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좌씨전
春秋左氏傳
공자(孔子)가 지은 노나라(魯)의 역사서인 춘추(春秋)의 주석서로 공자의 제자인 좌구명(左丘明)이 지었다고 전해지나, 실제로는 그가 지은 것이 아닌 어떤 무명의 인물이 저술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줄여서 춘추좌전, 좌씨전, 좌전 등으로 부른다. 또한 인경(麟經)으로도 일컬어지는데 애공(哀公) 14년 봄 노나라 서쪽에서 기린을 잡았다는 기록에서 비롯되었다.[1]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 등과 함께 춘추 3전으로 불린 책으로 철학적인 면에 집중한 공양전과 곡량전과는 달리 역사적이고 실증적인 면에 치중했기 때문에[2] 한나라 때는 외면받았고 공양전이 대세였지만, 후한 말부터 좌씨전이 주목받기 시작했는데[3] 서진 시대에 가면 3전 중에서도 독보적인 지위를 획득했다.[4] 지금도 춘추좌씨전이 가장 잘 알려졌고 또한 춘추공양전과 춘추곡량전에 비해 그 내용이 상당히 많다.
특히나 춘추같은 경우는 그 내용이 게임 삼국지 시리즈에 나오는 연표처럼 짧게 한줄 문장으로 기술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초자(초장왕)[5] 가 정나라를 7년동안 칠 때 그 7년을 담은 문장들은 하나같이
춘추 본문과 맞먹을정도로 저자의 가치관이 깊이 개입하여 어떤 사건을 두고 예에 맞는다, 안 맞는다 하는 평가가 자주 나온다. 당연히 개인의 가치관에 따른 평가라 보는 이에 따라 이게 뭐가 예가 맞는 사례인지 납득이 안 가는 경우도 있다. 더불어 가치관에 따라 어떤 내용은 자세히 넣고 어떤 내용은 삭제하는 경향이 있어, 심지어 춘추 본문에 나오는 내용도 자기 가치관에 안 맞는 이야기라며 주석을 안 달고 넘어가는 대목도 존재한다.
사통에서는 춘추좌씨전에 대해 서사에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진(晉)나라 이후 좌전을 흠모해 모방하려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 모방한 작품들은 점차 볼품이 없어졌고 그 중에는 우연이라 해도 좋은 사례도 있다고 하면서 그 예시를 몇 가지 제시했다.
배송지가 주를 단 강표전에 따르면 관우가 좌씨전을 암송할 정도로 즐겨읽었다고 하며, 아버지의 영향으로 경전학에 조예가 있는 두예는 단순히 즐겨읽은 것을 넘어 현대까지 두루 쓰이는 형태로 좌씨전과 춘추의 본문을 합쳐 정리하고 주석까지 붙여 춘추좌씨경전집해, 춘추석례 등을 저술했다. 동우도 춘추좌씨전의 주석을 썼고 가규도 춘추좌씨장의를 편찬했다. 그 외에 삼국시대의 인물 중에서는 위나라의 종요, 오나라의 사섭, 촉한의 내민과 재야에 있던 인물로 고대 등이 좌전을 익혔다고 한다.
이외에도 춘추좌씨전을 좋아한 사람은 많으며 조선시대에도 좌전은 매우 대우받았다. 특히 조선 성종 때 문신인 구종직은 눈 감고도 춘추좌씨전을 외울 정도로 좋아했다. 읽어보면 명언들이 넘쳐나며 춘추의 구절들의 이해관계를 설명하다보니 서사구조가 만들어져 읽기에도 흥미로우니 한번 읽어보는 것도 좋다.[6] 유명한 경극인 조가고아와 이를 바탕으로 한 볼테르의 "중국의 고아"는 춘추좌씨전에 수록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다.
