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成均館'''
'''Seonggyungwan[1] , Sungkyunkwan[2] '''
1. 개요
성균관 홈페이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로 31 (명륜3가)에 위치한 조선의 고등교육기관이자 최고학부이다. 공자를 위시한 성현들이 모셔진 유교의 사당인 문묘도 함께 있다. 면적은 81,673㎡. 태학(太學), 문묘(文廟), 반궁(泮宮), 행단(杏壇)이라고도 한다. 1964년 11월 10일 사적 제143호로 지정되었으며 문화재로서의 공식 명칭은 '서울 문묘와 성균관(Seoul Confucian Shrine and Seonggyungwan National Confucian Academy)'이다.
'성균관'이라는 이름에서 '성균(成均)'은 성인재지미취(成人材之未就), 균풍속지부제(均風俗之不齊) 각각의 앞 글자들을 따온 것으로, '인재로서 아직 성취하지 못한 것을 이루고, 풍속으로써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고르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소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2007년)과 이를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2010년)로 인지도를 얻었지만, 사실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와 비교하면 여러 모로 콩라인이다. 게다가 중국의 종묘는 문화대혁명으로 개박살나서 한국에 있는 것이 세계 유일이라지만, 성균관은 그와 비슷한 성격의 세계 문화 유산 공묘가 버젓이 중국에 존재한다. 물론 공묘가 성균관처럼 국가적 고등 교육을 수행하던 기관은 아니지만, 워낙 그 규모와 위상이 대단한지라 대개 성균관의 우위에 둔다.
매년 봄과 가을마다 유교의 성현들을 제사하는 석전대제가 거행됨에 따라 한국에서 유일하게 팔일무와 더불어 종묘제례악에 비견되는 문묘제례악이 정기 연주되는 장소이며, 이것은 중국으로 역수입되어 문화대혁명#s-5으로 실전되었던 공묘의 제공대전을 가까스로 재현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 성균관은 경학원, 명륜전문학교 등으로 격하되었고 1943년에는 그마저 폐교당했다. 1945년에 광복이 되면서 명륜전문학교가 부활하고[3] 경학원이 성균관으로 명칭을 회복했다.[4] 같은 해 11월 김창숙이 전국유림대회를 열어 전국에서 천여명의 대표 유림들이 성균관 명륜당에 모였으며, 김구가 위원장을 이승만이 고문을 역임했다.[5] 이 자리에서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의 수립을 위하여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었으며, 종전의 명륜전문학교 재단을 통합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설립하였다. 여기에 전국 유림들이 기부금을 모았으며 학봉 이석구가 재단법인 학린사의 거대한 토지재산을 희사하였다. 이후 1946년 9월 25일 문교부로부터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인가되었고, 김창숙이 성균관대 초대 총장 및 성균관장으로 취임했다. 1953년에는 종합대학 성균관대학교로 승격되었다.
1963년 사학법 시행 이후 학교법인 성균관대학과 재단법인 성균관으로 분리되었다.[6] 성균관대는 삼성그룹 창업주 호암 이병철 회장이 1965년부터 1977년까지 재단 이사장을 맡아 대학을 지원했고, 1979~1991년 봉명재단 시절을 거쳤다. 이후 1996년 삼성그룹이 다시 재단에 참여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7] 성균관은 유교 및 전통 문화 전문 교육 기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2. 역사
3. 캠퍼스
[image]
참고로 위에 올라와 있는 성균관 지도에 나와 있는 시설들은 2013년 5월 현재 제한적으로 관람 가능하다. 개방 시간은 오전 9시부터 하절기에는 5시 반까지, 동절기에는 4시 반까지.[8] 입장료는 따로 없기에 성균관대학교 학생들이 통학 지름길로도 사용하고 있다.[9]
3.1. 출입문
3.2. 제향 영역
3.3. 강학 영역
3.4. 관리 영역
3.5. 외부 부속 건물
4. 위패 배치도
4.1. 현재의 배치
현재의 위패는 조선시대의 배치를 따른 것은 아니다. 조선과 중국의 배치도 다른데 중국의 경우 조선의 인물을 빼고도 청나라 때 156명의 인물을 동서무에 모실 정도로 많은 인물을 모셨다. 조선에서는 사문난적으로 여겨지는 육구연이나 왕수인을 모시기도 하였고, 선조 때 명나라 사신의 보고에 따라 조선의 유학자들이 한탄을 하기도...
