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요제프 1세

 

'''프란츠 요제프 1세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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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z Joseph I'''
'''이름'''
프란츠 요제프 카를
(Franz Joseph Karl)
'''출생'''
1830년 8월 18일
[image] 오스트리아 제국 쇤브룬 궁전
'''사망'''
1916년 11월 21일 (86세)
[image]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쇤브룬 궁전
'''재위'''
오스트리아 제국황제, 헝가리, 보헤미아, 달마티아, 크로아티아의 왕
1848년 12월 2일 ~ 1916년 11월 21일
롬바르디아 - 베네치아의 왕
1848년 12월 2일 ~ 1866년 10월 12일
독일 연방 의장
1850년 5월 1일 ~ 1866년 8월 24일
'''배우자'''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1854년 결혼 / 1898년 사망)
'''자녀'''
조피, 기젤라, 루돌프, 마리 발레리
'''아버지'''
오스트리아 대공 프란츠 카를
'''어머니'''
바이에른의 조피 공주
'''형제'''
막시밀리아노 1세, 카를 루트비히, 마리아 안나, 루트비히 빅터
'''서명'''
[image]
[image]
문장
독일어: Franz Joseph I. (프란츠 요제프 1세)
헝가리어: I. Ferenc József (페렌츠 요제프 1세)
1. 개요
2. 칭호
3. 즉위 배경
5. 재위
5.1. 통치
5.2. 외교
5.3. 이중제국 성립
5.4. 실책
5.5. 사망
6. 가족 관계
6.1. 비극으로 얼룩진 가정사
6.2. 후계자 후보들
6.3. 가계도
6.4.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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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Viribus Unitis'''[단결]

'''Virtutis Confido'''[미덕]

오스트리아 제국의 3대 황제이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초대 황제.

2. 칭호


프란츠 요제프 1세가 1848년 오스트리아 황제로 즉위했을 때의 공식적인 칭호는 다음과 같았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오스트리아의 황제, 헝가리의 왕, 보헤미아의 왕, 롬바르디아-베네치아의 왕, 달마티아의 왕,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의 왕, 갈리치아-로도메리아의 왕, 일리리아의 왕, 예루살렘의 왕, 오스트리아 대공, 토스카나의 대공, 크라쿠프의 대공, 로트링겐의 대공, 잘츠부르크의 공작, 슈타이어마르크의 공작, 케른텐의 공작, 카르니올라의 공작, 부코비나의 공작, 트란실바니아의 대공, 모라비아의 변경백, 상하 실레시아의 공작, 모데나, 파르마, 피아첸차 및 구아스탈라, 옹슈비엥침, 자토르 및 테센, 프리울리, 두브로브니크자다르의 공작, 합스부르크티롤의 후백작, 키부르크, 고리치아 그라디스카의 후백작, 트렌토 및 브릭센 공, 상하 루사티아 및 이스트리아의 변경백, 호에넴스, 펠트키르히, 브레겐츠, 존넨베르크의 백작, 트리에스테, 코토르, 빈디츠 마르흐의 영주, 독일 연방의 의장이신 프란츠 요제프 1세 폐하'[원문]
이후 이탈리아 통일 전쟁으로 베네치아와 롬바르디아를 잃고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독일 연방에서 쫓겨난 뒤 1867년 대타협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창설을 통해 헝가리의 사도왕을 겸임하면서 공식적인 칭호는 아래와 같이 변경되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오스트리아의 황제, 헝가리의 사도왕, 보헤미아,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갈리치아, 로도메리아, 일리리아의 왕, 예루살렘의 왕, 오스트리아 대공, 토스카나 대공, 크라쿠프 대공, 로트링겐, 잘츠부르크,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카르니올라, 부코비나의 공작, 트란실바니아의 대공, 모라비아의 변경백, 상하 슐레지엔, 모데나, 파르마, 피아첸차, 구아스탈라, 옹슈비엥침, 자토르 및 테센, 프리울리, 두브로브니크자다르의 공작, 합스부르크티롤, 키부르크, 고리치아 및 그라디스카의 백작, 트렌토 및 브릭센 공, 상하 루사티아 및 이스트리아의 변경백, 호에넴스, 펠트키르히, 브레겐츠, 존넨베르크의 백작, 트리에스테, 코토르, 빈디츠 마르흐의 영주, 세르비아의 군주이신 프란츠 요제프 1세 폐하'[원문2]

3. 즉위 배경


[image]
청년기
오스트리아의 황제인 페르디난트 1세는 어려서부터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장애가 있었고 정신적 고자[1]였기 때문에 바로 아래의 동생인 프란츠 카를 대공의 장남인 프란츠 요제프가 이미 일찌감치 추정상속자로 취급받았으며, 이에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프란츠 요제프에게 제왕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페르디난트 1세가 혁명의 와중에 퇴위하자 제위는 프란츠 카를 대공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마리아 안나 황후와 조피 대공비는 프란츠 카를 대공에게도 페르디난트 1세와 마찬가지로 정신지체 증상이 있다는 점을 문제로 삼아 아들에게 양보하도록 강요했다. 이에 따라 프란츠 요제프가 황제가 되었다.
프란츠 요제프가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의 황제로 재위하던 시절까지만 해도 오스트리아는 제국이었다. 그러나 헝가리는 프란츠 요제프가 재위하던 시절, 별도의 내각을 가진 채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가를 섬기는 왕국으로 분리되었고, 그의 재위 중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도 했다.

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상징


[image]
노년기
프란츠 요제프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2]처럼 60년이 넘는 재위 기간 동안 근면성실한 국정 수행[3]과 엄격함, 그리고 가족사의 비극으로 인해 생전과 사망 이후 모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전 국민의 사랑과 존경, 그리고 두려움을 받았다. 그야말로 백발의 노황제 이미지에 딱 맞는 인물. 당대 남자들은 대부분이 황제의 수염과 구레나룻을 모방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제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으로 넘어간 시절에도 빈 시내 곳곳과 가장 호화로운 호텔인 자허 호텔[4]에 초상화가 걸려 있었으며, 제국 호텔에는 '''아직까지도''' 황제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이렇듯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처럼 '''존재 자체가 국가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이런 체제가 으레 그렇듯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프란츠 요제프라는 인물 자체의 카리스마와 그에 의한 결집력에 의해 유지되는 불안한 상태였다. 1차 세계 대전 중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사망한 후 급속도로 제국이 붕괴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5]

