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융
孔融
(153년 ~ 208년)
1. 개요
후한 말의 관원. 삼국시대 초기의 인물. 자는 문거(文擧). 노국 사람. 공자의 20대 후손. 성헌의 의제.[1]
공자의 후손으로 명망이 높았다. 더불어, 그의 작품은 전해지진 않지만, 그는 몹시 뛰어난 문재를 지녔으며, 건안문학을 빛낸 건안칠자 중의 한 명이었다.
2. 정사
2.1. 어린 시절
그의 7대조 공패(孔覇)는 원제(元帝)의 스승이 되었다가 시중으로 승진했다. 고조부인 공상(孔尙)은 거록태수를 역임했고, 아버지 공주(孔宙)는 태산도위를 역임했다. 공융은 아버지 공주의 7형제 중 여섯째 아들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자유분방하였고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천성이 배우는 것을 좋아하여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여러 학문을 두루 섭렵하여 유년기부터 신동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가 4살 때였다. 형과 함께 배를 먹는데, 그가 언제나 작은 조각을 먹자 사람들이 이에 대해 물었는데, 그는 어린 사람이 작은 것을 먹는 것이 당연하다고 대답했다. 그가 10살 때, 아버지를 따라 도성으로 가게되었는데, 그가 도성에서 만난 당시 청류파의 수장이자 하남윤[2] 을 지낸 이응(李膺)과의 대화는 유명하다.
공융은 13세 때 아버지를 여의어 삼년상을 지냈는데, 지나치게 열심이었다. 덕분에 그는 사람이 부축하지 않으면 똑바로 서지 못할 만큼 건강을 해쳤다고 한다. 사람들은 공융의 대단한 효심에 감탄했다. 유가적인 관념이 절대적이었던 당시에도 삼년상은 육체적으로 힘들어 후한의 사대부들은 대부분 약식으로 지냈다고 한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삼년상을 지내던 상주가 그 고행에 지쳐 죽어 줄초상이 나도 주변에서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였다고. 그만큼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삼년상을 유가의 규율대로 철저하게 지내는 사람은 덕성을 갖춘 뛰어난 인물로 칭송받았다. 삼년상을 두 번 연속 6년 동안, FM으로(!) 지낸 원소가 괜히 명성이 높았던 게 아니다. 더욱이 공융의 나이가 겨우 13세였기에 그가 지낸 삼년상은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10여 세의 공융은 이응이라는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이응의 문도가 되려고 했다. 이응의 집에 도착한 공융은 문지기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군(李君)의 가문과 통했던 사람의 자손이오."
이응이 공융을 만나서 이렇게 물었다.
"고명하신 그대의 선군께서 일찍이 나의 가문의 조상과 교제를 하신 적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저의 선군이신 공자와 군의 조상이신 이노군(李老君)께서는 덕과 의를 나란히 하셨으며, 함께 사우로 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저 공융의 가문과 이군의 가문은 대대로 서로 통하는 집안입니다."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은 모두 기이한 동자라고 했다. 태중대부 진위(陳煒)가 나중에 도착했다. 같이 앉아 있던 사람이 공융과 이응의 대화를 알렸더니, 진위는 이렇게 말했다.
"어렸을 때 총명한 애가 커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답니다."
그러자 공융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말씀을 듣고 보니, 군께서도 어렸을 때 총명하셨겠습니다.”'''
당돌한 어린 공융의 말에 진위는 결국 꼬리를 내렸고, 이응은 크게 웃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명하고 장대하니 반드시 큰 그릇이 될 것입니다."
그가 16세가 되는 169년에 공융의 형인 공포(孔褒)의 친구인 장검(張儉)[3] 이 당대의 권력자였던 중상시 후람의 비리를 고발했으나 오히려 모함을 받고 공포에게로 도망쳤는데, 당시 공포는 부재 중이었고 공융이 집에 있었다. 이 사건은 곧 2차 당고의 금과도 연결되었던 엄청난 일이었는데, 장검은 공융이 어렸으므로 상황을 모르리라 생각하여 사정을 이야기 하지 않은 채 떠나려 했지만 공융은 이를 눈치채고 형 대신 장검을 숨겨주었다.
나중에 공융이 장검을 숨겨준 일이 발각되자 장검은 도망쳤지만, 공융과 공포는 이에 대해 조사를 받기 위해 체포되어 송치되었다. 체포될 적에 공융은 자신이 장검을 받아들였으니 공포는 이 일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공포는 장검이 찾아온 사람은 자신이니 공융과는 무관한 사건이라 주장했다. 담당 관리가 누구를 죄줄지 정하지 못하고 공융 형제의 어머니에게 아들 중 누구를 죄줄지 묻자, 어머니도 집안 일은 주인이자 어른인 자신의 책임이며 두 아들은 죄가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토록 서로가 자신이 책임지고 처형받겠다고 다투는 전례 없는 일 때문에, 결국 군국에서는 판결을 못 내려 끝내는 사건이 조정에 보고되었다. 그 결과 공포에게 죄를 물어 처형하라는 조서가 내려왔고 공융은 살아남았다. 이와 같은 일화로 공융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2.2. 관리 출사
평원 출신인 도구홍, 진류 출신인 변양은 공융과 더불어 인재로 이름을 날렸으며, 나중에 함께 관직으로 진출했다. 공융은 논리를 전개하거나 이치를 따지는 측면에서는 변양 등에 비해 부족했지만, 창의성과 박학에서는 그들보다 뛰어났다. 사도(司徒) 양사가 추천하여 공융은 사도부의 속관으로 재직했는데, 관리들의 부정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환관과 그 친족들의 비리를 산더미만큼 적발해냈다. 공융의 보고서를 받자 상서는 환관들의 권력을 두려워해 결재해주지 않고 공융에게 면박을 주었지만, 공융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채 환관들의 비리를 정연히 진술했다고 한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 하진이 하남윤에서 대장군으로 승진했을 때, 양사는 공융을 시켜 그에게 축하인사를 보냈지만, 공융은 하진을 만날 수 없었다고 한다. 공융은 그 즉시 사도부로 돌아가 하진을 탄핵한 뒤 고향으로 떠나버렸다. 왕윤이 예주에서 황건적을 격파할 때 공융은 그를 따르는 부장으로서 종군했다. 하남윤 시절 하진의 부하들은 이 일을 수치스럽게 여겨서 자객을 고용해 공융을 죽이려고 했지만, 도리어 하진은 사대부 사이에서 명망이 높은 공융을 포섭하려 했기에 공융은 무사할 수 있었다. 그 하진의 문객이 하진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공융은 세상에서 이름이 높은 사람입니다. 장군께서 그의 원한을 사는 일을 하시면, 사방의 사대부들이 그를 따라서 물러날 것입니다. 차라리 예를 갖추어 그를 다시 불러서 장군의 넓은 마음을 천하에 드러내는 것이 좋습니다."
이후 하진은 공융을 시어사로 천거했지만, 공융은 어사중승(시어사의 직속상관) 조사(趙舍)와 사이가 좋지 않았었기 때문에 병을 핑계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뒷날 다시 사공부에 벽소되어 중군후에 임명되었다가 재직한 지 3일 만에 호분중랑장으로 승진했다.
당시 동탁이 집권했다. 공융은 황제를 폐위하려는 동탁에게 늘 바른 말로 반박하여 동탁의 심기를 건드렸기에 그는 의랑으로 좌천되었다. 이 즈음 황건적이 다시 일어나 여러 주에서 위세를 떨쳤었는데, 그중에서도 청주의 북해국의 세력이 가장 강성하자, 동탁은 공융을 북해상으로 삼아 그를 북해로 보냈다.
본디 공융은 약간의 군무를 맡은 경력이 있었으나, 그다지 군사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인물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삼부의 모든 관리들이 공융을 추천했으니, 동탁의 압력이 작용한 듯하다. 사실상 칼을 휘두르지 않고 그를 죽이려고 보낸 셈이다.
2.3. 북해상
북해에 도착한 공융은 북해상으로써 백성들을 수습하였고 군사를 모아 훈련을 시켰다. 한편에는 청주의 각 군현에 격문을 보내어 세력을 집결시켰고 방비를 굳게 했다. 덕분에 황건의 수령이었던 장요(張饒)는 식량을 약탈하지 못했고, 20만의 무리를 이끌고 기주로 돌아갔다. 이를 안 공융은 역습에 나서 황건적을 패주시키고 각 현을 수복했다. 또한 흩어져 있던 관리와 백성들이 점차 모이자 황건적으로 오인되었던 4만 명의 남녀 백성들을 중심으로 다시 성읍을 조성했다.
황건이 다시 침략을 하자 공융은 곧 도창(都昌)에 주둔했다. 그러나 황건의 관해에게 포위되자, 다급해진 공융은 동래 출신 태사자를 평원상 유비에게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했다. 유비는 놀라서 이렇게 말했다.
"공북해는 천하에 유비가 있음을 다시 알게 해 주었던 사람이다."
유비는 3천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공융을 구원하도록 했다. 유비의 구원병이 오자 적은 도주했다.