에도 시대의 탈성리학적 유학자인 이토 진사이는 춘추좌씨전을 높게 평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 때문에 강유위, 양계초, 고힐강 등 청말 신공양학파들은 유흠의 좌전 위작설을 부각시켰고, 이로 인해 한동안 좌전의 내용은 상당한 불신을 받았다. 강유위는 왕망 때 유흠이 춘추좌전을 위조하고 남은 사료로 국어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는데 스웨덴의 칼그렌이 좌전과 국어의 언어를 분석하여 좌전의 성립시기는 전국시대며, 좌전과 국어의 언어가 서로 다름을 밝혀냈다. 애당초 강유위가 춘추좌전 위조설을 주장한것 자체가 사기극이었다. 그의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와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역시 장지동의 문하생인 요평(廖平)의 고금학고(今古學考)와 지성편(知聖篇)을 그대로 베낀것이고 강유위는 그걸 정치적인 명성을 얻기 위해 사용했을 뿐이다.
따라서 현대에는 유흠의 좌전 위작설은 거의 부정되며, 신공양학파 학자들은 공양전을 중시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좌전을 공양전과 대립하는 것으로 보고 필요 이상으로 부당하게 좌전을 깎아내렸다고 보고 있지만, 여전히 좌전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논쟁 중. 이에는 현대 중공 역사학계의 고대 문헌 신뢰(이른바 '신고') 경향이 도를 넘어섰다는 외국 사학계의 판단도 있다.
중국 삼국시대를 다룬 소설인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와 두예의 애독서'''로 그려지고 있으며 관우의 경우 청룡언월도를 주창이 받들고 선 가운데 춘추를 읽는 초상화가 잘 알려져 있고 두예는 춘추좌씨전을 줄줄 외울 정도라 당대 사람들이 좌전벽이라고 일컬었다 전한다. 여하간 "의"의 상징으로서 적절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장수로 유명한 촉의 학자 내민 역시 춘추좌씨전에 조예가 뛰어났다고 한다.
코에이의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게임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서적계열으로 등장해 정치능력을 5 올려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시나리오에 따라서 관우가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는 듯. 아쉽게도 삼국지 11에선 서적 아이템들의 효과가 몽땅 설전의 모든 커맨드 사용가능으로 통합되어 존재가치가 없어졌다(...). 삼국지 12에서는 다시 정치 + 5 시켜주고 공성 특기까지 부여해준다. 재미있는 것은 삼국지 13에서 관우에게 춘추좌씨전을 증여해도 별로 좋아하는 기색이 없어서 감정상태가 호감으로 되진 않는다(...) 해당 게임에서 관우의 선호도는 무기 쪽이기 때문.
토탈 워: 삼국에선 관우의 대사인 '좌씨전을 가져와라'란 언급이 있으며, 노식을 플레이하는 경우 세력 특성으로 춘추좌씨전을 획득할 수 있는데, 이 조건이 관우가 속한 '목속성 장군으로 전투를 승리'하는 것이다.
경전이면서도 역사 사실을 다루고 있으며, 스토리텔링이 되어 있다는 특징 때문인지 분량에 비해 번역본이 무려 6종이다. 삼경(三經)[7] 을 제외한 오경(五經) 가운데 가장 많은 번역본이 출간되어 있는 셈이다. 분량이 분량이니 만큼 2천 페이지는 기본으로 넘어서는 거질로 번역된 경우가 많다.[8] 그 중 가장 압도적인 것은 장세후 교수가 번역한 을유문화사판이다. 총3책에 4452쪽. 그 뒤로 임동석 교수가 번역한 동서문화사판(총6책, 3776쪽), 정태현 한국고전번역원 명예교수가 번역한 전통문화연구회판(총8책, 3324쪽)이 있다. 업계에서는 공히 대표적인 번역본으로 꼽힌다.[9] 그 외에도 명문당판(문선규 번역, 총3책), 한길사판(신동준 번역, 총3책)[10] , 자유문고판(남기현 번역, 총3책) 등이 있다.
아쉬운 것은 글 자체의 분량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관련된 주석서의 번역이 없다는 점.