이와는 별도로 지방의 문묘에서는 고려의 최충과 최유선을 맘대로 모시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중종대 이후 도통이 확립되며 신라 설총, 최치원 고려 안향 정몽주로 전조(前朝)의 배향 대상자는 정리된다.
선조 때 한바탕 중국 역대 제현의 정리가 이루어져 대성전에는 5성과 공문십철, 송조육현이 모셔지고, 동서무에 중국 역대제현 94위와 동국 18현의 112위가 모셔진다.
- 공문십철(孔門十哲)
4.2. 조선에서 모셔졌지만 해방 후 출향
해방 후 심산 김창숙선생이 성균관을 경학원에서 고쳐 다시 열면서 대한민국의 자주성을 강조하여 동국 18현을 대성전으로 승향하고 동서무에 모셔진 94위의 중국 역대 제현의 위패는 매안하기로 한다. 그 외에 오성의 아버지를 모시는 별도의 사당인 계성사를 철거하는데, 계성사는 본래 조선 숙종 때 세워진 것으로, 이때 동서무에 있던 안자의 아버지 안무유, 증자의 아버지 증점, 공자의 아들이자 자사의 아버지인 공리의 위패를 옮겼다. 계성사가 철거되면서 결론적으로 총 95명의 위패가 출향되게 된다.
동서무에 모셔진 인물은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거론된 공자의 제자가 대부분이며 그 외에 송나라 성리학의 확립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준 인물들이 다수. 저평가된 한당 유학자들은 많이 없으며 구양수도 오르지 못했다.
- 계성사
제국공(齊國公) 숙량흘((叔梁紇)
곡부후(曲阜侯) 안무유(顔無類)
내무후(萊蕪侯) 증점(曾點)
사수후(泗水侯) 공리(公鯉)
주국공(邾國公) 맹손씨(孟孫氏)
곡부후(曲阜侯) 안무유(顔無類)
내무후(萊蕪侯) 증점(曾點)
사수후(泗水侯) 공리(公鯉)
주국공(邾國公) 맹손씨(孟孫氏)
- 동서 양무
동 1 금향후(金鄕侯) 담대멸명(澹臺滅明) 자우(子羽)
서 1 단보후(單父侯) 복부제(宓不齊) 자천(子賤)
동 2 임성후(任城侯) 원헌(原憲)
서 2 고밀후(高密侯) 공야장(公冶長) 자장(子長)
동 3 여양후(汝陽侯) 남궁괄(南宮适)
서 3 북해후(北海侯) 공석애(公晳哀) 계침(季沈)
동 4 수창후(須昌侯) 상구(商瞿) 자목(子木)
서 4 공성후(共城侯) 고시(高柴) 자고(子羔)
동 5 평여후(平輿侯) 칠조개(漆雕開) 자약(子若)
서 5 수양후(睢陽侯) 사마이(司馬犁) 자우(子牛)
동 6 익도후(益都侯) 번수(樊須) 자지(子遲)
서 6 평음후(平陰侯) 유약(有若) 자약(子若)
동 7 거야후(鉅野侯) 공서적(公西赤) 자화(子華)
서 7 동아후(東阿侯) 무마시(巫馬施) 자기(子期)
동 8 천승후(千乘侯) 양전(梁鱣) 숙어(叔魚)
서 8 양곡후(陽穀侯) 안신(顔辛) 자류(子柳)
동 9 임기후(臨沂侯) 염유(冉孺) 자로(子魯)
서 9 상채후(上蔡侯) 조술(曹䘏) 자순(子循)
동 10 목양후(沐陽侯) 백건(伯虔) 자탁(子拆)
서 10 지강후(枝江侯) 공손룡(公孫龍) 자석(子石)
동 11 제성후(諸城侯) 염계(冉季) 자산(子産)
서 11 풍익후(馮翊侯) 진상(秦商) 자남(子南)
동 12 복양후(濮陽侯) 칠조치(漆雕哆) 자염(子斂)