5. 재위



프란츠 요제프 1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아버지

5.1. 통치


역사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파란만장한 사건을 겪은 황제. 역사적으로는 1848년 유럽을 뒤흔든 거대한 혁명[6]을 겪고 그 격동의 와중에 백부 페르디난트 1세 황제의 양위로 즉위했다.
1850년, 러시아가 팍팍 밀어준 덕분에 프로이센 왕국과 담판을 지어 올뮈츠 협약으로 독일 연방에서 오스트리아의 우위를 확인, 프로이센에 일대 굴욕을 안겨주었다. 이때부터 자신감이 생겼는지 검열과 경찰국가 체제를 동원한 강력한 신(新) 절대주의 체제로 나라를 다스렸는데, 문제는 이게 '''시대에 완전히 뒤떨어진 발상'''이었다는 점.
이러한 전제주의 통치 와중인 1853년에는 헝가리인 애국지사가 황제를 암살하려 하기도 했으며[7] 이 사건에 충격을 받아 빨리 후손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난 모후의 계략(?)으로 이듬해(1854) 친척인 바이에른 왕가인 비텔스바흐 가문엘리자베트(애칭 시씨)와 결혼했다.[8]

5.2. 외교


황제 본인은 황제가 수행할 중요 지상과제로 외교와 국방을 고려해 외교 문제에 많이 간섭했는데, 1853년부터 1856년까지 일어났던 크림 전쟁 중에 러시아가 점령했다가 영국과 프랑스의 개입으로 반환한 왈라키아-몰다비아를 점령, '''러시아에게 빅엿을 먹였다.''' 이 행동은 1849년에 대군(약 16만 명)을 보내 혁명을 진압하도록 도와준 러시아에 대한 배신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크게 분노했고, 오스트리아의 얌체짓에 영국과 프랑스도 등을 돌려 크림 전쟁 후 오스트리아는 국제적으로 고립당했다. 그야말로 병크였던 셈.[9] 이 배신 행위로 인해 러시아와의 관계는 악화되었으며, 프로이센과의 관계는 올뮈츠 조약으로 인해 냉전, 영국과 프랑스와의 관계는 왈라키아와 몰다비아를 무단으로 점령한 얍삽한 짓에 오스트리아에 대해 냉소와 경멸을 보내는 상황이었으며, 이탈리아는 원래 반(反) 오스트리아 지역인지라 그야말로 오스트리아 제국은 삼제동맹 체결 이전까지 외교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상황에 놓이게 된다.
1859년에는 프랑스 제2제국의 황제 나폴레옹 3세(재위 1852년~1870년)의 강력한 지원을 받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군비를 증강해 도발해오자 재상 카보우르가 원하던 대로 먼저 선전포고를 때려버리는 대실수를 저지른다. 그 결과 마젠타와 솔페리노 전투에서 잇따라 패해 롬바르디아를 상실했고[10] 1866년 프로이센과의 7주 전쟁에서 패배해 베네치아까지 상실했다.
같은 해(1866) 통일 독일 문제의 주도권 쟁탈전에서 최종적으로 프로이센 왕국에 패배해 독일 연방에서 강제로 배제당했다(1866, 7주 전쟁). 그래도 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는 그 외의 땅들[11]은 철저하게 지키고 있기는 했다. 다만,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영토를 상실할 뻔한 위기를 겪는데, 빌헬름 1세와 독일 장군들은 오스트리아 땅을 갈라먹길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비스마르크가 이를 억지로 가라앉히면서 그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그러나 1873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재상이자 외교장관이었던 헝가리 출신 귤라 안드라시의 활약으로, 앞서 말했듯이 악연이 있던 러시아에게는 그 바로 밑에 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함으로서 다시 한번 강력한 압박을 행사하고, 7주 전쟁으로 사이가 좋지 않던 독일 제국과 강력한 동맹(대 러시아 방위동맹)을 맺는 성공적인 외교적 성과를 기어코 만들어냈다.
더불어 오스트리아 황제로서 콘클라베에 거부권을 행사한 마지막 군주이기도 하다. 교황 레오 13세 선종 후 열린 1903년 콘클라베에서 전임자처럼 진보적인 성향인 마리아노 람폴라 추기경의 선출이 유력해지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크라쿠프 대주교 푸치나 추기경으로 하여금 거부권을 행사하도록 했다. 결국 이 해에 선출된 교황은 보수 성향의 비오 10세였다. 비오 10세는 선출 다음 해인 1904년, 오스트리아 황제의 거부권을 박탈해 추기경이 아닌 인물의 콘클라베 간섭을 영구히 차단했다.

5.3. 이중제국 성립


1866년의 잇따른 대실패로 말미암아 1867년, 헝가리인과 타협해 오스트리아 제국의 연방 구성국이던 헝가리 왕국을 오스트리아 제국과 동등한 위치로 승격시킨 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제국을 개편했다.[12] 하지만 대타협 이후에도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전제적 통치로 일관하며 개혁을 거부했다.
이렇듯 평생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떠받친 인물이지만, '''1867년 이중제국 체제의 선택'''[13]과 황제 자신도 인정한 '''슬라브족에 대한 차별 정책''', 그리고 러시아와 대립했던 '''발칸 반도로의 동진 정책'''이 공교롭게도 그의 사후, '''제국 해체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에서는 과실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최근까지 이어진 세르비아의 혼란에 일부 책임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5.4. 실책


오스트리아 제국 시절에는 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도 전제적 통치로 일관했다. 1848년 헝가리 반란사태를 계기로 드러났던 제국의 허약한 군사력을 강화시키는데 무관심했고[14], 그 결과 이탈리아 통일 전쟁과 보오전쟁에서 대패하게 된다. 결국 그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헝가리 귀족들과 대타협을 하여 이중 제국을 성립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지경에 이르고도 전제적 통치를 고수하면서 다민족 국가인 제국에 '''독일어 사용만을 허용'''하여 민족주의의 발흥을 불러왔다. 또한, 그는 산업발전에도 무관심하여 동시대의 프로이센과 독일제국은 산업화를 이룩하여 부국강병에 성공한 반면[15], 오스트리아 제국 내의 산업 지역은 오스트리아 대공국, 보헤미아 왕국, 모라비아 변경백국, 이스트리아 반도 정도였고 나머지 지역은 낙후되어 있었으며, 이는 오스트리아의 부국강병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16] 게다가 그는 보스니아 합병 문제로 삼제 동맹을 깨뜨려버리는 우를 범하고 만다.[17]
그리고 빌헬름 2세가 독일 제국의 황제가 된 후에는 능동적인 외교는 커녕 독일에 과잉 의존했으며, 독일 제국의 카이저가 독일을 스스로 고립시키는 행동을 하고 있음에도 이를 방관하기만 했다.[18] 그는 오로지 자기권력 지키기에만 집중했으며, 나라의 분열을 막기 위한 방책을 제시하던 조카를 멀리하는 등 제국발전에 저해하는 짓들만 벌였다.
그러면서도 1914년에 사라예보에서 조카가 살해당하자, 이를 핑계로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를 병합하기 위해 군사력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대전쟁을 도발했다.[19] 제1차 세계대전 와중에 발생한 이중제국군의 전쟁 범죄에도 그의 책임이 없다고 볼 수 없다. 결국 이기지도 못할 전쟁을 벌여[20] 제국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으며, 그의 사후 2년도 채 안되어 제국은 붕괴되고[21], 오스트리아는 내륙국이자 소국으로 전락하여 우여곡절 끝에 오늘날에 이르게 된다.

