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파
분리파(Secession) 1892~1910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세기말'(1890년대) 이후 유행한 미술 사조.
1897년 4월, 20여 명의 화가와 건축가가 아방가르드(전위예술가) 동맹을 결성하여 시작되었으며 이들에 대해서 '분리파(Secession)'라는 명명이 이루어진 데에서 유래한다. 이들의 캐치프레이즈는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만의 고유한 예술이, 예술에는 예술만의 고유한 자유가 존재한다." 였다. 인상주의와 아르 누보의 영향을 받은 회화 운동으로서 출발한 분리파 화가들은 기존 아카데미즘이나 관 주도의 전시회로부터 자신들의 예술을 '분리'시키려 했다.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 1907-1908
분리파의 리더는 <키스>, <환희의 송가> 등으로 유명한 아르누보 미술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로, 나체에 대한 묘사, 황금색을 아낌없이 사용한 그림을 그렸으며 당대부터 대단한 찬사와 격렬한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정작 본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지만... 클림트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황금공로훈장을 받은 적이 있는 데, 새로 건축된 제국극장에 천장화를 그리는 일을 훌륭하게 해냈기 때문이었다. 공예학교 출신인 클림트의 작품은 매우 장식적이고 디자인적이었다.
이외에도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 등의 작가들이 있다. 분리파들은 생활 양식에 있어서도 좋게 말하면 '자유분방', 나쁘게 말하면 '방약무인'한 스타일을 고수했다. 이 때문에 훗날 나치 시대에 분리파 예술가들의 그림은 퇴폐미술로 낙인찍히게 된다.
미술사적으로는 피카소의 입체주의나 뒤샹의 다다이즘에 비해 큰 평가를 받지 못하는 편이다. 퇴폐미와 장식적인 요소 외에 이념이나 양식적으로 딱히 주목할 부분이 없기 때문. 다만 당시 빈의 세기말적 분위기를 잘 반영한 사조로는 인정받고 있고, 표현주의로 분류되는 화가들이나, 다리파, 뮌헨 신미술가협회의 화가들이 잠시 신 분리파에 참가하기도 했다. 분리파의 성과는 오히려 현대 건축과 공예의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 분리파는 영국의 미술과 공예 운동, 독일의 유겐트슈틸 등과 더불어 근대 공예와 건축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