 인조 4년(1626년)에 다시 묘정비를 세웠는데, 비문은 이정귀(李廷龜)가 짓고 이홍주(李弘胄)가 썼으며 제액은 김상용(金尙容)이 썼다. 비석은 커다란 귀부(龜趺)가 받치고 있으며, 높이는 187㎝에 해서체로 쓰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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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고(祭器庫)'''
문묘의 향사에 사용되는 제기를 보관하는 건물로 서무의 서쪽에 위치한다. 태조 7년(1398년)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5년(1602년)에 중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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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복청(守僕廳)'''
문묘의 관리를 담당하던 남자 하인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제기고 북쪽에 위치한다. 재학당(載學堂)이나 근관직청(芹官直廳)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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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청(典祀廳)'''
문묘의 향사에 사용되는 제수를 준비하는 건물로 수복청 북쪽에 위치한다. 성종 3년(1472년)에 창건하였고, 1986년에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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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주(庖廚)'''
문묘의 향사에 사용되는 제물을 검사하고 손질하던 곳으로 전사청의 북쪽에 위치한다. 태종 7년(1407년)에 창건하였고, 1975년에 복원하였다.

3.3. 강학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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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당(明倫堂)'''
성균관 유생들의 교육을 위한 강당이자 과거 시험장으로 대성전 북쪽에 위치한다. 태조 7년(1398년)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9년(1606년)에 중건하였다. 현판은 명의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썼다. 본당은 정면 3칸에 측면 3칸으로 맞배지붕이며, 좌우 익사는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팔작 지붕이다. 기단에는 본당 앞으로 월대가 있고 좌우 익사 및 월대 정면과 좌우의 돌계단을 통해 기단에 오르내리도록 되어 있다. 그 독특한 생김으로 말미암아 사실상 성균관의 마스코트와도 같은 건물로, 천 원짜리 지폐 앞에도 그려져 있다. 내부에 걸린 현판 중에는 박문약례(博文約禮)라는 현판이 있는데, 이것은 공자의 77세손으로서 제32대 연성공(衍聖公)이자 초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을 지낸 공덕성(孔德成, 1920년 2월 23일 ~ 2008년 10월 28일)의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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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재(東齋)·서재(西齋)'''
성균관 유생들이 기숙하던 건물로 명륜당 뜰의 동서에 위치한다. 태조 7년(1398년)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9년(1606년)에 중건하였다. 각각 정면 20칸에 측면 3칸으로 동재는 동쪽을, 서재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정면 1칸을 퇴칸으로 개방하여 마루를 설치하고 본칸에는 온돌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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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 은행나무'''
행단(杏壇)[11]을 상징하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로 명륜당 뜰에 위치한다. 중종 14년(1519년)에 대사성을 지낸 윤탁(尹卓)이 심었으며, 나이는 500살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는 26m이고 가슴 높이의 둘레는 12m에 달하는 웅장한 나무로 발달이 왕성하고 그 중에서도 동쪽의 나무는 6.25 전쟁으로 포탄을 맞아 가지가 일곱으로 갈라졌지만 가까스로 상처가 회복되었다. 천연 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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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각(尊經閣)'''
성균관의 장서를 보관하던 도서관으로 명륜당 북쪽에 위치한다. 소장된 장서는 각종 유교 경전과 역사서로 한정되었고, 불교 및 도교와 여타 기술 서적은 소장하지 않았다. 성종 7년(1476년)에 창건되어 중중 9년(1514년)의 화재와 임진왜란으로 두 차례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13년(1621년)에 중건하였다. 1924년 경성 제국 대학이 설립되자 대부분의 장서들이 경성 제국 대학으로 강제 이관되고, 남은 장서들도 6.25 전쟁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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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일각(六一閣)'''
군자가 갖추어야 할 육예(六藝) 가운데 하나인 궁술을 익히고 이와 관련된 대사례(大射禮)에 쓰이는 활과 화살을 보관하던 건물로 존경각 동쪽에 위치한다. 영조 19년(1743년)에 영조가 직접 대사례를 행하고 이를 기념하여 건립하였고, 본래는 향관청의 서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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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食堂)'''
성균관 유생들이 식사하던 건물로 동재 동쪽에 위치한다. 진사식당(進士食堂)이라고도 한다. 태조 7년(1398년)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인조 4년(1626년)에 중건하였다. 전체 33칸의 건물이 안뜰을 중심으로 장방형의 口자를 이루고 있는데, 이 가운데 주방이 10칸이고 식당이 20칸이며 나머지 3칸은 각기 북쪽의 출입문과 창고를 이루고 있다. 개방시간에도 출입이 통제되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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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복청(婢僕廳)'''
성균관 유생들의 식사를 담당하던 여자 하인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진사식당 북동쪽에 위치한다. 서벽고(西壁庫)라고도 한다. 정조 대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3.4. 관리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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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정록청(正錄廳)'''
성균관의 관원들이 근무하던 사무실로 명륜당 서쪽에 위치한다. 태조 7년(1398년)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인조 4년(1626년)에 중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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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서리청(書吏廳)'''
성균관의 관원들이 근무하던 사무실로 정록청 동북쪽에 위치한다. 정조 대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14칸의 건물이 안뜰을 중심으로 冂자를 이루고 있는데, 본당은 정면 5칸에 측면 2칸이고 서측 익사가 1칸에 동측 익사가 3칸이다. 개방 시간에도 출입이 통제되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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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직방(直房)'''
성균관의 관원들이 쉬어가던 대기실로 정록청 뜰의 동쪽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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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고직사(庫直舍)'''
정록청에 드나드는 문간채로 정록청 남쪽에 위치한다. 고문(庫門)이라고도 한다. 전체 4칸 가운데 문간을 중심으로 서쪽 1칸은 사무실로, 동쪽 2칸은 창고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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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향관청(享官廳)'''
문묘의 향사 때 제관들이 숙식하고 제사에 쓰이는 향과 축문을 봉안하는 건물로 육일각과 정록청의 북쪽에 위치한다. 성종 4년(1473년)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효종 4년(1653년)에 중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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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동월랑(東月廊)·서월랑(西月廊)'''
문묘의 향사 때 집사들이 숙식하고 평소에는 성균관의 유생들이 기숙하던 건물로 향관청 뜰의 동서에 위치한다. 성종 4년(1473년)에 창건하였고, 1986년에 복원하였다.