5.5.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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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이끌고 싸우다가 브루실로프 공세포로로 잡힐 뻔하다가 간신히 후퇴하였다. 이내 독일 제국의 강요로 오스트리아 제국군 총사령관에서 해임되는 등 2년간 제국을 이끌다가 제1차 세계 대전의 와중인 1916년 11월 21일 68년간 제국을 짊어졌던 86세의 노황제는 쇤브룬 궁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황실묘지(Kaisergruft)에 안장되었는데, 그의 석관 양옆에는 황제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던 아내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황후와 아들 루돌프 황태자가 잠들어 있다.

6. 가족 관계



6.1. 비극으로 얼룩진 가정사


[image]
사적으로는 '''매우''' 불행했다. 당대 유럽 군주들은 숱한 염문을 뿌리는 등 추문을 달고 살았던 것과는 달리 프란츠 요제프는 그런 쪽으론 깨끗했던 편이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는 초능력이 있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의 가정은 콩가루 집안이라는 말도 모자랄 만큼 문제가 많았다. 심지어 주변 사람들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여 엄청난 심적 고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산 걸 보면 정말 대단한 인물. 하지만 장수한 덕분에 그는 온갖 못 볼 꼴까지 다 보게 되었다. 오죽했으면 '프란츠 요제프가 젊었을 적 사형시킨 헝가리 민족주의자의 어머니가 그에게 저주를 내렸다'는 소문까지 돌았겠는가.
황제의 가족 관계는 정말로 꼬일 대로 꼬여있었다. 젊은 시절의 프란츠 요제프는 유약한 성격인지라 여장부였던 어머니 조피 대공비의 기세에 눌려 지냈고, 결혼 후에는 거기에 아내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와 어머니 조피 사이의 갈등이 더해졌다. 자유롭고 발랄한 가풍의 바이에른에서 자란 엘리자베트는 엄격한 빈 궁정에 적응하지 못했다. 결혼식 직전 엘리자베트가 시어머니 조피에게서 받은 건 예물이나 편지 같은 게 아니라 '''6페이지에 걸친 궁중예법'''이었다고 한다. 결혼 후에도 조피는 며느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며 간섭했고, 첫 아이로 딸이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이름을 따다 붙이고 엘리자베트에게서 빼앗아 양육했다.[22] 거기다 이 어린 조피 황녀가 엘리자베트가 고집 부려 동행한 여행에서 사망하면서 조피 황태후가 육아를 맡는 것이 더욱 정당화되어 조피는 그 후 태어난 세 아이 중 막내딸 마리 발레리를 제외한 둘을 자신이 키웠고, 엘리자베트는 아이들이 자기보다 할머니를 더 따르는 것에 큰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일중독자인 프란츠 요제프는 격무에 시달리느라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황제는 자신의 아내를 위해 어머니에게 자식들을 돌려주라고 부탁했지만 조피는 아이들을 자신에게서 뺏어가려 한다면 다른 곳으로 떠나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어머니한테 이렇게 휘둘리고 사니 이 양반도 한심한 인간일 수밖에. 엘리자베트는 자신을 사랑한다지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는 남편을 원망했고, 결국 현실에서 도피해 평생을 고독 속에 살며 여기저기로 여행만 다닐 뿐이었다. 프란츠 요제프도 마찬가지로 이런 아내의 행동으로 크게 상처받았지만 그녀를 차마 비난하지는 못 했다.
아이들 역시 불행했다. 아버지는 일만 하느라 제대로 얼굴도 볼 수 없었고 어머니도 빈에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할머니 조피는 지나치게 엄격하고 손주들에게 사랑을 주기보다는 황족으로서 행동하기를 바랐다.[23] 이런 가운데 자식들은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로 자랐다. 다만 막내딸 마리 발레리만은 예외였다. 엘리자베트가 시어머니에게 빼앗기지 않고 직접 양육한 자식이었던지라 자기 손으로 못 키웠던 위의 세 아이 몫까지 쏟아부은 듯한 애정을 받았다.[24] 특히 루돌프 황태자는 차기 황제라는 이유로 도가 지나칠 정도로 엄격한 교육을 받았는데, 조피가 임명한 군사교관에게 '''7세'''부터 군대식 교육을 받았다. 겨울 새벽 눈 속을 행진시킨다든지, 냉수목욕이라든지, 숲 속에 혼자 내버려두고 온다든지. 심지어 루돌프를 깨울 때는 옆에서 권총을 쏴서 그 소리로 일어나게 했다고 한다.[25] 이것이 황제의 자식들이 부모의 사랑을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할 나이에 받았던 것들이었다. 루돌프는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를 원망하는 반항적인 청년으로 자라났고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는 자신의 의무를 등한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루돌프를 이해하지 못해 부자 관계 또한 막장이었다. 이처럼 황제의 가정에는 '''행복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26]
21세기 들어 아내와의 불화에 대해 새로운 연구가 진행되었다. Family Tree DNA라는 집단의 DNA 연구에 의하면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인인 찰스 홀트(Charles Holt, 1865~1947)가 프란츠 요제프의 사생아일 확률이 매우 높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합스부르크로렌 가문의 부계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 찰스 홀트가 태어난 1865년 이후로 엘리자베트 황후는 헝가리 독립을 지지하고(1867년), 막내인 마리 발레리를 출산(1868년)[27]하는데, 그 직후부터 궁정에 머무르지 않고 평생 여행을 다니는 삶을 살게 된다. 이 시기가 묘하게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엘리자베트가 다른 여자와 관계하여 사생아를 낳은 프란츠 요제프를 전보다도 더 경멸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된다.
1889년 아들 루돌프 황태자가 사망하고, 1898년에는 아내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황후가 이탈리아인 아나키스트 루이지 루케니에 의해 암살당했다.[28] 아내의 죽음을 듣게 된 장소는 엘리자베트가 그렇게도 혐오하던 집무실 책상 위였다. 부관의 보고를 받고 황제는 집무실 책상에서 쓰러져 잠시 정신을 잃었고, 깨어난 후 한 말은 '''"짐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짐에게는 이제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구나."'''였다. 그나마 그에게 위안이 된 것은 돌봐주지 못한 아들 사후에 자책하며 늘 상복만 입고 다닐 정도로 우울하게 살던 아내가 자살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런 일들 이후에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지만 특유의 성실함과 의무감으로 사망할 때까지 무너져가는 제국을 떠받치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있었다는 묘사도 있을 정도다. 그야말로 불굴의 의지. 그 스스로도 당대에 조신에게 "나는 운이 없는 놈이야."라는 말도 남겼다고 한다. 몰락해가는 합스부르크 왕조와 제국을 떠받치는 일에 60년이나 매진한 스스로에게 남긴 자조일지도.
출판된 참고할 만한 자료로 <황태자의 마지막 키스>와 <석양녘의 왈츠>가 읽을 만하다.
그나마 프란츠에게 사적으로 위로가 되어준 사람으론 정부카타리나 슈라트(1853~1940)라는 여배우가 있었다. 대외적으로 정부라고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프란츠 요제프와의 관계는 애인이라기보다는 황제가 생애 단 한 번도 갖지 못 했던 인간적인 감정들을 나누는 진정한 친구와도 같았다고 한다. 프란츠 요제프와 함께 만나면 정치, 사회 등의 분야에 대해 대화하고 조언을 하는 등 황후가 하지 않는 일을 어느 정도 하기도 했다고 한다. 흠이 있다면 도박 중독자라 종종 심한 도박빚을 지기도 했고 이 때문에 프란츠 요제프가 몇 번씩 잔소리를 하며 대신 갚아준 적이 있다는 점이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아내 엘리자베트가 남편을 자기에게서 떼어 내려고 '''일부러''' 소개해준 여자라는 점이다.[29] 전술했듯 정부라고는 하지만 카타리나 슈라트와의 관계는 매우 플라토닉했기에 프란츠 요제프는 그녀의 집을 방문하더라도 담소를 나눌 뿐이었다고 한다. 보통 왕이나 황제의 정부는 왕이나 황제의 사후 내쳐지기 마련인데 슈라트가 프란츠 요제프를 워낙 살뜰히 모신 덕분인지 카타리나는 프란츠가 서거하자 궁정에 불려가 시신을 곁에서 지키기도 했으며 황녀인 마리 발레리에게 감사 인사를 받기도 했다. 이후 빈 근교에 있는 히칭의 저택에서 조용히 살다 1940년에 사망했다. 수많은 언론사, 출판사에서 황제와의 관계에 대해 인터뷰를 따려고 하거나 회고록 계약을 하려고 해도 일절 거절하고 별다른 발언을 하지 않고 눈에 띄는 정치적인 행동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가장 정치적인(?) 행동으로는 안슐루스로 인해 아돌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방문했을 때 집의 창문을 가리고 바깥을 보지 않았던 정도.

