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춘화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해녀. 2003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부춘화는 1908년 4월 6일 전라남도 제주군 구좌면(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922년 15살 때 물질을 배웠고, 밤에는 사립보통학교 야간학부에서 공부했다. 1928년 21살 때 해녀조합 산하 조직인 구좌면 해녀대표로 선임되어 해녀 회장이 되었다. 그러던 1932년, 일본 물산회사 주재원이 하도리 해산물을 지정된 가격을 무시하고 싸게 팔 것을 강요했다.
이에 부춘화는 해녀들을 동원해 일본 검속경관대를 습격해 무장경관대와 격렬한 항일투쟁을 이끌었다. 그녀는 수차례 일본인들의 강제적 침탈행위 중단을 관청에 건의했지만 시정되지 않았다. 이후 해녀들의 단결을 호소하며 9개항의 요구사항이 적힌 건의서를 직접 작성해 항일 투쟁에 나섰다.
1932년 1월 7일, 부춘화는 해녀 300명을 동원해 호미와 비창을 들고 시장에 나가 시위에 나섰다. 그날은 해녀어업조합장이자 제주도지사인 다구치 데이키(田口禎熹)가 순시하는 날이었다. 다구치가 탄 차가 장터에 도착하자, 해녀들은 차를 에워싸고 "우리가 보낸 항의서에 대답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냐.", "우리를 착취하는 일본 상인들을 몰아내라"고 외쳤다. 일본 경찰들이 칼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진압하려고 했으나 해녀들의 강한 반발로 실패했다. 이후 1월 12일에 2차 시위가 벌어지자, 일본 경찰은 해녀항일운동의 확산을 조기에 차단하기 위해 목포 경찰대까지 동원해 야학교사와 부덕량을 포함한 시위 연루자 100여 명을 잡아들였다.
1월 24일, 부춘화는 체포된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해녀 500여 명을 이끌고 주재소를 습격해 건물을 파괴했다. 이때 일본 경찰 1명과 제주 해녀들이 부상당하고 부춘화 등 주동자 20여명이 체포됐다. 일제는 우도로 피신한 나머지 주동자를 검거해 배에 태웠으나 해녀 800여명이 배를 에워싸고 흔들어 뱃길을 막았다. 이후 부춘화는 해녀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자신이 모든 것을 단독으로 주도했다고 자수한 뒤 6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1932년 7월 석방된 그녀는 일본 경찰의 감시와 미행에 시달리다가 1933년 일본 오사카에 살고 있는 사촌 언니 집으로 피신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7년간 가내공업을 하며 지냈고 구좌면 세화리 출신의 고한일과 결혼하여 3남 1녀를 낳았다.
8.15 광복 후 1946년 7월에 제주도로 귀환하여 고향 세화리에서 부인회장을 하며 해녀들의 권익 옹호에 힘썼으며, 이후 부산, 서울 등지로 거쳐를 옮겨 살다가 1995년 3월 24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향년 88세.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8월 15일 부춘화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