황건의 잔당을 모두 격파하고 성읍을 수복하자, 학교와 상서(庠序)를 세우고 현명한 인재들을 천거하여 유학자들을 세상에 진출시켰다. 또 후손을 남기지 못한 사람들이나, 사방을 떠돌다가 죽은 사족들을 모두 나무로 만든 관에 넣어서 장례를 지어 주었다. 군민들 가운데 효행으로 이름이 알려졌다가 일찍 죽은 사람이 있으면, 공융은 자신이 그를 돌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여 곧 현에서 사당을 지어주도록 했다. 그 밖에도 한 가지라도 선행을 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정중히 예를 갖추어 대함으로 유가적 덕성의 회복을 장려했다.
죽으라고 보낸 곳에서 멋진 성공을 거둔 셈이지만, 공융의 정치는 너무 이상주의적인 면에 치중돼 있던 모양인지 왕수전에 의하면 호족들이 그를 만만하게 본 듯하다. 더하여 현실적인 감각이 빠졌다는 비판이 많았다.
구주춘추의 기록들은 그를 비판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에 따르면, 그는 비록 법치에 기반한 정치를 잘 펼치려고 노력했지만, 제대로 실행되는 법은 없었으며, 단지 문제를 끌어다 망라하는 것에 능할 뿐 실제로 일을 처리하는 점에 있어서는 소홀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보좌해야 할 측근들을 임용함에 있어서도 문제가 있었다. 좌승조와 유의손이라는 인물들이 책모에 뛰어나 준재라는 평판이 있었지만, 공융은 이들의 명성이 높았기에 어쩔 수 없이 높은 자리에 앉혀만 뒀을 뿐, 절대로 이들을 중히 쓰지 않았고 그들의 진언도 받아들이는 일이 없었다. 대신 그저 빈말을 잘하고 별 재주가 없던 왕자법과 유공자라는 인물들을 총애하며 중용했다고 한다.
구주춘추의 기록들은 공융의 군사적 행적에 대해서도 여러 모로 비판을 하고 있다. 유주의 군사 수만 명이 북해를 공격하자[4] 청주 전역이 모두 두려워하며 떨었지만, 공융은 기습공격을 통해 이들을 대파하고 수많은 포로를 잡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모조리 배반한 뒤 본국으로 도망갔다고 한다.
또한, 그가 황건적 잔당과 재차 싸울 때, 공융은 승리를 과신했는지 술에 만취한 상태로 친히 지휘했지만, 황건군은 중군은 공융과 맞붙으어 견제하는 와중에 좌우익은 우회로 기동하여 강을 건너 공융의 본성을 함락시켰다. 공융은 그 해가 지나도록 성을 되찾지 못하다가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지자 북해를 버리고 서주로 달아났다.
이후 그는 다시 북해로 돌아갔고, 유비의 추대를 받아 영청주자사가 됐다(195년?)
당시 원소와 조조가 두각을 드러내지만, 공융은 이들과 아무런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 좌승조는 공융에게 충고를 했는데, 원소와 조조가 강하니 이들 가운데 하나에게 붙으라는 것이었다. 그의 충고를 무시하며 공융은 좌승조를 죽여버렸고 이에 유의손은 공융을 버리고 떠났다고 한다.
후한서에 따르면 약간 뉘앙스가 다르다. 당시에는 조조와 원소가 세력을 떨치기 시작했으나, 공융은 어느 쪽으로도 붙지 않았다. 좌승 황조가 공융에게 어느 한 쪽으로 붙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건의했다. 그러나 공융은 원소나 조조가 결국은 한왕실을 없앨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는 화가 나서 좌승 황조의 말을 시류와 권력에 영합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기에 대노하여 좌승조를 처형했으며, 유의손은 공융을 두려워하여 달아났다.
후한서를 지은 범엽은 구주춘추처럼 세세하게 좋지 않은 내용은 넣지 않았으나, 좌승조의 일화를 소개하며 공융은 높은 뜻이 있고 왕실을 보좌하며 난세를 평정하려는 뜻을 가진 충신이었지만, 그의 기질이 너무 올곧았기에 넓은 시야를 가지지 못했다고 그의 저서에서 공융을 평가했다.
범엽의 평이나 공융이 이전부터 좌승조 등을 싫어했다는 점, 원소나 조조에게 붙으라고 권유했던 점을 감안하면, 좌승조 등은 비록 냉철한 안목은 있었지만, 공융이 지향하는 바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던 것 같다.
'산동을 귀부시키고 밖으로 요동과 맞붙어 군사적 이득을 얻고자 하였으며, 한 구석에 홀로 기초를 세워 (원소, 조조와)함께 하지 않았다'는 구주춘추의 기록을 생각하면, 공융은 청주를 평정한 뒤 요동의 공손도와 결전을 벌여 요동-청주를 아우르며 원소, 조조와는 독립된 세력권을 구축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나, 196년 1월에 서서히 세력을 넓혀 가던 원소의 세력권과 충돌하여 마침 전해를 격파하여 기세를 타던 원담을 맞아 전투를 하였다.
계절이 지나 여름에 이르기까지 수개월 교전한 끝에 공융은 거듭 패배하여 끝내는 불과 수백 명의 군사만 남은 채로 농성하는 상황에 몰렸다. 그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결국에는 성을 잃었다. 성이 점령당하는 날, 공융은 화살이 비오듯 쏟아져 그의 바로 옆에까지 빗발치는 상황에서도 전혀 안색이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책을 읽으며 평상시와 같이 행동하는 등 무척 의연하게 대처했다고 한다.
평소에 정무를 내팽개친 채 책이나 읽을 정도로 한심한 인간이라는 것이 구주춘추가 묘사하는 공융이다. 태도만 의연하게 허세를 부렸기에 망한 한심한 인물이라는 뉘앙스가 강하지만, 후한서에서 묘사되는 그는 그렇게까지 한심한 인물이 아니며, 오히려 절대적인 열세에 몰려 별다른 방도가 없던 상황에서 보였던 공융의 초연함과 당대의 다른 군벌들과 달리 매사에 사소한 일로 공치삿거리를 만들지 않았던 것을 칭찬한다.
저렇게 초탈한 모습을 보인 것치고는 붙잡히지 않은 채 탈출에 성공했으나, 정작 공융의 가족들은 모조리 원담에게 포로로 붙잡혔다고 한다.
마침 이 무렵은 조조가 헌제를 막 옹립했을 때였고, 헌제 또한 자신을 충심으로 보필할 인재가 필요했기에 직접 조서를 내려 공융을 불렀다. 이에 공융은 조조에게 몸을 의탁했지만, 이것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2.4. 조정의 야당
허도로 간 공융은 장작대장에 천거되었다가 다시 소부로 전임되었는데, 장작대장으로 재임하던 197년, 원소와 조조가 대장군 직을 두고 대립한 끝에 조조가 대장군의 자리를 내놓았을 때, 공융은 지절을 받아 업으로 가서 원소에게 대장군의 작위를 수여하는 칙사의 역할을 수행했다. 공융은 결코 조조에게 복종하지 않았으며, 조조를 매우 비판적으로 대했는데, 조정에서 조회를 열 때마다 그는 늘 정론을 펼쳐 의견을 주도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무렵 공융은 순욱과 설전을 벌였는데, 그들이 논한 주제는 원소군의 상장인 안량과 문추의 자질이었다. 순욱은 안량과 문추에 대해 '''필부의 용맹을 가진 장수'''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과소평가를 한 반면, 공융은 안량과 문추에 대해 '''삼군을 이끌 만한 장수'''라며 극찬했는데, 나중에 순욱의 안목이 옳았음이 드러났다.
당초에 태부 마일제가 사신이 되어 산동으로 갔다가, 회남에 이르러 원술과 만났다. 원술은 그를 가볍게 여기며 모욕을 주고 마침내 마일제가 지닌 부절을 빼앗았다. 마일제가 다시 달라고 하자 원술은 듣지 않고 군사를 동원하여 협박을 했다. 마일제는 그것이 너무 창피하고 한스러워서 결국 피를 토하고 죽었다. 마일제의 시신이 돌아오자 조정에서는 그의 장례를 어떻게 치룰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하려고 했다. 아무도 별다른 의견을 내지 않자, 공융이 홀로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황제는 옛 신하를 불쌍히 여겼기 때문에 차마 지난 일을 공안에 붙이지 못하고, 마일제의 장례에 특별한 예를 더하지 못하도록 했다. 조정도 황제의 명에 따랐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죽은 마일제를 다시 육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공융은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마일선은 상공의 존엄한 자리에 있으면서 모절을 든 사신이 되었습니다. 명을 받들어 흔들림 없이 그대로 동하를 평화롭게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눈웃음이나 치는 간신들에게 휘둘려서 장표에 서명이나 하는 사람으로 으뜸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랫사람들의 눈치나 보고 윗사람을 기망하였으니, 간사함으로 군주를 섬겼을 뿐입니다. 옛날에 국좌는 진나라 군사들과 마주쳤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의료는 칼날 앞에서도 정색을 했습니다. 왕실의 대신이 되어 어찌 협박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있을 수가 있습니까? 또 원술이 역모를 꾸민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마일제는 사방을 돌아다니며 오랫동안 한의 율법을 어긴 죄인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죄를 사해주거나 적당히 무마하는 일에 전념했을 뿐입니다. 원술을 만나고 3일이나 지났으면 모든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춘추시대 노나라의 숙손득신이 죽었을 때, 양중의 죄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죽은 날자를 기록에 남기지 않았습니다. 정나라 사람들은 유공의 난을 토벌하고 자가의 관을 깎았습니다.