3.5. 외부 부속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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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비(蕩平碑)'''
영조 18년(1742년)에 성균관의 유생들이 당쟁에서 벗어나 참다운 인재가 되기를 권장하기 위해 영조의 어필을 새겨서 세운 것으로 어서비(御書碑)라고도 불린다. 본래 반수(泮水)를 건너는 향석교 뒤에 세워져 있었으나 1980년에 성균관대학교 정문 자리에 있던 대성문(大成門)과 가깝다는 이유로 보다 남쪽인 지금의 자리에 이전되었다.
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不周 寔小人之私心 / 두루 사귀되 가리지 않음은 곧 군자의 공심(公心)이고, 가려 사귀되 두루치 않음은 바로 소인의 사심(私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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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비(下馬碑)'''
궁궐과 종묘 사직 등 엄숙한 장소의 입구에 세워서 이곳을 지나는 자는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알리기 위해 비석이다. 본래 성균관 일대 반촌(泮村)의 어귀에 세워져 있었으나 현재는 이전되어 탕평비각의 왼쪽에 세워져 있다. 비석 뒷면에는 정덕 14년(1519년)에 세웠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大小人員 過此者 皆下馬 / 크건 작건 이곳을 지나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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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련대(下輦臺)'''
석전대제나 알성시 등이 거행되어 임금이 친히 성균관에 행차할 때 타고 온 가마(輦)를 내려놓는 곳이다. 동삼문 맞은편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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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천당(丕闡堂)'''
강당이나 과거 시험장으로 쓰이던 건물로 명륜당 서북쪽에 위치한다. 현종 5년(1664년)에 도성 안의 사찰인 인수원(仁壽院)과 자수원(慈壽院)을 헐면서 나온 자재를 가져다가 성균관에 비천당과 함께 그 서남쪽으로 벽입재(闢入齋)와 일양재(一兩齋)를 세웠는데, 그 이름은 송시열이 큰 도를 크게 밝힌다(丕闡大猷)는 주희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벽입재와 일양재는 모두 구한말에 파괴되었고, 비천당은 해방 후 한동안 성균관대학의 대학 본부로 사용되다가 6.25 전쟁으로 소실되어 1988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성균관대의 부지 부족으로 인해 비천당 앞 마당을 주차장으로 쓴 적이 있었는데, 도올 김용옥 선생이 이를 보고서 매우 한탄했다고 한다. 이후 주차장으로 쓰지 않고 공터로 남겨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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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회관(儒林會館)'''
하련대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0년 건립되었다. 2층에는 한국 유림의 총수인 성균관장의 집무실과 성균관 유도회 총본부, 여성 유도회, 전례 연구 위원회, 석전 보존회 등의 사무실이 있으며 지하 2층에는 석전 교육원이 있다. 특히 주말이면 성균관과 함께 결혼식장으로 많이 이용되는데 3층에는 예식장인 성균관 파티움, 1층과 지하에는 연회장인 진사각이 있다. 1996년 서태지와 아이들 은퇴 기자회견도 이 곳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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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성균관대학교 정문'''
성균관과 성균관대학교의 공통 정문. 과거에는 대성문(大成門)이 있었다. 이곳에서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성균관대학교 캠퍼스로, 유림 회관 뒷편 주차장으로 돌아가면 동삼문을 통해 성균관으로 들어갈 수 있다. 정문 바로 뒤 왼쪽에는 탕평비와 하마비가 위치하고 있다. 성균관대학교의 건물이지만 동시에 문화재청의 관리를 받는다. 2014년 정문 공사를 통해 사라짐...
서울 특별시 산하의 서울 역사 박물관의 조사에 따르면 대성문은 경희궁개양문으로 확인되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경희궁 전각이 매각되면서 서본원사, 경성방송국을 떠돌다 성균관대학교 정문으로 사용되었고, 1970년대 신라호텔로 매각되었다고 구전되나 지금은 그 행방을 찾을 수 없다.