1. 개요
공자(孔子)가 지은 노나라(魯)의 역사서인 춘추(春秋)의 주석서로 공자의 제자인 좌구명(左丘明)이 지었다고 전해지나, 실제로는 그가 지은 것이 아닌 어떤 무명의 인물이 저술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줄여서 춘추좌전, 좌씨전, 좌전 등으로 부른다. 또한 인경(麟經)으로도 일컬어지는데 애공(哀公) 14년 봄 노나라 서쪽에서 기린을 잡았다는 기록에서 비롯되었다.[1]
2. 서술상 특징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 등과 함께 춘추 3전으로 불린 책으로 철학적인 면에 집중한 공양전과 곡량전과는 달리 역사적이고 실증적인 면에 치중했기 때문에[2] 한나라 때는 외면받았고 공양전이 대세였지만, 후한 말부터 좌씨전이 주목받기 시작했는데[3] 서진 시대에 가면 3전 중에서도 독보적인 지위를 획득했다.[4] 지금도 춘추좌씨전이 가장 잘 알려졌고 또한 춘추공양전과 춘추곡량전에 비해 그 내용이 상당히 많다.
특히나 춘추같은 경우는 그 내용이 게임 삼국지 시리즈에 나오는 연표처럼 짧게 한줄 문장으로 기술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초자(초장왕)[5] 가 정나라를 7년동안 칠 때 그 7년을 담은 문장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짧게 7번이 반복되며 AA나 BB에는 갑신 등의 그해 연도가 들어가지만 그에 비해 춘추좌씨전은 그 인과관계가 제법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또한 춘추에서 사건을 묘사할 때 특정 인물이나 사건을 비평하기 위해 어휘를 달리 하는데(예를 들어 높은 벼슬에 오른 사람이라도 그 행동이 악독하면 그의 본명을 그대로 불러서 깎아내린다.) 춘추만 읽어선 이걸 이해하기 힘들지만 춘추좌씨전은 그 어휘를 사용한 까닭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고 그 뒤에 사가의 평을 넣는 좌전의 구성은 후대에도 이어져 사기, 한서뿐 아니라 삼국사기나 고려사등 한국의 역사서에도 이어져왔다.초자(초나라 자작, 즉 초나라 왕)가 AA년 정후를 치다.
초자(초나라 자작, 즉 초나라 왕)가 BB년 정후를 치다.
춘추 본문과 맞먹을정도로 저자의 가치관이 깊이 개입하여 어떤 사건을 두고 예에 맞는다, 안 맞는다 하는 평가가 자주 나온다. 당연히 개인의 가치관에 따른 평가라 보는 이에 따라 이게 뭐가 예가 맞는 사례인지 납득이 안 가는 경우도 있다. 더불어 가치관에 따라 어떤 내용은 자세히 넣고 어떤 내용은 삭제하는 경향이 있어, 심지어 춘추 본문에 나오는 내용도 자기 가치관에 안 맞는 이야기라며 주석을 안 달고 넘어가는 대목도 존재한다.
3. 이후의 좌전
사통에서는 춘추좌씨전에 대해 서사에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진(晉)나라 이후 좌전을 흠모해 모방하려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 모방한 작품들은 점차 볼품이 없어졌고 그 중에는 우연이라 해도 좋은 사례도 있다고 하면서 그 예시를 몇 가지 제시했다.
배송지가 주를 단 강표전에 따르면 관우가 좌씨전을 암송할 정도로 즐겨읽었다고 하며, 아버지의 영향으로 경전학에 조예가 있는 두예는 단순히 즐겨읽은 것을 넘어 현대까지 두루 쓰이는 형태로 좌씨전과 춘추의 본문을 합쳐 정리하고 주석까지 붙여 춘추좌씨경전집해, 춘추석례 등을 저술했다. 동우도 춘추좌씨전의 주석을 썼고 가규도 춘추좌씨장의를 편찬했다. 그 외에 삼국시대의 인물 중에서는 위나라의 종요, 오나라의 사섭, 촉한의 내민과 재야에 있던 인물로 고대 등이 좌전을 익혔다고 한다.