속한서(續漢書)에 따르면 태위 양표는 원술과 사돈관계였고, 원술은 황제를 칭하려 하였으므로, 조조와 양표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를 근거로 양표를 붙잡아 죽일려고 했다. 공융이 이 소리를 듣고 조복을 입지도 않고 조조를 만나서 말했다.옛 사람은 크고 두터우면 옭고 그름을 구별하지 못하고, 관리들이 올곧으면 형벌이 밝아진다고 했습니다. 정치가 지나침이나 빠짐이 없는데도 백성들이 죄를 지는 것은 모두 스스로 저지른 짓입니다. 세상이 기울어지면 풍속을 교화하는 기능이 무너지고, 정치가 흔들리면 법이 사람들을 해칩니다. 그러므로 상류층이 도를 상실하면 백성들이 흩어진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다시 묶으려면 고대의 형법인 신체를 손상시키는 법률을 버려야 했습니다.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서 저절로 늘어나거나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은(殷)의 주왕(紂王)은 아침에 냇물을 건너는 사람을 보고 정강이를 발랐기 때문에 천하의 사람들이 무도하다고 했습니다. 구목(九牧)의 땅에는 1,800명의 군주가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한 사람씩 월형(刖刑)으로 처벌했다면 천하에는 1,800명의 주왕이 있었던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야 풍속을 아름답고 온화하게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또 형벌을 받는 사람은 온전하게 살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더 악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숙사(夙沙)는 죽음을 각오하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려(伊戾)는 송나라의 화근이 되었으며, 조고와 영포는 세상에 큰 우환거리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차라리 적당한 조치를 취하여 옳은 길로 유도를 하는 것이 낫습니다.
비록 죽권과 같은 충성심과 변화와 같은 믿음과 손빈과 같은 지혜와 사마천(司馬遷)과 같은 재능과 항백과 같은 억울함과 자정과 같이 모든 학문에 통달한 사람이라도, 칼질 한 번이면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맙니다. 이는 태갑이 항상 도를 생각하게 된 것과 진목공이 진(秦)나라를 패자로 만든 것과 남수가 뼈를 세운 것과 위무공이 초연을 베푼 것과 진탕이 모든 일을 주관했던 것과 위상(魏尙)이 변경을 수비했던 것과 같은 경우는 다시 베풀어지지 않습니다. 한왕조가 개국을 하여 개악(改惡)의 길을 걸은 것은 대개 이와 같은 사례를 참고로 했습니다. 그러므로 밝은 덕을 갖춘 군주는 멀리 헤아리고 깊이 사유함으로써, 단점을 머리고 장점을 취하면서 정치적 개혁을 구차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조정에서 옳다고 하더라도 갑자기 그것을 고치지도 않았습니다.
조조가 말했다.양공은 4대에 걸쳐 밝고 바르게 천자를 섬겨 그 덕망을 모두가 우러러보고 있습니다. 주서(周書)는 "부자형제까지 죄는 미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5]
, 지금 원술 때문에 양공까지 죄를 뒤집어 쓰고 있습니다. 주역에는 적선여경(積善餘慶), 즉 덕행을 많이 행한 집안은 그 자손들이 그 덕을 누리게 된다는 말이 있는데, 양표가 하옥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 귀를 위심했습니다.
공융이 말했다.그것은 국가의 일이지, 내가 알바 아니오[6]
조조도 어쩔 수 없이, 양표를 풀어주라고 하였다. 공융은 조정의 무력함에 대하여 꽤나 한탄했던 듯하다. 당시에 형주목 유표는 공납을 바치지 않으면서 여러 가지 거짓말을 하다가 마침내 천지(天地)에 제사를 지낼 때 마치 천자가 가마를 타고 가는 것처럼 했다. 조칙을 내려 그것을 질책하려고 하자 공융은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제가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주나라 시대에 창업주인 무왕(武王)이 귀국한 지 2년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어린 성왕이 등극하고 무왕의 아우인 주공이 섭정을 했습니다. 주공은 그의 아우인 소공(召公)과 의논하여 정사를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제 열 살도 안된 어린 성왕이 소공을 죽였다고 한다면, 주공의 입장에서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천하의 대신들과 선비들 중에서 명공(조조)을 우러러 보면서 따르는 자들은, 공의 총명과 인지로서, 한나라의 조정을 도와가며 다스리고 , 바른 자들을 천거하고 , 요상한 것을 버리고 하는 것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무고한 사람을 느닫없이 죽이는데, 만약에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듣는다면, 도대체 누가 명공을 따르겠습니까? 공융은 노국(魯國) 남자로, 내일 옷을 벗고 되돌아가서, 두번 다시 조정에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건안 5년에 헌제의 아들이었던 남양왕(南陽王) 유풍(劉馮)과 동해왕(東海王) 유지(劉祗)가 죽었다. 황제는 일찍 죽은 그들이 불쌍하여 사계절에 한 번씩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한편, 공융에게 제사에 참석하도록 했다. 공융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영형주목 유표가 방자하게도 법도를 어기다가 마침내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마치 사직을 갖추려는 것처럼 의식을 진행했다고 들었습니다. 비록 우매하여 극악한 짓을 저질렀지만, 그 죄는 죽어야 마땅합니다. 지엄한 국체(國體)를 어겼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만승(萬乘)은 지극히 엄중하고, 천왕(天王)은 지극히 존엄하기 때문에 그 몸을 성스럽게 여겨야 하며, 나라의 신기(神器)가 되어야 합니다. 계급(階級)은 멀리 걸려 있으며, 녹위(祿位)는 한계와 등급이 있습니다. 오히려 하늘에는 계단이 없으므로 해와 달까지는 뛰어넘지 못합니다. 하찮은 신하라도 이러한 법도를 어기면 빨리 제거할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만약 사방에서 이러한 조짐이 나타나면 그 싹을 미리 막아야 합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비록 중대한 잘못이 있어도 그것을 감추어주고 참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의는 그와 같은 관용은 쥐새끼에게 그릇을 던져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제나라 군사가 초나라는 제쳐두고 풀을 거두지 않을 것을 책망한 것이나 다름이 없으며, 왕사가 패했음에도 진나라 사람들을 기록에 남기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전에 원술(袁術)의 죄는 폭로하고 지금 유표에 관한 일은 아랫사람에게 맡긴다는 것은, 높은 언덕을 볼 때는 말뚝이라도 사용하지만 천험의 높은 산은 걸어서 올라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유표의 발호(跋扈)를 살펴보면, 자기 마음대로 열후(列侯)를 죽였고, 조칙이 전달되지 못하도록 막았으며, 공비(貢篚)를 끊고 도둑질을 했습니다. 또한 아주 흉악한 무리들을 끌어들여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했습니다. 오로지 주상에게 반역을 할 생각을 품은 자들이 연수(淵藪)로 모여들고, 고정(郜鼎)이 대묘에 있으니 이보다 심한 경우가 또 있겠습니까? 뽕잎이 떨어지고 기와장이 깨지는 것을 보면 그 정도를 알 수가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유표가 제사를 지낸 일은 모른 척하는 것이 나라의 권위를 세우는 길일 것입니다.
뒷날 원소가 죽고 조조가 원소의 후계자 원상을 격파하여 업을 함락했을 때, 조조와 조씨 일족은 많은 원소의 딸과 며느리들을 범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조조의 아들인 조비가 원희의 부인이었던 문소황후를 빼앗아 강제로 처로 삼은 것이다. 공융은 조조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왕은 주왕을 정벌한 후에 달기를 주공(周公)에게 주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조조와 조씨 일가를 조롱하는 말이었는데 세간의 비난을 두려워하던 조조는 공융이 워낙 박식했기 때문에 자기를 비웃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공융이 경전을 인용해 자신을 두둔한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책을 찾아봐도 그런 고사를 찾지 못했기에 나중에 공융을 만났을 때 그 이야기를 어떤 책에서 발췌했냐고 물어봤는데 공융은 "지금의 일을 살펴보니 과거에도 당연히 그랬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7] 즉, 공융은 실재하지 않는 고사를 거짓으로 지어내 말함으로써, '오늘날 조조 일족의 행태는 성현의 행적과 대비되는 부도덕한 일이다.'라는 이야기를 돌려서 말한 것이다. 그제서야 조조는 공융이 자신의 행동을 비꼬는 정도를 넘어서 역사와 고전도 모르는 무식쟁이[8] 라고 까댄것을 알았다.성은이 두텁고 따뜻하셔서 계절이 지날 때마다 더욱 생각이 나실 것입니다. 두 왕의 영령을 애도하시며 슬프고 불쌍한 마음을 담은 조칙을 내리시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전의 규정을 살펴서 예제(禮制)는 바르게 시행하셔야 합니다. 신이 홀로 지난 사례를 살펴보니, 양회왕, 임강민왕, 제애왕, 임회회왕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들은 모두 경제, 무제, 소제, 명제와 같이 태어난 현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조에서 제도를 고쳐 제사를 지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만약 임시로 그러한 조치를 내렸다면 열전이나 본기에 그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분들이 모두 어려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황제께서 그것을 슬퍼하여 어른과 같은 예를 갖추고 시호를 더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땅히 주상의 은혜를 가늠하여 제사를 마친 후에는 어 이상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고작 한 살인 경우에는 더욱 예와 일치되지 않을뿐더러 선대의 황제들이 남긴 법도와도 일치되지 않으니 그렇게 하시지 않아야 합니다.
