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그룹
1. 개요
'''大宇'''[1]
'''DAEWOO Group'''
1967년부터 2000년까지 대한민국 경제계를 호령하던 4대 재벌[2] 중 하나였으며, 현재는 해체된 기업집단 중 하나이다. 창업주는 주산 김우중.
창업 초기까지만 해도 흔하디 흔한 중소기업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었지만, 연줄[3] 과 김우중 자신의 경영능력이 겹쳐 빠른속도로 성장해나갔다. 특히 1970년대 중동 붐으로 엄청난 잭팟을 터트렸으며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오늘날까지 이름을 날리고 있는 현대그룹, 삼성그룹, LG그룹[4] 에 이은 4위 그룹으로 등극하며 한국을 호령하는 재벌 그룹 중 하나가 되었다. 1980년대 중동 붐이 끝난 이후로도 5공 정권의 부실기업 정리 정책의 수혜자로서 문어발식 경영 확장으로 세를 불려나갔으며 1990년대에 북방외교와 동유럽 민주화를 기회 삼아 동유럽과 중앙아시아로의 진출을 꾀했다.
그렇게 1990년대 중반까지 기업규모를 지속적으로 불려나가며 승승장구를 지속했고 1997년 외환 위기를 맞은 뒤로도 몸집불리기를 시전하여 쌍용자동차를 인수했고[5] 그 결과 1998년에는 '''삼성을 제치고 재계 순위 2위'''를 차지하였다.[6] 김우중 입장에서는 오일쇼크 때 위기를 기회삼아 몸집을 불려먹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작전을 시전한 것이겠지만 이러한 몸집불리기는 당시 금융환경이나 시대적 상황을 감안했을때 너무도 무모한 작전이었고 결국 막대한 부채의 만기가 돌아오면서 자금난에 봉착하고, 엄청난 규모의 분식회계[7] 가 드러나면서 김우중 회장은 해외를 떠도는 신세가 되었으며, 2000년 주요 계열사가 모조리 워크아웃에 들어가 대우그룹은 공중분해됐다.
독단적이지만 우월한 경영으로 소문났었는데. 대기업에 입사를 하면 삼성은 책상 속에 연필까지 깎여 모든 게 준비돼 있고, 현대는 책상이라도 갖춰져 있고 대우는 책상도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현 시점에 와서 세 그룹의 위치를 보면 정말로 절묘한 이야기.[8]
당시 홈페이지 도메인은 'www.daewoo.co.kr'이었다.
2. 역사
1967년 3월, 한성실업 출신 샐러리맨 김우중이 서울 충무로 동남도서빌딩 3층에 무역업체 '대우실업'을 설립하고 부산에 공장을 설치하여 와이셔츠 등 공산품 수출을 주로 했다.
1970년대 경제성장 및 수출 호조에 따라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정부 주도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힘입어 단기간에 국내 최대기업으로서 성장했다. 1973년 영진토건과 동양증권을 인수해 건설 및 금융업에 각각 손을 뻗었고, 1974년 동남전자를 인수해 '대우전자'로 개편해 전자제품 수출업에도 손을 뻗었다. 1976년 부실기업 한국기계를 인수해 중공업 사업에 손을 뻗기 시작해 1978년 대한조선공사로부터 옥포조선소를 인수해 '대우조선'을 세웠고, 1979년 새한자동차도 인수해 중공업 사업군을 형성했다. 이러한 성장 과정에서 부실 국영기업의 불하[9] 등 M&A를 많이 활용한 측면에선 이후의 STX나 웅진그룹[10] 등과도 비견된다. 1976년 기획조정실을 신설해 그룹의 모양새를 갖췄다.
1981년 대우개발이 대우실업을 합병해 '(주)대우'로 출범했고, 1982~1983년 들어 대한전선으로부터 가전사업부, 오리온전기, 대한통신공업, 광진전자공업 등을 인수해 전자/전기산업에도 손을 뻗었고, 1984년 부실 건설업체 경남기업도 인수했다. 다른 한편 그룹측은 해외 자원개발 참여, 해외 건설 및 조선 수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해외로 눈을 돌려 동유럽 및 신흥시장 개척을 추진해 왔으며 1993년 "세계경영"에 나서면서 중공업과 자동차, 특히 자동차 부문에서 고속성장을 거듭했다. 1987년 경기도 용인군 백암면에 종합연수원을 세웠다.
리즈시절 막바지인 1996년에 제작된 그룹 PR. 아역 광고 모델은 장근석.
