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풍

 


'''백제 제32대 건길지'''
'''豊王 | 풍왕'''
'''왕호'''
풍왕(豊王)
'''별호'''
풍장왕(豊障王)
'''성씨'''
부여(扶餘)
''''''
풍(豊) / 풍장(豊璋) · 규해(糺解)(?)[1]
'''왕후'''
오오씨(多氏)[2]
'''부왕'''
무왕(武王)(?) / '''의자왕(義慈王)(?)'''
'''생몰연도'''
음력
623년(?) ~ 668년(?)
'''재위기간'''
음력
660년 ~ 663년 음력 9월 (3년)
1. 개요
2. 생애
2.2. 고구려 망명
3. 여담


1. 개요


백제의 왕족. 휘는 풍(豊) 혹은 풍장(豊璋)이다. 왕호를 붙여 풍왕(豊王), 풍장왕(豊障)이라고도 하며 보통 '''부여풍'''으로 알려져있다. 일본에서 편안한 여생을 보낼수 있었음에도 자신의 가족까지 내다버리고 일생을 백제부흥운동에 투인했으나, 끝내 실패한 비운의 인물.

2. 생애


의자왕의 5남으로 알려져 있다. 무왕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으나, 현재는 의자왕의 다섯 번째 아들설이 정설이다. 일본서기에 부여풍의 다른 이름으로 추정되는 규해(糺解)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부여규해가 또 다른 백제 왕자라는 설도 있지만 동일 인물이 맞다면 그 이름이 초명(初名)이거나, 자(字), 호(號)로 추정된다.일본서기와 삼국사기에서 교차검증으로 일본으로 보내진 인질로 서술되고 있다. 다만 이는 일본서기 특유의 윤색이나 거짓말일 가능성이 큰데, 거의 동시대에 일본서기의 증언으로 인질이라고 서술되는 김춘추의 경우 642년 고구려로 외교사절로 파견 되었고, 647년에 왜국으로 가는데, 1년도 채 안 돼서 다시 당나라로 648년에 건너간다. 당시 김춘추의 신라 국내에서의 입지상, 인질로 파견될 인물도 아니고, 인질이 1년도 채 안 돼서 빠져나와 당나라로 파견될리도 없다. [3] [4] [5] 부여풍의 경우 김춘추와 비슷한 시기인 조메이천황 3년 즉, 595년에 인질로 파견 되었다고 적혀있지만, 후에 백제가 멸망하고 왜왕이 백제로 송환하며 준 왜군 5천명과 수하에 왜국 장군들을 거느리고 재건운동에 투신한 상황을 짐작하면, 인질이라는 표현은 윤색이나 과장일 가능성이 크다 [6]
형으로는 의자왕의 장남 부여융, 차남 부여태, 3남 부여효, 4남 부여연이 있었다. 동생으로는 일본서기에서만 전해지는 忠勝와 塞城이 있다.[7][8]660년 백제 멸망(사비성 함락) 당시에는 일본에서 머물고 있으며, 장남도 아니니 시대가 평안했다면 왕이 될 일은 없었겠지만 백제 붕괴 이후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 등을 비롯해 백제 땅에 머물던 거의 모든 백제 왕족이 당나라로 끌려간 뒤 왕이 없어진 백제의 옛 대신들이 일본에 요청해, 일본의 협조를 받아 귀국해 백제 부흥에 나섰다.

2.1. 백제부흥운동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660년 7월 18일 의자왕의 항복으로 멸망하였으나 백제의 상황은 웅진성~사비성 주변의 수도권[9]만 나당연합군에게 기습적으로 점령당했고 지방 영토의 대부분과 지방군은 건재한 상황이었다.[10] 백제의 변방에서는 귀실복신흑치상지, 지수신, 사타상여, 승려 도침 등이 임존성[11]주류성[12]을 근거지로 세력을 넓히며 백제 부흥운동을 이끌었고, 의자왕과 대부분의 왕자들이 당에 끌려가 왕위가 비어 있었으므로 당시 31년간 왜국에서 질자로 지내고 있던[13] 왕자 부여풍을 백제로 보내달라고 660년 10월 일본 측에 사신을 보내 요청한다. 이에 부여풍은 동생(혹은 아들?) 부여선광[14]을 일본에 남겨두고 1년이 지난 661년 9월 옛 백제 땅에 귀국한다.
[image]
660년 8월, 전격적으로 봉기한 백제 부흥군은 순식간에 200여 개의 성을 탈환[15]하며 군을 몰아냈다. 당군은 13만 대군의 상륙으로 일거에 백제의 웅진성과 수도 사비성을 점령했지만 잔당 처리에는 적은 병력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벌써 대부분의 병력이 당으로 귀환한 상황이었다.[16][17]
그리고 여세를 몰아 9월 23일 옛 도읍 사비성을 포위, 또한 웅진성도 공격하며 옛 백제 땅을 거의 되찾는 듯 했으나, 신라군의 급습으로 백제 부흥군은 성 20여 개를 빼앗기고 만다. 이때부터 내분의 조짐이 보였는데, 《일본서기》에는 도읍을 정하는 과정에서부터 내분이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겨울 12월 병술(丙戌) 초하루: 백제왕(百濟王) 풍장(豊璋), 그 신하 좌평(佐平) 복신(福信) 등은 사이노무라지(狹井連)[18]