6.2. 후계자 후보들



6.2.1. 막시밀리안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이었던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1832~1867)은 나폴레옹 3세의 꼬드김에 넘어가 1864년 멕시코 제국의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멕시코에서 반 프랑스 저항군이 들고 일어나 1867년 막시밀리안을 잡아 총살해버렸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과의 싸움에서 참패해 엉망진창인 상태라 동생을 도울 여력이 딸렸던 듯한데…이 일로 인해 유럽의 왕실들을 돌아다니며 남편의 구명 활동를 벌이던 막시밀리안의 아내 샤를로트는 그만 '''미쳐버렸고''', 오빠인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에 의해 유폐되었다. 황제의 어머니로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조피 황태후도 차남의 사망에 충격을 받았는지 이 사건 이후로 정치 활동을 그만두고 칩거하게 된다.

6.2.2. 루돌프 황태자와 마이어링 사건


프란츠 요제프 1세와 황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루돌프 황태자(1858년~1889년)는 항상 격무에 시달리는 아버지와 대부분의 시간을 여행으로 보내는 어머니 아래에서 외롭게 자라났다.
그는 (당시로서는) 진보주의자로서 제국의 황제로서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와 정치적으로 대립적인 관계에 위치해있었다. 어머니의 자유분방하고 예민한 기질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던 루돌프는 당대에 가장 폐쇄적이었던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황실[30]을 갑갑해했고 황실내에서도 이해받지 못 한다고 여겼다.
정략결혼으로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의 딸, 브라반트의 장미라고도 불린 아름다운[31] 스테파니 공주와 결혼했지만 당연히 사랑은 없었고[32] 스테파니가 딸을 낳고 나서 사이가 급격히 멀어져 외도를 일삼았다.[33] 그러다보니 스테파니는 바람피우는 남편한테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다며 화를 냈고, 아버지도 루돌프에게 '왜 가정에 충실하지 않냐'고 질책만 하여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도 어머니인 엘리자베트는 아들 부부의 갈등을 귀찮아하며 그저 여행만 다닐 뿐이었다. 그녀 역시 우울증이 심하고 며느리와 남편을 싫어해 루돌프의 약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루돌프는 사촌인 라리쉬 백작부인에게 소개받은 베체라 남작의 딸 '마리'와 사귀게 되었고, 독단으로 교황에게 정략결혼을 무효화해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교황의 반응은 당연히 황제에게 사태를 알리는 것.[34] 황제는 경악했고 루돌프는 제대로 찍혀버렸다. 황제에게 결별을 강요받고 모욕까지 받은[35] 황태자는 이 공개적인 창피와 심한 질책에 더는 견디지 못하고 1889년 1월 30일, 마리 베체라와 함께 마이어링으로 가서 자살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죽음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카를 1세의 아내인 지타 황후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가 어렸을 적 루돌프의 누나 기젤라가 '시신의 총상 주변에 화상이 없었다,[36] 따라서 암살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타살설을 지지하는 증언들도 꽤 있다. 진보적인 황태자가 황위에 오를 것을 두려워하는 보수파 세력, 혹은 황실을 증오하던 공산주의자가 마이어링의 별장에 침입해 두 사람을 살해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암살설 같은 타살설을 지지하는 쪽의 주장 중에는 루돌프 황태자의 장례가 교황의 인가를 받은 가톨릭식 장례미사로 치러졌다는 점을 든다.[37]
루돌프와 마리 베체라는 약 14살 정도 나이차가 났으며, 루돌프가 (아무리 정략결혼이라 한들) 가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둘의 관계는 대략 흠좀무. 마이어링 사건은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로 포장되곤 하지만 실제로는 그리 지고지순한 로맨스 따위가 아니었다. 루돌프에게는 미치 카스팔이라는 이름의 정부를 비롯해 여러 여자가 있었다. 처음 루돌프가 같이 죽자고 했던 사람도 미치 카스팔이었는데 그녀는 거절했고 그 다음 순위(?)인 마리 베체라를 꼬드겨 동반자살한 것. 그러나 후세 사람들은 이 이야기가 좋았던 모양으로 2차 저작물까지 만들었다. <황태자의 마지막 키스>라는 책이 이 사건을 다루고 있으니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에드워드 노튼 주연의 일루셔니스트란 영화도 이 이야기를 배경으로 만들었고,[38] 루돌프에 대한 뮤지컬도 2012년 말, 2014년말 한국에서 공연.
셜록 홈즈: 그림자 게임에서는 제임스 모리아티가 개입한 사건 중 하나로 루돌프 황태자의 자살 기사가 나온다.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일대기를 다룬 엘리자벳에서도 '마이어링 왈츠'라는, 이 이야기를 춤으로 표현한 장면이 있다.

