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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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장면을 다룬 민족기록화 (박영선 작.)
1. 개요
2. 명칭
3. 과정
4. 결과
5. 의의
6. 여담


1. 개요



1909년[1] 10월 26일 러시아 하얼빈[2]하얼빈역에서, 대한제국 출신의 안중근일본 제국의 제4, 6대 내무경, 초대 내각총리대신, 초대 귀족원#s-2 의장, 초대 추밀원#s-4 의장, 초대 한국통감을 역임한 이토 히로부미권총으로 사살한 사건.

2. 명칭


이를 두고 한국에서는 의거라 칭하고,[3] 일본에서는 단순히 사살(射殺), 저격, 암살, 그리고[4] 종종 테러라고도 한다.[5]
안중근은 한때 '항일 의병장'이었지만, 이토 히로부미 암살 당시에는 휘하 병사를 거느리고 교전을 벌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국의 후방에 침투하여 교란, 요인 암살 등을 주된 임무로 하는 특수부대는 현대에도 존재하며, 교전 중인 적국에 대한 매우 유효한 전술이다. 이미 수년 전부터 항일 의병일본군교전 상태였으므로, 안중근의 암살은 항일 의병의 일원으로서 교전 중인 적국의 수괴를 사살한 특수 작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있다. 요인 암살을 위한 특수전 전문 의병부대를 창설한 뒤 거사에 임했다고 보면 된다.

3. 과정


1905년 초대 한국통감을 지냈다가 막후로 물러나 일본 제국에서 추밀원 의장을 지내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제국과의 철도 문제, 경제 현안, 러일전쟁 뒷처리 등을 논의하기 위해 러시아 제국 재상인 코코흐체프와 회담을 갖기로 하여 러시아가 청 제국에게 조차한 하얼빈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는 회담을 위해 러시아 측에서 특별 제공한 특별 열차를 타고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1909년 10월 21일 안중근은 신문기사에 이토 히로부미가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을 방문하여 러시아 재무상과 러일 간 경제 회담을 갖는 목적으로 방문한다는 정보를 알아내어,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계획한다. 26일 안중근은 거사 동지인 우덕순과 함께 기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출발하였다. 1박을 머문 끝에 다음날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우덕순은, 러시아에서 세탁소를 운영한다는 재러시아 한국인 조도선을 만난다. 그는 거사에 동의하였다.
그 중 기차들이 중간에 정차하게 되어서 쉬어간다는 '차이자거우(蔡家具 / 채가구)역' 에서 우덕순, 조도선이 거사를 분담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신문 기사에 이토 히로부미의 특별 열차도 차이자거우 역에 정차한다는 예상이 나오자, 세 사람은 차이자거우로 향하여 기차역 객사(客舍)에 머물며 거사를 준비한다.
그러나 철도들의 분기점인[6], 차이자거우 역은 경비가 삼엄해 객사에서 나가 의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데다가 러시아 헌병들이 숙소 문을 잠가버려 탈출도 불가능했다.
다행히 당초에 차이자거우에 왔던 안중근하얼빈 거사를 위해 우덕순, 조도선에게 차이자거우 거사를 분담하며 자신은 이미 하얼빈으로 이동하였던 상태였다. 만약 이 때 안중근마저 객사에 갇혔다면 하얼빈 거사도 실패하였고 이토 히로부미도 무사히 경제 회담을 마치고 일본으로 살아서 귀국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차이자거우에서 거사에 실패한 우덕순, 조도선은 안중근의 하얼빈 거사 성공 이후 차이자거우역 객사에서 러시아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압송되었다.
차이자거우 거사가 실패함에 따라 안중근하얼빈으로 건너가 드디어 이토 히로부미와의 운명을 결정할 거사 준비에 돌입하게 된다. 단신으로 하얼빈에 도착하여 일본인으로 위장하고[7] 기차역에 입장했다.[8]
기차역에는 양국 수뇌를 환영하기 위해 일본인러시아인, 중국인[9]이 나오게 되었고, 신변 경호를 위해 러시아군 헌병 및 청군들이 호위 삼아 경계를 서고 있었다. 드디어 이토 히로부미 일행을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고, 기차 안에서 이토 일행이 모습을 드러내자 환영을 나온 군중들이 러시아 국기일장기를 흔들며 양국 수뇌를 환영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와 면식이 없었던 탓에 수많은 군중과 섞여 있는 이토 히로부미를 알아보지 못했고 일을 그르치는가 했다가, 일부 군중이 이토 히로부미의 이름을 부르자 백발의 남자가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어주는 모습을 보고 백발의 노인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임을 인식했다. 이에 품 속에 있는 권총[10]을 준비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조준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헌병들 사이에 지나가고 있는 순간 그를 향해 첫 발을 쏘았다. 첫 발은 바로 이토 히로부미의 몸을 관통하였고, 안중근은 계속해서 2발 ~ 3발을 추가로 발포했다.[11] 이토는 결국 땅바닥에 쓰러졌고, 안중근은 혹시 다른 사람이 이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를 보호하기 위해 나온 일부 일행[12]에게도 총탄을 발포하여 중상을 입히고 총알 한발을 남겼다.[13][14] #
안중근은 즉시 청과 러시아의 호위병들에게 체포되었고, '''"까레이 우라!!!(한국 만세)"'''라 외쳤다. 이는 러시아어라는 것이 통설인데 이견도 있다.[15][16][17]
한편 이토 히로부미는 기차에 호송되어 총탄을 맞은 직후 의식을 잃고 기차로 옮겨진 뒤 바로 숨이 끊어졌고, 동행했던 그의 손자가 이토 히로부미의 유언은 없다고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하얼빈청나라 땅에 러시아 조계지이므로, 러시아 내지는 청나라에서 조사 후 재판받는 게 맞았다. 실제로 한국인 변호사들은 러시아 헌병이나 청나라 경찰이 이를 조사하고 청나라에서 재판하기를 원했지만, 청나라에 있던 일본제국 경찰 영사는 상황의 심각성에 따라 안중근의 신병을 일본으로 넘겨 버린다.