이후 하북을 평정한 조조가 오환 원정을 계획하자, 나서는 김에 옛날 숙신이 조공을 바치지 않고 정령족이 소무의 소와 양을 훔친 것까지 다스리지 않겠느냐며 비웃었다고 한다. 이 말인즉, 내부적으로도 할 일이 많은데 그렇게 밖으로 돌 테면 나서는 김에 아예 옛날옛날부터 있던 온갖 시시콜콜한 일까지 다 처리하고 오라는 말이며, 한편으로는 조조가 정벌하지도 못할 곳까지 생각없이 함부로 나서대는 얼빠진 사람이라고 비웃는 말장난이기도 하다.
또한 오환 원정 당시 군량이 모자랐기에 조조가 금주령을 내리자, 이를 반박하는 글을 올리며 조조와 논쟁하기도 했다. 식량난은 곧 자신의 치세가 그만큼 좋지 못하다는 뜻이기 때문에, 조조는 "옛 암군들이 술에 빠져서 나라 망쳤다"는 구실을 댔다. 공융은 "여색 때문에 나라 망친 일도 적지 않으니 여자도 금합시다."라며 허를 찔렀다. 물론 공융이 반대한 이유는 극히 사적인 이유도 포함되었으며, 그것은 곧 자신이 술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이 일화는 세설신어에서도 언급되는데, 공융이 제례를 지내기 위해서 술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금주령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공융의 인기가 높아졌으며, 세설신어에서는 조조가 공융을 죽인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공융의 금주령 반대에 대해서는 여론이 좋았던 듯하다.
중국의 근대 학자인 노신은 이에 대해 "그때 내린 조조의 금주령은 그가 나라를 다스리는 경세가라는 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조조는 그때 '현실'을 책임진 조정의 경세가였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융은 야당의 방관자 입장이었으므로 자기 멋대로 함부로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2.5. 최후
공융은 이미 조조라는 사람이 점차 간웅으로서의 기질을 나타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으로 조조를 감당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 공융은 자꾸 비꼬는 말을 내뱉었다. 그것이 조조와 공융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또 일찍이 고대의 왕기제도(王畿制度)에 따라서, 수도를 중심으로 사방 1천리 내에는 제후를 봉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여, 조조로부터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는 의심을 받았다. 조조는 그 일로 더욱 공융을 꺼렸다. 그러나 공융의 지명도가 워낙 높았으므로, 겉으로는 서로 참고 용인하는 것처럼 했지만, 속으로는 그와 정론을 펼치는 것을 기피하면서, 공융이 자신의 대업을 달성하는데 방해가 될 것이라는 생각했다.
조조는 외부적으로는 공융에 너그러운 척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끙끙 앓고 있었다. 208년 8월, 조조는 이미 공융을 싫어하는 마음이 쌓였다. 공융과 사이가 나빴던 치려라는 인물을 높은 관직에 임명했고 치려 또한 조조에게 영합되기 위해 관직을 이용해 공융의 죄를 날조해 고발했다. 공융이 파직되자, 실질적인 배후에 있던 조조는 표면적으로는 치려와 공융 사이를 중재해주는 척 하며 회유에 나섰지만, 공융이 고분고분하게 따를 기미가 보이지 않자, 마침내 승상군모좨주(丞相軍謀祭酒) 노수(路粹)를 시켜서 다음과 같이 공융을 모함하는 상주(上奏)를 올리도록 하였다.
글이 상주되니 공융을 하옥하고 기시(棄市)[12] 되었는데 이때 나이 56세였다. 그의 아내와 자식 모두 주살되었다. 이때의 죄목이 가관인데 공자의 후손에게 '''불효죄(...)'''의 죄목을 내린 것이다. 공융이 죽기 10개월 전에 원소 집단이 붕괴했고, 전 달에는 유표가 죽었으며, 조조는 막 삼공을 폐지하고 승상에 오른 시점이었다. 양대 주적이 모두 박살났으니 더 이상 거리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듯 하다.소부 공융은 예전 북해에 있을 때에 왕실이 안정되지 못함을 보고 무리를 끌어 모아 불궤(不軌)를 꾀하고 이르기를
"내 공자의 후손으로 조상은 송나라에서 멸문을 당했었소. 천하를 소유할 자가 어찌 묘금도[9]
만 있겠소?"하였으며 손권의 사자와 더불어 이야기하며 조정을 비방하였습니다. 또한 공융은 구경(九卿)의 반열에 올라서도 조정의 논의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며 맨머리에 미복(微服)을 하고 당돌하게도 궁궐을 다녔습니다. 또한 전에는 평민이었던 예형과 더불어 방자하게 말하기를 "아버지가 자식에게 무슨 친함이 있겠는가. 본래 의미를 논한다면 실상 부부 사이의 욕정이 나타났을 뿐 아닌가.[10] 자식이 어머니에게 또한 무슨 친함이 있겠는가. 비유컨대 물건을 병 속에 두었다가 꺼내면 병과 떨어져 상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네.[11] "하고는 예형과 더불어 서로를 칭찬하였습니다. 예형이 공융에게 일러 말하기를
'중니(仲尼)께서 죽지 아니하셨소.'
하였사옵고 공융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안회가 다시 살아났구려.' 하였습니다.
"이처럼 대역 무도하니 마땅히 무겁게 주벌하소서."
공융을 처형한 표면적인 이유는 위에서 나오듯이 예형과 함께 서로를 성인(聖人)인 공자와 안회로 지칭한 불경을 범했으며, 기근이 들어 모두 죽게 생겼을때 아버지가 불초한 인간이라면 그를 살리느니 차라리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이 낫다는 패륜적인 주장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하자면 공융은 효(孝)라는 개념을 타산적인 것으로 해석했다. 정작 공융이 효자의 모범으로 칭송받았던 사실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데, 이와 같은 그의 효의 해석은 당시 유가적 미덕으로 칭송받던 청렴이나 효행이 본질은 없어진 채 오로지 과시적인 허례로 악용되던 사회상을 비판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후한 말 영제의 철권과 극심한 정치적 부패에 대한 반발은 유가적인 미덕인 청렴함과 효행을 극단적으로 과시하는 원리주의적 풍조로 이어졌는데, 이는 효가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에 대한 당연한 고마움의 감정이 아닌 단순히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겉치레로 전락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런 분위기에서 몇몇 인간들은 일부러 자기학대에 가까운 고행을 통해 명성을 얻는 등, 효를 정치적 출세에 악용했다.
위선적 행동양상은 후한 사대부 전체에 만연했던 풍조인 만큼 조조 진영이라고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그러므로, 이후의 시대인 위진시대까지도 이런 기풍이 이어졌다. 본질을 살펴보면 공융은 과격한 언사를 통해 변질된 효를 실천한 인사들의 위선성을 비판한 것이다. 다만 조조는 한이 충과 효를 중요시하는 유교이념을 국가의 이념으로 삼았는데, 공융은 효에 대한 개념을 단순히 타산적으로 해석했으니 국가이념을 뒤흔드는 것이라는 억지를 부리며 처형한 것이다.
그는 아들이 둘(후한서에서는 아들 하나, 딸 하나) 있어 형은 6살, 동생은 5살이었는데, 세설신어에는 낮에 공융이 잘 때 동생이 술을 훔쳐 먹었더니 이를 본 형이 어찌하여 배례를 않느냐고 묻자, 동생은 훔쳐 마시는데 무슨 예를 행한단 말인가라고 반문했으며, 언어라는 책에 종회 형제와 관련해 비슷한 고사가 실려있어 이 고사가 와전된 내용으로 추측된다.
아버지인 공융이 죽임을 당할 당시에 형은 9살, 동생은 8살로 두 사람은 바둑[13] 을 두었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도망가라고 급히 알려주니 '''둥지가 깨졌는데 그 안의 알이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꾸하더니 두던 바둑을 계속 뒀다고 한다. 이렇게 적어 놓으니 마치 다 큰 어른처럼 느낄 텐데, 사실 어린아이들이었다. 큰 애가 아홉 살이고 작은 애가 여덟 살(후한서에서는 딸이 일곱 살)로 이거야말로 부전자전이리라.
세설신어에서는 저 일화가 못치기놀이로 나온 것 말고도 조비가 원희의 처를 받아들인 뒤에 조조에게 편지를 보낸 이야기, 그의 아들과 딸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와 자신의 집을 방문한 손님을 대접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그의 아들과 딸이 연약한 어린아이였므로 그들의 목숨을 보전시켜 다른 사람의 집에 기거하게 했는데, 그 집의 주인이 고깃국을 보내주어 아들이 그것을 마시자 딸이 오늘 같은 화를 당했는데 어떻게 오래 살 수 있겠냐면서 무슨 믿는 구석이 있다고 고깃국 맛을 알겠어요?"라고 질의했다. 어떤 사람이 조조에게 그 말을 알리자 그들은 체포되어 여동생이 오빠에게 "만약 죽어서도 지각이 있어서 부모님을 뵐 수 있다면 어찌 지극한 바람이 아니겠어요?"라고 말한 뒤에 당당히 목을 길게 내밀었다고 한다.