서 12 뇌택후(雷澤侯) 안고(顔高) 자교(子驕)
동 13 고완후(高宛侯) 칠조도부(漆雕徒父) 자교(子交)
서 13 상규후(上邽侯) 양사적(壤駟赤) 자도(子徒)
동 14 추평후(鄒平侯) 상택(商澤) 자수(子秀)
서 14 성기후(成紀侯) 석작촉(石作蜀) 자명(子明)
동 15 당양후(當陽侯) 임부제(任不齊) 자선(子選)
서 15 거평후(鉅平侯) 공하수(公何首) 자상(子桑)
동 16 모평후(牟平侯) 공량유(公良孺) 자정(子正)
서 16 교동후(膠東侯) 후처(后處) 자지(子之)
동 17 신식후(新息侯) 진염(秦冉) 자개(子開)
서 17 제양후(濟陽侯) 해용점(奚用蒧) 자철(子哲)
동 18 양보후(梁父侯) 공견정(公肩定) 자중(子中)
서 18 부잠후(富箴侯) 안조(顔祖) 자양(子襄)
동 19 요성후(聊城侯) 교단(鄡單) 자우(子宇)
서 19 부양후(滏陽侯) 구정강(勾井疆)
동 20 기향후(祁鄕侯) 한보흑(罕父黑) 자소(子素)
서 20 견성후(甄城侯) 진조(秦祖) 자비(子丕)
동 21 즉묵후(卽墨侯) 공조구자(公祖勾茲)
서 21 염차후(厭次侯) 영기(榮旂) 자기(子旗)
동 22 무성후(武成侯) 현성(縣成) 자횡(子橫)
서 22 남화후(南華侯) 좌인영(左人郢) 행인(行人)
동 23 견원후(汧源侯) 연급(燕伋) 자사(子思)
서 23 구산후(朐山侯) 정국(鄭國) 자도(子徒)
동 24 완구후(宛句侯) 안지복(顔之僕) 자숙(子叔)
서 24 낙평후(樂平侯) 원항(原亢) 자적(子籍)
동 25 건성후(建成侯) 악해(樂欬) 자성(子聲)
서 25 조성후(胙成侯) 염결(廉潔) 자용(子庸)
동 26 당읍후(堂邑侯) 안하(顔何)
서 26 박평후(博平侯) 숙중회(叔仲會) 자기(子期)
동 27 임려후(林慮侯) 적흑(狄黑)
서 27 고당후(高堂侯) 규손(邽巽) 자흠(子欽)
동 28 운성후(鄆成侯) 공충(孔忠) 자무(子茂)
서 28 임구후(臨胊侯) 공서여여(公西輿如)
동 29 서성후(徐城侯) 공서점(公西蒧) 자상(子尙)
서 29 내황후(內黃侯) 거완(蘧瑗) 백옥(伯玉)
동 30 임복후(臨濮侯) 시지상(施之常) 자항(子恒)
서 30 장산후(長山侯) 임방(林放) 자선(子仙)
동 31 화정후(華亭侯) 진비(秦非) 자지(子之)
서 31 남돈후(南頓侯) 진항(陳亢) 자금(子禽)
동 32 문등후(文登侯) 신장(申棖) 자속(子續)
서 32 탕평후(湯平侯) 금장(琴張) 자개(子開)
동 33 제음후(濟陰侯) 안쾌(顔噲) 자성(子聲)
서 33 단창후(慱昌侯) 보숙승(步叔乘) 자거(子車)
동 34 중도백(中都伯) 좌구명(左丘明)
서 34 임치백(臨淄伯) 공양고(公羊高)
동 35 수양백(睢陽伯) 곡량적(穀梁赤) 이상 주(周) 69인
서 35 승씨백(乘氏伯) 복승(伏勝)
동 36 내무백(萊蕪伯) 고당륭(高堂隆)
서 36 고성백(考城伯) 대성(戴聖) 형덕(兄德)
동 37 낙수백(樂壽伯) 모장(毛萇)
서 37 강도백(江都伯) 동중서(董仲舒)
동 38 팽성백(彭城伯) 유향(劉向)
서 38 곡부백(曲阜伯) 공안백(孔安伯)
동 39 중모백(中牟伯) 정중(鄭衆)
서 39 구씨백(緱氏伯) 두사춘(杜士春)
동 40 양향후(良鄕侯) 노식(盧植) 자간(子幹)
서 40 고밀백(高密伯) 정현(鄭玄) 강성(康成)