4. 결과


이 사건으로 이토 히로부미덤덤탄에 맞아 숨졌고, 일행 중 일부는 총상을 입어 사상자가 발생했다. 안중근과 우덕순, 조도선 등 관련자 3명은 러시아 헌병대와 청나라 경찰에 체포된 후 러시아 검찰로부터 간단한 조사를 받다가, 저녁에 하얼빈 일본영사관을 거쳐 10월 28일에는 일본의 식민지관동주 뤼순감옥으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가 관동도독부 법원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게 되면서[18] 1910년 3월 26일에 순국했다.[19]
거사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얼빈역 개보수로 저격지점에 화단 등이 배치돼 실제 저격지점을 알 수 없었으나, 2006년에야 하얼빈시 철도국이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바로 그 곳에 화살표 모양의 타일을 비로소 설치했으며,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당한 지점에는 마름모 모양의 타일이 배치돼 그때의 일을 증명하고 있다.

5. 의의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이에 조선 보호론 실현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함으로써 보호국화의 국제법불법#s-1성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또한 일부 한국인들의 강력한 항일 투지와 의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는 없었기에 일본은 예정대로 1910년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했다.[20]
일각에서는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항일 의병과 일본군이 이미 수년 전부터 교전 상태였으므로 '''교전 중인 적국'''을 공격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적국의 요인을 암살하는 것은 특수부대의 전형적인 특수 작전으로 볼 수 있다고 해석한다.
한편 일본에서는 의거 후 일제강점기에 들어갔음에도 안중근 연구회가 만들어졌다. 특히 놀라운 건 뤼순 감옥의 일본 헌병들까지 그의 인품에 감화되어 스스로 일본인임이 부끄럽다고 할 정도였다는 것.[21]