대우그룹 마지막 광고[11]
이 당시 김우중 회장은 그의 공격적인 경영 때문에 킴키즈 칸이란 별명이 붙었다. 공격적이고 팽창적인 진출과 경영 방식도 그렇지만, 중국-몽골-인도-우즈베키스탄-루마니아-폴란드로 이어진 자동차 공장 확장루트도 흡사했다. 하지만 얄궂게도 4년 뒤 몽골 제국처럼 사라졌다. 관련 기사(여 NA) : 1분을 하루처럼 썼습니다.
시간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1시간을 1년처럼 썼습니다.
시간이 유일한 재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피와 땀과 눈물의 시간이 이 땅의 시간을 세계의 시간에 맞추게 했습니다.
세계를 경영하게 했습니다.
세계가 우리를 찾고 있습니다.
새로운 천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우가 앞에 있습니다.
실제 당시 대우의 대외 확장 방식은 체제 전환기를 맞아 투자 유입을 갈망하던 구 공산권 국가의 다급함을 이용해 있는 대로 금융 지원을 받아낸 것으로, 당시에는 적은 투자로 큰 사업을 한다고 호언했으나 결국 도박에 불과했다. 이와 같이 극단적인 레버리징에 의한 과잉 투자의 몰락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도 맥락이 닿는다.
"만들어라, 그러면 팔릴 것이다" 란 야심만만한 발언은 정작 대우자동차가 주문물량을 소화하지도 못하면서 부채로 변했다. GM과 결별 이후 사들인 뮌헨 연구소, 영국의 워딩 연구소[12] 와 폴란드의 FSO[13] 등도 모두 2000년 전에 모기업과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1992년까지 긴밀히 협력해온 제너럴 모터스와 폴란드에서 대우자동차가 정면충돌한 것도 이 시절인 1995년. 결국 M&A 다툼에선 승리했지만... 이후 고부채로 포드에게도 버림받고 결국 GM에 팔린건 유명한 이야기다.
케이블 TV 초창기에는 DCN 같은 케이블 채널도 운영했으나, 1997년에 외환위기와 맞물려 갑작스럽게 어려워진 경영여건을 극복하지 못하고[14] 1999년 동양그룹에 인수됐다. 이후 채널명도 OCN으로 개명되었으며, 2001년 오리온그룹 분가 때 합류했다가 2009년 CJ로 매각되어 2013년 12월, CJ E&M에 흡수 합병되었다.
1995년 우진필름으로부터 복합상영관 '씨네하우스'를 인수해 영화관 사업을 시작했고, '메가플렉스'란 이름으로 멀티플렉스 영화관 체인사업을 준비해 오다가 개장을 못 해보고, 결국 1999년에 (주)대우가 준비하던 영화관 사업은 동양그룹에 인수됐다. 그러다가 2001년에 동양제과 등과 함께 오리온그룹으로 분리됐다. 그러나 오리온그룹이 쇼박스를 제외한 미디어 계열사를 정리하면서 메가박스는 해외 자본에 매각되었다가 현재는 중앙그룹 계열에 인수됐다.
초기에 위태위태 할 때만 해도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의 협력 관계를 바탕으로 대마불사를 외쳤다. 의외로 IMF 직후 대우는 친정부 그룹의 선두에 있었다. 그래서 엄청난 위기 속에도 1998년부터 구조조정을 통해 계열사를 정리해 다운사이징을 했고, 1999년 7월에는 잠시 3조 원의 빚을 사재출연과 경영권 포기 등을 통해 위기를 잠시 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대우자동차를 살리려고 마지막 순간에 삼성자동차를 받고 대우전자를 주는 빅딜을 하려고 한게 SM5 생산문제와 부산의 하청업체 문제 등으로 실패로 끝나면서 엄청난 빚을 지게 되어 8월 워크아웃과 10월 김 회장의 중국 도피, 12월의 임원단 전원 사퇴로 몰락했다.
IMF 금융위기가 아니었다면 인천광역시 연수구에 초고층 마천루를 지어 본사를 이전할 계획이었다. 대우그룹의 주요 계열사인 대우자동차, 대우중공업, 대우전자 등의 공장, 연구소들이 모두 인천에 위치해 있었고 대우그룹 인천 이전 계획과 연계한 것이 오늘날의 송도국제도시이고, 이곳에 건설할 예정인 151 인천타워가 이 마천루 계획의 후신격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15]
참고로 그룹 존속 시절 대우증권을 빼고 해체될 때까지 회사의 역사책인 사사(社史)를 단 한 번도 발간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1987년과 1997년 두 차례 사사 발간 시도가 있었으나 노사분규와 IMF 사태로 각각 이루지 못했으며, 30년사 내용은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홈페이지에 있으나 회원만 공개중이다.