, 에치노 타쿠츠(朴市秦 田来津)[19]와 의논하기를 “이 주유(州柔)[20]는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고, 이곳은 방어하기 좋아 싸울 만한 곳이다. 여기에서 오래 머문다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니 이제 피성(避城)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피성은 서북쪽으로는 띠를 두르듯 고련단경(古連旦涇, 충남 당진군 신평면에 흐르는 신평천)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둑으로 된 제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땅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랑을 터트리면 물이 쏟아진다. 꽃과 열매가 있는 나무에서 얻는 토산물은 삼한(三韓)에서 가장 기름질 것이며, 옷과 음식의 근원은 천지 사이에 숨어 있는 곳일 것이다. 비록 낮은 땅(평지)이라고 하지만 어찌 옮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에치노 타쿠츠가 혼자 나아가 “피성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예기하지 못한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않는 것은 주유가 산이 험한 곳에 있어 모두 방어물이 되며,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땅에 머물면 어찌 굳건히 살겠으며 흔들리지 않음이 오늘날에 미치겠습니까?”라고 간하였다. 끝내 (백제왕은) 간하는 말을 따르지 않고 피성에 도읍하였다.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이렇게 부여풍은 복신과 왜군의 의견을 묵살하고 자기 뜻대로 피성을 부흥운동의 수도로 정했지만, 그러나 천도한 직후 김흠순천존이 이끄는 신라군이 백제 남부로 쳐들어와 지금의 전라북도 일대인 거열성, 거물성, 사평성, 덕안성을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지고,[21] 일본서기에 의하면 이 4개성을 신라에 빼앗긴 후 피성과 국경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져 위험했으므로 결국 2달만에 다시 주류성으로 환도하게 된다. 이런 의견 충돌과 잘못된 판단은 후술할 백제군의 내분과도 연결되었을 수도 있다.
백제 부흥군은 나당연합군에 3년(햇수로는 4년)간 저항했으나 부흥군의 주 세력인 복신도침의 주도권 다툼으로 내분이 일어나 결국 도침이 복신에 의해 살해당했고 복신이 풍왕마저 죽이려 하자 풍왕은 선수를 쳐서 복신을 살해하였다.

“당시 복신이 그 병권을 오로지 한 뒤 부여풍과 점차 서로 시기하였다. 복신이 병이 들었다고 하고 굴실(窟室)에 누워 있으면서 장차 부여풍이 문병오면 습격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부여풍이 이를 알고 그가 믿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불의에 습격하여 죽였다”

'''《신당서》 권 제220 동이열전 제145'''


여름 5월 계축 초하루 이누카미노키미(犬上君)[22]

가 달려가 군사에 관한 일을 고려(高麗)에 알리고 돌아왔다. 석성(石城)[23]에서 규해(糺解)를 보았는데 규해가 복신의 죄를 말했다.

6월 전장군(前將軍) 카미츠케노노키미 와카코(上毛野君 稚子) 등이 신라(新羅)의 사비기노강(沙鼻岐奴江)[24]

