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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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gon Schiele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


오스트리아화가. 에곤 쉴레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1890년 6월 12일 ~ 1918년 10월 31일

2. 생애


오스트리아 도나우 강변 툴른에서 출생했다.[1]
2살경부터 색연필과 종이를 잡고 그림을 그렸다고 하며, 어릴 때는 철도 미니어처를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고 그것들을 그린 데생도 몇 점 남아있다. 이는 그의 아버지의 영향인데 아버지 아돌프 실레는 톨른역의 역장이었다.[2] 그의 아버지는 그가 어릴 때부터 열성적으로 그림을 그리자 그의 스케치북을 태워버렸다고 한다.
에곤은 어릴적 여동생에게 근친애적인 성향을 보였는데 이를 알고 있던 아버지가 그가 필름을 현상하느라 여동생과 단둘이 있자 잠겨있던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실레의 아버지는 그가 15살때 결혼전부터 앓았던 매독으로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다 죽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고 사이도 좋지 않았다고.[3] 실레는 아버지의 죽음에도 슬퍼하지않고 무덤덤한 태도를 보이는 어머니에게 충격을 받았다. 이때부터 아버지를 우상화하고, 어머니를 혐오하기 시작했다. 이는 실레에게 있어서 최초의 불신이었다. 이후 평생 어머니와 불화한 채 살았다.
이런 어머니와의 소원한 관계가 여동생 게르트루드에 대한 집착으로 남았다. 실제로 여동생을 누드모델로 많은 작품을 남겼고, 근친상간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1살때 학교를 옮겼는데 이상하고 수줍음이 많은 아이로 여겨졌다. 그의 삼촌과 아버지는 에곤이 그들과 같은 철도 기술자가 되기를 기대해서 클로스터노이부르크에 위치한 고등학교에 진학시켰지만 에곤의 성격에 말을 잘 들을리도 없고 미술 외의 과목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에곤은 여기서 미술에 대한 재능을 나타내기도 했는데 미술선생님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학업을 돕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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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15살'''에 실레가 학교 창문 밖 풍경을 보고 그린 그림. 제대로 배우지도 않았는데 이정도였다.
결국 고등학교에서 유급을 당한뒤 화가가 되기위해 자신의 대리자인 어머니와 삼촌을 설득하여 16살인 1906년 으로 상경,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한다.[4] 에곤은 아카데미에 그리 열심히 다니지는 않았지만 3년 동안 미술의 기초와 기술적인 부분을 체득한다.
에곤는 이 시기에 그의 평생 스승인 구스타프 클림트를 처음 만나게 된다. 사제관계이기도 했지만 에곤은 클림트의 덕후 수준이어서 초기에는 클림트를 오마주하는 작품도 남겼다. 그리고 분리파에 영향을 받게되는데 이것은 우연히도 분리파의 작업실이 아카데미의 뒷편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1909년에는 분리파의 작품 관람을 금지하는 지도교수 때문에[5] 그는 학교를 자퇴하고 동료들과 신 예술가그룹을 결성한다.
1911년 4월에는 첫 개인전을 열게되는데 분리파의 세련되고 웅장한 그림에 익숙하던 빈의 관객들은 에곤의 해체된 자화상을 보고 충공깽스러운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여기서 그의 예술을 처음 이해해주고 죽을 때 까지 후원을 해준 평론가 아르투어 뢰슬러를 만나게 된다.[6]
1912년 노이렌바흐에서 미성년자(...) 소녀들을 그렸다는 소지로 체포되었다. 그의 누드모델로 섰던 빈곤층 소녀들 중 한명이 그를 고발했고, 경찰이 증거를 찾기 위해 그의 스튜디오에 갔을 때는 100점이 넘는 포르노그래픽적인 그림을 찾았다고 한다. 재판에선 아이들이 드나들 수 있는 곳에 에로틱한 그림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유죄로 보았다. 재판 도중 판사가 그의 그림 한점을 직접 촛불에 태워버렸다고 한다. 그는 재판을 위해 21일간 유치소에 보냈고 유죄 판결로 3일간 투옥됐다. 3일간 감옥에 있는 것의 불편함에 관한 12점의 그림을 그렸다.
1915년 6월 17일 부유한 아내 가문으로부터 약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디트 하름스(이후 Edith Schiele)라는 이름의 여성과 그의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에 결혼했다[7].
1차 세계대전 당시 징집을 피하기 위해 일년간 노력했으나 결혼 후 삼일 뒤 프라하에서 근무할 것을 명령받았다. 종전 직전인 1918년 10월 당시 유행하면서 세계적으로 2000만명을 죽인 스페인 독감에 걸려 임신 6개월 중이던 아내도 사망했다.[8]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사망전 <줄무늬 옷을 입은 에디트 실레의 초상>을 그렸다. 삼일 뒤 28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수많은 자화상을 남겼음에도 자신이 죽는 모습을 그림으로 남길 수 없어 사진으로 남겼다. 사진
에곤 쉴레 작품 감상