6. 여담


  • 훙커우 공원 의거 등 무장 독립투쟁도 그렇듯, 위키백과처럼 특정 국가의 이익을 대변치 않는 위키위키 사이트에선 '테러'냐, '독립투쟁'이냐를 두고 유저들 간에 싸우는 일이 잦다.
  • 공교롭게도 정확히 70년뒤인 1979년 김재규 당시 중정부장이 박정희 당시 대통령(차지철 당시 대통령경호실장 포함)을 총으로 쏜 사건인 10.26사건과 날짜가 같다. 둘다 총으로 벌인 암살이고 같은 탄약(.32 ACP)이 쓰였으며, 한국 근현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40년 뒤 2019년 ISIS의 수장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도 이 날 미군의 총격을 맞고 사망했다.
[1] 경술국치 이전이지만 당시 대한제국주권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2] 당시 하얼빈은 러시아가 조차하고 있었다.[3] 행위의 형식만 보면 사전적 의미의 '테러'로 볼 수도 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테러'라는 의미가 세계적으로 일종의 비하로 전락한 상황이나 국가 정통성 문제에 따라 '의열(義烈) 투쟁'이라고 한다. 물론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독립운동과 이를 지원하고 명령한 상해임시정부의 행보까지 의열 투쟁이라고 칭한다.[4] 꼭 극우가 아니더라도[5]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전인 코지엔(広辞苑)이나, macOS에 기본 탑재되어 사용율이 꽤 높은 다이지린(大辞林) 같은 사전에서는 안중근을 독립운동가로 소개하고 있다. 코지엔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안중근: 조선의 독립운동가. 가톨릭교도이며 학교를 설립. 또한 의병을 조직. 1909년 10월 26일 전(前) 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살해하여 사형. 한국 / 북한에서 의사로 칭해진다. (1879년 ~ 1910년)[6] 지방에 위치한 시골 역이었던지라 규모가 작아 경비 인력이 역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7] 검문을 피할 목적[8] 서양인들은 물론, 한국인과 일본인도 서로를 외모로 구별하는 게 힘들다. 인종적 특징이 거의 같기 때문이다.[9] 사실 중국인이 제일 많았다. 비록 러시아의 조계지이긴 했어도 엄연히 청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영국령 홍콩이 영국 조차지였지만 한족 홍콩인이 인구 대부분이던 것과 마찬가지다.[10] FN M1900 자동권총을 사용했으며, 리볼버(육혈포)는 소지했으나 사용하지 않았다.[11] 이는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이었는데 이미 이토 히로부미는 이전에 원태우 의사에게 죽을 뻔 하여서 이 일로 인해 이토 히로부미는 자신의 사진이 나도는걸 막았다.[12]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궁내 대신 비서관 모리, 만주 철도 이사 다나카[13] 이걸 자결용이라고 추측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이 아니다. 안 의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가톨릭에서 자살은 과거에는 장례 미사도 치뤄 주지 않았을 정도로 큰 죄악이다) 당시 자결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고 이토 처단 후 재판에서 이토의 죄를 낱낱이 밝힐 생각이었다고 여러번 진술했다. 총알 한 발을 남긴건 이미 이토가 쓰러져서 더 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14] 이 총알 한발을 하나의 메시지로 해석하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안중근은 이토를 저격하고도 혹여 변장했을까 싶어 이토 히로부미 주변의 일본인들도 저격했는데, 이토가 쓰러졌으니 쏘지 않았다는 건 모순이라는 것. 이 관점에서의 해석은 자신이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극단적인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한발을 일부러 남겼다는 것이다.[15] 이 외침에 대하여 위키백과사전에서는 코리아 후라가 에스페란토로 "대한 만세!"라고 주장하는데, 잘못된 정보이다. 에스페란토로 한국은 Koreio 이고, 발음조차 코리아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계 공통어'가 라틴어라는 주장도 있으나, 이 또한 잘못된 정보이다. 라틴어로 한국은 Corea(코레아)이기도 하지만 '만세'에 해당하는 라틴어는 의미로 따지면 vivat, 함성으로 따지면 eia, io, eu, evax, euge 등으로 '우라'와 발음이 유사한 어휘는 없다. (우라 내지 후라는 1680년대부터 유럽 각지의 선원들이 내는 전투 고함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옥스포드 영어사전 OED는 말한다. 라틴어가 어원이 아닌 것이다.) 그나마 러시아어로 했다는 가설이 많다.[16] 이 시기의 하얼빈은 청나라의 영토였지만, 시베리아 횡단 열도의 연장선을 건설할 만큼 러시아 제국의 입김이 강한 지역이기도 했고, 만주는 러일 전쟁 이후 바로 이 하얼빈을 기준으로 일본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사이 좋게 나눠먹었다. 또한 체포 당시에 러시아 제국 공안이 관여하였고, 러시아에서 상업을 하여 번 돈으로 의병활동과 안중근의 암살을 도운 최재형 선생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장소를 하얼빈역으로 정해, 일본이 아닌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치하고, 변호사로서 러시아 제국 사람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했던 점으로 보아, 하얼빈에서 러시아어로 외쳤다는 사실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식민지 조선에서 좌파 계열의 지식인들이 에스페란토에 관심갖기는 했지만, 안중근이 에스페란토를 배웠다는 내용은 지금까지 전혀 나오지 않았다.[17] 세계 공용어 내지 세계에서 보통으로 사용하는 언어라는 표현이 몇 문헌에서 보인다. 코레아 우라라는 표현은 굳이 에스페란토어나 영어의 표현이라기 보단 두 단어(코레아, 우라) 모두 보편적으로 일본인이든 중국인이든 러시아인이든 알아들을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다만 이도 하나의 가설이고, 우라라는 표현이 명백히 러시아어인 것은 사실이다.[18] 원래는 베이징을 거쳐 러시아모스크바나 이르쿠츠크로 넘겨야 했었다. 러시아 조차지이기 때문.[19] 흔히 알려져 있는 2월 14일은 순국일이 아니라 사형 선고일이다.[20] 애초에 일제는 한국을 최종적으로 식민지배할 계획이 있었다. 다만 그 여력이 되지 않았기에 일단 외교권을 강탈하고 친일적인 보호국으로 만들어 식민지배의 연착륙을 목표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헤이그 특사 등의 저항과 정미의병13도 창의군 등의 대대적인 의병저항에 직면하여 일제는 기존의 정책을 폐기하고 조기합병으로 노선을 전환한다. 따라서 이미 이 시기의 이토는 본인의 정책실패를 인정하고 조선 통감에서 내려온 상황이었고 이토의 사망과는 별개로 한일병합은 예정된 수순이었다.[21] 의외로 안중근은 일본의 우위를 인정했다. 그는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다기 보다는 아시아주의자로 그가 저술한 동양평화론에서 잘 알 수 있는데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근대화를 성공한 일본이 모범이 되어 한중일이 연합하자고 주장했었다. 그가 이토를 살해한 것은 이토가 동양평화를 위협한다고 보았기 때문일뿐 특별히 반일주의로 살해한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