4. 위패 배치도



4.1. 현재의 배치


 
 
 
'''大 대
成 성
至 지
聖 성
文 문
宣 선
王 왕

孔 공
夫 부
子 자'''
 
 
 
 
 
 
 
 
 
文昌侯 崔致遠
문창후 최치원
<color=#373a3c> 鄆公 冉耕
운공 염경
 
 
<color=#373a3c> 費公 閔損
비공 민손
弘儒侯 薛聰
홍유후 설총
文忠公 鄭夢周
문충공 정몽주
<color=#373a3c> 齊公 宰予
제공 재여
'''郕 성
國 국
宗 종
聖 성
公 공

曾 증
子 자'''
'''兗 연
國 국
復 복
聖 성
公 공

顔 안
子 자'''
<color=#373a3c> 薛公 冉雍
설공 염옹
文成公 安裕
문성공 안유
文獻公 鄭汝昌
문헌공 정여창
<color=#373a3c> 徐公 冉求
서공 염구
<color=#373a3c> 黎公 端木賜
여공 단목사
文敬公 金宏弼
문경공 김굉필
文元公 李彦迪
문원공 이언적
<color=#373a3c> 吳公 言偃
오공 언언
<color=#373a3c> 衛公 仲由
위공 중유
文正公 趙光祖
문정공 조광조
文正公 金麟厚
문정공 김인후
<color=#373a3c> 潁川侯 顓孫師
영천후 전손사[12]
 
<color=#373a3c> 魏公 卜商
위공 복상
文純公 李滉
문순공 이황
文簡公 成渾
문간공 성혼
 
'''鄒 추
國 국
亞 아
聖 성
公 공

孟 맹
子 자'''
 
'''沂 기
國 국
述 술
聖 성
公 공

子 자
思 사
子 자
'''
 
文成公 李珥
문성공 이이
文烈公 趙憲
문열공 조헌
<color=#373a3c><colbgcolor=#bfff9e> 豫國公 程顥
예국공 정호
 
<color=#373a3c><colbgcolor=#bfff9e> 道國公 周惇頤
도국공 주돈이
文元公 金長生
문원공 김장생
文正公 宋時烈
문정공 송시열
<color=#373a3c> 新安伯 邵雍
신안백 소옹
 
<color=#373a3c> 洛國公 程頤
낙국공 정이
文敬公 金集
문경공 김집
文純公 朴世采
문순공 박세채
<color=#373a3c> 徽國公 朱熹
휘국공 주희
 