3. 사옥
서울역 앞에 대우센터빌딩을 직접지어 (주)대우의 본사 사옥으로 사용했었다. 그룹 해체 이후 대우건설을 따라 매각되어 금호아시아나그룹 산하로 들어갔지만, 이후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상황이 나빠져 모건스탠리에 또 팔렸다. 모건스탠리가 리모델링을 해서 '서울스퀘어'라는 새 이름을 달고 2009년 10월 재개장했으며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4. 역대 그룹임원
- 회장
- 김우중 (1979~1999)
- 장병주 직무대행 (1999~2001)
- 회장비서실 총괄회장
- 이경훈 (1995)
- 윤영석 (1995~1997)
- 기획조정실 부회장
- 최명걸 (1987~1989)
- 서형석 (1993~1995)
- 기획조정실 사장
- 박세영 (1976~1980)
- 최명걸 (1980~1982)
- 김용원 (1982~1983)
- 홍성부 (1983~1985)
- 홍인기 (1985~1986)
- 김태구 (1987~1989)
- 서형석 (1990~1993)
- 유기범 (1990~1991)
- 이재명 (1993)
- 회장비서실 사장
- 박용근 (1995~1997)
- 김욱한, 박동규 (1997~1998)
- 회장 부속실장
- 김욱한 (1998~1999)
- 정주호 (1999)
- 구조조정본부장
- 김태구 (1998~1999)
- 정주호 (1999)
5. 기업정신
- 사훈: 창조, 도전, 희생
- 사가: 〈대우 가족의 노래〉- 작사는 윤석중, 작곡은 손대업이 맡았다.
6. 탱크주의
대우전자의 탱크주의 관련 TV광고. 물건을 너무 튼튼하게 만든 "탱크주의" 때문에 신제품이 안 팔려서 망했다는 농담이 있고, 꽤 널리 퍼져 있다. 단 '탱크주의'는 어디까지나 대우전자의 슬로건으로, 타 계열사는 별 관계가 없다. 해당 광고 모델은 '''역사스페셜''' 진행자로 유명한 유인촌과 '''공룡선생'''에 출연했던 탤런트 조문정, 배순훈 당시 대우전자 사장이다.[16]
다만 여기에서 간과한 부분이 있는데, '''필수기능과 튼튼한 제품으로 승부를''' 건 탱크주의 취지는 좋았지만, 당시 우리나라 전자제품은 전반적으로 품질이 매우 열악했다.[17] 이것이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적지 않은 집에서 연출된 상황이니 그 당시 대우전자 생산의 냉장고의 품질은 알고도 남있으니... 비슷한 시기를 겪었지만 살아남은 삼성이나 금성(LG) 냉장고는 아직까지도 꿋꿋한 현역이다.
사실 이 문제는 대우그룹 편입 이전 대한전선 시절부터 유서가 깊었다. 이미 '''1978년 3월에 서울 서대문구 홍제 2동에서 TV 폭발로 어린이 2명이 화상을 입었고, 12월에는 경기도 인천시 남구 용현동에서 TV가 폭발해 일가족 5명이 사망하는 참사[18] 가 있었는데, 둘 다 대한전선 제품이었다. (기사1 기사2)''' 이후 TV 부문은 절치 부심해 일본 SONY와의 기술협력으로 세계 최초로 고강성 CRT 모니터 개발을 하며 기술적으로 진보한 제품을 선보였고, 나름 고정 소비층도 탄탄했지만... 신규 구매자층의 마음을 잡기에는 이미 한 발 늦었다.'''(...)''' 결국 1983년에 대우그룹에 전자사업부를 매각했다.
