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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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존재했던 유럽의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인들의 대타협(독일어로 아우스글라이히-Ausgleich, 헝가리어로 키에제제시-Kiegyezés)으로 만들어진 국가다.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시스라이타니아(Cisleithania)[3] 과 헝가리를 중심으로 하는 성 이슈트반 왕관령[4] 으로 이루어져 있다. 복잡한 구조나 다양한 민족과 언어[5] 를 가지고 있었다.
2. 국가 상징
2.1. 명칭
독일어: Die im Reichsrat vertretenen Königreiche und Länder und die Länder der heiligen ungarischen Stephanskrone(디 임 라이히스라트 페어트레테넨 쾨니크라이헤 운트 렌더 운트 디 렌더 데어 하일리겐 웅가리셴 슈테판스크로네)
헝가리어: A birodalmi tanácsban képviselt királyságok és országok és a magyar szent korona országai(어 비로덜미 터나치번 케프비셸트 키라이샤고크 에시 오르사고크 에시 어 머저르 센트 코로너 오르사거이)
정식 명칭의 뜻은 '제국협의회(라이히스라트)를 대표하는 왕국들과 영토와 신성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슈테판)의 왕관의 땅'이다. 제국협의회를 대표하는 왕국들과 영토는 빈 제국의회의 의원을 뽑는 국가들이며, 성 이슈트반(헝가리의 초대 왕)의 왕관은 헝가리의 왕이 대대로 써온 왕관으로 이 왕관의 영토는 헝가리 왕국을 뜻한다.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의 땅이 제국협의회를 대표하는 왕국들과 영토와 별도로 언급된 것은 헝가리가 이제는 제국협의회의 일원이 아닌 독립적인 의회와 체제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KuK-Kaiser und König(lich)(카이저 운트 쾨니히(리히)) 제국으로 불리기도 한다.[6]
2.2. 국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두 주권국가의 이중 군주국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국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합스부르크 어기와 헝가리의 국기를 이어붙인 국기를 쓸 때도 있었으며[7] , 각자의 국기를 따로 쓰거나 하였다. 다만 상선기의 용도로 쓰일 깃발이 따로 필요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국기와 헝가리 국기를 합친 바리에이션이 나왔고, 이것이 국기처럼 인식되고 있다.
2.3. 국가
<Kaiserhymne>[8] 이라 불리며 <Volkshymne>[9] 라고 불리기도 하는 곡으로 요제프 하이든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 황제인 프란츠 2세의 생일날인 1797년 2월 12일에 맞추어 그에게 바친 곡이다. 황제 4중주 <Emperor Quartet> 작품 76의 3번에 포함되어 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되는 1918년까지 쓰였다. 독일의 국가인 <Deutschlandlied>의 멜로디로 사용되고 있으며 찬송가 245장인 <시온 성과 같은 교회>의 곡조로도 사용되고 있다. 또한 오스트리아 제국 시절 <Gott erhalte Franz den Kaiser>[10] 라는 제목으로 황실 찬가이자 국가로 불리기도 했다. 한편 이 곡조는 제국이 붕괴한 후 1919년에 들어선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에서도 1929년부터 파시즘 정권이 독재 체재를 강화하기 위해 헌법을 개정하면서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이 사라진 1934년까지 <Sei gesegnet ohne Ende>[11] 라는 제목으로 국가로 사용되었으며 헌법 개정 후 들어선 오스트리아 연방국의 국가로도 1934년부터 나치 독일에게 합병당하는 1938년까지 쓰였다.
2011년,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오토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12] 의 장례식에서 연주되기도 했다. 합스부르크 황실의 마지막 후예[13] 답게 그의 장례식에는 스웨덴의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 리히텐슈타인의 대공 한스 아담 2세, 불가리아의 전 차르인 시메온 2세, 몰타의 기사단장, 요르단의 왕자, 보헤미아의 공작, 오스트리아의 전 총리를 비롯한 전 세계의 왕족과 명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 > 사이에 있는 부분은 2번 부르라는 표시다.
황제가 바뀌면서 가사도 여러번 바뀌었다. 아래 가사는 1854년부터 부르기 시작한 가사이며 윗부분 최상단 동영상은 1826년 가사이다. 다른 시대의 가사는 여기를 참조.
3.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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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구역은 오스트리아 제국 관할 지역과 헝가리 왕국 관할 지역이 구별되어 있었으며, 비교적 후기에 점령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둘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빈 근교에서 도나우(Donau)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작은 지천 라이타(Leitha)강을 기준으로 잡아 오스트리아 제국 관할 지역은 시스라이타니아, 헝가리 왕국 관할 지역은 트란스라이타니아로 부르기도 한다.
지도에서는 시스라이타니아(1~15번), 트란스라이타니아(16~17번),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18번) 순으로 숫자가 매겨져 있으며, 시스라이타니아 지역은 각 지역의 로마자 알파벳순으로 매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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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의 오스트리아 제국의 민족 분포 사진이지만, 나중에 이탈리아 땅이 되는 연두색과 노란색을 제외하고 보스니아만 추가하면 1867년 당시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토와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략적인 민족 분포를 알 수 있는 지도다.