<color=#373a3c> 郿伯 張載
미백 장재
文正公 宋浚吉
문정공 송준길
현재의 위패는 조선시대의 배치를 따른 것은 아니다. 조선과 중국의 배치도 다른데 중국의 경우 조선의 인물을 빼고도 청나라 때 156명의 인물을 동서무에 모실 정도로 많은 인물을 모셨다. 조선에서는 사문난적으로 여겨지는 육구연이나 왕수인을 모시기도 하였고, 선조 때 명나라 사신의 보고에 따라 조선의 유학자들이 한탄을 하기도...
이와는 별도로 지방의 문묘에서는 고려의 최충과 최유선을 맘대로 모시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중종대 이후 도통이 확립되며 신라 설총, 최치원 고려 안향 정몽주로 전조(前朝)의 배향 대상자는 정리된다.
선조 때 한바탕 중국 역대 제현의 정리가 이루어져 대성전에는 5성과 공문십철, 송조육현이 모셔지고, 동서무에 중국 역대제현 94위와 동국 18현의 112위가 모셔진다.
  • 공문십철(孔門十哲)
    • 민손 자건
    • 염경 백우
    • 중궁 염옹
    • 자아 재여
    • 단목사 자공
    • 염구 자유
    • 중유 자로
    • 언언 자유
    • 복상 자하
    • 전손사 자장: 원래 이 자리에는 안회가 들어가야 하지만 안회가 '자' 칭호를 받고 5성에 들어가는 바람에 자리를 대신 메웠다. 원래 십철이 아니었기 때문에 홀로 공작 대신 후작을 받았다.