6.2.3. 프란츠 페르디난트사라예보 사건


루돌프 사망 후 프란츠 요제프의 동생 카를 루트비히가 황태자가 되었지만 그는 1896년 형보다 먼저 사망하고, 세 번째 황태자로 선택된 황제의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1863~1914)는 아내 조피[39]와 함께 1914년 6월말 사라예보의 육군 훈련에 참관차 갔다가 가브릴로 프린치프[40]의 피격을 받아 죽고 만다.[41] 그로부터 딱 한 달 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6.2.4. 엘리자베트 페츠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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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트(1883~1963)[42]루돌프 황태자와 스테파니 황태자비 사이에서 태어난 프란츠 요제프의 손녀이다. 미모의 황후 엘리자베트의 손녀답게 굉장한 미인이었다.
엘리자베트는 아버지 루돌프가 죽고 어머니 스테파니가 재혼하고 나서는 황제 할아버지 곁에서 자란다. 그러나 살리카법으로 인해 여성이었던 그녀는 제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
아름다운 미모와 오스트리아 황제의 유일한 친손녀[43]라는 지위를 가진 엘리자베트는 유럽에서 가장 촉망받는 신붓감이었다. 여러 왕자들과 혼담이 오갔지만, 할아버지 프란츠 요제프는 손녀가 빌헬름 2세의 장남인 빌헬름 황태자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엘리자베트가 선택한 남편은 일국의 황태자도, 왕자도 아닌 하급 귀족 출신의 오토 폰 빈디슈-그래츠(Otto von Windisch-Grätz)였다. 황실 가족들은 결사반대했지만, 엘리자베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엘리자베트와 그녀의 남편은 결혼 후에도 몇몇 스캔들을 겪었고, 결국 두 사람은 이혼한다. 이후 엘리자베트는 사회민주당원 레오폴트 페츠넥과 사랑에 빠져 두 번째로 결혼하고 아예 황족 신분을 버린다. 평민이 되고도 '''붉은 황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마지막으로 살았던 폴란드에서는 평전도 나와 있다고 한다.
사실 가정 면에서는 매우 불행한 인물이다. 본인의 애인과 동반자살한 아버지야 말할 것도 없었고, 어머니 스테파니가 재혼하면서 이를 싫어한 엘리자베트는 어머니와의 연을 끊어버렸다. 애초에 어머니와의 사이도 그리 좋지 않았다고. 이후 1934년에 스테파니는 엘리자베트의 상속권을 박탈해버렸다. 또한 할머니였던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는 자신이 '할머니'로 생각되는 게 싫어서 손자녀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녀와도 관계가 좋지 않았는데, 엘리자베트 자신의 사회주의적 이념에 의해 아들인 루돌프는 학교에서 나와 공장에서 일해야 했다고 한다. 또한 엘리자베트의 딸은 자신의 첫 남편과 결혼한 이유를 엘리자베트가 딸의 남편을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6.2.5. 카를 1세


네 번째 황태자는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조카인 카를[44](1887~1922)이 되었다.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종손이기도 하다. 그러나 카를 1세는 즉위 후 '''딱 2년만에'''(1916년 11월말에 즉위해 1918년 11월 퇴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공중분해되면서 쫄딱 망하고 만다(…). 카를 1세는 일반적인 "망국의 군주"들과는 달리 성실하고 머리 좋은 인물이었지만 당시의 상황상 제국의 해체를 막기는 힘들었다. 자세한 내용은 카를 1세 항목을 참고.

6.3. 가계도


비극적으로 사망한 인물은 ☆ 처리.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프란츠 요제프 1세
(Franz Joseph I)
오스트리아 대공 프란츠 카를
(Archduke Franz Karl of Austria)
프란츠 2세
(Francis II)
레오폴트 2세
(Leopold II)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 공주
(Infanta Maria Louisa of Spain)[46]
마리아 테레사 공주
(Princess Maria Theresa of Naples and Sicily)
페르디난도 1세
(Ferdinand I)
오스트리아 여대공 마리아 카롤리나
(Archduchess Maria Carolina of Austria)[47]
바이에른의 조피 공주
(Princess Sophie of Bavaria)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Maximilian I Joseph)
츠바이브뤼켄 펠러타인백 프리드리히 미하엘
(Frederick Michael, Count Palatine of Zweibrücken)
슐츠바흐의 펠러타인백비 마리아 프란치스카
(Countess Palatine Maria Franziska of Sulzbach)
바덴의 공녀 카롤리네
(Princess Caroline of Baden)
바덴의 대공세자 카를 루트비히
(Charles Louis, Hereditary Prince of Baden)
헤센다름슈타트의 공녀 아멜리에
(Princess Amalie of Hesse-Darmstadt)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조피 여대공
(Archduchess Sophie)
1855년 3월 5일
1857년 5월 29일