- 빨간색이 오스트리아의 중심지이자 독일계들의 거주 지역인 오스트리아 대공국, 잘츠부르크 공국, 티롤 제후백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케른텐 공국, 포어아를베르크 주
- 초록색이 헝가리계의 거주 지역인 헝가리 왕국
- 파란색이 체코계와 슬로바키아계 거주 지역인 보헤미아 왕국, 모라비아 변경백국이며 보라색과 접하는 곳은 폴란드계가 거주하는 오스트리아령 실레시아
- 어두운 파란색은 슬로베니아계의 거주 지역인 카르니올라 공국과 이탈리아계의 거주 지역인 오스트리아 연안 지대
- 하늘색은 크로아티아계의 거주 지역인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달마티아 왕국
- 보라색은 폴란드계, 우크라이나계, 루신계의 거주 지역인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 갈색은 세르비아계가 거주하는 보이보디나-바나트
- 주황색은 루마니아계가 거주하는 트란실바니아 대공국과 폴란드계, 우크라이나계, 루신계의 거주 지역인 부코비나 공국
- 연두색과 노란색은 롬바르디아로 이 지역은 후에 이탈리아 왕국이 차지하게 된다.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방안에 따른 지도에는 재편성 계획이 나온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공동통치국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이 지도에서 제외되었다. 제국 안에 새로 설정할 지역들의 경계선이 있다. 초록색은 해당 지역의 주요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국민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 그 지역 내에서 다시 주권을 부여받을 지역들인데, 대부분 독일어 사용 국민들이 사는 곳들이다.
4. 역사
4.1. 형성
1848년 3월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1830.8~1916.11, 재위 1848.12~1916.11)는 신 절대주의(바흐 절대주의) 통치를 유지했지만 많은 불만을 샀다. 게다가 오스트리아는 독일 연방의 프로이센 왕국을 무시하며 타협을 거부했다가 일어난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지고(1866.7), 독일 연방에서 강제로 쫓겨났다.(프라하 조약)[25] 이렇게 되자 합스부르크 황실의 영향력은 크게 축소되었고 제국 내 여러 민족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었던 1867년 오스트리아 지역의 인구는 4,500,000명으로 전체에 비하면 일부에 불과했다. 오스트리아 정부와 황제는 가장 강력한 저항 세력이자 제국 안에서 2번째로 많은 인구 비중을 차지하는 헝가리인들[26] 과 '대타협'(Ausgleich)을 맺고 이중 제국 체제를 만들었다.
대타협은 본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황제가 가지고 있던 헝가리 왕위를 분리해서 헝가리 왕국과 의회를 독립시키되, 헝가리의 왕위만은 계속 합스부르크 황제가 차지하는 일종의 동군연합이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간에는 공동의 중앙 정부 조직이 있었으므로 단순히 칭호만 공유하는 인적 동군연합(personal union)이 아닌 물적 동군연합(real union)으로 간주된다.
이 타협에 의거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는 헝가리 왕의 자리에 올랐으며, 제국의 중요한 업무인 국방, 재정, 외교만 동일한 대신이 관장하고 나머지 사항은 두 국가가 따로 내각과 각료를 두어 처리하기로 하였고 재정 분담금과 관세 등의 사안은 10년마다 조정하기로 합의하였다. 한편 헝가리의 불만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군대에서는 독일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였다.[27]
하지만 헝가리 왕국 내에서조차 슬로바키아인, 크로아티아인[28] , 세르비아인, 루마니아인, 루신인 등 다수의 민족 집단이 있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에도 이탈리아인, 슬로베니아인, 체코인,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이 소수 민족으로 있었으며, 양국 공통으로 유대인이 있었다.
4.2. 대외 정책
이런 상황에도 제국은 발칸 지역으로의 팽창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주요 국가가 1884~1885년의 베를린 회담 뒤에 아프리카로 급속히 팽창했던 반면에 해군력이 뒤떨어졌던 오스트리아는 가까운 발칸 반도를 식민지로 삼고자 했다. 이런 발칸 식민화를 오스트리아의 동진 정책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러시아 제국의 남진 정책과 충돌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많은 국민은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오스트리아 군대를 지지했고, 프랑스를 패배시킬 정도로 강력한 독일 제국이 오스트리아를 지지해줬기 때문에 정복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있는 서쪽과 남쪽으로는 판로를 확장할 수 없었던 오스트리아 정부 입장에서는 동쪽의 발칸 반도로 확장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있는 결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벗어난 발칸 국가들은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쉽게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또한 1890년대를 전후해서 오스트리아 제국을 주도해 온 독일계가 독일 민족 국가의 영향으로 오스트리아를 떠나 독일에 편입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분리 세력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방침도 변경되어서 원래는 제국 소속의 소수 민족들이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발칸 반도의 현상 유지 정책을 펼쳤지만, 이 시기부터는 제국을 이득으로 다시 하나로 묶기 위해 무력을 과시하고 영토 확장을 계획했다. 이런 팽창 정책으로 발칸 반도를 노리던 다른 주요 국가였던 러시아와 협력하려고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와 오스만 제국이 전쟁을 하면서 상황이 좋지 않아졌을 때 발칸 반도에서의 영향력을 늘리려고 하였으며, 이후에는 불가리아, 세르비아와 전쟁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세르비아는 연달아 일어난 두 전쟁을 빠르게 승기를 잡아서 큰 손실을 얻지 않았고, 원래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받던 루마니아마저 세르비아와 동맹을 맺은 대가로 원하는 것을 얻자 오스트리아의 지배력을 거부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러시아와 영토에 대한 영향권을 합의했으나, 러시아가 이러한 조약 변경을 다른 주요 국가들에게 알리고 인정받기 전에 1908년 오스만 제국이 '통일 진보 위원회(청년 튀르크당)'가 일으킨 혁명으로 혼란에 빠지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해 버림으로써 세르비아 왕국과 러시아 제국의 분노를 사게 된다.[29] 이러한 조치는 남슬라브 민족들에게 분노를 일으켰고, 러시아와도 적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당시 제국을 도와준 국가는 오스만에 영향력을 얻으려는 독일뿐이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주요 동맹은 독일만 남게 되었다.
