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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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경
명과 일본 간의 강화협상이 결렬됨에 따라 1597년(선조 30년) 1월, 왜군이 다시 조선을 재침하여 정유재란이 시작되었다. 남원성 전투 이후 압도적인 기세로 북상하던 왜군은 명량해전과 직산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북상이 좌절되었고, 울산, 순천, 사천 등지에 왜성을 쌓아 장기 농성에 돌입하기 시작한다. 이 중에서 사천에 주둔하던 시마즈 요시히로의 왜군은 거창, 산청, 진주, 하동, 함양 등의 경상도 지역과 장수 등 전라도 지역을 약탈하며 살육을 자행하였다. 1차 울산성 전투의 패배 이후, 경리 양호가 탄핵되어 명나라로 귀국하였고, 명 조정은 흠차조선군무 만세덕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왜군은 은밀히 철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명군은 다시금 제독 마귀, 동일원, 유정, 진린 등 4명의 도독이 지휘하는 대군을 조직하였으며 군문 형개는 이들 4명의 제독 중 마귀는 울산성, 동일원은 사천성, 유정은 순천성을 공격하도록, 수군도독 진린은 조선수군과 협력하여 수로를 공략, 왜군의 상호구원을 차단케 하는 등의 사로병진책을 구상한다.전라 수사(全羅水使) 이순신(李純信)이 비밀히 치계하였다.
일본에서 도망해 온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수길(秀吉)이 7월 초에 병사했으므로 흉적들이 철수해 돌아가려 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또 왜인들이 말하기를, ‘금년은 불길한 해이다. 중국 장수가 무수히 나오고 조선의 주사(舟師)도 많다. 협공을 당할까 매우 우려되니 도망쳐 돌아가려 한다.’ 했습니다."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03권, 선조 31년 8월 20일 계유 5번째기사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전라 수사 이순신이 수길의 사망과 왜적의 철수 상황을 치계하다.
2. 전투 전개
1598년 9월 18일 조·명 연합군은 사천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진주로 향하였다. 이때 왜군은 시마즈 요시히로 지휘하에 사천신성(泗川新城)에 본진을 두고 1만여의 병력을 배치하였으며, 진주남강 연안의 망진채(望晉寨), 영춘채(永春寨), 곤양채(昆陽寨) 등에 1천여 명, 사천성에 2천여 명의 병력을 배치하여 14,000여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제독 동일원이 지휘하는 명군과 정기룡이 지휘하는 조선군은 사천성을 항해 남하하기 시작했다. 명군은 성주에서 고령을 거쳐 진주로 향하였다. 1598년(선조 31년) 9월 20일 명군의 선봉군이 진주남강을 지키던 일본군을 급습하였고, 일본군은 도주하여 곤양채를 거쳐 사천성에 주둔한 왜군과 합류하였다. 이윽고 명군이 망진채와 영춘채를 점령하자 시마즈는 사천성의 군사에게 사천신성의 병력과 합류하도록 명령했다. 사천성의 왜군이 철수 준비를 하던 28일 밤 정기룡의 조선군은 이 정보를 알고 야습을 감행하였다. 당황한 왜군은 성문을 열고 포위망을 돌파하려다가 많은 희생자를 내고 사천 신성으로 들어갔다.
조명 연합군은 사천성을 점령하고 10월 1일 사천 신성 공격을 시작했다. 전투 도중, 가와카미 다다노리는 세토구치 시게하루(瀬戸口重治)에게 명하여 적의 식량 창고를 불태웠다. 연합군은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식량 창고가 불타버리자 한층 더 궁지에 빠지고, 단기 결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천 선진리왜성의 뒤에 굳세고 튼튼한 진을 치고 복병을 배치했다.
요시히로는 연합군의 공격에 대량의 총을 사용하고 지뢰를 묻는 방법으로 연합군의 공격을 잘 방어했다. 명군 유격장수 팽신고의 부대가 총포를 이용한 공격을 가하며 동문으로 접근하였고, 왜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와중에 나무기둥을 이용하여 성내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때 명군 진영에서 유격장수 모국기 휘하 포병부대의 불랑기포가 과열하여, 파열된 포신으로부터 발생된 불꽃이 화약더미에 옮겨붙어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나자 명군은 우왕좌왕하며 진열이 흩어졌고, 이를 본 시마즈는 전 병력을 출동시켜 명군을 공격하였다.[4] 명군은 이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와해되었으며, 거기다 식량까지 부족해지자 회의 끝에 진주 방면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3. 결말
승리할 수 있었는데 이기지 못한 아쉬운 전투였다. 만약 사천이 함락되었으면 부산과 순천의 연락이 끓겨 순천 왜교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를 고립시킬 수 있었을 것이고 그리되면 순천 왜교성도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이며 나아가서는 훗날 시마즈 요시히로의 군대에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1] 선조 실록[2] 일본 기록.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3] 다만 조명 연합군보다 적었다는건 분명하다.[4] 이 때 붉은 여우와 흰 여우 각각 한 마리가 성안으로부터 명군 진영을 향해 달려 나갔고, 이를 본 왜군은 승리를 암시하는 징조로 여겨 사기가 매우 높아졌다고 한다. 이 두 마리의 여우에 관한 춤이 가고시마 무형 문화재로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