이외에도 춘추좌씨전을 좋아한 사람은 많으며 조선시대에도 좌전은 매우 대우받았다. 특히 조선 성종 때 문신인 구종직은 눈 감고도 춘추좌씨전을 외울 정도로 좋아했다. 읽어보면 명언들이 넘쳐나며 춘추의 구절들의 이해관계를 설명하다보니 서사구조가 만들어져 읽기에도 흥미로우니 한번 읽어보는 것도 좋다.[6] 유명한 경극인 조가고아와 이를 바탕으로 한 볼테르의 "중국의 고아"는 춘추좌씨전에 수록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다.
에도 시대의 탈성리학적 유학자인 이토 진사이는 춘추좌씨전을 높게 평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춘추》를 아는 이로는 맹자만한 분이 없었고, 《좌씨전》만이 홀로 맹자의 뜻에 합치되었다. 그러므로 《춘추》를 읽는 자는 마땅히 맹자의 말씀을 정칙으로 삼고, 좌씨의 설을 참고해 보아야 한다. ...(중략) 좌씨가 전(傳)을 저술한 것은 역시 그 일의 본말을 두루 기록하여 뒷사람으로 하여금 그 선악의 실상을 지각케 한 것이니, 이것이 좌씨가 성인(聖人)의 뜻을 안 것이요, 맹자의 뜻과 합치된 것이다.
4. 한계
- 신뢰성
이 때문에 강유위, 양계초, 고힐강 등 청말 신공양학파들은 유흠의 좌전 위작설을 부각시켰고, 이로 인해 한동안 좌전의 내용은 상당한 불신을 받았다. 강유위는 왕망 때 유흠이 춘추좌전을 위조하고 남은 사료로 국어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는데 스웨덴의 칼그렌이 좌전과 국어의 언어를 분석하여 좌전의 성립시기는 전국시대며, 좌전과 국어의 언어가 서로 다름을 밝혀냈다. 애당초 강유위가 춘추좌전 위조설을 주장한것 자체가 사기극이었다. 그의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와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역시 장지동의 문하생인 요평(廖平)의 고금학고(今古學考)와 지성편(知聖篇)을 그대로 베낀것이고 강유위는 그걸 정치적인 명성을 얻기 위해 사용했을 뿐이다.
따라서 현대에는 유흠의 좌전 위작설은 거의 부정되며, 신공양학파 학자들은 공양전을 중시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좌전을 공양전과 대립하는 것으로 보고 필요 이상으로 부당하게 좌전을 깎아내렸다고 보고 있지만, 여전히 좌전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논쟁 중. 이에는 현대 중공 역사학계의 고대 문헌 신뢰(이른바 '신고') 경향이 도를 넘어섰다는 외국 사학계의 판단도 있다.
- 내용의 누락
5. 각종 매체에서의 좌전
중국 삼국시대를 다룬 소설인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와 두예의 애독서'''로 그려지고 있으며 관우의 경우 청룡언월도를 주창이 받들고 선 가운데 춘추를 읽는 초상화가 잘 알려져 있고 두예는 춘추좌씨전을 줄줄 외울 정도라 당대 사람들이 좌전벽이라고 일컬었다 전한다. 여하간 "의"의 상징으로서 적절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장수로 유명한 촉의 학자 내민 역시 춘추좌씨전에 조예가 뛰어났다고 한다.
코에이의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게임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서적계열으로 등장해 정치능력을 5 올려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시나리오에 따라서 관우가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는 듯. 아쉽게도 삼국지 11에선 서적 아이템들의 효과가 몽땅 설전의 모든 커맨드 사용가능으로 통합되어 존재가치가 없어졌다(...). 삼국지 12에서는 다시 정치 + 5 시켜주고 공성 특기까지 부여해준다. 재미있는 것은 삼국지 13에서 관우에게 춘추좌씨전을 증여해도 별로 좋아하는 기색이 없어서 감정상태가 호감으로 되진 않는다(...) 해당 게임에서 관우의 선호도는 무기 쪽이기 때문.