2개의 성을 빼앗았다. 백제왕 풍장은 복신이 모반하려는 마음을 가졌다고 의심하여 손바닥을 뚫고 가죽으로 묶었다. 이 때 스스로 결정하기 어려워, 할 바를 알지 못했으므로 여러 신하에게 “복신의 죄가 이미 이와 같으니 목을 베는 것이 좋겠는가 아닌가”하고 물었다. 이에 달솔 덕집득(德執得)이 “이 악한 반역 죄인은 풀어주어서는 안됩니다”고 하였다. 복신이 곧 집득에게 침을 뱉으며 “썩은 개와 같은 어리석은 놈”이라고 하였다. 왕이 시종하는 병졸들로 하여금 목을 베어 머리를 소금에 절이도록 하였다.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663년 결국 내분에 빠져 전력을 소진한 백제부흥군은 3만에 달하는 왜군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아 분위기를 쇄신하려 하였다. 그리고 백강에서 당군과 대치하는데, 알고보니 당군을 이끈 장수는 부여풍의 친형 부여융이었다.[25] 백제 - 왜국 연합군은 백강 전투에서 부여융을 포함한 신라 - 당 연합군에 의해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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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강전투
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 등을 비롯해 학자에 따라선 왜국의 지원군을 포함한 백제 부흥군이 백강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부여풍이 고구려로 도망간 시기를 백제라는 국가의 멸망으로 보기도 한다. 660년에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고 국왕 의자왕이 끌려갔지만 사실 200년 전에도 국왕이 전사하고 수도가 털린 적이 있었고[26] 660년의 멸망은 두 번째, 풍왕의 몰락이 실질적인 멸망이라는 것.

2.2. 고구려 망명


백강 전투에서 부흥군과 그를 돕던 왜군이 당의 해군에 그야말로 박살이 나자 풍왕은 자식들을 내버리고[27] 차고 다니던 보검도 떨군 채[28] 측근 몇 사람과 함께 이웃의 고구려로 도주, 663년 9월 주류성이 함락되면서 백제 부흥운동이 사실상 끝났다. 고구려로 달아난 뒤의 행적은 당의 장군 유인궤의 상소문에 "부여풍이 고구려로 도망가서 왜국에 있는 자기 동생 부여용과 내응하고 있다"고 한 것이 유일하다.
이후 고구려도 연개소문이 죽고 연씨 집안끼리 내전이 붙어 666년에 대막리지 연남생이 당나라에 항복하면서 위기에 빠지는데, 노태돈속일본기한 기록을 보아 이 당시 고구려가 일본에 저자세로[29] 군사지원을 요청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기도 했다. 고구려는 일본서기에 의하면 666년 정월, 10월, 그리고 말 그대로 멸망하기 일보직전인 668년 7월에도 일본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 당시 고구려가 일본에 사신을 보내 협상해볼만한 일은 지원 요청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 당시 고구려에는 일본과 연줄이 있는 부여풍이 망명해 있었고, 일본은 663년 백제부흥군의 백강 전투에 지원군을 실제로 보낸 전례도 있으므로 고구려 역시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했다는 것이다. 다만 일본은 백제부흥군이 몰락한 이후 만에 하나 나당연합군이 일본에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 신라에 우호적인 태도로 전환해 한반도에 개입을 그만두고, 성을 쌓고 방어태세를 갖추는 중이었으므로 고구려를 돕지는 않았다.
결국 부여풍은 자신이 이끌던 백제부흥군의 패망 5년 뒤인 668년 9월 21일에 고구려도 나당연합군에 의해 패망하는 바람에 결국 잡혀서 당나라에 압송, 영외(嶺外)로 유배를 갔다. 이후의 생애는 알 수 없지만, 일본에서 다른 가설이 제기되었다.
왜국에 있었다는 풍왕의 동생 부여용에 대해서는 부여선광(일본에서 백제 왕족에게 부여된 쿠다라노코니키시氏의 선조)과 동일인이라는 설도 있고, 혹은 다른 백제 왕족이라는 설도 있다.

3. 여담


  • 일본에 있을 때 양봉(축산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는 일본 역사상 양봉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이기도 하다.
>이 해(643년)에 백제의 태자 여풍(餘豐)이 꿀벌 둥지 네 개를 미와산(三輪山)에 풀어 사육하였다. 그러나 결국 번식시키지 못하였다.
>
>일본서기》 권 제24 고교쿠 덴노(皇極 天皇)
  • 한국 대체역사소설 백제의 이름을 잇다에서 현대인 주인공이 부여풍에게 빙의하여 고생 끝에 망했던 백제를 되살리고 오히려 신라를 멸망시키고 고구려 왕위를 선양받아 삼국을 백제의 깃발 아래 통일하는 대업을 이룬다.