2녀
기젤라 여대공
(Archduchess Gisela)
1856년 7월 12일
1932년 7월 27일
바이에른의 레오폴트 왕자[48]
슬하 2남 2녀
1남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루돌프
(Rudolf, Crown Prince of Austria)
1858년 8월 21일
1889년 1월 30일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49]
슬하 1녀
3녀
마리 발레리 여대공
(Archduchess Marie Valerie)
1868년 4월 22일
1924년 9월 6일
오스트리아토스카나 대공 프란츠 잘바토어[50]
슬하 4남 6녀

6.4. 대중매체


새드 사탄

6.4.1.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


주인공 덕에 생긴 나비효과로 보오전쟁의 피해를 일거에 무효로 할 수 있게 되는데, 프랑스 제국과의 전쟁으로 프로이센이 패배하자 오스트리아도 이 기회에 프로이센 국경에 대군을 배치하고 양면전쟁이 일어날 수 있게 되자 프로이센은 급한 불을 끄려고 독일연방의 주도권을 오스트리아에게 넘겨준다. 그 여파로 오스트리아는 이 기회에 독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늘리고자 유럽대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데, 프랑스, 이탈리아 전선을 펼쳐나가다가 프로이센의 충고를 무시하고 러시아와 합동으로 프랑스를 공격하다 패배를 당하는 등 온갖 고생을 다한다. 그러던 중 북독일 연방을 주도하던 프로이센 왕국이 파리공방전에서의 패전에 이어 라인란트, 하노버 전역에서까지 패한 데다 독일연방의 주도권을 상실하여 베를린에서 공화혁명이 일어나자 호엔촐레른 왕가와 귀족들이 과거의 라이벌인 오스트리아로 망명하고, 상황이 괜찮아보이자 영국과의 협상도 물리치고[51] 마침내 독일 전역의 귀족과 왕족과 성직자 들 앞에서 나폴레옹 때문에 무너진 신성 로마 제국의 부활을 선포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카이저로 즉위한다. 그러면서 이탈리아 교황령을 문제삼아 친 오스트리아 성향의 헝가리 추기경 조셉 미할로 비치를 대립교황으로 내세우는 등 잘만 되면 의 멸망 대신 제국을 부활시킨 중흥의 황제가 될 가능성이 충분한 상황.
허나, 전쟁이 장기전으로 진행되면서 3년 정도 치르다 유럽대전이 종결되는데, 아직 전쟁이 현대전으로 보기도 어렵고 유럽 내에서도 전황이 지지부진하면서 탱크나 독가스, 무연화약, 원뿔형 탄두, 기관총 등이 세상에 나오지 않는 등의 문제와 함께 각국의 피로도도 높아져서 결국 종결되게 되나 사실상 휴전인 상태.
불씨가 또다시 피어오르기 전까지는 우선 유럽 내에서는 전반적으로 숨고르기에 나설 뜻하며 프로이센과 통일된 제국은 실패하게 되었으나 프로이센 공화국을 제외한 나머지 독일연방을 재건된 신성 로마 제국이 장악하게 되었고 황제의 복수도 하면서 반 세기만에 부활하였으니 원래 역사와 비교하면 현재까지는 정말로 잘 나가고 있으며 황제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것 또한 당연하다.
게다가, 노동자 권익 개선과 참정권 확대를 요구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시위에 대해서도 '대타협까지 했는데, 이제 와서 뭔들 못하겠냐.'라는 대범함을 보이며 타협에 응하는 등 신 절대주의적인 통치행태조차 상황에 맞게 바꾸는 유연함까지 보여주고 있다.
종전 협의를 위해 베를린에 전권대사를 보내 발칸 강역에 대한 주도권을 두고 이탈리아, 러시아와 다투던 중 독일 연방 공회국의 파산 선언 때문에 금융위기가 터진 영국과 프랑스 등의 협상국이 자국 안정화를 위해 본국으로 군대를 철수시키고, 독일 연방 공화국에서는 공화정이 붕괴되고, 입헌군주정 수용 조건으로나마 호엔촐레른 왕가가 복권되면서 대독일 신성 로마 제국을 완성, 마리아 테레지아를 뛰어넘는 명실상부한 중흥의 황제가 된다.
여기에 더해 동맹국인 러시아 제국이 재침공 개시 1개월도 안 돼서 바르샤바를 점령하면서 공조체제 강화를 위해 유로파 대륙횡단철도 공동부설 계획을 공표하여 해양 진출을 위한 야망을 드러내고 있다.

