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보증권
1. 개요
옛 대우그룹 계열 증권사. 대우 인수 이전 업계 1위로 손꼽혔다.
2. 역사
오리엔트시계 창업주로 유명한 강영진(1921~1993) 창업주가 1962년 6월 4일 자본금 2억 5천만 환으로 서울 중구 소공동 29번지 삼화빌딩에 세웠다. 설립 후 증권업허가 74호 및 거래원번호 39호 등록인가를 받고 영업개시했다.
이후 을지로 2가 오양빌딩으로 이전했으나 업계에서 중위권 정도를 유지하다 1964년 3월 강성진 전 영화증권 사장이 인수한 뒤 개척정신과 성실봉사로 총력영업을 경주하여 동년도 업계 1위 자리까지 올랐다. 이후 본사는 업계 선두를 유지키 위해 1972년 5월 명동 유네스코회관 이전 후 11월 기획조사부를 신설해 기획/조사기능을 강화했고, 영업 분야에서도 1972년 5월 남한제지 회사채 공모 주선 및 6월 진로주조 기업공개 등으로 다른 회사를 앞섰다. 그 외에도 같은 해 11월에 증권업계 최초로 신입사원 공채를 실시했다.
이뿐만 아니라 지방 증권인구 저변 확대를 위해 각지에 연락소/지점을 내고, 타 회사보다 앞서서 <월간 삼보투자>, <주간 삼보> 등 투자분석 잡지도 타 회사보다 먼저 내는 한편, 초보 증권투자자 양성을 위해 '증권교실'도 적극적으로 열었다. 국제부문에선 1975년 국제자본시장포럼 주도 후 1980년 한국산업은행 엔화표시제 발행에 국제인수단으로 관여했고, 1981년 대한투자신탁이 주도한 '코리아 트러스트' 발족 시 공동 간사로 참여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이에 따라 회사 규모도 커져 1978년 거래원번호가 2호로 변경된 뒤 1981년 업계 최초로 주식약정고 1조 원을 돌파했고, 1982년 기준 자본금 80억 원과 주식약정고 2조 원을 달성하며 전체 직원 수 750여 명에 지점수 28개로 업계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줄곧 업계 선두를 지키기 위한 공격적 경영에 문제가 생겨 약정고 경쟁에 부작용이 일어났고, 관리 면에서 허점이 생겨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현상이 누적되어 190억이 넘는 시재부족 현상이 발생해 회사 존립에 문제가 생겼다. 이에 해수부는 업계 선두 증권사 파산 시 업계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인수자를 물색토록 했으나, 당대 증권업계의 어려운 사정으로 시재부족에 빠진 회사를 구원할 데가 없었다. 하지만 증권업계의 성장 가능성을 본 대우그룹이 본사를 인수 후 계열사 동양증권에 합병시켰으며, 이로써 삼보로서 21년 역사가 종결되었다.
3. 역대 임원
- 대표이사 사장
- 강영진 (1962~1964)
- 강성진 (1964~1983)
- 대표이사 부사장
- 김창희 (1983)
4. 여담
삼보증권은 사라졌지만 본사가 낳은 우수한 인재들은 다방면에 걸쳐 활약했다. 대표적으로 명호근 전 쌍용투자증권 사장, 이연우 전 고려증권 사장, 김영용 전 전자신문 사장, 임철규 초대 BNG증권 사장, 이원익 전 쌍용투자자문 사장, 손우헌 전 쌍용템플턴투자신탁 사장, 김재홍 전 쌍용화재 사장, 오세호 전 한신증권 사장 등이 있었으며, 강성진 회장도 증권업협회장 등을 맡다가 2000년 BNG증권 설립도 주도했다.
5. 출처
- 대우증권 이십년사 (1990) - p359~361.
6. 관련 자료
- 머니투데이 연재물 <강성진의 증권반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