동 41 영양백(榮陽伯) 복건(服虔) 자신(子愼) 이상 한(漢) 12인
서 41 신야백(新野伯) 범녕(范甯) 이상 진(晉) 1인
동 42 창려백(昌黎伯) 한유(韓愈) 이상 당(唐) 1인
서 42 온국공(溫國公) 사마광(司馬光)
동 43 장락백(長樂伯) 양시(楊時)
서 43 문질공(文質公) 나종언(羅從彦)
동 44 건녕공(建寧公) 호안국(胡安國)
서 44 문정공(文靖公) 이동(李侗)
동 45 화양백(華陽伯) 장식(張栻) 경부(敬夫)
서 45 개봉백(開封伯) 여조겸(呂祖謙)
동 46 문숙공(文肅公) 황간(黃幹)
서 46 숭안백(崇安伯) 채침(蔡沈)
동 47 포성백(浦城伯) 진덕수(眞德秀) 이상 송(宋) 10인
서 47 위국공(魏國公) 허형(許衡) 이상 원(元) 1인
서 1 단보후(單父侯) 복부제(宓不齊) 자천(子賤)
동 2 임성후(任城侯) 원헌(原憲)
서 2 고밀후(高密侯) 공야장(公冶長) 자장(子長)
동 3 여양후(汝陽侯) 남궁괄(南宮适)
서 3 북해후(北海侯) 공석애(公晳哀) 계침(季沈)
동 4 수창후(須昌侯) 상구(商瞿) 자목(子木)
서 4 공성후(共城侯) 고시(高柴) 자고(子羔)
동 5 평여후(平輿侯) 칠조개(漆雕開) 자약(子若)
서 5 수양후(睢陽侯) 사마이(司馬犁) 자우(子牛)
동 6 익도후(益都侯) 번수(樊須) 자지(子遲)
서 6 평음후(平陰侯) 유약(有若) 자약(子若)
동 7 거야후(鉅野侯) 공서적(公西赤) 자화(子華)
서 7 동아후(東阿侯) 무마시(巫馬施) 자기(子期)
동 8 천승후(千乘侯) 양전(梁鱣) 숙어(叔魚)
서 8 양곡후(陽穀侯) 안신(顔辛) 자류(子柳)
동 9 임기후(臨沂侯) 염유(冉孺) 자로(子魯)
서 9 상채후(上蔡侯) 조술(曹䘏) 자순(子循)
동 10 목양후(沐陽侯) 백건(伯虔) 자탁(子拆)
서 10 지강후(枝江侯) 공손룡(公孫龍) 자석(子石)
동 11 제성후(諸城侯) 염계(冉季) 자산(子産)
서 11 풍익후(馮翊侯) 진상(秦商) 자남(子南)
동 12 복양후(濮陽侯) 칠조치(漆雕哆) 자염(子斂)
서 12 뇌택후(雷澤侯) 안고(顔高) 자교(子驕)
동 13 고완후(高宛侯) 칠조도부(漆雕徒父) 자교(子交)
서 13 상규후(上邽侯) 양사적(壤駟赤) 자도(子徒)
동 14 추평후(鄒平侯) 상택(商澤) 자수(子秀)
서 14 성기후(成紀侯) 석작촉(石作蜀) 자명(子明)
동 15 당양후(當陽侯) 임부제(任不齊) 자선(子選)
서 15 거평후(鉅平侯) 공하수(公何首) 자상(子桑)
동 16 모평후(牟平侯) 공량유(公良孺) 자정(子正)
서 16 교동후(膠東侯) 후처(后處) 자지(子之)
동 17 신식후(新息侯) 진염(秦冉) 자개(子開)
서 17 제양후(濟陽侯) 해용점(奚用蒧) 자철(子哲)
동 18 양보후(梁父侯) 공견정(公肩定) 자중(子中)
서 18 부잠후(富箴侯) 안조(顔祖) 자양(子襄)
동 19 요성후(聊城侯) 교단(鄡單) 자우(子宇)
서 19 부양후(滏陽侯) 구정강(勾井疆)
동 20 기향후(祁鄕侯) 한보흑(罕父黑) 자소(子素)
서 20 견성후(甄城侯) 진조(秦祖) 자비(子丕)
동 21 즉묵후(卽墨侯) 공조구자(公祖勾茲)
서 21 염차후(厭次侯) 영기(榮旂) 자기(子旗)
동 22 무성후(武成侯) 현성(縣成) 자횡(子橫)