[단결] with united forces.[미덕] My trust in virtue.[원문] Seine kaiserliche und königliche apostolische Majestät, Franz Joseph I., durch die Gnade Gottes Kaiser von Österreich, König von Ungarn, Böhmen, König von Lombardei und Venedig, von Dalmatien, Kroatien, Slawonien, Galizien, Lodomerien und Illyrien; König von Jerusalem usw., Erzherzog von Österreich; Großherzog der Toskana und Krakau, Herzog von Lothringen, von Salzburg, der Steiermark, Kärnten, Krain und der Bukowina; Großfürst von Siebenbürgen; Markgraf von Mähren; Herzog von Oberschlesien und Niederschlesien, von Modena, Parma, Piacenza und Guastalla, von Auschwitz, Zator und Teschen, Friaul, Dubrovnik und Zadar ;. Fürstlicher Graf von Habsburg und Tirol, von Kyburg, Görz und Gradisca; Prinz von Trient und Brixen; Markgraf der Ober- und Niederlausitz sowie in Istrien; Graf von Hohenems, Feldkirch, Bregenz, Sonnenberg usw .; Herr von Triest, von Kotor und über den Windmarsch; Präsident des Deutschen Bundes.[원문2] Seine kaiserliche und königliche apostolische Majestät Franz Joseph I. durch die Gnade Gottes, des Kaisers von Österreich; Apostolischer König von Ungarn, König von Böhmen, Dalmatien, Kroatien, Slawonien, Galizien, Lodomerien, Illyrien; König von Jerusalem usw .; Erzherzog von Österreich; Großherzog der Toskana, Krakau; Herzog von Lothringen, Salzburg, Steiermark, Kärnten, Krain, Bukowina; Großfürst von Siebenbürgen; Markgraf von Mähren; Herzog von Oberschlesien und Niederschlesien, Modena, Parma, Piacenza, Guastalla, Oswiecin, Zator, Cieszyn, Friaul, Ragusa, Zara; Fürstlicher Graf von Habsburg, Tirol, Kyburg, Görz, Gradisca; Prinz von Trient, Brixen; Markgraf der Ober- und Niederlausitz in Istrien; Graf von Hohenems, Feldkirch, Bregenz, Sonnenberg usw .; Herr von Triest, von Kotor und über den Windmarsch; Großer Woiwode der Woiwodschaft Serbien usw. usw.[1] 성교를 할 때면 간질 발작이 일어났다고 한다(...).[2] 재위: 1837년 6월 20일~1901년 1월 22일, 63년 216일.[3] 매일 새벽 5시에 어김 없이 일어나서 '''10시간 이상''' 집무했다.[4] 초콜릿 케이크 자허토르테를 개발한 그곳.[5] 1차 세계 대전으로 이중제국의 국력이 파탄에 직면한 것도 있지만.[6] 최종적으로는 러시아군의 도움으로 헝가리 반란군을 진압.[7] 잠입한 헝가리 애국지사가 칼을 들고 덤벼 찔려죽을 뻔했다. 근위병들이 빨리 달려왔기에 살 수 있었다.[8] 원래 조피 대공비는 엘리자베트의 언니인 헬레네(애칭 네네)와 결혼시키려 했지만 프란츠 요제프가 헬레네와의 첫 선을 보는 자리에서 헬레네 옆에 있던 엘리자베트에게 '''뿅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계획을 수정, 엘리자베트와 결혼하도록 했다.[9] 헝가리 반란 진압에 도움을 주고자 병력 20만과 차관까지 보냈는데 받은 게 배신이라, 러시아 제국 정부는 니콜라이 1세가 임종할 때에 그 어떤 오스트리아인도 참석하지 못하게 했으며, 보불전쟁 때까지 프로이센을 지지했다.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와 관계를 회복한 것은 보불전쟁 이후에 비스마르크가 삼제동맹을 제의했을 때부터였다. 이 때쯤 와서는 시간도 많이 흐르고 보오전쟁 때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에게 대패하자 신나게 웃어서 반오스트리아 감정이 많이 가라앉았다.[10] 그나마 상당한 희생자(7,000명 이상)에 깜짝 놀란 나폴레옹 3세가 사르데냐를 배신 때리고 단독으로 강화를 맺은 덕분에 베네치아는 간수했다. 하지만 7년 뒤…[11] 니더외스터라이히, 오버외스터라이히, 잘츠부르크, 포어아를부르크, 캐른텐, 슈타이어마르크, 티롤, 뵈멘(보헤미아), 메렌(모라비아), 슐레지엔, 갈리치엔 운트 로도메리엔, 부코비나, 크라인, 달마티엔, 퀴스텐란트, 운가른(헝가리), 크로아티엔 운트 슬라보니엔, 보스니엔 운트 헤르체고비나.[12] 기존에는 오스트리아의 황제이면서 동시에 헝가리의 사도(使徒)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고 기술되어 있었으나 그 전에도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오스트리아의 황제이자 헝가리의 사도왕을 겸하고 있었다. 프란츠 요제프가 한 것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구성국이던 헝가리 왕국을 제국에서 분리한 뒤 헝가리를 오스트리아의 새로운 파트너로 인정해준 것이지 새롭게 헝가리의 사도왕이라는 지위에 오른 것은 아니다.[13] 이쪽은 헝가리인들의 입장에선 긍정적인 업적이지만 그 헝가리인들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치하의 슬라브족(특히 슬로바키아인)을 탄압했다는 점에서 전체적으로는 마냥 긍정적인 업적으로만 보기 힘들다.[14] 실제로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1세의 도움을 받아 헝가리에서 일어난 반란을 겨우 진압할 수 있었다.[15] 심지어 1880~90년대 독일의 생산력은 산업혁명의 종주국인 영국과 강대국 프랑스를 뛰어넘을 정도였다.[16] 대표적으로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은 문화적 발전과는 반대로 제국내에서 매우 가난한 지역이었다. 오죽하면 지역민들조차도 굶주림이 가득한 땅으로 평가했을 정도이다.[17] 이 때 독일제국의 재상 비스마르크의 선택은 이상하게도 근시안적이었다.[18] 독일 제국이 무너지면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결코 무사할 수 없었다.[19] 독일의 룩셈부르크 침공이 대전쟁 첫 전투였으니 당시 이중제국의 지리멸렬함을 엿볼 수 있다.[20] 대전쟁 확대는 빌헬름 2세의 책임이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를 등용해 러시아 제국과의 관계를 더욱 파탄낸다.[21] 그의 사후 즉위한 카를 1세는 대단히 유능하여 제국을 어떻게 해서든지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제국이 다시 살아날 가능성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22] 합스부르크 황실과 아들 프란츠 요제프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황태후의 입장도 간과할 수는 없지만, 그녀가 가혹한 시어머니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가정사에까지 지나치게 어머니한테 휘둘리고 산 프란츠 요제프 역시 좋은 남편이라고는 못 한다. 