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림

 


성명
부승림(夫升琳)
일본식 성명
富永國正
본관
제주 부씨
생몰
1905년 4월 30일 ~ 1980년 5월 7일
출생지
전라남도 제주군 구좌면 하도리
(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1]
추서
대통령표창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부승림은 1905년 4월 30일 전라남도 제주군 구좌면(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에서 태어났다.
[2]
그는 1930년 9월 20일경 제주도 구좌면 세화리 김시화(金時和)의 집에서 청년 10여 명과 함께 간담회를 열고, 논의 끝에 비밀결사 '민중운동자협의회'를 조직하였다. 당시 제주에서는 일본 관리들이 해녀들을 가혹하게 대우하고, 일제의 관제조합인 해녀어업조합이 뇌물을 제공한 일본인 상인에게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해산물을 매입할 수 있도록 특혜를 주어 해녀들이 극심한 피해를 보고 있었다. 이에 제주도 해녀들은 자생적으로 해녀회를 조직하고 해녀어업조합에 맞섰다.
이에 부승림은 그해 11월 4일 밤 오문규(吳文奎)·채최선(蔡最善)·오동진(吳東振) 등과 함께 구좌면과 정의면(현 서귀포시 성산읍) 일대에 제주어업조합의 해초 부정판매 등 불합리한 행위를 규탄하는 격문을 배포하였다가 제주경찰서에 체포되었다. 그는 소위 출판법 위반 및 협박죄로 송치되어, 12월 19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 및 협박 혐의로 벌금 30엔을 언도받았다.#
한편, 1931년 12월 20일 부승림 등 민중운동자협의회 관계자들과 부춘화·부덕량·김옥련(金玉連) 등의 해녀들은 서로 모여 요구조건과 투쟁방침을 결의하고, 1932년 1월 7일 구좌면 세화리 장터에서 1차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어서 12일에는 당시 제주도지사 겸 해녀어업조합장이었던 다구치 데이키(田口禎熹)가 구좌면사무소를 방문할 때에 맞춰, 호미와 전복 채취도구인 빗창을 들고 총궐기하여, 해녀어업조합의 부당한 침탈행위를 규탄하는 대규모의 항일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결국 이들은 해녀들의 권익을 위해 다구치와 담판을 벌여 지정판매 반대와 공정한 입찰·조합비 조정·조합재정공개·손해배상 등의 요구조건을 관철시켰다.
그해 1월 24일에는 해녀들이 세화주재소로 몰려가 투쟁하다가 29명이 검거되었다. 이때 해녀투쟁의 배후에 민중운동자협의회라는 비밀결사가 있다는 것을 파악한 일본 경찰은 전라남도경찰부의 지원을 얻어 이틀 후인 26일 11명의 남성을 검거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부승림도 체포되었다. 당시 이들의 체포를 막기 위해 800여 명의 해녀들이 우도에서 온몸으로 맞섰고 일본 경찰은 공포탄까지 10여 발을 쏘면서 이를 저지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다시 다수의 해녀들이 체포되었다.
이들 가운데 민중운동자협의회에 관련된 27명은 1932년 5월 14일 목포부로 압송되어 예심에 회부되었으며, 이때 부승림도 소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가, 그해 6월 15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80년 5월 7일 별세하였다.
201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1] 인근의 상도리·세화리·평대리와 함께 제주 부씨 집성촌이며, 부좌현 전 국회의원과 독립유공자 부덕량·부춘화도 이 마을 출신이다.[2] 형사사건부에 의하면, 소위 출판법 위반 혐의로 제주지검의 예심에서 목포검사국에 송치 판결을 언도받았다가 1930년 7월 20일 기소중지로 불기소처분을 받고 출옥한 정황이 있는데, 어떤 사건에 연루된 것인지 확실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