4.3. 사회
오스트리아는 법적으로는 자유주의 등의 사상을 강하게 억압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오랜 다민족 국가의 역사로 인해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것'에 관대한 국가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심각한 탄압을 받지는 않았다. 이런 형식적이고 권위적인 통제와 느슨한 집행 방침을 당대인들은 '슐람페라이'적 관행이라고 불렀다.
검열은 형식적이었고, 수많은 글에서 여러 사상가와(심지어는 아나키스트도) 학자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했다.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공산주의 운동가인 블라디미르 레닌, 레프 트로츠키, 이오시프 스탈린조차 오스트리아에서 상당히 자유롭게 활동했다. 스탈린은 오스트리아에 머무는 동안 민족 문제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저서를 집필하기도 했는데, 그 자신이 조지아 출신이고 러시아도 오스트리아처럼 다민족 국가였다. 또한 1911년 제국의회에서는 이탈리아계 정당 소속 의원이 이탈리아계 영토의 분리를 주장하고 있었다.[30]
1907년 남성 보통 선거권이 도입된 이후 오스트리아 쪽 제국의회의 정당 구성을 보면 과격한 민족 세력이나 사회주의 계열 정당들까지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온건하긴 하지만 사회주의파였던, 빅토르 아들러의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이 오스트리아 원내 제1당이었다.[31]
오스트리아의 사회 보장 제도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제국의 관료들은 선진적인 복지 정책들을 도입했고, 국민들의 생활 수준도 당대 유럽에서 생각보다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노숙자 같은 사람에게도 사회 보장의 혜택은 골고루 돌아갔고 몇년 간 직업이 없어도 노숙자용 무료 숙소에서 잠을 자고 무료 급식소에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이밖에 공립 대학이나 고등 교육도 무료였는데, 재능만 있으면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교육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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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인 가톨릭 국가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남녀 간의 교제 또한 상당히 자유로웠다. 19세기 말엽부터 여성들 사이에선 미혼, 기혼 상관 없이 젊은 군인과 짧게 연애하고 헤어지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수백 년간 제국을 통치해온 합스부르크 가문의 권위는 제국 내 국민들은 물론 다른 유럽인들에게까지도 선망의 대상이 될 정도로 오랜 역사와 정통성을 갖고 있었지만, 동시에 합스부르크 제국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작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도 했다. 오스트리아는 구조적으로 민족 세력에 호의적이지 않기 쉬웠고, 과거 대독일주의에도 반대했다. 만일 민족주의에 의거해 독일인들이 독일인들의 제국을 만드는 것이 타당하다면, 동시에 제국 내 다른 민족들이 자신들의 민족 국가를 만드는 것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850년대 오스트리아 제국의 슈바르첸베르크 백작 등이 주창한 통일안은 '독일인들의 민족 국가'가 아니라 합스부르크 제국이 가진 모든 영토를 신생 독일국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대오스트리아주의에 가까웠다.폴란드인이나 아일랜드인 같은 '억눌린 민족들(submerged nations)'이 독립을 위해 이미 투쟁하고 있기는 했지만, 서유럽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심지어 러시아에서도― 민족주의는 응집력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전적으로 '억눌린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8세기에는 지배적인 독일계 엘리트 계층이 있었지만 심지어 이 독일인들에게도 이제는 북쪽에 새로운 독일 제국이라는 인접한 조국이 생겼다. 1867년 합스부르크 제국은 '억눌린 민족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마자르족에게 헝가리 왕국이라는 준 독립국 지위를 부여하여 스스로를 '이중 군주국'으로 재편했다. 헝가리 왕국은 독일인이 우세한 지위를 차지한 '오스트리아인들'과 군주(1848년 이래로 줄곧 통치한 프란츠-요제프 황제), 군대, 재정, 외교만을 공유했다. 독일인처럼 (그리고 사실 부다페스트에 국회의사당을 건립할 때 웨스터민스터 국회의사당을 본뜰 만큼 크게 찬탄한 영국인처럼) 마자르족은 스스로를 지배 민족이라고 여겼고 헝가리 왕국 내 슬라브 소수 민족들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을 강압적으로 통치했다. 이중 군주국 서쪽에서는 독일계 '오스트리아인'이 북부(체코인), 북동부(폴란드인과 루테니아인), 남부(슬로베니아인과 세르비아인)의 슬라브족뿐만 아니라 신생 이탈리아 왕국이 탐내는 알프스 산맥 남사면의 이탈리아권(독일어권 남 티롤도 포함)을 다스렸다. 부다페스트의 거친 마자르족 소지주들과 달리 빈의 합리적 관료들은 피지배 소수 민족들에게 관용을 베풀려고 노력했고 독일인과 동일한 권리를 부여했다. 그 결과 빈의 정부 기구는 마비되고 황제가 칙령으로 통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풍성한 문화 융합은 분명히 빈을 지적·예술적으로 활기 넘치는 독특한 도시로 만들었지만 그곳의 지식인들은 우려와 함께 때로는 절망감에 사로잡힌 채 미래를 내다봤다.