사실 대우전자가 90년대 초중반 이러한 캠페인을 만들어낸 것도, 위의 품질 문제와 연관된다. 비교적 구조가 간단한 제품은 고장도 잘 안나고 나더라도 고치기 쉽다. 그러나 복잡한 제품들은 사소한 고장이 상대적으로 잘 날 수 있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전자제품에 갖가지 기능들이 붙어 복잡해지고[19] 경쟁사들은 이런 기능들을 '컴퓨터를 이용한 첨단 기능'으로 광고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러한 복잡한 기능의 제품을 따라서 만들면 품질 문제가 걸릴 수 있으니 '''아예 기능을 축소해서 기본기만 갖춘''' 제품을 만들어 상대적인 품질 트러블을 줄이고, 복잡한 기능에 피로감을 느끼는 계층을 타겟으로 탱크주의란 슬로건을 내건 것이다.[20]
그러다 보니 반대로 얼리어답터들에게는 탱크주의가 대우전자의 첨단 기술이 뒤떨어지는 것을 자뻑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삼성, 금성은 첨단기술의 상징이니 최첨단 기술의 상징이니 하는 용어로 싸우던 시절이니까. 하지만 지금과 달리 그 시절엔 얼리어답터들의 파급력이 별로 없어, 오히려 대우전자의 전략이 상당히 틈새시장을 잘 공략하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해외시장에서도 이같은 일이 한번 벌어진 적이 있었는데, 대우전자의 탱크주의 슬로건을 장착한 전자레인지가 1997년 프랑스에서 우수한 평가를 얻으며 판매가 불티나게 팔리자, 오히려 자국산 전자 제품의 판매 부진을 우려한 강성 보수 층에서 '''대우 불매'''운동을 벌여 인기와는 별개로 판매가 급감하기도 한 바 있었다.
6.1. 대우자동차
한편 자동차 부분에선, 특히 같은 시기 현대자동차에 비교해서 실제 1990년대 초반까지는 탱크라고 불러도 될 만큼 내구성 및 성능이 우수했기에 과소 평가된 경향이 크다. 게다가 언론의 영향으로 현대에 비해 대우는 뭔가 2인자의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각인됐기에 당시 자동차 판매원들 사이에서 "대우자동차는 연비, 내구성, 디자인 모두 다른 회사보다 좋은데 대우 마크 때문에 팔리지 않는다." 란 말이 돌 정도였다. 특히 대우그룹이 해체되기 이전에 나온 대형 버스, 대형 트럭 같은 대형 상용차들의 내구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특히 잔고장이 적은 만(MAN) 엔진을 탑재해 1970년대 말 ~ 1980년대 '''운수산업 발전을 견인'''한 명품 BF101은 3만 대가 팔린 초 베스트셀러 차종이었다. 서울부터 소도시, 시골까지 BF101 시내버스가 없는 지역은 거의 없었으며, 운수회사들은 도로사정이 열악한 지역에도 과감히 뛰어들며 비로소 제 이익을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의 시내버스 구도를 보자면 현대자동차 시내버스의 경우 '''잔 고장이 잦았고'''(특히 HD160 차종이 심했었다. 반대로 HD170은 BF101과 같은 D0846HM-V 엔진 장착), 동아자동차 HA20의 경우 '''출력은 좋았으나 연비가 나빴으며''' 아시아자동차 시내버스의 경우 한 대 당 '''가격이 비싼''' 걸로 유명했으며, 후에 현대가 1982년에 HD170의 후속으로 FB485를 출시했으나 당시의 시내버스 업체들은 여전히 연비좋은 BF101을 선호했다.
또한 자동차 합리화 조치 이전의 경우에도 상용차 부문에서는 엘프와 대형트럭 모델들이 현대와 기아 등의 경쟁자들과 쟁쟁히 경쟁을 이어갔으며, 1980년대 후반에 조치 해제 이후에도 바네트와 엘프 2를 제외하면 1995년 국내 최초로 독자 개발한 트럭인 차세대 트럭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기도 한 바 있었다.
그러나 승용차 부문에서는 라이벌인 현대나 기아가 선진국 시장의 경쟁 압력에 살아남기 위해 기술 자립도를 높이며 꾸준히 상품성을 끌어올린 반면, 대우는 GM과 본격적으로 충돌하기 전까지 GM 기술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경쟁력을 잃었다. 단, 이 점이 기술 개발에 소홀히 한 대우자동차의 실책인지, 50%의 지분을 가지고 대우자동차를 단순 하청 공장 수준으로 두려는 GM의 의도 때문인진 알 수 없으나 1992년 대우그룹이 GM의 50% 지분을 사오면서 적극적인 신차 개발에 나섰다는 것을 보면 후자가 맞을 듯.[21] 단, 신차 개발을 시작해도 출시까진 4~5년의 시차가 있는데 출시된 시기가 하필이면 IMF인지라...