4.2. 조선에서 모셔졌지만 해방 후 출향


해방 후 심산 김창숙선생이 성균관을 경학원에서 고쳐 다시 열면서 대한민국의 자주성을 강조하여 동국 18현을 대성전으로 승향하고 동서무에 모셔진 94위의 중국 역대 제현의 위패는 매안하기로 한다. 그 외에 오성의 아버지를 모시는 별도의 사당인 계성사를 철거하는데, 계성사는 본래 조선 숙종 때 세워진 것으로, 이때 동서무에 있던 안자의 아버지 안무유, 증자의 아버지 증점, 공자의 아들이자 자사의 아버지인 공리의 위패를 옮겼다. 계성사가 철거되면서 결론적으로 총 95명의 위패가 출향되게 된다.
동서무에 모셔진 인물은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거론된 공자의 제자가 대부분이며 그 외에 송나라 성리학의 확립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준 인물들이 다수. 저평가된 한당 유학자들은 많이 없으며 구양수도 오르지 못했다.
  • 계성사
제국공(齊國公) 숙량흘((叔梁紇)
곡부후(曲阜侯) 안무유(顔無類)
내무후(萊蕪侯) 증점(曾點)
사수후(泗水侯) 공리(公鯉)
주국공(邾國公) 맹손씨(孟孫氏)
  • 동서 양무
동 1 금향후(金鄕侯) 담대멸명(澹臺滅明) 자우(子羽)
서 1 단보후(單父侯) 복부제(宓不齊) 자천(子賤)
동 2 임성후(任城侯) 원헌(原憲)
서 2 고밀후(高密侯) 공야장(公冶長) 자장(子長)
동 3 여양후(汝陽侯) 남궁괄(南宮适)
서 3 북해후(北海侯) 공석애(公晳哀) 계침(季沈)
동 4 수창후(須昌侯) 상구(商瞿) 자목(子木)
서 4 공성후(共城侯) 고시(高柴) 자고(子羔)
동 5 평여후(平輿侯) 칠조개(漆雕開) 자약(子若)
서 5 수양후(睢陽侯) 사마이(司馬犁) 자우(子牛)
동 6 익도후(益都侯) 번수(樊須) 자지(子遲)
서 6 평음후(平陰侯) 유약(有若) 자약(子若)
동 7 거야후(鉅野侯) 공서적(公西赤) 자화(子華)
서 7 동아후(東阿侯) 무마시(巫馬施) 자기(子期)
동 8 천승후(千乘侯) 양전(梁鱣) 숙어(叔魚)
서 8 양곡후(陽穀侯) 안신(顔辛) 자류(子柳)
동 9 임기후(臨沂侯) 염유(冉孺) 자로(子魯)
서 9 상채후(上蔡侯) 조술(曹䘏) 자순(子循)
동 10 목양후(沐陽侯) 백건(伯虔) 자탁(子拆)
서 10 지강후(枝江侯) 공손룡(公孫龍) 자석(子石)
동 11 제성후(諸城侯) 염계(冉季) 자산(子産)
서 11 풍익후(馮翊侯) 진상(秦商) 자남(子南)
동 12 복양후(濮陽侯) 칠조치(漆雕哆) 자염(子斂)
서 12 뇌택후(雷澤侯) 안고(顔高) 자교(子驕)
동 13 고완후(高宛侯) 칠조도부(漆雕徒父) 자교(子交)
서 13 상규후(上邽侯) 양사적(壤駟赤) 자도(子徒)
동 14 추평후(鄒平侯) 상택(商澤) 자수(子秀)
서 14 성기후(成紀侯) 석작촉(石作蜀) 자명(子明)
동 15 당양후(當陽侯) 임부제(任不齊) 자선(子選)
서 15 거평후(鉅平侯) 공하수(公何首) 자상(子桑)
동 16 모평후(牟平侯) 공량유(公良孺) 자정(子正)
서 16 교동후(膠東侯) 후처(后處) 자지(子之)
동 17 신식후(新息侯) 진염(秦冉) 자개(子開)
서 17 제양후(濟陽侯) 해용점(奚用蒧) 자철(子哲)
동 18 양보후(梁父侯) 공견정(公肩定) 자중(子中)
서 18 부잠후(富箴侯) 안조(顔祖) 자양(子襄)
동 19 요성후(聊城侯) 교단(鄡單) 자우(子宇)
서 19 부양후(滏陽侯) 구정강(勾井疆)
동 20 기향후(祁鄕侯) 한보흑(罕父黑) 자소(子素)
서 20 견성후(甄城侯) 진조(秦祖) 자비(子丕)
동 21 즉묵후(卽墨侯) 공조구자(公祖勾茲)
서 21 염차후(厭次侯) 영기(榮旂) 자기(子旗)
동 22 무성후(武成侯) 현성(縣成) 자횡(子橫)
서 22 남화후(南華侯) 좌인영(左人郢) 행인(行人)
동 23 견원후(汧源侯) 연급(燕伋) 자사(子思)
서 23 구산후(朐山侯) 정국(鄭國) 자도(子徒)
동 24 완구후(宛句侯) 안지복(顔之僕) 자숙(子叔)
서 24 낙평후(樂平侯) 원항(原亢) 자적(子籍)
동 25 건성후(建成侯) 악해(樂欬) 자성(子聲)
서 25 조성후(胙成侯) 염결(廉潔) 자용(子庸)
동 26 당읍후(堂邑侯) 안하(顔何)
서 26 박평후(博平侯) 숙중회(叔仲會) 자기(子期)
동 27 임려후(林慮侯) 적흑(狄黑)
서 27 고당후(高堂侯) 규손(邽巽) 자흠(子欽)
동 28 운성후(鄆成侯) 공충(孔忠) 자무(子茂)
서 28 임구후(臨胊侯) 공서여여(公西輿如)
동 29 서성후(徐城侯) 공서점(公西蒧) 자상(子尙)
서 29 내황후(內黃侯) 거완(蘧瑗) 백옥(伯玉)
동 30 임복후(臨濮侯) 시지상(施之常) 자항(子恒)
서 30 장산후(長山侯) 임방(林放) 자선(子仙)
동 31 화정후(華亭侯) 진비(秦非) 자지(子之)
서 31 남돈후(南頓侯) 진항(陳亢) 자금(子禽)
동 32 문등후(文登侯) 신장(申棖) 자속(子續)
서 32 탕평후(湯平侯) 금장(琴張) 자개(子開)
동 33 제음후(濟陰侯) 안쾌(顔噲) 자성(子聲)
서 33 단창후(慱昌侯) 보숙승(步叔乘) 자거(子車)
동 34 중도백(中都伯) 좌구명(左丘明)
서 34 임치백(臨淄伯) 공양고(公羊高)
동 35 수양백(睢陽伯) 곡량적(穀梁赤) 이상 주(周) 69인
서 35 승씨백(乘氏伯) 복승(伏勝)
동 36 내무백(萊蕪伯) 고당륭(高堂隆)
서 36 고성백(考城伯) 대성(戴聖) 형덕(兄德)
동 37 낙수백(樂壽伯) 모장(毛萇)
서 37 강도백(江都伯) 동중서(董仲舒)
동 38 팽성백(彭城伯) 유향(劉向)
서 38 곡부백(曲阜伯) 공안백(孔安伯)
동 39 중모백(中牟伯) 정중(鄭衆)
서 39 구씨백(緱氏伯) 두사춘(杜士春)
동 40 양향후(良鄕侯) 노식(盧植) 자간(子幹)
서 40 고밀백(高密伯) 현(鄭玄) 강성(康成)
동 41 영양백(榮陽伯) 복건(服虔) 자신(子愼) 이상 한(漢) 12인
서 41 신야백(新野伯) 범녕(范甯) 이상 진(晉) 1인
동 42 창려백(昌黎伯) 한유(韓愈) 이상 당(唐) 1인
서 42 온국공(溫國公) 사마광(司馬光)
동 43 장락백(長樂伯) 양시(楊時)
서 43 문질공(文質公) 나종언(羅從彦)
동 44 건녕공(建寧公) 호안국(胡安國)
서 44 문정공(文靖公) 이동(李侗)
동 45 화양백(華陽伯) 장식(張栻) 경부(敬夫)
서 45 개봉백(開封伯) 여조겸(呂祖謙)
동 46 문숙공(文肅公) 황간(黃幹)
서 46 숭안백(崇安伯) 채침(蔡沈)
동 47 포성백(浦城伯) 진덕수(眞德秀) 이상 송(宋) 10인
서 47 위국공(魏國公) 허형(許衡) 이상 원(元) 1인