-Michael Howard, <제1차 세계대전> 中
언어적으로도, 시스라이타니아에서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공용어가 없었고 1867년 기본법에서는 모든 민족과 언어의 평등을 공식 인정했다. 물론 독일계 위주로 국가가 굴러갔던건 부정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스라이타니아의 다문화적 관용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이를 보여주는 예가 빈의 의회인데, 의도적으로 소수민족 언어를 사용하여 필리버스터를 유도하는게 가능했으며, 특히 체코인 의원들이 자주 이 방법을 써먹었다.[34]그러나 친오스트리아 슬라브주의는 사실상 제1차 세계 대전 마지막까지도 여전히 체코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32]
1917년 1월 말까지도, 체스키 스바즈(Českého svazu)의 최고 회의에서는 두 번이나 황제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1917년 1월 24일의 회의에서는 '우리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는다. 세계 대전 이후에도 체코 민족에게 속하는 모든 권리는 제국의 틀 내에서 그리고 오스트리아 군주국 내에서 성취될 것이다.' 라고 했으며, 1917년 1월 31일 회의에서는 '체코 민족은 합스부르크의 군주국 이외에는 아무런 미래도 없으며, 발전의 조건도 찾을 수 없다.' 라고 선언했다. 또한 1917년 5월 30일 제국의회에 참여한 체코 의원들도 황제와 제국을 지지하면서 민족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연방 국가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33]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향과 체코-슬로바키아의 문화적 자기 이해>, 김신규
그러나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와는 달리 민족 억압책을 폈기에, 오스트리아 같은 사상적 다양성이 없었다. 헝가리의 강압적인 마자르화 정책으로 헝가리 내의 소수민족들은 민족 정체성의 붕괴를 걱정해야 했으며, 그 중 슬로바키아인은 체코인과 연대해 헝가리에서 독립하려고 했다. 그 결과 탄생한 국가가 1918년의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다. 반면 체코(보헤미아) 민족 세력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때까지는 완전한 분리가 아니라 헝가리 이중제국 같이 제국 내에서 동등한 주권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35] 나중에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 대통령이 되고 국부로 대접받는 토마시 마사리크조차도 이 노선을 고수했다. 체코의 또 다른 분리 운동가 프란티셰크 팔라츠키도 체코인들이 제국이라는 틀에서 나오게 된다면 독일과 러시아에게 휘둘리게 될 것이라 보고 제국 내에서의 자립을 추구했다. 그리고 이 걱정은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4.4.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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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전통적으로 정부, 황실, 군대에 대한 인기가 높아 타 유럽 국가에서 이상하게 여길 정도였다. 먼저 합스부르크 가문은 1278년부터 수백 년 동안 지배 체제를 유지하며 1806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는 독일에서 일어난 개신교의 전파와 오스만 제국으로 대표되는 무슬림의 침공을 막는 역할을 수행했고, 합스부르크의 지배자들은 자국을 정통 기독교 신앙의 보루로 여겼으며, 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대는 대외 전쟁보다는 경찰과 같은 치안 사무를 주로 맡고 있었고, 군사 훈련이 힘들지 않았으며[36] 규율이 엄격하지도 않았다. 상관의 명령을 받지 않은 행동이라도 결과가 좋으면 주는 훈장[37] 도 있었다. 또한 육군의 제복이 민족별로 색깔이 다른 등 당대 유럽에서 가장 화려했고[38] , 황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각종 행사를 많이 벌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들 중에서도 트란실바니아나 갈리치아 같은 지방은 특히 미개발된 곳이었기 때문에, 그런 곳에 치안을 위해 육군 병력이 주둔하는 것은 합스부르크 황제의 힘을 과시하는 중요한 선전 효과를 주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 달마티아 등 다른 지역들에서 모여 국가를 지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대는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한 문필가는 제국이 없어진 이후 사람들이 더이상 '깃털 달린 모자를 쓴 군인들'을 볼 수 없다는 것에 매우 불평한다고 쓰기도 했다. 프랑스 못지 않은 패션과 문화의 강국이라 그런지 군복 디자인도 실용성은 둘째 치고 일단 보기에는 멋있는 청색 감도는 회색 군복에 철모가 아닌 훗날 나치 독일 국방군 M43 야전모의 전신이 되는 챙달린 모자를 쓰니 당대에도 오스트리아군은 전투력은 좀 허접해도 보기에는 멋진 군대로 통했다.
