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함
1. 개요
傅咸
(239 ~ 294)
서진 시기의 관료이자 문학가. 자는 장우(長虞). 부현의 전처 소생의 아들로, 계모는 엄헌의 딸 두위이다.
북지군 이양현 사람으로 굳세면서 대쪽같았고 풍격이 매우 가지런했으며, 사물을 알아내 깨닫는 것에 밝았고 악을 원수처럼 미워했다. 어진 것을 받들고 선한 것을 좋아했으며, 계문자를 사모하고 중산보의 뜻이 있었다.
문론을 즐겨 지었는데 시문이 아름답고 고운 것이 부족했지만 규감이 되는 말을 잘했다.
2. 생애
2.1. 무제 시절
함녕 초에 작위를 계승해 태자선마가 되었다가 상서우승으로 옮겼다. 나가서 기주자사가 되었지만 계모 두위가 따라가지 않으려 하자 표를 올려 관직을 그만뒀으며, 한 달 사이에 사도좌장사로 옮겼다.
279년에 관료와 요역을 줄이고 농업에 힘써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고 부함은 관직에 있으면서 바르게 처리했으며, 예주대중정인 하후준이 표를 올려 노국소중정, 사공사마 공육이 병을 핑계로 그만둬 손님을 대접하지 못하니 상서랑 조복이 대신해야 한다고 했다. 열흘 동안 다시 공육이 중정을 맡았고 사도인 위서가 세 번을 사양하자 하후준이 근거를 가지고 주장했다.
부함은 하후준이 뜻한 바대로 주는 것과 빼앗는 것을 결정하니 하후준을 대중정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해야 한다고 글을 올렸으며, 위서는 하후준이 인척이라 처리하기 어렵다고 해서 사양했다. 부함은 근거를 가지고 바로잡으려 했지만, 위서는 끝내 따르지 않으면서 부함이 격하게 헐뜯고 굽히지 않는다고 아뢰어 거기사마로 옮겨졌다가 사치를 경계하는 상소를 올렸고 상서좌승으로 옮겼다.
2.2. 혜제 시절
혜제가 즉위하고 양준이 보정대신이 되자 부함은 혜제가 나이가 어리지 않은 것을 들어 보정을 지내면 안된다는 상소를 올렸지만 양준이 듣지 않았으며, 사례교위 순개가 종형의 상을 치룰 때 양준을 찾아가자 예법보다 아첨하는 것을 우선으로 해서 순개를 탄핵했다. 부함이 자꾸 간하는 것에 대해 양준이 화가 나서 홍농태수로 옮기려다가 이빈이 올바른 사람을 내쫓는다면 인망을 잃을 것이라고 해서 중지했다.
양준의 동생인 양제가 대사마(사마량)을 불러들인다면 그를 피해야 집안이 온전할 수 있을 것이라 하자 부함은 종실과 외척이 서로 밑어야 편안하며, 대사마를 불러 경사로 오게 하면 함께 공정함을 높여 보정을 하면서 피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양제가 석숭을 통해 양준에게 전달했지만 양준이 이를 듣지 않았으며, 후에 양준이 주살되고 부함은 태자중서자로 옮겼다가 어사중승으로 옮겼다.
사마량이 보정하고 양준을 주살한 공로를 논의해 1081명이나 후로 책봉하자 부함은 공로가 없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면 안된다고 간언했지만 거절되었다. 양준이 권세를 가지고 외척을 등용한 것에 대해 언급하면서 권세에 대한 아첨하는 풍조를 배척하며, 하후준은 공이 없음에도 소부에 발탁되었다면서 이러한 풍조를 만들면 안된다고 간언했지만 거절되었고 관리 선발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
북지군의 중정을 지내다가 계모 두위의 상을 당해 관직을 떠났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의랑과 사례교위를 겸해 임명되자 사양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취임했다.
낙양에서 조정 관리들 중에서 세력이 강한 자들이 제멋대로 행동하고 뇌물이 공공연히 돌아 어지럽자 부함은 하남윤 사마담, 좌장군 사마천, 정위 고광, 겸 하남윤 하반을 탄핵하자 수도가 조용해졌고 왕실의 친척들이 두려워했다. 부함은 공자의 말과 서경을 인용해 3년마다 실적을 고려해 결정하는데, 왕융은 이를 따르지 않고 1년도 되지 않아서 그 우열을 결정해 벼슬을 옮겨 이 행위가 국정을 문란하게 하고 풍조를 어지럽혀 중랑 이중, 이의 등이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고치지 않으니 이들을 면직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왕융에게 다시 논의하게 했다.
어사중승 해결이 부함이 왕융의 법령에 대해 어긋나다고 하는 것은 관직을 함부로 침해한 것이라 하면서 부함을 면직시켜야 한다고 하자 조정에서는 허락하지 않았으며, 부함은 해결에게 반박하는 글을 올렸다.
3. 죽음
294년에 관직에 있는 채로 56세에 사망했고 조복 1구, 옷 1벌, 20만 전 등을 하사하고 시호를 정(貞)이라 했으며, 그의 아들로는 부부(傅敷), 부희(傅晞), 부찬(傅纂) 등으로 장자인 부부가 작위를 계승했다.
4. 평가
고영은 부함에 대해 장우는 사례에 있으면서 굳세고 충성스러우면서 과단성이 있었으며, 살피면서 꾸짖어 사람을 놀라게 했다. 비록 세상을 구제할 재주는 가지지 않았어도 한 분야에서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유순은 부함의 글에 대해 시인이 쓴 것과 같다고 칭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