4.3. 조선시대에 출향


선조 당시 명나라의 사신이 명나라의 문묘를 조사한 후 자체적인 판단에 의해 호안국 등을 새로 배향하는 대신 자격을 갖추지 않거나 중복되는 인물들을 가려내어 출향하였다. 특히 촉한정통론에 입각하여 위진의 유학자들을 거의 내쳤다. 또 순자인 순황을 오랫동안 모시다가 내친 것도 특징
치천후(淄川侯) 신당(申黨): 문등후 신장과 동일인물
난릉백(蘭陵伯) 순황(荀況): 법가에 오염
수장후(壽長侯) 공백료(公伯寮): 자로를 모함
사공(司空) 왕숙(王肅): 공자가어를 위조하고 정현을 모함
사도(司徒) 두예(杜預)
기양백(岐陽伯) 가규(賈逵)
부풍백(扶風伯) 마융(馬融)
임성백(任城伯) 하휴(何休)
언사백(偃師伯) 왕필(王弼)
임천백(臨川伯) 오징(吳澄): 송의 신하로 원에 출사하여 절의를 꺾음

5. 직제



5.1. 고려, 조선 초 성균관의 직제


품계
관직
정원
비고
정1품



종1품



정2품



종2품



정3품
대사성(大司成)
1명

종3품
좨주(祭酒)[13]
1명

정4품
악정(樂正)[14]
2명

종4품



정5품
직강(直講)
1명

종5품



정6품
전부(典簿)[15]
1명

종6품



정7품
박사(博士)
2명

종7품
순유박사(諄諭博士)
2인

정8품
진덕박사(進德博士)
2명

종8품



정9품
학정(學正)
2명

학록(學錄)
2명

종9품
직학(直學)
2명

학유(學諭)
4명

품계외
서리(書吏)
2명


5.2. 경국대전에 명문화된 성균관 직제


품계
관직
정원
비고
정1품



종1품



정2품
지사(知事)
1명
겸관
종2품
동지사(同知事)
2명
겸관
정3품
대사성(大司成)
1명

종3품
사성((司成)
2명

정4품
사예(司藝)
3명

종4품



정5품
직강(直講)
4명

종5품



정6품
전적(典籍)
13명

종6품



정7품
박사(博士)
3명

종7품



정8품
학정(學正)
3명

종8품



정9품
학록(學錄)
3명

종9품
학유(學諭)
3명

품계외
서리(書吏)
10명


6. 입학자격


국립대였던 만큼 성균관 유생은 특혜도 많았다. 우선 오늘날로 치면 등록금이니 하는거 모두 없이[16] 성균관에서 수업받는건 반촌에서 하숙생활 하지 않는 이상에야 모두 무료였고 성균관 유생만을 위한 과거 시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랬던만큼 성균관 유생이 되는 조건은 아주 까다로워서 일단 성균관 유생이 되려면 적어도 소과 합격은 해야 가능했다. 즉 진사나 생원은 달아야 노려볼 수 있는 자리였다는 것. 여기에 저 특혜를 얻으려면 연간 300일의 출석을 달성해야 했다.[17] 여기에 툭하면 시험으로 매일 치는 시험 매달 치는 시험 등등 줄줄이 시험이었다.

7. 석전대제


매년 봄과 가을에 대성전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성현들에 대한 제사가 거행되는데, 1953년부터 음력 2월과 8월의 첫 정일(丁日)에 이를 거행하다가 다시 2007년부터는 공부자서거일(5월 11일)과 공부자탄강일(9월 28일)에 거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석전(釋尊), 석채(釋菜), 정제(丁祭), 상정제(上丁祭)라고도 한다. 1986년 11월 1일 중요 무형 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으며 문화재로서의 공식 명칭은 '석전대제(Ritual for Confucius)'이다.