특히 슈타이어 만리허라는 총기 제조 회사가[39] 오스트리아에 있었는데 페르디난트 만리허라는 무기 기술자가 제작한 만리허 소총을 생산하면서 당시 유행하던 열강들의 볼트액션 소총에 오스트리아-헝가리도 편승하는데 일조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게 평화시 병력 확보는 엄청난 문제였다. 1910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총 인구는 5,000만 명 이상이었지만, 징집이 가능한 인원은 12만 5,000명에 불과했다. 평화시 오스트리아군 병력은 50만 명 이하였으며, 총동원령이 떨어지면 355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는 향토예비군, 동원예비군, 대체예비군과 같은 예비군 병력과 헝가리의 예비 병력인 혼베드 등과 같은 다양한 2선급 부대들이 포함된 숫자였다. 이론적으로 19세 이상의 신체 건장한 남성은 징병 대상이 되어 2년을 현역으로 복무하고 예비군에 편입되도록 되어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최소한 군사적 전통 면에서는 매우 강력한 군대였다. 오스트리아군 연대 대다수는 17세기 오스만 제국과 싸웠던 연대들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꾸준히 확장을 거듭하면서 오스트리아군 내부에서도 점점 비게르만계 출신 병사들의 수가 늘어났다. 독일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민족 출신 부대의 수가 독일어를 구사하는 부대의 수를 넘어서자, 충성심 및 의사소통과 관련된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1914년 당시, 전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병사들 가운데 30퍼센트만이 독일계였다. 대부분의 독일계, 헝가리계 병사들은 슬라브족 병사들에 비해 교육도 더 잘 받았고, 주로 포병, 공병, 기병 등의 특수병과에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소위 일반 보병이라고 불리는 보병 연대들은 배치되는 병력의 거의 70퍼센트가 슬라브계였다. 독일계, 헝가리계처럼 잘 교육받은 슬라브계 병사들은 체코계뿐이었으며 당연히 체코계 병사들도 특수병과에 배치되었다. 헝가리인은 슬라브인을 혐오했기 때문에 헝가리인과 슬라브인을 한 부대에 함께 배치할 때는 많은 주의가 필요했다.
또 문제는 제국군이 독일어를 공용어로 지정했음에도 언어가 달라서 제대로 된 의사 소통이 힘들었다. 역시 골치 아픈 문제였지만 오스트리아군은 '군대 슬라브어'로 널리 알려진 방언을 사용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신병들은 80개에 이르는 독일어로 된 군대 명령어 역시 함께 암기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때문에 일반적으로 대부분 독일인인 장교들과 슬라브인 출신 병사들은 아예 말을 서로 안 하기도 했다. 이런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슬라브인 군인들을 징집할수 밖에 없는 것이, 앞서 서술했듯 당시 제국 인구의 절반 이상이 슬라브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들을 제외했다가는 갈리치아를 방어할 군인들이 매우 부족해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뽑을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대의 장비가 부실하고 장교들의 기강이 해이한 것은 부분적으로는 적은 군비 탓이기도 했다. 적국의 첩보 기관에 매수되는 장교들이 나오기도 했는데, 1913년 일어난 레들(Alfred Redl) 대령 사건[40] 은 오스트리아 군부 최악의 사건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징집 인원은 연평균 15만 9,500명으로, 전체 인구대비 비율로 따졌을 때 독일 제국보다 20퍼센트 이상 적었지만, 러시아 제국에 비해서는 오히려 약 50퍼센트나 높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부대 가운데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부대는 제국의 핵심인 오스트마르크(Ostmark)와 헝가리 출신 부대들뿐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가장 큰 문제는 제국민의 거의 3분의 2가 주변 국가들과 민족적 배경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제국의 서부에 이탈리아 왕국과 인접한 티롤 제후백국, 오스트리아 연안 지대에는 이탈리아계가 다수 거주했고, 동부에는 보헤미아 왕국과 모라비아 변경백국에 거주하는 체코계,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에는 루신계와 루테니아(우크라이나)계, 폴란드계, 루마니아 왕국과 인접한 지역인 부코비나 공국과 트란실바니아는 루마니아계가 다수를 차지했으며 헝가리 왕국 내에 슬로바키아계가 있었다. 남부의 카르니올라 공국에는 슬로베니아계가, 세르비아 왕국과 인접한 달마티아 왕국과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그리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에 크로아티아계, 보슈냐크계, 세르비아계가 살고 있었다. 특정 민족으로 구성된 부대들을 해당 민족의 본거지로부터 먼 곳에 배치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슬라브계 병사들 없이 독일계 오스트리아인이나 헝가리인 부대들만으로는 동부전선을 모두 감당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어쩔 수 없이 슬라브계 부대들도 전선에 투입했지만, 1916년 중반 이후 슬라브계 부대들이 대러시아전에 투입하기에는 신뢰할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4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방 예산 지출의 절대명제는 '무조건 절약'이었다. 1911년까지만 해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방 예산은 독일 제국의 4분의 1도 채 되지 않았고, 러시아 제국 국방 예산의 4분의 1을 겨우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병력 규모도 1911년 말, 전시 군사력을 90만 명에서, 150만 명으로 증가한다는 계획이 채택되면서 늘어나기는 했지만, 주변 열강들과 비교하면 여전히 적은 수준이었다. 그 결과 개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무장 상태는 자국이 자랑하는 만리허 소총이라는 우수한 무기를[42] 제식 소총으로 택했음에도 러시아 제국군과 비교해서 그다지 나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실정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참모총장인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육군 원수는 1914년 6월에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사력을 과시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전력은 독일 제국의 도움 없이는 세르비아 왕국조차 제대로 제압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기 전, 독일 제국은 일단 전쟁이 터질 경우 단기전으로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으며 동부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작전 협조를 할 필요성도 별로 느끼지 못했다. 