공융은 권세를 잃고 실각한 뒤부터 처형되기 전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 집에 기거하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날마다 빈객이 그의 문하에 가득했다고 한다. 공융 자신은 인재를 아끼고 선비를 좋아해 늘 부족한 듯이 여겼는데, 그러면서도 매번 좌중에 상객이 늘 가득하고 술이 떨어지지만 않으면 나는 걱정이 없겠다라 탄식했다고 한다.
한편 진서 양호열전에 양신의 전처가 공융의 딸이라는 기록이있다. 저서로 《공북해집(孔北海集)》(총 10권), 《천예형표(薦禰衡表)》 등이 있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18로 제후 중 한 명으로 참가하는데 정사에서는 아니었다. 황건적 관해에게 북해를 공격당하나 태사자, 유비 삼형제가 구원해주었다. 같은 시기 도겸이 위기에 빠졌기 때문에 유비와 함께 도겸을 구원하러 간다. 조조가 신야의 유비 공격을 명했지만 공융은 반대해서 조조에게 처형되었다.
정치, 사회, 윤리철학 전반에 걸쳐 복잡하게 다양한 요소가 걸친 공융의 죽음을 유비를 치는걸 반대해서로 퉁친건 아쉬운 부분이지만 그 원인이된 혼잣말은 나관중이 공융 캐 해석을 잘했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인데 혼잣말로 "지극한 불인(仁)으로 지극한 인을 치려하니 패하지 않을리가 있겠냐."라고 빈정거린 것 이 처형 원인이었다. 정사의 본인 어록이라고 해도 무방한 수준.
연의에서도 공융의 성격 면모를 반영했다. 대표적인 예는 양표를 문초하지 말고 낙향시키라는 그의 진언과, 장수의 투항을 진언하는 대목이나, 유비에게 패하여 사로잡혀 설득 당한채 돌아온 유대와 왕충 처형을 말리는 대목 등이다.
연의에서는 공융이 예형을 조조에게 추천했다가 예형이 조조의 안전에서 막말을 내뱉자 화가 난 조조가 예형을 죽일까봐 조조를 말리기도 한다. 더불어 여포가 죽은 뒤 한동안 조조에게 진언을 하며 순욱과 조금 대립하는 역할도 맡는다. 이후로 비중이 다시 급격하게 줄어든다.
4. 평가
4.1. 극과 극을 달리는 평판
공융에 대한 사가들의 '''평가는 양극으로 극단적으로 갈라진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공융의 전기를 따로 만들지 않았다. 대신 그는 최염전의 말미에 부록으로 공융의 행적을 매우 간략하게 언급하며 오만하게 굴다가 죽었다고 적었다. 더불어 사마표는 구주춘추에서 공융을 맹렬하게 비판했다. 앞서 설명했듯이 특히 청주에서의 공융의 행적을 두고 조목조목 따지며 비판하는데, 대체로 말만 앞섰지 제대로 실행되는 게 없었다는 것이 주요한 내용이고, 재주는 얕은데 이상만 가득한 인물로 표현한다.
당장 제갈량은 내민을 파직시키면서 공융보다 더한 혼란을 불러올것이라 하며 그를 파직시켰다
후한서를 지은 범엽은 공융을 순욱, 정태와 더불어 후한의 마지막 충신으로 평가해 세 사람을 같은 열전에 묶었다. 공융에 내린 범엽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공융은 다른 사람의 선행을 들으면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좋은 점이 있으면 반드시 부연해서 완성시켰다. 상대의 면전에서 단점을 직접적으로 지적했으나 뒤에서는 그 장점을 칭찬했다. 현명한 선비를 좋아했으므로 많은 사람들을 발탁하여 명예를 얻게 했다. 선한 사람을 알고 있으면서 추천하지 않는 것을 자신의 잘못과 같이 여겼다.'
(중략) 마찬가지로 공문거의 높은 뜻과 외곬적인 행동은 사람들의 정의감을 불러일으켜 효웅의 야심을 저지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그 때문에 조조도 살아있는 동안에 한의 천하를 빼앗지 못하고 아들의 대에 한을 대신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본디 곧은 성품의 사람은 부딪혀 부서지는 것이 숙명으로, 원만하게 다스려지도록 허리를 구부려 사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공문거는 순수한 백옥과 같아 준열(峻烈)함의 표상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범엽 또한 공융이 청주에서 할거할 당시의 행적을 모르진 않았던 것으로 보이나 사마표처럼 세세하게 따지지는 않은체, 공융의 성품이 너무 올곧다 보니 시야가 좁았다고 그의 장점을 높이 사는 동시에 그의 단점을 지적하였다.
당대 사가들 평가부터 이렇다보니 후대의 평가도 극단적이다. 같은 행적을 두고서도 부정적으로 보는 쪽은 죽을 만해서 죽었다, 아무것도 못하면서 입만 산 인물이라 폄하하고 긍정적으로 보는 쪽은 후한의 키케로, 시대의 마지막 양심으로 평가하는 등 평이 심하게 갈라진다.
다만 당시 혼란스러운 곳이었던 청주에 좌천성으로 부임해서는 황건적을 몰아내고 통령체계를 회복했다는 자체를 감안하면 그는 절대로 가볍게 생각될 인물이 아니다. 그는 권력자들과 상성이 극단적으로 나빴는데, 십상시→하진→동탁→원소→조조로 이어지는 당대 최대의 권력자 계보에서 공융이 비판하지 않은 인물은 없다. 다만, 원소와 공융의 관계는 직접적인 기록이 많지 않고 오히려 관도대전 무렵 공융은 그에 대한 비관론을 펼쳤기에 친원소파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공융이 원소를 최대의 역적이라 여긴 것은 후한서에서 확인되고, 원소도 조조에게 공융을 죽이라고 권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조는 여론을 의식해 거절하였다.
조조가 불효죄로 삼족을 멸했기에 건안칠자의 1명으로 꼽히면서도 다른 6명과 달리 전혀 언급되지 않는 등 조조의 시대에 거론되는 대상은 아니었으나, 조비가 공융의 시를 특히 좋아했기 때문에[14] 그는 조조가 죽은 뒤에 공융의 시문을 모은 공북해집을 출간했다. 하지만 조조 시대를 거치며 공융의 글이 많이 사라진 탓에 조비는 남아있는 공융의 글을 신고하는 자가 있으면 황금과 비단을 내리며 포상했다고 한다.
공융은 글재주가 뛰어나 건안칠자의 일원이었고 조비와 <후한서>에 남겨진 평에 따르면 '논리를 전개하고 이치를 따지는 측면에서는 부족했지만, 그는 창의적이었고 아는 것이 많았다고 한다.
처형하기 직전 임종시(臨終詩)를 지어 죽는 순간까지 조조를 비판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그는 국가에 충성하고 효로써 세상을 교화한다는 유가적 이념을 끝까지 실현시키려 노력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공융孔融:비틀린 시대에 용납되지 않은 비운의 천재
4.2. 천하의 효자가 불효죄로 처형당한 이유
공융은 이렇게 효에 대해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불효죄로 처형되었으나 정작 그 자신은 효자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왜 공융은 이렇게 말해야 했을까? 공융 처형의 빌미를 제공한 이말은 부모와 자식의 윤리를 전면 부정하며 효(孝)[15][16] 에 대한 가열찬 비판을 담고 있다. 유교의 성인으로 받들어지는 공자의 후손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아비가 자식에게 무슨 친함이 있겠는가? 근본된 뜻을 논하자면 사실 (아버지의) 욕정(欲情)이 결과로 나타났을 뿐 아닌가? 자식 또한 어미에게 또한 무슨 친함이 있겠는가? 비유컨대 병 속에 있던 물건을 꺼낸 것과 같을 뿐 아닌가?
- 《후한서》 <공융전>
생각한다면 어떻게든 공융을 죽일 꼬투리를 찾던 조조가 가장 사회적 공감을 받기 쉬운 죄목을 골라 잡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공융과 조조의 대립 관계에 대해 좀 더 초점을 맞춰볼수 있다. 이미 언급한 대로 공융은 조조를 '권력'을 공격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융이 끝내 용서받지 못한 것은, 그가 조조의 '권위'를 공격한 것을 조조가 가볍게 여기지 않았음에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조는 당대의 여러 명사들처럼 효렴을 통해 관직에 진출했고, 아버지 조숭의 참사를 갚는다는 명분하에 서주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 이 시대의 여러 야심가들과 마찬가지로 조조 역시 효를 통해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고자 했던 셈이다. 그전까지 조조가 싸워온 상대들은 황건적, 흑산적 등 반란세력 또는 무력을 기반 삼아 괴뢰를 세운 동탁 같은 부류들이었다. 반면 서주의 통치자 도겸은 엄연히 조정의 명으로 서주를 다스릴 권한을 얻은 공직자였으므로 조조의 서주 공격 및 학살은 그의 첫 일탈이자 사적 전쟁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헌데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공융의 효 해석이 결합하면 조조가 결코 달갑게 여길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한다. 공융에 의하면 효는 어디까지나 근친 사이에서만 성립되는 이기주의에 불과하며,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그 어떤 윤리적 정당성도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조조가 자신의 행동을 변호할 명분의 기반 또한 정당성을 잃는다. 결국 남는 것은 한에 대한 충성은 나몰라라 하고 영토 확장과 세력 경쟁에 대한 군웅들의 야욕에 불과한 것이다. 과연 조조는 이러한 해석이 공융이 가진 명성에 힘입어 설득력을 가질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공융은 자신의 발언이 단순한 변덕이나 자기만족을 위한 헛소리가 아님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끊임없이 조조를 조롱했으며 그 논리의 원천은 대부분 경학에서 나왔다. 조조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분노와 위협을 느낄 만한 상황이었다.