토탈 워: 삼국에선 관우의 대사인 '좌씨전을 가져와라'란 언급이 있으며, 노식을 플레이하는 경우 세력 특성으로 춘추좌씨전을 획득할 수 있는데, 이 조건이 관우가 속한 '목속성 장군으로 전투를 승리'하는 것이다.
6. 번역본
경전이면서도 역사 사실을 다루고 있으며, 스토리텔링이 되어 있다는 특징 때문인지 분량에 비해 번역본이 무려 6종이다. 삼경(三經)[7] 을 제외한 오경(五經) 가운데 가장 많은 번역본이 출간되어 있는 셈이다. 분량이 분량이니 만큼 2천 페이지는 기본으로 넘어서는 거질로 번역된 경우가 많다.[8] 그 중 가장 압도적인 것은 장세후 교수가 번역한 을유문화사판이다. 총3책에 4452쪽. 그 뒤로 임동석 교수가 번역한 동서문화사판(총6책, 3776쪽), 정태현 한국고전번역원 명예교수가 번역한 전통문화연구회판(총8책, 3324쪽)이 있다. 업계에서는 공히 대표적인 번역본으로 꼽힌다.[9] 그 외에도 명문당판(문선규 번역, 총3책), 한길사판(신동준 번역, 총3책)[10] , 자유문고판(남기현 번역, 총3책) 등이 있다.
아쉬운 것은 글 자체의 분량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관련된 주석서의 번역이 없다는 점.
7. 바깥고리
[1] 十有四年, 春, 西狩獲麟. (14년 봄이라. 서쪽에서 사냥하다 기린을 잡았다.)[2] 보통 경문의 의미를 잘 밝힌 것은 공양전, 명분론을 잘 밝힌 것은 곡량전,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기록한 것은 좌씨전이라고 평하곤 했다. 비록 일부 해설은 그 내용을 알기 힘든 상황(예컨대, 암살당하는 사람이 죽기 직전에 한 말이 그대로 적혀져 있다)이 첨부되어 있지만, 아주 말이 안되는 허구가 아니라 그 상황에 사람이 했음직한 말을 추정하여 서술했거나, 혹은 사람들 사이에서 입으로 전해진 내용을 서술했다. 사실 사기도 그런 식으로 윤색된 감이 없지 않다. 현실은 소설보다 소설같고, 소설은 현실보다 사실 같다고 했던가.[3] 정현이 고문에 근거하여 유교 경전을 정리하면서 비주류였던 좌씨전의 위치가 주류의 단계로 올라서게 되었다. 곡량전은 전한 중기에 잠시 주목 받긴 했지만, 줄곧 비주류...[4] 여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두예. 원래 경문과 전문이 분리된 체제였던 좌씨전을 한 체제로 재구성하여 경전으로서 위치를 다졌다.[5] 초장왕은 스스로 왕을 칭했고, 춘추오패이기도 했으나 주나라에서는 초자, 즉 자작급이었다. 물론 초장왕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춘추필법으로 춘추를 기록한 공자는 그를 초자라고 썼다.[6] 참고로 고전 업계(?)에서 《춘추좌씨전》은 《맹자(孟子)》, 《장자(莊子)》와 함께 선진(先秦)시대 3대 명문으로 불린다.[7] 이 가운데에는 『주역』 번역이 가장 많다. 다만 『주역』의 경우 점서라는 책 자체의 특성 때문인지 비전공자의 신비주의적 번역의 양이 많다.[8] 물론 글자의 크기, 책의 판형 등 전체 분량에 있어서 책 자체의 분량 외에도 페이지 수를 결정할 수 있는 요인이 많긴 하다.[9] 이유는 각기 다르다. 을유판은 자세한 역주, 동서판은 접근성, 전통판은 원문의 충실한 번역으로 이름이 높다.[10] 현재 절판. 신동준 번역본은 올재판, 인간사랑판 등으로 재편집되어 출간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