따라서 1896년~1909년에 양국 참모부 간의 교류는 거의 완전히 정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후 콘라트의 주장에 따라 양국 참모부 간의 교류가 재개되기는 했지만, 1914년 당시 양국 간에는 대러시아전을 염두에 둔 어떠한 합동 작전계획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개전과 동시에 향후 전쟁의 전망에 대한 양국 간의 견해 차이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개전 당시 총 80개 사단 가운데 70개 사단을 서부전선에 투입할 계획이었던 독일 제국은 프랑스 공화국을 처리하는 데 36일~40일이 걸리는 동안, 동부전선에서는 나머지 10개 사단으로 방어에 전념한다는 전략을 세워두고 있었다. 독일 제국의 속셈은 일단 서부전선을 정리한 후 80개 사단을 모두 동부전선에 투입해서 러시아 제국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줌으로써 평화를 애걸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반면 콘라트는 러시아령 폴란드(바르샤바 돌출부)의 남쪽 측면을 최우선으로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맹국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와 같은 동부전선과 서부전선 사이의 우선순위 문제를 놓고 끝내 해결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은 콘라트의 지휘 아래 동부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을 맡았지만, 러시아 제국군이나 이탈리아 왕국군을 상대로도 고전을 면치 못해 러시아 제국군의 브루실로프 공세에 무너졌고 이탈리아 왕국군에겐 이손초 전투, 카포레토 전투같이 매우 치열한 접전 끝에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했다. 심지어는 1차 대전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세르비아 왕국에게도 크게 고전하여 1914년의 세르비아 침공에서는 일시적으로 베오그라드를 점령하지만, 세르비아 왕국군의 역습에 말려들어 오히려 자국 국경으로 쫓겨나는 추태를 보였다. 이는 원래 세르비아 침공에 예비로 배정된 육군 제2야전군을 러시아 육군이 예상을 뛰어넘어 빠르게 갈리치아로 진격해 오자 이곳으로 돌려야 했고,[43] 당초 계획과 달리 공자와 방자의 전력비가 거의 '''1대1''' 수준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충분한 예비대가 연속적으로 투입되었다면, 세르비아 왕국군이 실제 역사처럼 선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평이 많다. 하지만 병력수가 비슷하다 해도 당시 가난한 신생 독립국의 군대인 세르비아 왕국군은 중화기는 물론 기본적인 소화기조차 턱 없이 부족하였다. 프랑스, 러시아 등이 세르비아에 긴급히 무기를 지원했지만, 전쟁이 워낙 뜻밖에 터진지라 제때에 도착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엄연히 열강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육군을 물리친 것은 전적으로 국왕 페타르 1세의 리더쉽 아래에 세르비아 군민이 단결하여 감투정신을 발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세르비아 왕국 정도는 오스트리아가 혼자서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던 독일 제국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이듬해인 1915년 마켄젠 육군 원수의 지휘하에 독일 제국 육군과 불가리아 왕국 육군이 개입함으로써 간신히 세르비아를 제압할 수 있었다. 쾨니히그레츠 전투는 독일 제국군의 실적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것이었다.
해군은 육군에 비해 국제 공통에 가까운 제복을 입어 대민 인지도가 좀 떨어지는 편이었지만, 이탈리아 왕국 해군을 상태로 승전보를 올리고 1차 대전 당시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이나 U보트 에이스 게오르크 폰 트랍 소령과 같은 인물을 내는 등 크게 선전했다. 패전으로 인해 내륙국으로 전락하기 전까지, 지중해 지역에서 이탈리아 해군과 패권 다툼에서 밀리지 않을 만큼 무시 못할 해양 강국이었다. 다만 수병들에 대한 처우는 타국 대비 좀 열악한 편이었는지, 전함 내에 가혹한 환경의 영창과 교수대 등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 제국이 해체된 후 해군 함선들은 협상국들에게 배상함으로 넘겨졌고, 대부분 해체되거나 표적함으로 처분되었다.
4.5. 재편성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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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오스트리아 합중국이라는 명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제안하고, 루마니아계 정치가 아우렐 포포비치(Aurel Popovici)가 1906년 세부 안건을 작성한 방안.
독일계들은 헝가리인들에게 권력을 배분하여 그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지만, 아무리 독일계와 헝가리인들을 모두 합해도 겨우 약 44%(독일계 약 24%, 헝가리계 약 20%) 정도라, 제국 내 반도 안되는 민족 세력이 모든 권력을 휘두르기는 어려웠다. 그나마도 오스트리아 지역의 인구는 저 비율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고 헝가리도 주변 지역을 행정 구역상 묶어 지배하면서 비율을 늘렸는데도 저 수준이어서 나머지 체코, 슬로바키아, 폴란드, 루마니아 등의 인구가 더 많을 정도였다. 거기다 독일계와 헝가리인을 제외하면 크로아티아인만 제한적으로나마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었고[44] 그 외의 민족들(체코인, 슬로바키아인,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루마니아인, 슬로베니아인, 이탈리아인, 루신인 등)은 동등한 주권이 없었다.[45]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정복을 당한 게 아니라 혼인으로 왕관이 넘어가며 합쳐진 것이라 헝가리 귀족들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 순종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헝가리의 전통을 준수할 것을 요구할 정도여서 그나마 자치를 누리게 한 것이고 19세기 격렬한 반발 끝에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동등한 권리를 얻어낸 영향으로 배타적인 성향이 있었기 때문에 헝가리 내 다른 소수 민족들은 자신들의 안전과 민족의 정체성 유지를 걱정할 정도였다.[46]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이런 민족 갈등을 해소해, 좀 더 체제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전 국토 내부 경계선을 민족과 언어권 위주로 다시 만들자고 제안했다. 새로 편성한 각 지역에 동등한 권리를 줘 제국을 아예 연방 국가로 만들자는 대오스트리아 합중국(Vereinigte Staaten von Groß-Österreich, United States of Greater Austria)을 말하는 것이었다.[47] 이 계획 아래 각 언어나 문화 정체성을 살리고 민족 갈등도 줄이자는, 다른 사람도 아닌 황태자가 본인이나 독일계의 기득권도 선뜻 내놓겠다는 방안이었다.