아이러니한건 조피도 젊었을땐 씨씨처럼 당찬 성격에 총명한걸로 유명했는데 정략혼으로 정신박약아로 유명한 프란츠 카를과 사랑없는 결혼을 해야 했다는 점이다. 조피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합스부르크에서 외롭게 지냈던 나폴레옹 2세와 가깝게 지냈다. 다만 나폴레옹 2세 사후에는 더이상 마음 기댈 곳이 없어지자 마음을 닫아버리고 흑화해버린다.[23] 첫째 손녀 조피한테 직접 자신의 이름을 붙인 것을 보면 아주 애정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24] 그러나 이 역시 아이에게는 결코 좋지 못했다. 마리 발레리는 도피여행을 해대던 엘리자베트의 여행에 동참해 곁에 늘 붙어있으면서 어머니의 우울증을 달래는 역할을 해야 했다. 마리 발레리는 '엄마가 나 때문에 못 죽고 이 세상에 살아있다'고 느꼈다던데, 어린 나이에 이런 게 좋은 영향을 미칠 리가 없다. 또 엘리자베트는 마리 발레리를 그렇게 아꼈으면서 정작 마리 발레리가 결혼해서 낳은 외손주들한테는 무심했다고 하니 이 역시 정상은 아니다.[25]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다! 친할머니 자격으로 차기 황제의 교육을 빌미로 몰인정한 짓을 한 셈. 엘리자베트의 기질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진 루돌프 황태자는 저렇게 어린 시절부터 훈육을 빙자한 학대를 당하며 일찍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다. 보다 못한 엘리자베트가 프란츠 요제프에게 교관을 관대한 사람으로 바꿔달라고 부탁했고 프란츠 요제프도 수락해 황태후 조피를 설득해 교관을 바꾼다.[26] 사실 이것도 전체적으로 보면 프란츠 요제프의 책임이 가장 크다. 자세한 건 루돌프 황태자 참고.[27] 딸 둘을 낳은 뒤에야 후계자가 될 루돌프를 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츠 요제프는 후계 구도를 든든히 하기 위해 아들을 하나 더 갖고 싶어 했으나 아이들을 모두 시어머니에게 뺏긴 엘리자베트는 더이상 임신하지 않겠다고 우겼다. 그렇게 10여년을 지내다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에 막내를 가진 것.[28] 루케니는 체포되고 나서 스위스 정부에 사형을 원했지만 스위스는 사형이 폐지된 터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를 분하게 여긴 그는 교도소에서 목매어 자살했다.[29] 엘리자베트가 일부러 프란츠 요제프와 카타리나가 만나는 자리를 계속 만들어 준 끝에 결국 둘이 내연 관계가 됐고, 비로소 뜻대로 됐다며 자신을 어려워하는 슈라트에게 도리어 늘 여행만 다니는 자신 대신 황제 곁에 있어 준다는 이유로 고마워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30] 오스트리아에서는 조부대부터 명문 귀족이 아니면 황제의 특허가 없는 한 황궁 무도회에 참석할 자격도 없었다.[31] 하지만 남아있는 초상화나 사진을 보면 그리 예쁘진 않다. 시어머니 엘리자베트가 며느리 스테파니를 싫어한 이유 중에는 못생긴 외모도 포함되어있다는 설이 있다.[32] 스테파니는 외향적이고 오만한 성격의 소유자인 터라 내성적이고 우울증 앓는 루돌프를 이해할 턱이 없어 나약하다고만 여긴 남편을 결혼 초부터 싫어했다. 루돌프 역시 자신을 이해주지 않는 스테파니를 싫어했다.[33] 아내 스테파니랑 딸 엘리자베트 마리한테는 아예 무관심한 데다 처소로 찾아가지도 않았다. 틈만 나면 정부한테 갔다.[34] 애초에 이혼을 금지하는 가톨릭이 이런 요청을 허가해줄 턱이 없다. (예외적으로 '혼인무효'라는 것은 있다. 혼인성사 참조.) 왕실의 일이라면 더 안 해준다.(영국헨리 8세도 교황이 캐서린 왕비와의 혼인을 무효화해주지 않자 빡쳐서 가톨릭을 버리고 성공회를 만들고, 앤 불린과 재혼했다.) 이런 걸 황실에서 가르쳐줄 리가 없으니 모르고 저지를 수밖에.[35] 신임 대사를 환영하는 접견식에서 황태자가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러 나오자 꼴도 보기 싫다며 '''등을 돌려 외면하는 굴욕'''을 주었다. 그리고 나중에 따로 불러 "당장 정부랑 결별하고 가정에 충실하라"며 크게 화를 냈다.[36] 머리에 총을 대고 자살하면 총 내부의 가스가 터져나오면서 총상 주변에 총구 모양의 화상이 남게 된다. 화상이 없다는 것은 멀리서 쐈다는 뜻.[37] 자살한 사람은 가톨릭교회에서 장례미사를 할 수 없다. 루돌프도 처음에는 교황이 장례미사를 거부했는데 후에 입장을 바꿔 장례미사를 했다. 이에 대해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교황에게 아들이 반 황실 세력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증거를 제시했기 때문에, 교황이 인정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에 따르면 황제가 아들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지 않은 것은 제국 내의 혼란을 두려워해서라고 한다.[38]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많은 내용이 사실과 '''정말 많이 다르다'''. 이 영화의 오스트리아 제국은 현실 역사와는 무관한 패러럴 월드로 보는 것이 맞다. 여기선 약혼녀를 죽인 천하의 개쌍놈으로 몰려 누명을 쓰고 자살하고 약혼녀는 주인공 마술사에게 뺏긴다. 덤으로 천하의 개쌍놈으로 모는데 그 약혼녀도 일조했다. [39] 조피는 왕녀가 아니라 백작 영애였기 때문에 귀천상혼(貴賤相婚)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래서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황태자였지만 조피는 황태자비가 될 수 없었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이도 모두 계승권이 없었다. 프란츠 요제프는 조피와 그녀의 자식들을 불쌍히 여겼던지 이들의 결혼과 함께 조피에게 호엔베르크 공작 작위를 주고 그 후손들이 계승하게 했다.[40] 1894~1918. 세르비아 민족주의 단체 <검은 손> 조직원으로 수감되었다가 폐결핵으로 죽었다. 공범 중 하나는 잡혀서 16년 동안 복역하다 나와 1990년 93살로 죽었다.[41] 귀천상혼 문제로 조피는 페르디난트와 함께 공식석상에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날 사라예보에서의 행사는 공식 행사이긴 해도 페르디난트가 황태자가 아닌 군 사령관으로서 참석한 행사였기에 아내도 동석할 수 있었다. 기필코 아내를 공식석상에 동행시키려는 페르디난트의 꼼수였으나 운이 없어도 참 더럽게 없던 셈. 페르디난트가 필사적으로 남긴 유언은 '''"조피! 죽지 마시오! 아이들을 위해 꼭 살아주시오!"'''였다고 한다.[42] 할머니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이름을 땄고, 할머니 엘리자베트가 평생 헝가리에 애착이 깊었던 연유로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에르치'로 불렸다고.(엘리자베트라는 이름은 헝가리식으로 '에르체베트'가 되고 이를 줄인 애칭이 '에르치')[43] 프란츠 요제프에게는 여러 손주가 있었지만, 친손주는 엘리자베트 하나뿐이었다.[44]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남동생인 오토 프란츠 대공의 장남[45] 살해당하거나 자살한 건 아니지만 오스트리아제1차 세계대전으로 몰락하고 폐위되자 실의에 빠져 병고에 시달리다 사망.[46] 카를로스 3세의 차녀이자 아우구스트 3세의 외손녀이다.[47] 프란츠 1세마리아 테레지아의 10녀이다.[48] 루트비히 1세의 손자이다.[49] 레오폴드 2세의 차녀이다.[50] 페르디난도 2세의 외손자이다.[51] 프란츠 요제프나 이 시기 오스트리아 내부에서는 이 기회에 제국의 부활을 확실히 해야한다고 마음을 굳게 다짐한 상황이였다. 나폴레옹 이후 60년 만에 찾아온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