이런면에서 공융이 참으로 적절한 지적을 한게, 실제로 효는 굉장히 타산적인 논리[17] 고 충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효는 결국 '봉양의 의무를 진 자'가 '봉양의 혜택을 받는 자'로 자연 전환되면서(자식도 결국은 부모가 되니까) 희생과 수혜의 대차를 맞추는, 결국 철저한 손익균형/순환의 시스템인데 반해,충은 한번 신하는 영원히 신하, 한번 군주는 영원히 군주로 못 박힌, 불변의 불균형 관계다. 결국 효와 충을 억지로 단일화 시키다 보면,신하가 '나는 내 의무 다했으니까 나도 왕 되보련다!' 라는,오히려 찬탈과 왕조 교체의 논리가 정당화 되는 것도 가능하다. 공융이 했던 문제의 발언은,이런 효자/역적들을 지켜보며 오랜 세월 내려온 이 모순된 충효관에 대해 나름 느낀 바가 많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은데,공자의 후손으로서 그가 이런 문제의식을 새로운 학설로 발달시켰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의견도 있다.
다시 말해 공융은 유교의 양대 덕목인 효와 충이 양립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현한 셈이다. 전후 양대 400년을 합쳐 한나라를 지탱했던 사상[18] 인 유교를 배제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세력이 받을 사회적 반감을 최대한 줄일 방법을 찾아야 했고, 그 결과 발생한 것이 바로 효의 부각이었다. 이렇듯 윤리가 정치적 도구로 전락하는 과정의 한가운데에 있던 공융은, 힘으로는 그들을 제압할 수 없는 대신 끊임없는 조롱으로 일관했다. 그저 한 개인에 불과했다면 무시당하거나 진작 제거되는 빌미를 마련했을 발언들은 공융의 명성을 뿌리 삼아 나름대로 질긴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
공융은 젊은 나이에 이미 조정으로부터 복잡한 시선을 받은 사람이다. 후한 말 대장군 하진은 공융의 탄핵을 받자 무사들을 시켜 그를 암살하려 했다. 헌데 빈객이 공융의 명성이 높은데 그를 죽였다간 사방의 사대부들이 등을 돌릴 것이 우려되므로 차라리 회유책을 쓰는 것이 낫겠다고 진언하여 받아들여진 사건이 있었다. 조조가 자신에게 비판적이었던 공융을 굳이 끌어안은 것 또한 반대 세력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정치적 필요에서 나왔을 터이나, 정작 그 공융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규합해주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을 늘릴 판이 되는 것을 좌시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융이 멸족을 당한 것은 다름 아닌 공융 자신이 조조에게 갖는 존재 근거에서 기인했다는 이야기가 된다.결국 조조는 구현령으로 인재를 선발할때 불인불효를 외쳤으나 정작 당대의 명사 공융은 불효죄로 죽인 꼴이 되었다. 공융은 마지막 순간까지 이런식으로 조조에게 엿을 먹였으니 아이러니가 따로 없다.
후일 조조의 후손 조모가 천자의 지위를 잃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근거는 그가 불효자라는 조작된 사실에서 나온 것이다. 이로써 조모는 죽은 뒤에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여 시호조차 없게 되었다. 신하가 황제를 창으로 찔러 죽이는 최대 최악의 불충조차 황실의 어른에게 불효했다는 사실에 눌려 가려지고 또 그것이 정치적 필요의 당위를 얻었다는 이 기막힌 사건은, 생전의 공융이 무엇을 경계하고 또 무엇을 적대하고자 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사상이 사상으로 남지 않을 때, 정치적 필요에 따라 변질되고 오용될 때 그것은 창칼 못지 않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더욱 대적하기 어려운 무기가 될 수 있다. 물론 공융은 사상이 사상 그 자체로 남을 수 있도록 지키려 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그 자신이 직접 조조에 대항하기 위해 사상을 무기로 삼아 행동한 것에 가까우며 그 결과 일가가 함께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조조 또한 공융을 죽임으로써 자신이 굳게 세운 효의 불가침성으로 인해 살해당한 자손이 오히려 죄인이 되고 찬탈을 당하는 역사의 비극을 낳았다.
이상의 사실을 토대로 볼 때, 공융을 순수한 철학자로 보기 어렵다는 관점은 공융 자신의 정치적 행적에서 직접 드러나므로 정당하다. 그러나 그들의 정쟁에 이념이라는 요소가 깊게 침투해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결국 공융의 주장과 그의 삶은 정치와 사상, 윤리도덕이 완전히 분리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정면 반박인 셈이다.출처: 강명의 삼국지 - 충과 효에 대한 세 가지 질문
학문적 관점으로 보면 후한말쯤 가면 이미 동중서가 확립한 유교적 패러다임에 대드는 것은 노자나 장자를 공자보다 확연히 아래인데 공자가 미처 얘기하지 않고 지나간 부분에 대해 얘기했다는 식으로 슬그머니 끼워넣는 게 가장 성공한 시도. 공융이 어떤 문제의식을 가졌는지 명확하게는 파악되지는 않지만 그 방향성만으로 볼 때 그 문제의식을 개개의 사례가 아니라 하나의 학문으로 설립한다는 건 공융의 학자적 능력이 동중서가 아니라 주자급이라도 무리수일 가능성이 높다. 이미 '우리 아빠나 엄마가 나쁜 놈이면 어떻게 합니까?' 에 대해서 공자가 명확한 답을 내린 바 있기 때문에 어지간히 교묘하지 않으면 학설로 정립해 보려는 순간 공융의 사회적 학자적 생명 - 디 엔드일 가능성 다분하다.
유교의 지배적 위치와 충효에 의한 통치 체제 자체의 개혁을 논하는게 아니라 그 교리의 다양한 해석적 측면에 대한 얘기이다. 유교,특히 초기 유교는 우리가 조선시대 주자 해석 조금 바꾸면 죽일 놈 취급했던 것 처럼 철두철미 불변의 도그마를 뿌리내린 학문이 아니었고 항상 새로운 해석과 변용을 받아들이며 성장해 나갔다. 실상 후한 말~삼국시대 유교는 이미 동중서 시절의 유교와는 크게 다른게,애시당초 동중서 시절에는 금문 뿐이었지만,이 시기에는 정현에 의해 고문 중심의 금고문 통합이 이루어졌으니 근본 텍스트 자체가 다르다.
더군다나 동중서 등이 관학화 한 유교는 먼치킨 급으로 막강한 황제들(무제/광무제) 비호 아래 황제 폐하 짱짱맨 수준의 어용학문으로 시작한 거고, 실제 학술적/철학적/사회윤리학적 측면 보다는 음양오행이나 참위 등 공자가 보면 '이게 무슨 개소리야!' 싶을 오컬트 요소가 지나치게 부각된,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 과는 많이 다른게 그 시대의 유교였다. 후한 말~삼국시대가 유교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것은 정현에 의해 근본 텍스트가 정리되고 하안, 왕숙, 왕필 등에 의해 유교의 철학적 저변을 넓히는 시도가 있었으며 그동안 입으로만 읊어대던 충과 효를 현실의 난관 속에서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하는 실천적 측면에서의 시험을 거치며 그 진정한 가치가 연마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상적 진화와 격변의 시기에,공자의 후손이면서 현실 정치가 이기도 했던 공융이 한가지 더 기여했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안 들수는 없는 법.
5. 미디어 믹스
흔히 삼국지 관련 작품에서는 공자의 자손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꼬장꼬장하고 깐깐한 정통 유학자처럼 묘사된다.(대표적으로 창천항로 등 일본 쪽 삼국지 창작물)[19] 그러나 당대나 현대의 평가로는 공융은 유학자로서는 '''이단'''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조조가 공융에 대해 '불효죄'라는 명분을 붙일 수 있었던 것도 공융의 학설 가운데 이런 이단적인 부분이 꼬투리를 잡혔기 때문이다.
5.1.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군웅할거 등의 시나리오에서 북해를 차지하는 군주로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능력치가 전투적인 측면에서 약한 편이고, 부하도 없어 난관이 많다. 시나리오에 따라서 상당히 능력치가 좋은 무장인 태사자가 부하인 일이 많지만, 주변에 워낙 강성한 군주들이 많아서 헤쳐나가기 어렵다. 그리고 무안국이 고정 부하로 있지만 썩 좋은 무장이 아니다.
엄백호와 한복 등 하드코어 진영에 밀리지만, 이쪽도 사실 하드코어 플레이를 펴야한다. 삼국지 11 영웅집결 시나리오에선 태사자가 부하장수로 있지만, 주변에 도겸, 여포, 원소, 장각 등 수많은 적들이, 그것도 공융보단 센 존재들이 매의 눈으로 북해를 바라보니, 그냥 했다간 얼마 못 가서 쓸린다.