3. 기타


독특한 작품 세계로 유명하지만, 한편으론 꽤나 이중적이고 야멸찬 구석이 있는 인간이기도 했다. 이는 후술.[9]
먼저 그의 모델이었던 발리 노이칠[10]은 무명 시절부터 에곤 실레의 모델이 되어주었고 에곤의 그림에 대한 질타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인 + 동거자 + 아내의 역할을 오랫동안 수행해주었으며, 에곤이 감옥에 갔을 적에도 열심히 그를 수발했을 정도로 그에게 헌신했다. 겸사겸사 발리는 그의 그림 배달부 역할까지 했는데, 그녀가 클림트와 에곤의 모델이었던 걸 알았던 사람들에게 성희롱을 당하는 등의 고생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11]
그러나 어느 정도 화가로써 입지를 다진 에곤이 정작 결혼할 맘을 먹고 선택한 것은 무명 시절부터 조강지처 노릇을 해왔던 발리가 아니라 부유한 집의 딸이었던 에디트[12]였다.[13] 한 술 더 떠서 그는 본인의 후원자에게

'''저는 결혼할 생각입니다. 다행히 상대는 발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I intend to get married, advantageously. Not to Wally.")

라는 소리를 한 주제에 정작 발리한테는 '''발리가 원한다면 자기가 결혼한 후에도 연인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고 함께 에디트 없이 매년 휴가를 떠날 수도 있다'''(...) 라는 말을 발리의 면전에서 했다고 한다(...) 결과는 당연히 발리와의 결별.
남자든 여자든 고무신 거꾸로 신는건 그 당시에나 지금이나 흔한 일이긴 하지만, 결혼은 결혼대로 하고 싶고 아내 외의 애인도 한 명 둔 채로 쭉 살고 싶다는 소리를 자기가 사실상 차버린 발리에게 했던 걸 보면 정말로 인성이 의심된다. 겸사겸사 나중에 자기랑 정식으로 결혼하게 될 에디트에게 보낼 러브레터까지 발리를 시켜서 보냈다고 한다(...) [14][15]
여담으로 그의 그림들 중 죽음과 소녀(참고 이미지)는 에곤과 발리의 결별을 의미하는 그림이라고 한다.[16]
소녀들을 누드모델로 삼았다가 모델이었던 빈곤층 소녀 한 명에게 고발당해 감옥까지 간 적은 있지만, 유괴 혐의의 경우 무혐의가 인정되었다고 한다. 그가 유죄 처리가 된 건 위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애들 정서에 악영향을 주는 그림을 애들이 볼 수 있는 곳에 뒀다는, 일종의 검열과 관련된 이유였다. 지금 같았으면 꽤 논란이 되거나 심할 경우 예술가 인생이 끝장날지도 모를 사건을 한 번 겪은 셈이긴 했지만, 정작 에곤은 이 사건 때문에 감방 갔다가 나온 후에도 별 타격을 입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당시 오스트리아 사회가 워낙 퇴폐적이라 외설 그림이나 사진이 만연(...)했기에 그런 사건 정도는 그냥 소규모 스캔들 정도로 넘어갔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생전에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은 아내였던 에디트 실레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었다고 한다.
아내 에디트의 경우 곱게 자란 순진한 처녀였으나 제법 강단이 있는 여인이었다고 한다. 에곤의 여자관계[17]를 제대로 정리할 것을 에곤에게 요구하기도 했고, 에곤과의 결혼을 부모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에곤과의 결혼을 성사시켰을 정도. 덤으로 에곤과 에디트가 결혼했던 날은 1915년 6월 17인데, 이 6월 17일이 에곤의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었다고.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이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1] 참고로 여기는 오스트리아에서도 쌩시골이라고 한다(..) [2] 에곤은 화가가 된 이후에도 철도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지인에게 철도에 대해 설명 늘어놓기를 좋아했다고한다 한마디로 철덕이었다.