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교기

 

  • 같은 이름을 가진 일본의 승려에 대해선 교기 참조.
扶餘翹岐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2. 의문점


1. 개요


백제의 왕족. 의자왕에게는 동생인 인물이다. 《일본서기》 황극기 1년(642년) 기록에 의하면 642년 정월 의자왕에 의해 내좌평 기미, 누이동생 4명, 명망있는자 40여명과 함께 섬으로 추방되었다.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으나 같은해 5월에 종자와 아들을 잃었으나 두려운 마음에 아들상에 참여하지도 못하고 백제인 대정(大井)의 집에서 아들을 장사지냈다고 한다. 7월에 당시 야마토조정의 실권자인 백제계 도래인으로 추정되는 大臣 소가 이루카(蘇我入鹿)가 베푸는 향연에참석하였고, 백제 대좌평 지적 등의 사신이 오자 연회가 끝나고 교기의 대궐 앞에서 큰절을 하는 등 문안했다고 한다.

2. 의문점


그러나 사택지적의 항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최소 654년 정월까지 생존해있던 사택지적이 뜬금없이 641년 11월에 사망했다고 기록해놓곤 다음해 사신으로 참여한 정황이나 분명 섬으로 추방했는데 일본에서 활동하는 교기의 행적 역시 의문스럽다. 그래서 642년에 일어난 사건을 655년으로 앞당겨서 보기도 한다. 이는 황극천왕(고쿄구 덴노)과 제명천황(사이메이 덴노)이 동일 인물이기 때문에 찬자들이 연대 오류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의자왕 항목 참조.
그 외에 부여교기를 부여풍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고 하는데,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왜냐하면 부여교기는 의자왕의 이복동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부여풍은 의자왕의 다섯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며 왜에 인질로 파견되어 있었던 기록이 엿보인다. 663년 왜조정에서 대규모의 백제 부흥군 파병 전, 덴지천황이 부여풍에게 왜조정 최고의 관위인 대직관을 하사하여 백제왕으로 임명 후, 왜군과 함께 출병을 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