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해(삼국지)
謝該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의 인물. 자는 문의(文儀).
남양 장릉 사람으로 춘추좌씨전에 능통했고 유학자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제자는 수 백명에서 수 천 명에 달할 정도로 많았으며, 건안 연간에 악상이 춘추좌씨전에 대한 의문이나 난해한 점을 말하자 사해는 이 점을 모두 해소해 이를 사씨석이라 했다.
공거사마령을 지내다가 부모가 늙고 병들었다는 것을 핑계삼아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고향에 가려고 했지만 형주의 길이 끊겨 돌아가지 못했다. 공융의 천거로 의랑에 임명되었다.
공융이 사해를 천거하는 글에서 옛 고사를 들어가면서 사해를 증삼, 사어, 숙성, 복상, 언언의 학문을 가졌고 여러 가지 예의와 도에 통달하고 고금을 널리 알고 있으며, 물건이 있으면 그것에 유혹되지 않고 청렴결백하다고 칭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