삼국지 2에선 지력 82, 무력 35, 매력 87로 능력치는 눈물나는 무력 빼곤 그럭저럭 괜찮게 나왔다. 근데 문제는 '''바로 옆이 그 조건달'''. 그 위에는 원소인데다 다른 시나리오라고 해봐야 바로 옆은 여포. 전부 평화와는 거리가 먼 군주들이다. 거의 100% 이들에게 개털린다. 거기다 콘솔판은 방랑시스템이 없어서 100% 끔살당한다. 시나리오 3에서는 조조의 부하로 등장.
삼국지 3에서는 더 답이 없다. 공융 본인의 능력치는 육지 67/수지 63/무력 58/지력 83/정치력 76/매력 64로 B급 군사 정도는 되는 편이지만, 부하라고는 무안국[20] 뿐이고 재야도 북해의 인구도 적기 때문에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 거기다 조조랑 떨어졌어도, 바로 옆이 '''문추, 안량, 장합을 가진 사기 군주''' '''원소'''라는 게 문제. 거의 100% 원소에게 망한다.[21] 이래저래 삼국지 3은 공융과 원소의 악연(?)이 시작된 첫 작품. 다만 그나마 다행인 건 바로 아래의 도겸군이 먹고 있는 하비태수 차주의 충성도가 70이라서 운 좋으면 등용 가능하다는 것이다.
삼국지 5에서는 거의 1순위로 멸망. 원소/유비에게 밥줄이다. 동맹없이 살아남기 거의 불가능. 능력치는 무력 37/지력 89/정치력 75/매력 72로 무력을 제외하곤 나쁘지 않지만, 무력이 바닥이라 전장에서 쓰기가 힘들고 진형, 특기들도 사실 좋은 편이 아니다. 시나리오2에서는 수하에 무안국밖에 없으며, 시나리오3에선 아예 본인 혼자뿐. 재야인 예형이 북해로 굴러들어오기만을 바랄 뿐. 예형 같은 경우 재수가 좋으면 아예 시작하자마자 부하로 삼아달라고 찾아오기도 하며 상성이 잘 맞아서 일단 북해로 오기만 하면 등용하기 쉬운 편이다. 초반 다른 나라와 동맹맺고 인재 모으기가 필수다.
삼국지 6은 시나리오 2, 3에서 북해에서 군주로 등장한다. 시나리오2는 부하장수 무안국, 시나리오 3은 부하장수없이 홀로 등장한다. 두 시나리오 모두 통솔 63/무력 48/지력 85/정치 75/매력 71의 준수한 능력이며, 성장특성은 신동이다. 시나리오 2는 재야에 관해도 있으며 주변 세력도 고만고만하기에 충분히 할 만한 세력이지만, 시나리오 3은 굉장히 암울하다. 시나리오 3에서 전 세력 중 허공과 유이하게 부하장수 없이 시작하며, 시작 후 1년 안에 무조건 원소가 평원과 남피 두 방향에서 쳐들어와서 가장 먼저 리타이어한다. 다만 플레이어가 하면 시작하자마자 수색 노가다로 초에서 허저를 등용하며, 원소의 1차 공격만 성공적으로 막아내면 인재 수색노가다로 원소를 거꾸로 칠 수 있다.[22]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23/무력 7/지력 69/정치력 64. 병법도 매도 뿐이다. 공융이 실전에서 활약이 없긴 했지만 그래도 당대의 명사 였는데 지력은 물론이고 정치도 60대라니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싶을 지경. 군주라 관직 보너스를 얹어줄 수도 없으니, 내정에서도 별로 도움이 안 되고 등용은 고사하고 인재 탐색도 제대로 안된다. 철저한 잉여자원으로 수송이나 탐색 금 노가다 말고는 할 게 없다. 인재를 찾는 임무는 오롯이 정치 78인 왕수의 몫이다.
190년, 191년(PK), 194년, 영웅집결에 군주로 등장하는데 플레이 난이도는 영웅집결>194>191>190 순으로 190년 시나리오가 가장 쉽고 영웅집결이 가장 어렵다. 190년 시나리오는 인접한 유비, 조조, 도겸, 원소가 전부 반동탁 연합군으로 묶여 있어 1년간 전쟁이 없고, 공백지와 미발견 장수가 많기 때문에 1년 동안 견제없이 바지런히 (공융말고 왕수가)인재등용하러 다니고 십시일반으로 병력 모아 제법 괜찮은 세력을 구축할 수 있다. 강동이 비어있으니 할 일 없는 무안국이 군사 약간을 이끌고 말릉을 점령해서 멀티를 구축하는 방법도 있다. 공용말고 유비나 도겸 플레이때도 유효한 방법인데 일정 확률로 엄백호가 거병을 하기 때문에 운이 좋거나 세로신공을 써야한다.
PK 가상 시나리오인 191년 시나리오는 190년 시나리오에선 남쪽 장사에서 아무 제한없이 세력을 확장하는 손견이 낙양으로 들어가 강릉 이남과 강동이 텅 비어 인재등용과 세력확장이 편하다. 다만 연합이 끝나서 시작부터 물고 뜯기 때문에 신속함이 요구된다. 장군감이 없는 공융은 190, 191년 시나리오에선 일단 북해 즉묵에 미발견재야로 있는 태사자를 등용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194년 시나리오는 조조, 여포, 유비, 원술은 서로 물고 뜯느라 공융쪽에 관심없지만 기주를 재패한 원소가 바로 옆에 있다. 여전히 미발견 장수는 많지만 공백지가 줄어서 대부분 남의 땅에 있다. 무엇보다 태사자가 유유에게 떨어져 나간게 치명적이다. 여몽(시상), 주태(시상 구강), 감녕과 이엄(완)이 이 시나리오에서 즉시 탐색해 등용 가능한 장수들이니 신속히 왕수를 보내자.
영웅집결에선 부하장수에 왕수와 무안국이 있는데 이걸로는 당연히 턱없이 부족하다. 다행히 영웅집결에서도 청주 출신 인재들이 재야로 있으니 세이브 - 로드 신공으로 등용해서 전력을 채우도록 하자. 북해 지역에 등윤, 즉묵 지역에 동명이인 왕기 2명, 별로 좋은 장수는 아니지만 임치 지역에 오질 등. 이렇게 장수를 빨리 등용하고 세력을 키워 주변의 도겸이나 장각, 원술 등을 무너뜨리고 확장에 성공하지 못하면 가면, 서주를 사이에 두고 있는 조조의 확장도 매우 위협적이기 때문에 갈수록 희망이 없어진다.
삼국지 10의 영웅집결 시나리오에선 딱 1년 지나고 컴퓨터들이 정복을 시작할 때 십중팔구 2월 이내에 멸망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삼국지 10에서는 왠지 모르지만 '유비 토벌을 간했다가 처형' 당했다고 나온다. 거기다 능력치는 눈물이 날 지경. 통솔력 30/무력 11/지력 74/정치력 78/매력 60의 문관형 능력치에 특기가 6개인데(보수, 치안, 항변, 반론, 반박, 명사) 문제는 내정 쪽으론 보수, 치안 등 본인의 능력치랑 전혀 무관한 특기를 가지고 있고, 군주임에도 통솔력이 30인지라 여러 모로 거지같다. 명사 특기와 반박, 반론 특기가 있어 길거리에서 산적 정도는 발라 줄 수 있어 위안이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30/무력 5/지력 72/정치력 75/매력 65이며 군주로서는 전형적인 약체군주. 하지만 영웅집결의 경우에는 태사자, 태사향, 무안국, 왕수가 휘하에 있고 재야장수로 창장이 있는 왕기와 둔전이 있는 국연이 있어 문, 무의 균형이 잡혀 있다. 재야에 내정셔틀 등윤과 오질도 숨어 있어서 초반 장수 걱정은 확실히 덜하다. 그러나 여포가 비교적 초기부터 정면으로 러시를 오는 편이며, 반대편의 원소 또한 평원 점령 이후 북해의 양 항구나 내정건물을 건드리러 오니 매우 귀찮다. 장각도 임제항 또는 직결 육로로 러시를 오는데, 황건의 특성상 통솔병력이 워낙 많아 주의를 요한다. 전체적으로 별 5개에 비해서는 특급 기준으로도 할 만한 군주.
삼국지 11 콘솔판 추가 시나리오인 영웅난무에서는 북해 옆 도시인 평원에서 군주로 등장한다. 부하로 무안국과 왕수 이외에도 국연, 최염, 최림, 허유, 허정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이 시나리오에서는 태사자가 손책의 부하로 있고 옆 도시인 업에 그 등애가 있기 때문에 영웅집결보다 더 어렵다. 다행히 평원에는 장각과 주령 등 재야가 많이 있는 편이므로 빨리 등용하도록 하자.