서 22 남화후(南華侯) 좌인영(左人郢) 행인(行人)
동 23 견원후(汧源侯) 연급(燕伋) 자사(子思)
서 23 구산후(朐山侯) 정국(鄭國) 자도(子徒)
동 24 완구후(宛句侯) 안지복(顔之僕) 자숙(子叔)
서 24 낙평후(樂平侯) 원항(原亢) 자적(子籍)
동 25 건성후(建成侯) 악해(樂欬) 자성(子聲)
서 25 조성후(胙成侯) 염결(廉潔) 자용(子庸)
동 26 당읍후(堂邑侯) 안하(顔何)
서 26 박평후(博平侯) 숙중회(叔仲會) 자기(子期)
동 27 임려후(林慮侯) 적흑(狄黑)
서 27 고당후(高堂侯) 규손(邽巽) 자흠(子欽)
동 28 운성후(鄆成侯) 공충(孔忠) 자무(子茂)
서 28 임구후(臨胊侯) 공서여여(公西輿如)
동 29 서성후(徐城侯) 공서점(公西蒧) 자상(子尙)
서 29 내황후(內黃侯) 거완(蘧瑗) 백옥(伯玉)
동 30 임복후(臨濮侯) 시지상(施之常) 자항(子恒)
서 30 장산후(長山侯) 임방(林放) 자선(子仙)
동 31 화정후(華亭侯) 진비(秦非) 자지(子之)
서 31 남돈후(南頓侯) 진항(陳亢) 자금(子禽)
동 32 문등후(文登侯) 신장(申棖) 자속(子續)
서 32 탕평후(湯平侯) 금장(琴張) 자개(子開)
동 33 제음후(濟陰侯) 안쾌(顔噲) 자성(子聲)
서 33 단창후(慱昌侯) 보숙승(步叔乘) 자거(子車)
동 34 중도백(中都伯) 좌구명(左丘明)
서 34 임치백(臨淄伯) 공양고(公羊高)
동 35 수양백(睢陽伯) 곡량적(穀梁赤) 이상 주(周) 69인
서 35 승씨백(乘氏伯) 복승(伏勝)
동 36 내무백(萊蕪伯) 고당륭(高堂隆)
서 36 고성백(考城伯) 대성(戴聖) 형덕(兄德)
동 37 낙수백(樂壽伯) 모장(毛萇)
서 37 강도백(江都伯) 동중서(董仲舒)
동 38 팽성백(彭城伯) 유향(劉向)
서 38 곡부백(曲阜伯) 공안백(孔安伯)
동 39 중모백(中牟伯) 정중(鄭衆)
서 39 구씨백(緱氏伯) 두사춘(杜士春)
동 40 양향후(良鄕侯) 노식(盧植) 자간(子幹)
서 40 고밀백(高密伯) 정현(鄭玄) 강성(康成)
동 41 영양백(榮陽伯) 복건(服虔) 자신(子愼) 이상 한(漢) 12인
서 41 신야백(新野伯) 범녕(范甯) 이상 진(晉) 1인
동 42 창려백(昌黎伯) 한유(韓愈) 이상 당(唐) 1인
서 42 온국공(溫國公) 사마광(司馬光)
동 43 장락백(長樂伯) 양시(楊時)
서 43 문질공(文質公) 나종언(羅從彦)
동 44 건녕공(建寧公) 호안국(胡安國)
서 44 문정공(文靖公) 이동(李侗)
동 45 화양백(華陽伯) 장식(張栻) 경부(敬夫)
서 45 개봉백(開封伯) 여조겸(呂祖謙)
동 46 문숙공(文肅公) 황간(黃幹)
서 46 숭안백(崇安伯) 채침(蔡沈)
동 47 포성백(浦城伯) 진덕수(眞德秀) 이상 송(宋) 10인
서 47 위국공(魏國公) 허형(許衡) 이상 원(元) 1인
4.3. 조선시대에 출향
선조 당시 명나라의 사신이 명나라의 문묘를 조사한 후 자체적인 판단에 의해 호안국 등을 새로 배향하는 대신 자격을 갖추지 않거나 중복되는 인물들을 가려내어 출향하였다. 특히 촉한정통론에 입각하여 위진의 유학자들을 거의 내쳤다. 또 순자인 순황을 오랫동안 모시다가 내친 것도 특징
치천후(淄川侯) 신당(申黨): 문등후 신장과 동일인물