[3] 매독이 성병이라는 점과 에곤의 부모님 간의 사이가 좋지 않음을 감안하면 그의 아버지는 불륜을 하거나 매춘을 하는 식으로 다른 여성과 관계를 하다가 매독을 얻었을 가능성도 있다.[4] 비슷한 시기에 '''히틀러'''도 이 학교에 입학 하기 위해 재수까지 했으나 실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낙방. 같은 또래에 같은 꿈을 추구했지만 누구는 꿈을 이루고 또 누구는 실패 했다는 점에서 인생이란 참 알다가도 모르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 서울신문 (2012.01.21.) : 히틀러와 입학시험) 둘이 지향하는 예술의 기준도 극과 극 정도로 다르다. 히틀러의 경우 , 소위 '순수예술' 이라 부르는 고전 스타일의 미술을 지향했지만 실레는 시대의 흐름에 반하는 '전위예술'을 행했다. 이때 자신을 제치고 입학하여 현대미술의 한 획을 그은 실레와 다른 예술인들에게 큰 콤플렉스를 느꼈는지 훗날 히틀러는 총통의 지위에 오르고 나서 클림트와 실레를 비롯한 분리파들의 작품을 전부 퇴폐미술로 규정하여 금지시켜 버렸다. [5] 이 교수는 심지어 에곤의 데생실력이 구리다고 깠다(...)[6] 뢰슬러는 에곤이 죽어서도 그를 알리려고 노력했으며 에곤에 관한 책도 집필했다.[7] 이 때 결혼을 위해 자신을 위해 온갖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오랜 연인 발리 노이칠을 버렸다. 쓰레기[8] 아이러니하게도 그 전에 아내와 자신, 그리고 아내가 임신중인 아이를 태어난 것처럼 묘사해서 세 가족이 함께 있는 《가족》 이라는 그림을 그린 적이 있는데, 정작 스페인 독감 때문에 에곤은 자기가 그렸던 가족의 그림과는 반대가 되는 현실을 보고 말았다(...)[9] 그래도 여자관계가 난잡하다고 소문난 것과 달리 실제로 여자관계가 엄청 난잡하고 문란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한다.[10] 원래 구스타프 클림트모델이었는데 나중에 실레의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다만 클림트도 여자관계가 문란하다는 소문이 있으며 그의 모델들은 그와 한 번씩 잤다는 말도 있어서, 세간에선 발리가 에곤의 모델이 된 것에 대해 '클림트가 자기 여자를 에곤에게 줬다' 는 소문이 돌았다고.[11] 지금이야 이런 일이 있었다가 밝혀지면 오히려 화가 쪽이 추문에 시달릴 확률이 높지만 이 당시엔 화가들이 이러는건 별로 문제되지는 않았다. 그림 쪽에서 일하는 모델들의 권리가 낮게 간주되었던 탓. 인성 좋은 화가를 만나면 존중받을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을 만날 경우 비하당하거나 성적으로 착취를 당하기도 했다. 물론 모델 일을 하는 사람들 중엔 가난해서 돈을 벌고자 매춘을 겸하는 경우도 있었다고.[12] 유디트로도 표기되기도 한다.[13] 이는 그가 안정적인 생활을 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14] 참고로 발리는 에곤에게 에디트와 결혼한 후에도 너랑 연애관계 유지할 수도 있고 함께 여행을 떠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걸 들은 후 그와 결별한 이후 종군간호사가 되어 1차 세계대전에 참여했다가 결국 발칸반도의 야전병원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15] 덤으로 에곤의 아내가 된 에디트는 실레가 발리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강경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그녀가 실레에게 보낸 편지에만 해도 발리와의 관계를 정리할 것을 요구하는 말이 있을 정도.[16] 그림 속 남자(죽음)의 얼굴이 에곤을 닮았고, 남자(죽음)과 포옹하는 여자는 발리로 추측된다. 이 그림이 그려진 이후, 나중에 둘 다 요절한 걸 보면 (실레는 28세에 사망, 발리는 23세에 사망) 좀 아이러니한 부분.[17] 발리와의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