8. 반촌(泮村)


성균관 인근에는 성균관에서 일하는 사역인들이 모여 사는 반촌(泮村)이라는 동네가 있었다. 이 사역인들 중에는 성균관에서 쓰는 고기들을 다루는 백정들도 많이 있었다. 최악의 천시를 받았던 다른 백정들과는 달리 이 반촌의 백정들은 성현들의 영혼과 성균관 유생들에게 고기를 바친다는 자부심이 매우 강했고, 성균관 출신의 고위층 인사들과도 학생시절부터 안면을 트고 지내며 생긴 연줄이 있어서 한성부 관리들조차 함부로 다루지 못하는 자들이었다.[18] 이 때문에 반촌은 일종의 치외법권 지대로 바뀌었으며[19] 한성부의 다른 지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특이한 상점과 물건들이 존재하며 성균관 유생들이 유흥을 즐기는 이색적인 번화가로 자리잡았다. 쉽게 말해서 조선 시대의 대학로신촌과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이 반촌의 위치는 현대의 대학로와도 상당 부분 면적이 겹치는 편이다. 심지어 반촌민들의 말투도 서울 내 다른 지역 사람들과도 판이하게 달랐다.
반촌의 기원은 고려 말 안향이 성균관에 기부한 노비들이라고 하며 그들의 후예들이 조선 성립 이후에도 한양으로 이주하면서 반촌을 형성하였다고 한다.[20] 따라서 반촌 사람들은 자신을 안향의 노비들의 후예라고 믿었으며, 안향의 후손이 성균관에 들어오면 '옛 주인의 후손이 오셨다'고 하면서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9. 유소(儒疏)



성균관은 권위가 세서 세자가 나이가 차면 성균관 입학례를 하였다.[21] 이렇게 파워가 센 성균관 유생들은 학생운동처럼 정치적인 활동도 벌였는데 이때 '공관' 이라는 것은 어마무시한 영향력을 끼쳤다. 대개 정책에 대한 반대운동을 벌이면 먼저 정책을 반대한다는 뜻의 집단 상소인 유소를 벌였고 그래도 안 되면 단식투쟁을 벌였다. 그래도 안 먹혔을 때 쓰이던 최후의 스킬이 공관인데, 아예 성균관 유생들이 수업 받기를 거부하는 일을 말한다. 단순히 수업 거부니 유생들 손해 아닌가 싶겠지만 실상은 공관쯤 되면 왕도 골치 아픈 상황에 이른다. 국가에서 직접 선발해 대우해주며 키우려는 인재들이 일제히 수업을 거부하는 것도 거북할 일일 뿐더러 특히 수업일수 300일을 채워야 하는 사정 상 공관이 길어지면 그만큼 성균관 유생들은 수업일수를 채우기 어려워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들은 특별 시험을 못본다. 즉 나라에서 직접 선발하고 키운 인재들이 등용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 이렇게 되면 여론도 슬슬 도대체 얼마나 잘못했길래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냐고 하고 대간에 대신들까지 유생들의 편을 들테니 난감한 건 당연, 여기에 지방에 있는 유생들까지 이에 자극받아 연명상소니 만인소니 올려댈 수준까지 가면 상소 폭탄까지 받아야 한다(...). 게다가 여러 안건들도 상당수는 성균관을 비롯한 많은 유생들이 올리고 이를 대간이 받아 주청하고 다시 대신이 받아 주청하는 방식이니 성균관 유생들은 언론의 역할도 했다고 볼 수 있다.

10. 개성 성균관



[image]
북한 개성에도 성균관이 있다. 그러나 한양 천도 후 최고학부로서의 기능을 잃어 향교로 격하되고 '성균관'이라는 이름만 유지되었다. 2013년에 성균관이 포함된 개성역사유적지구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1. 기타


  • 을사오적이완용박제순이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적이 있다. 위의 직제를 보다시피 대사성은 지금의 성균관대학교 총장에 대응되는 자리이다. 다만, 고종 대에는 성균관이 그렇게 권력이 있는 기구가 아니었기에 대사성 직함은 그냥 명예직이자 한직이나 다름없었다. 고종의 재위 기간 중 거쳐간 대사성이 수백 명은 되는 걸 보면...
  • 충무공전2: 난세영웅편에서 조선군 건물로 등장한다. 대본영을 대군본영으로 확장하는데 필요한 테크 건물이라고 한다.