난릉백(蘭陵伯) 순황(荀況): 법가에 오염
수장후(壽長侯) 공백료(公伯寮): 자로를 모함
사공(司空) 왕숙(王肅): 공자가어를 위조하고 정현을 모함
사도(司徒) 두예(杜預)
기양백(岐陽伯) 가규(賈逵)
부풍백(扶風伯) 마융(馬融)
임성백(任城伯) 하휴(何休)
언사백(偃師伯) 왕필(王弼)
임천백(臨川伯) 오징(吳澄): 송의 신하로 원에 출사하여 절의를 꺾음
5. 직제
5.1. 고려, 조선 초 성균관의 직제
5.2. 경국대전에 명문화된 성균관 직제
6. 입학자격
국립대였던 만큼 성균관 유생은 특혜도 많았다. 우선 오늘날로 치면 등록금이니 하는거 모두 없이[16] 성균관에서 수업받는건 반촌에서 하숙생활 하지 않는 이상에야 모두 무료였고 성균관 유생만을 위한 과거 시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랬던만큼 성균관 유생이 되는 조건은 아주 까다로워서 일단 성균관 유생이 되려면 적어도 소과 합격은 해야 가능했다. 즉 진사나 생원은 달아야 노려볼 수 있는 자리였다는 것. 여기에 저 특혜를 얻으려면 연간 300일의 출석을 달성해야 했다.[17] 여기에 툭하면 시험으로 매일 치는 시험 매달 치는 시험 등등 줄줄이 시험이었다.
7. 석전대제
매년 봄과 가을에 대성전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성현들에 대한 제사가 거행되는데, 1953년부터 음력 2월과 8월의 첫 정일(丁日)에 이를 거행하다가 다시 2007년부터는 공부자서거일(5월 11일)과 공부자탄강일(9월 28일)에 거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석전(釋尊), 석채(釋菜), 정제(丁祭), 상정제(上丁祭)라고도 한다. 1986년 11월 1일 중요 무형 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으며 문화재로서의 공식 명칭은 '석전대제(Ritual for Confucius)'이다.
8. 반촌(泮村)
성균관 인근에는 성균관에서 일하는 사역인들이 모여 사는 반촌(泮村)이라는 동네가 있었다. 이 사역인들 중에는 성균관에서 쓰는 고기들을 다루는 백정들도 많이 있었다. 최악의 천시를 받았던 다른 백정들과는 달리 이 반촌의 백정들은 성현들의 영혼과 성균관 유생들에게 고기를 바친다는 자부심이 매우 강했고, 성균관 출신의 고위층 인사들과도 학생시절부터 안면을 트고 지내며 생긴 연줄이 있어서 한성부 관리들조차 함부로 다루지 못하는 자들이었다.[18] 이 때문에 반촌은 일종의 치외법권 지대로 바뀌었으며[19] 한성부의 다른 지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특이한 상점과 물건들이 존재하며 성균관 유생들이 유흥을 즐기는 이색적인 번화가로 자리잡았다. 쉽게 말해서 조선 시대의 대학로나 신촌과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이 반촌의 위치는 현대의 대학로와도 상당 부분 면적이 겹치는 편이다. 심지어 반촌민들의 말투도 서울 내 다른 지역 사람들과도 판이하게 달랐다.