[1]일본서기》, 《일본세기[2] 오오노오미 코모시키(多臣蔣敷)의 누이[3] 고구려와 당나라에서 수행한 그의 행적들을 보면 다분히 외교사절의 성격이 강하지, 절대 인질로 파견될 인물도 아니거니와, 동북아시아 당대 최강자 고구려 당나라에서도 인질 취급 안받았는데 왜국에서 인질 취급 받을리가 없다.[4] 다만 후대의 각색에 의해 연개소문에게 억류되었다는 소리가 있지만, 정사는 아니고, 연개소문과 보장왕은 융숭히 대접했다 다만, 신라와 연합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무리한 조건을 내세워 돌려보냈다.[5] 친백제계의 일색인 왜국 조정에서 일부러 신라의 사신인 김춘추를 하대 했을거라는 견해도 있는데, 친 신라계를 자처하는 소가 집안이 조정을 장악하던 무렵이었고, 또 7세기 초반이면 이미 왜국은 외교 다각화를 꿰하며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기도 한다. 물론 성덕태자의 망상이 가득 담긴 편지를 보고 수양제는 분노했고, 또 받은 답신은 백제인에게 빼앗겼다고 일본서기가 전하지만..[6] 참고로 일본서기에서 인질이라고 서술하는 백제 왕자는 백제 역사에서 부여풍과 그의 동생의 경우 밖에 없다. [7] 다만 塞城은 부여풍의 동생이라고 전해지지만 일본서기의 다른 기록에서는 부여풍의 숙부라고 전해진다. 일각에서는 동명이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8] 塞城는 후에 부여풍과 함께 백제로 귀국하여 백제 부흥운동에 투신한다.[9] 지금의 충청남도 일대.[10] 따라서 백제의 멸망을 의자왕이 붙잡힌 660년이 아니라 풍왕의 통치가 끝나는 663년이라고 주장하는 소수설도 있다.[11]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군으로 추정.[12] 지금의 전라북도 부안군으로 추정.[13] "부여풍은 왜국에서 인질로 지내고 있는 자이다(扶餘豊, 甞質於倭國者)." 삼국사기의 표현이다. 일본서기에도 舒明3년에 풍왕이 인질로 보내졌다고 나오긴한다. 부여풍의 경우에는 선레와 다르게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에서 교차검증으로 인질이라고 확인되고 있다.[14] 부여선광은 일본 귀족으로 편입되었고(쿠다라노코니키시 요시미츠) ''''황족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15] 애초에 백제 지방 병력은 의자왕이 항복을 하건, 백제가 멸망을 하건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가 부여풍을 왕위에 올리는 과정에서야 합세했다는 견해도 많다. 지방 귀족 세력의 병력 합류가 기록으로 나오지 않은 백제의 멸망 과정을 보면 심히 설득력이 있다.[16] 굉장히 묘하게도 1400여년 후의 이라크 전쟁의 상황과도 매우 흡사하다. 빠르게 주요 지도부를 포함한 수도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자 주요 전투 병력 대부분이 철군하였고 남아있던 잔병들이 저항세력을 형성하여 게릴라전을 포함한 비정규전이 벌어지는 향상[17] 사실 이는 참수작전의 양날의 검과 같은데 빠른 전쟁 종결을 가져온다는 이점은 있으나 지방군이 건재하여 이들을 회유하지 않아 저항세력으로 변하게 되면 전면 침공을 하는 것 보다 못한 상황을 가져온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발해부흥운동이 있다.[18] 이름이 누락됐다. 풀네임은 사이노무라지 아지마사(狹井連 檳榔).[19] 풀네임은 에치노하타노미야츠코 타쿠츠(朴市秦造 田来津). 아지마사와 타쿠츠는 백제인이 아닌 일본에서 파견한 사람들이다. 타쿠츠는 후에 백강 전투에서 전사하게 된다.[20] 주류성(周留城)을 가리킨다.[21] 백제부흥군의 4개성을 신라군이 점령한 것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모두 나온다.[22] 이름은 누락됐다.[23] 현재의 부여군 석성리로 추정[24] 학자마다 해석이 달라 어디인지 확실하지 않다.[25] 부여융은 660년에 사비성 함락으로 아버지 의자왕과 함께 붙잡힌 직후 당에 투항하여 당의 세력에 가담하였다. 이후에도 부여융은 신라에 의해 쫓겨날 때까지 당나라가 설치한 웅진도독부의 수장인 웅진도독으로 재직한다.[26] 일본서기는 이때 "백제가 멸망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27] 풍왕의 두 아들은 당에 항복했다.[28] 구당서 유인궤 열전에 백강 전투 이후 당나라군이 풍왕의 보검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29] 다만 일본 사서의 일관적인 일본 중심적 논조상 사실관계 외에 저자세를 취했다는 것은 과장일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