12. 유사기구



12.1. 한국



12.1.1. 국립



12.1.2. 사립



12.2. 외국



13. 관련 문서



[1] 현행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에 의한 것으로 문화재로서의 로마자 명칭이다.[2] 유림 단체인 성균관유도회와 성균관대학교의 로마자 명칭이다.[3] 군정법령 제6호 참조[4] 군정법령 제15호 제1조 경성제국대학의 명칭은 자에 차를 서울대학이라 변경함 제2조 공자묘경학원의 명칭은 자에 차를 성균관이라 변경함 제3조 본령은 1945년 10월 16일 야반에 효력을 생함[5] 출처: 자유신문 1945년 12월 10일자 "성균관대학 재단을 촉성, 1000여 대표 참가로 전국유림대회"(원본)[6] 1963년 12월 13일 기사 라이브러리 [7] 한양원 민족종교협의회 회장의 말에 따르면 60년대 당시 삼성은 전통을 가진 성균관대를 탐냈다고 한다. 하루는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회장의 형 이병갑 사장이 심산 김창숙 선생을 찾아와서는 봉투를 하나 건넸다. 심산은 비서인 윤종(윤봉길 의사의 아들)에게 ‘봉투에 뭐가 들었는지 보라’ 하더니 ‘5억원 수표가 들어 있다’고 하자 침을 뱉어 던지며, ‘이러면 내가 성균관대를 어서 가져가라고 내놓을 줄 알았느냐’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기사 이 내용이 기사화 되자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연락이 와 만났는데, ‘그런 일이 정말 있었느냐’며 ‘제가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못한 일(성균관대 인수)을 해냈네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2013년 이건희 회장이 쓰러지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기사[8] 과거에는 아예 문을 걸어잠그고 일반인의 출입을 막은 적도 많았다. 2005년까지는 성균관 유생들의 대를 잇는 의미에서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 학생들의 성균관 동재, 서재를 기숙사로서 사용하고 있었으나 2005년 1월 종로구청의 민간인 퇴거 명령 이후로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9] 유림회관 옆으로 들어와서 성균관을 통과하면 국제관 앞으로 바로 나온다.[10] 처음에는 대성인(大聖人)을 모신 곳이라 해서 대성전(大聖殿)이라 했는데, 중국 사신이 공자는 온갖 학문을 집대성(集大成)하였으므로 대성전(大成殿)이라 부르는 것이 맞다 해 바뀌었다.[11] 과거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 단을 만들어두고 그곳에서 제자들을 양성했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단어.이 단어 때문에 은행나무가 유독 학교 같은 교육 시설에 많이 심긴 이유가 되었다.[12] 본래 공자가 언급한 사과십철四科十哲의 구성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홀로 후작이다.[13] 태종 1년(1401년) 사성(司成)으로 개정[14] 태종 1년(1401년) 사예(司藝)로 개정[15] 태종 1년(1401년) 주부(注簿)로 개정[16] 대신 속수례(束脩禮)라 해서 제자가 스승한테 배움을 받고자 하니 가르침을 달라는 의미에서 약소하게나마 물건을 줬다고 한다. 보통은 , 무명천, 술안주를 줬다고.[17] 현대 기준으로는 휴가 혹은 방학 없는 주 6일제에 가깝다. 상당히 빡빡한 수업일정인 셈. 출석은 매일 점심 급식(?)을 받은 기준으로 했는데 나중에는 점심, 저녁 두번으로 바뀌었다.[18] 렛츠고 시간탐험대 성균관 편에서는 반인(반촌 거주 노비)들이 끽소리도 못하고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것으로 나오지만, 딱히 틀린 고증은 아니다. 반인들이야 정부 고관대작들이나 성균관의 강사나 유생들의 빽으로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데, 그 빽 노릇해주는 사람들이 직접 갑질을 하고 있으니 뭐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물론 이들도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던 건 아니라서, 잘못을 저지른 유생들을 선배 유생들이 벌할 때는 이들이 주로 나섰다. 렛츠고 시간탐헝대에서도 이 부분이 아주 잘 고증이 되었다.[19] 이는 중세 유럽의 대학들에서도 비슷하게 발생한 현상이다. 심지어 유럽에서는 교황, 황제, 왕, 유력 제후 등이 아예 대학에 자치권을 주기도 했다.[20]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반촌 사람들이 개성 사투리를 쓰는 것으로 표현했다. 영묘조가 조선 건국 겨우 50여 년 즈음의 일이니 꽤나 적절한 고증.[21] 다르게 보면 그만큼 성균관이 국가적으로 띄워주는 기관이라는 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