슬라브인, 루마니아인, 이탈리아인들은 이 방안을 지지했지만 독일계와 헝가리인들은 이 방안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특히 헝가리는 이 방안으로 자신들의 이권과 영토[48] 가 대폭 줄어들 것을 우려했다. 그리고 제국 내 슬라브인과 통합하려는 세르비아 왕국의 민족주의 세력도 위기감에 휩싸였으며, 이후로도 이 방안을 추진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슬라브인을 회유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1914년 사라예보 사건으로 대공을 암살하게 된다. 이를 구실로 레오폴트 베르히톨트 외무부 장관과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원수는 전쟁을 지지하였고[49] , 황태자의 죽음에 격노한[50]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다.
4.6. 해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동맹국으로 참여했다가 패배한 이후, 민족자결주의에 따라서 승전국들이 함께 패전한 헝가리를 비롯해 체코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트란실바니아, 갈리치아 같은 곳들을 모두 분리시켜야 했고 그 이후 오스트리아는 스위스보다 조금 큰 소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도 1918년 11월 제위에서 밀려나서 제국은 해체되었다.
처음 협상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해체시킬 생각은 없었다. 1917년까지만 해도 같은 다민족 제국인 러시아 제국이 협상국으로 남아 있었고 발칸 반도에서의 전황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무너지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전쟁에서 이탈하자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해체되고 만다. 이후 해체된 제국 내의 독일어권 지역에서는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을 수립,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제국 내 모든 독일어권 지역들을 영토로 선포했으나 이미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국가들과 협상국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현재의 오스트리아의 영토만을 가지게 된다.
5. 황제
6. 출신 및 주요 인물
황실 인물은 합스부르크 가문 문서로.
- 레오폴트 베르히톨트 - 독일계 정치인[51]
- 카를 레너 - 독일계 정치인[52]
- 엥겔베르트 돌푸스 - 독일계 정치인[53]
- 쿠르트 슈슈니크 - 독일계, 슬로베니아계 정치인[54]
-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 독일계, 체코계 정치인[55]
- 아돌프 히틀러 - 독일계 정치인[56]
- 알치데 데 가스페리 - 이탈리아계 정치인[57]
- 에드바르트 베네시 - 체코계 정치인[58]
- 에밀 하하 - 체코계 정치인[59]
- 요제프 티소 - 슬로바키아계 사제, 정치인[60]
- 살러시 페렌츠 - 헝가리, 아르메니아, 독일, 루신, 슬로바키아계 정치인[61]
- 너지 임레 - 헝가리계 정치인[62]
-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 폴란드계 정치인[63]
-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 폴란드계 정치인[64]
- 스테판 반데라 - 우크라이나계 정치인[65]
- 요시프 브로즈 티토 -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계 정치인[66]
- 안테 파벨리치 - 크로아티아계 정치인[67]
- 프란체스카 도너(이부란) - 유대계 대한민국 대통령 배우자
- 시몬 비젠탈 - 유대계 나치 사냥꾼
-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 독일계 군인[68]
- 스베토자르 보레비치 - 크로아티아계[69] 군인[70]
-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 독일계 군인[71]
- 헤르만 쾨베시 폰 쾨베셰사 - 독일, 헝가리계 군인[72]
- 알렉산더 폰 크로바틴 - (불명)[73] 군인[74]
- 프란츠 로어 폰 덴타 - (불명)[75] 군인[76]
- 호르티 미클로시 - 헝가리계 군인, 정치인[77]
- 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트랍 - 독일계 군인[78]
- 에르하르트 라우스 - 독일계 군인[79]
- 로타르 렌둘릭 - 크로아티아계 군인[80]
- 프란츠 뵈메 - 독일계 군인[81]
-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 독일계 나치 친위대원, 경찰[82]
- 오딜로 글로보츠닉 - 독일, 체코, 슬로베니아계 나치 친위대원, 경찰[83]
- 아돌프 아이히만 - 독일계 나치 친위대원[84][85]
- 오토 슈코르체니 - 폴란드계 나치 친위대원, 군인[86]
- 아몬 괴트 - 독일계 나치 친위대원[87]
- 바소 추브릴로비치 - 세르비아계 암살[88] 자, 교수, 정치인
- 프란츠 카프카 - 유대 및 체코계 작가
- 카렐 차펙 - 체코계 작가
- 라이너 마리아 릴케 - 독일계 작가
- 로베르트 무질 - 독일계 작가
-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 독일 및 우크라이나계 작가
- 슈테판 츠바이크 - 유대계 작가
- 아르투어 슈니츨러 - 유대계 작가
- 지그문트 프로이트 - 유대 및 독일계 심리학자
- 알프레트 아들러 - 독일계 심리학자
- 빅토르 프랑클 - 유대계 심리학자
- 알렉시우스 마이농 - 이탈리아계 심리학자, 철학자
- 에른스트 마흐 - 독일계 철학자