반촌의 기원은 고려 말 안향이 성균관에 기부한 노비들이라고 하며 그들의 후예들이 조선 성립 이후에도 한양으로 이주하면서 반촌을 형성하였다고 한다.[20] 따라서 반촌 사람들은 자신을 안향의 노비들의 후예라고 믿었으며, 안향의 후손이 성균관에 들어오면 '옛 주인의 후손이 오셨다'고 하면서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9. 유소(儒疏)
성균관은 권위가 세서 세자가 나이가 차면 성균관 입학례를 하였다.[21] 이렇게 파워가 센 성균관 유생들은 학생운동처럼 정치적인 활동도 벌였는데 이때 '공관' 이라는 것은 어마무시한 영향력을 끼쳤다. 대개 정책에 대한 반대운동을 벌이면 먼저 정책을 반대한다는 뜻의 집단 상소인 유소를 벌였고 그래도 안 되면 단식투쟁을 벌였다. 그래도 안 먹혔을 때 쓰이던 최후의 스킬이 공관인데, 아예 성균관 유생들이 수업 받기를 거부하는 일을 말한다. 단순히 수업 거부니 유생들 손해 아닌가 싶겠지만 실상은 공관쯤 되면 왕도 골치 아픈 상황에 이른다. 국가에서 직접 선발해 대우해주며 키우려는 인재들이 일제히 수업을 거부하는 것도 거북할 일일 뿐더러 특히 수업일수 300일을 채워야 하는 사정 상 공관이 길어지면 그만큼 성균관 유생들은 수업일수를 채우기 어려워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들은 특별 시험을 못본다. 즉 나라에서 직접 선발하고 키운 인재들이 등용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 이렇게 되면 여론도 슬슬 도대체 얼마나 잘못했길래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냐고 하고 대간에 대신들까지 유생들의 편을 들테니 난감한 건 당연, 여기에 지방에 있는 유생들까지 이에 자극받아 연명상소니 만인소니 올려댈 수준까지 가면 상소 폭탄까지 받아야 한다(...). 게다가 여러 안건들도 상당수는 성균관을 비롯한 많은 유생들이 올리고 이를 대간이 받아 주청하고 다시 대신이 받아 주청하는 방식이니 성균관 유생들은 언론의 역할도 했다고 볼 수 있다.
10. 개성 성균관
[image]
북한 개성에도 성균관이 있다. 그러나 한양 천도 후 최고학부로서의 기능을 잃어 향교로 격하되고 '성균관'이라는 이름만 유지되었다. 2013년에 성균관이 포함된 개성역사유적지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1. 기타
- 을사오적 중 이완용과 박제순이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적이 있다. 위의 직제를 보다시피 대사성은 지금의 성균관대학교 총장에 대응되는 자리이다. 다만, 고종 대에는 성균관이 그렇게 권력이 있는 기구가 아니었기에 대사성 직함은 그냥 명예직이자 한직이나 다름없었다. 고종의 재위 기간 중 거쳐간 대사성이 수백 명은 되는 걸 보면...
- 충무공전2: 난세영웅편에서 조선군 건물로 등장한다. 대본영을 대군본영으로 확장하는데 필요한 테크 건물이라고 한다.