삼국지 12에서는 태사자가 엄청나게 세서 원소에게 빨리는 안 털린다. 빨리는.... 전법은 방어약화. 일러스트는 비만으로 보이는 털보 아저씨 같은 인상에다가 유비 토벌을 하려는 조조를 조롱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수성전이라면 방어약화 쓴 뒤 태사자가 강용 키고 때리면 어지간해서는 다 막는다. 공격 나가는 게 문제지....삼국지 도원결의에서는 해당작품의 공융과 그의 세력에 속한 신무장을 주인공으로하는 작품이 대표적이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30/무력 5/지력 73/정치력 75. 특기는 상업 1, 문화 5, 교섭 5, 언변 7, 인덕 3. 전수특기는 언변이며 전법은 수비약화. 군웅할거 시나리오에서 북해 바로 옆에 제북 하나만 가지고 있는 조조만 먹으면 다음부터 쉬워진다. 물론 말이야 쉽지, 아무리 땅이 1개라도 능력과 인재면에서 공융을 따위로 만들어버리는 조조라 어렵다. 전작과 다른 점은 조조를 등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이전에 조조를 혐오하는 마씨 일가도 조조의 편에 들어오는 모습이 나오는 게 삼국지 13이다. 조조 세력을 먹은 후에 원소랑 동맹 맺고 유비랑 여포를 차례대로 멸망시키면 중원을 장악하게 된다. 그 이후는 유비와 조조, 여포 할 때와 동일하게 원소보다 만만한 손책을 먹으면 된다.
관도대전 이후 시나리오에선 조조의 부하로 나온다.
영웅집결에서는 역시 태사자 하나만 믿어야 하는데, 주변에 평원과 낭야가 비어 있고, 제북의 포신은 장수가 우금뿐이라 태사자의 힘으로 물리칠 수 있으므로 이 네 도시를 먹고 물량빨로 버텨야 한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30, 무력 5, 지력 72, 정치 76, 매력 65로 전작에 비해 정치력이 1 상승한 대신 지력이 1 하락했다. 개성은 시상, 명성, 문화, 인맥, 소심, 주의는 예교, 정책은 태학 Lv 3, 진형은 방원, 전법은 대갈, 매성, 친애무장은 양수, 양표, 왕수, 우번, 위강, 태사자, 혐오무장은 없다. 반동탁연합에서 북해의 군주로 등장하는데 4명이서 힘들게 세력을 키워나갔던 전작들과는 달리 이 시리즈에서부터 손소#s-2.1와 시의#s-1가 추가되어 그나마 나아졌다. 영웅집결에서도 북해의 군주로 나오는데 무안국#s-3, 손소#s-2.1, 시의#s-1, 왕수, 태사자, 태사향까지 총 7명의 부하를 두고 있다. 소속 도시의 재야 무장으로는 관승, 관통, 국연#s-1.1, 오질#s-5, 왕기, 은번#s-2, 정병#s-3.4 총 7명이 있으며 이들을 등용하면 난이도가 급하락한다.
5.2. 영걸전 시리즈
삼국지 영걸전에서는 북해 전투에서 등장하며, 레벨 8의 단병으로 나온다. 연의의 내용을 반영했는지 지력이 83으로 준수한 수준이며, 나머지 능력치는 무력 58, 통솔력 67. 성 안에 계속 짱박혀 있다가 일정 시점 이후에 성문을 열고 도우러 오는데, 큰 도움은 안 된다.애시당초 해당 전투의 난이도가 그렇게 높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도움 없이도 충분히 클리어할 수 있다. 전투가 끝난 이후에는 사례금으로 금 500을 주며, 이후에는 등장이 없다.
5.3. 삼국전투기
삼국전투기에서는 잼아저씨로 등장하는데 뱅글이 안경을 쓰고 있다.
북해 전투 편에서는 황건적에게 포위당하여 위기에 처해 있었으나 태사자의 도움으로 유비군 포섭에 성공, 유비군의 지원을 받아 황건적을 몰아내고 북해를 지키는 데 성공한다.
우이 전투 편에서는 청주목 전해와 더불어 원담이 쳐들어오자 간단히 청주의 지배권을 뺏기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후 쭉 등장이 없다가 중간정리 편에서 간만에 등장. 조조 세력에 영입되어 허도에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자신이 한 정치 한다며 자신감을 표하지만, 정작 조조는 사방팔방에서 깨진 주제에 잘난 척이나 한다며 마뜩찮아하는 모습을 보인다.
환 전투 편에서는 순욱과 함께 양표의 심문을 반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조조가 이들의 의견을 묵살하자 만총에게 고문만큼은 피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만총이 아랑곳하지 않고 전기고문을 가하자 만총에게 실망하는 모습을 보인다. 순욱은 이후 만총의 진의를 깨닫고 그를 인정하는 묘사가 나오나, 공융은 딱히 만총을 다시 봤다는 묘사가 없다.
신야2 전투 편에서는 조정에서 조조의 행보에 딴지를 거는 행위를 계속했고, 이에 더 참을 수 없었던 조조가 공융의 앙숙이자 같은 대유학자인 치려를 어사대부로 임명하면서 그에게 삼족이 멸해졌다고 언급된다.
5.4. 삼국지평화
삼국지평화에서는 송문거(宋文擧), 공수(孔秀) 등으로 나오는데, 송문거는 호뢰관에서 앞에서 동탁을 죽이는 것이 녹의랑 같은 벼슬아치가 무슨 도움이 되겠냐면서 반동탁연합에 참가하는 유비 일행에게 모욕을 주는 것으로 나온다. 공수는 조조가 오나라를 공격할 때 보낸 편지에서 여태까지 조조가 없앤 적들을 언급하는데, 낙양에서 공수를 생포했다는 언급으로 나온다.
5.5. 화봉요원
화봉요원에선 은근 음흉하게 나온다. 서주를 구원하러 갔다가 유비만 서주를 얻자 자기 몫이 없었다고 아쉬워하거나, 나중에 태사자에게 여차하면 유비를 제거하라고 한다.
5.6. 적벽대전
영화 적벽대전 1편에서는 헌제를 반협박하며 유비를 죽이겠다고 출정하는 조조를 욕하다가 헌제가 보는 앞에서 뎅겅하고 목이 잘린다.
5.7. 창천항로
공자의 자손이라는 것 떄문인지 얼굴도 공자의 모습을 본따서 그려졌는데 꼬장꼬장한 정통 유학자로 묘사되며 조식, 진림과 문학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 인간의 감정을 자유롭게 담아 문학에 담아야 한다는 관점의 조식, 진림과는 반대로 문학은 시대적인 상황을 다루고 인간의 감정을 다루는 것은 저속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작품이 조조나 작중 여러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어 "구습", "위선" 등 유교를 다소 냉소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는데, 공융은 "구습 유교의 대표자"처럼 묘사된다.
여담으로 공융 처형 건은 작품의 주역인 조조와 순욱의 관계에서 작지만 중요한 불씨가 되는 사건이기도 한데, 순욱부터가 작중에서 스스로를 유학자라고 칭한다. 그런데 공융을 처형하기로 했다는 조조의 말을 들은 순욱은 충격에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아래와 같은 대화를 나운다. 그리고 이후 펼쳐지는 이야기를 보면 공융 처형 건에 대한 조조와 순욱의 이 대화가 이후 작중의 조조가 탈유교적인 정책과 행동을 실시하는 것에 대해 순욱이 불만과 두려움을 품게 되고, 결국은 그의 최후로 이어지는 첫 발단이기도 한 셈이다. 이때의 순욱과 조조의 대화를 보면 작중 조조의 유교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결국 역사대로 참형을 당하는데 죽기 직전에 남긴 말은 "유가의 적 조조의 전횡은 이제부터 시작되리!" 여기서는 공융의 죄를 승상불손죄라고 해 놓았는데, 위에 있듯이 공융의 표면적인 죄목은 사실 불효죄였고, 공융이 처형된 복잡한 경위는 묘사되지 않았다.순욱: 유교는... 승상의 적입니까?
조조: 수백년을 이어져온 윤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밝히는 진리가 있다. '''그 한도 내에서 유교는 유용한 것이며 경의를 표할 만하다'''. 단, 유교가 '''사람의 인생을 속박하고 나라의 부흥을 상해할 때에는, 내게 있어 유교는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 된다.
5.8. 토탈 워: 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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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에이 삼국지에서는 항상 마이너 군주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으나 본편의 단 12개의 플레이어블 팩션 중 하나의 수장으로 선정되었다.
자세한 것은 토탈 워: 삼국/공융 참고.
5.9. 삼국지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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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20대손으로 북해상을 지내고 있었다. 자신을 구해준 평원상 유비를 돕기 위해 서주로 지원군을 이끌고 왔다. 사서에서는 군을 지휘할때 술을 마신뒤에 병사를 이끈 적이 있다는 언급이 있었는데, 이에 따라 프사도 레알이슬이고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전투에 나선 것으로 나왔다. 서주 백성들을 구조하겠다는 유비의 계책에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황당해했지만, 이후 그를 믿어 보겠다며 마음에 들어하는 티를 낸다.
관도대전 76화에서 인터넷 방송을 하고 있다는 근황이 밝혀졌다. 썸네일은 서주를 구원하러 왔을 때 손에 들고 있던 레알이슬 병이며, 채널 이름도 '공융의 술술 넘어가는 시사'인 것으로 보아 애주가 컨셉을 확실히 다진 듯하다. 조조에게 반대하는 기미가 보여도 바로 잡혀가는 험악한 시국 속에서 조조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게 특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