- 오토 바이닝거 - 유대계 철학자
- 에드문트 후설 - 유대계 철학자
- 칼 포퍼 - 유대계 철학자
- 카를 카우츠키 - 체코계 철학자
- 테오도르 헤르츨 - 유대계 언론인, 시오니즘 운동가
-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 유대 및 독일계 철학자
- 쿠르트 괴델 - 독일계 수학자, 철학자
- 에르되시 팔 - 헝가리, 유대계 수학자
- 존 폰 노이만 - 헝가리, 유대계 수학자
- 조지프 슘페터 - 독일 및 체코계[89] 경제학자, 철학자
- 오토 노이라트 - 독일계 경제학자
- 칼 폴라니 - 헝가리, 유대계 경제학자
- 루트비히 볼츠만 - 독일계 물리학자
- 볼프강 에른스트 파울리 - 유대 및 독일계 물리학자
- 에르빈 슈뢰딩거 - 독일 및 영국계 물리학자
- 그레고어 멘델 - 독일계 사제, 유전학자
- 카를 란트슈타이너 - 유대계 병리학자
- 페르디난트 만리허 - 독일계 및 체코계 발명가
- 헤디 라마르 - 유대계[90] 배우, 발명가
- 니콜라 테슬라 - 세르비아계 발명가
- 오스카 쉰들러 - 독일계 사업가
- 구스타프 클림트 - 독일계 화가
- 에곤 실레 - 독일계 화가
- 구스타프 말러 - 유대계 음악가
- 안톤 브루크너 - 독일계 음악가
- 프란츠 폰 주페 - 독일계 음악가
- 한스 로트 - 독일계 음악가
- 한스 리히터 - 독일계 음악가
- 슈트라우스 가문 - 독일계
- 요한 슈트라우스 2세 - 음악가
- 요제프 슈트라우스 - 음악가
-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 - 음악가
- 요한 슈트라우스 3세 - 음악가
- 칼 미하엘 치러 - 독일계 음악가
- 안톤 베베른 - 독일계 음악가
- 알반 베르크 - 독일계 음악가
- 아르놀트 쇤베르크 - 유대계 음악가
- 한스 아이슬러 - 유대계 음악가[91]
- 프리츠 크라이슬러 - 유대계 음악가
- 에리히 클라이버 - 독일계 음악가
- 카를 뵘 - 독일계 음악가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그리스, 슬로베니아계 음악가
- 한스 리히터 - 헝가리계 음악가
-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 유대계 음악가
- 프란츠 리스트 - 헝가리계 음악가
- 코다이 졸탄 - 헝가리계 음악가
- 벨라 바르톡 - 헝가리계 음악가
- 도라 페야체비치 - 크로아티아 및 헝가리계 음악가
- 에르뇌 도흐나니 - 헝가리계 음악가
-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 체코계 음악가
- 안토닌 드보르자크 - 체코계 음악가
- 레오시 야나체크 - 체코계 음악가
- 요제프 호프만 - 폴란드계 음악가, 발명가
- 프리츠 랑 - 유대계 영화감독
- 벨라 루고시 - 헝가리 및 세르비아계 배우
- 리 스트라스버그 - 유대계 배우
- 마티아스 신델라 - 체코계, 유대계 축구선수, 감독
- 후고 마이슬 - 유대계 축구선수, 감독
- 빌모스 좀보리 - 루마니아계 축구선수
- 알로이스 히틀러 - 독일계 공무원[92]
7. 기타
- 패러독스가 제작하고 유통하는 게임이며 19세기와 1차 세계 대전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빅토리아 2에선, 게임 시작 시점에는 아직 대타협이 이루어지기 전이었기에 오스트리아 제국이 등장하지만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헝가리 민족국가 형성 반란이 일어난다. 오스트리아가 이를 물리치고 나면 대타협을 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통일을 위해 독일계 소국들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향권에서 빼앗으려는 프로이센과 역시 통일을 위해 롬바르디아를 되찾으려는 사르데냐-피에몬테에게 영 좋지 않은 꼴이 되기 마련이다. 플레이어가 잡으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본문에 언급되었던 재편성을 통해 도나우 연방을 구성할 수도 있지만...
유명 모드인 카이저라이히에서는 오헝이 승전국이라 제국 자체는 존속해 있지만 오스트리아 제국과 속국 헝가리, 보헤미아, 일리리아, 갈리치아로 분열되어 있는 상태로 시작한다. 설정상 카를 1세가 소수민족들에게 광범위한 주권을 약속한 대가로 분열되었다고 한다. 이후 7차 대타협을 통해 현 상태를 유지하거나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구상했던 동등한 민족들의 연방 국가를 설립할 수 있다. 아니면 군대로 소수민족들을 억누르는 독재국가가 될 수도 있다.
-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쓰여졌던 1897년의 트란실바니아 지역, 즉 드라큘라 성이 있던 지역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헝가리 왕국쪽 영토였다. 드라큘라 백작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귀족이었던 것이다!
- 사운드 오브 뮤직의 등장 인물이자 모델인 트랍 대령은 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군 잠수함장이자 사령관 출신이다. 제국이 해체되고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수립된 뒤에도 오스트리아에 정착한 것이다.
- 2017년 연립정부에 참여한 오스트리아 자유당 대표는 TV토론에서 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의 지역협력체인 비셰그라드 그룹에 오스트리아가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스트리아까지 비셰그라드 그룹에 가입하면 이들 나라의 지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비슷해진다. #
- 2012년 국내에 정발된 요제프 로트의 소설 라데츠키 행진곡은 제국이 존속하던 기간의 한 가문의 일대기를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