12. 유사기구
12.1. 한국
12.1.1. 국립
12.1.2. 사립
12.2. 외국
13. 관련 문서
[1] 현행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에 의한 것으로 문화재로서의 로마자 명칭이다.[2] 유림 단체인 성균관유도회와 성균관대학교의 로마자 명칭이다.[3] 군정법령 제6호 참조[4] 군정법령 제15호 제1조 경성제국대학의 명칭은 자에 차를 서울대학이라 변경함 제2조 공자묘경학원의 명칭은 자에 차를 성균관이라 변경함 제3조 본령은 1945년 10월 16일 야반에 효력을 생함[5] 출처: 자유신문 1945년 12월 10일자 "성균관대학 재단을 촉성, 1000여 대표 참가로 전국유림대회"(원본)[6] 1963년 12월 13일 기사 라이브러리 [7] 한양원 민족종교협의회 회장의 말에 따르면 60년대 당시 삼성은 전통을 가진 성균관대를 탐냈다고 한다. 하루는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회장의 형 이병갑 사장이 심산 김창숙 선생을 찾아와서는 봉투를 하나 건넸다. 심산은 비서인 윤종(윤봉길 의사의 아들)에게 ‘봉투에 뭐가 들었는지 보라’ 하더니 ‘5억원 수표가 들어 있다’고 하자 침을 뱉어 던지며, ‘이러면 내가 성균관대를 어서 가져가라고 내놓을 줄 알았느냐’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기사 이 내용이 기사화 되자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연락이 와 만났는데, ‘그런 일이 정말 있었느냐’며 ‘제가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못한 일(성균관대 인수)을 해냈네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2013년 이건희 회장이 쓰러지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기사[8] 과거에는 아예 문을 걸어잠그고 일반인의 출입을 막은 적도 많았다. 2005년까지는 성균관 유생들의 대를 잇는 의미에서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 학생들의 성균관 동재, 서재를 기숙사로서 사용하고 있었으나 2005년 1월 종로구청의 민간인 퇴거 명령 이후로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9] 유림회관 옆으로 들어와서 성균관을 통과하면 국제관 앞으로 바로 나온다.[10] 처음에는 대성인(大聖人)을 모신 곳이라 해서 대성전(大聖殿)이라 했는데, 중국 사신이 공자는 온갖 학문을 집대성(集大成)하였으므로 대성전(大成殿)이라 부르는 것이 맞다 해 바뀌었다.[11] 과거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 단을 만들어두고 그곳에서 제자들을 양성했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단어.이 단어 때문에 은행나무가 유독 학교 같은 교육 시설에 많이 심긴 이유가 되었다.[12] 본래 공자가 언급한 사과십철四科十哲의 구성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홀로 후작이다.[13] 태종 1년(1401년) 사성(司成)으로 개정[14] 태종 1년(1401년) 사예(司藝)로 개정[15] 태종 1년(1401년) 주부(注簿)로 개정[16] 대신 속수례(束脩禮)라 해서 제자가 스승한테 배움을 받고자 하니 가르침을 달라는 의미에서 약소하게나마 물건을 줬다고 한다. 보통은 술, 무명천, 술안주를 줬다고.[17] 현대 기준으로는 휴가 혹은 방학 없는 주 6일제에 가깝다. 상당히 빡빡한 수업일정인 셈. 출석은 매일 점심 급식(?)을 받은 기준으로 했는데 나중에는 점심, 저녁 두번으로 바뀌었다.[18] 렛츠고 시간탐험대 성균관 편에서는 반인(반촌 거주 노비)들이 끽소리도 못하고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것으로 나오지만, 딱히 틀린 고증은 아니다. 반인들이야 정부 고관대작들이나 성균관의 강사나 유생들의 빽으로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데, 그 빽 노릇해주는 사람들이 직접 갑질을 하고 있으니 뭐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물론 이들도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던 건 아니라서, 잘못을 저지른 유생들을 선배 유생들이 벌할 때는 이들이 주로 나섰다. 렛츠고 시간탐헝대에서도 이 부분이 아주 잘 고증이 되었다.[19] 이는 중세 유럽의 대학들에서도 비슷하게 발생한 현상이다. 심지어 유럽에서는 교황, 황제, 왕, 유력 제후 등이 아예 대학에 자치권을 주기도 했다.[20]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반촌 사람들이 개성 사투리를 쓰는 것으로 표현했다. 영묘조가 조선 건국 겨우 50여 년 즈음의 일이니 꽤나 적절한 고증.[21] 다르게 보면 그만큼 성균관이 국가적으로 띄워주는 기관이라는 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