더군다나 독일쪽 기술을 그대로 재현했다면 괜찮은데 그것도 아니고 '''조립 품질이 심하게 떨어졌다.''' 위에서 말한 버스와 달리 승용차는 대우 르망 문서에서 알 수 있듯 그야말로 엉망으로 나온 경우가 다반사.[22] 1997~1999년 라인 업을 갈아엎기 전의 모델이 씨에로는 오펠 카데트, 프린스와 브로엄은 오펠 레코드 및 제나토어로, 모두 1980년대가 가기 전에 단종 된 플랫폼을 20세기 끝날 때까지 사실상 페이스 리프트 수준으로 버텼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나마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한 모델 개발이 도산하기 직전에나마 시장에서 인정받은 것과, 국내 자동차 브랜드 중 채 10년이 되지 않은 단기간에 유럽시장 진출 성공[23] 을 했다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것으로 나름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7. 현재
비록 그룹은 해체됐지만 몇몇 계열사들은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의 영광만을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신세. 이중 일부는 대우란 이름 자체도 사라지고 있는 혹은 사라진 상태. 다만 그룹이 망하기 전에 잘 나가던 계열사들은 아직도 해당 업계에서 순위권을 유지 중이다. 재계 순위 14위의 대우조선해양, 재계 순위 24위의 대우건설, 업계에서 빅3에 속하는 미래에셋대우, 3대 엔지니어링 회사인 포스코엔지니어링, 사실상 지주역할을 했던 포스코인터내셔널 등.
본사였던 대우빌딩이 구 서울역 앞에 있어, 그 거대한 모습은 서울특별시에 찾아온 사람에게 압박을 주는 효과가 있다.@[24] 지금은 서울역 신역사가 약간 남쪽으로 내려와서, 대우빌딩을 약간 비껴서 보게 되기에 그 효과는 조금 줄어든 듯. 다만 서울의 경관을 가리고 위압감을 준다는 점에서 건축가들에게 까이기도 한다. 위치상 도쿄역의 마루노우치 빌딩과 비교되기도 한다.
학교법인 대우학원이 운영하는 아주대학교는 잘 돌아가는 상황.
대우사태 이후 대우빌딩은 대우건설을 인수한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손에 넘어가서 30년동안 달고 있던 DAEWOO 로고를 떼고 금호아시아나 로고를 달았다. 그리고 4개월 후에 모건스탠리에 팔았다. 이후 리모델링 시 건물 외관을 유리궁전으로 완전히 뜯어고치려 했으나, 대우빌딩이 용적률을 초월한 건물이라서 외관을 리모델링하면 모건스탠리가 세금폭탄을 맞기 때문에 내부 수리와 외부 타일 교체만 하는 수준에서 그쳤다. 결국 모건스탠리의 손에서 대우빌딩은 이름이 바뀌어 서울스퀘어가 됐다.
8. 해체 관련 음모론
대우그룹 해체에는 모종의 세력이 관여하고 있다는 음모론이 있기도 한데, 그 모종의 세력에 관해서 음모론은 대체적으로 두 설로 양분된다. 이런 음모론이 뜬금없는 것도 아니라, 국제그룹이라는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8.1. 유대인 배후자본설
당시 대우그룹은 국제적으로 마이너한 분야에서 잘 노는 플레이어로 정평이 나 있었다. 유대계열 자본이 지배하고 있는 에너지자원이라든지 건설, 금융 분야에서 한 켠 비껴가 있는 마이너한 곳들을 잘 공략해서 수익을 올리던 알짜기업이었지만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유대 자본이 환율 공격을 비롯한 각종 수단을 동원해 한국 정부와 대우를 압박했고 마침 분식회계 등 각종 악재가 겹친 상태에서 대우그룹은 이로 인해 결정타를 맞아 몰락하고 말았다고 하는데...
이에 관련한 내용이 2010년 11월 8일자 조선일보 칼럼에도 기재되었다. 이 칼럼에 따르면, 이는 김우중 회장의 생각으로 '''생전에 김 회장이 환율공부를 했던 이유'''라 한다.
8.2. 대북사업 비협조로 인한 보복설
당시 김대중 정부에서 추진하던 대북사업 자금이 모자라 기업에 협찬금을 요구했고 이에 삼성, 현대 등은 정권이 요구한 금액을 납부했지만 대우그룹은 이를 거부해 정권으로부터 미운털이 박힌 대우그룹에 마침 악재가 터지자 본보기로 정치보복을 하였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김우중 회장이 군사정권 시절 정치자금을 여당에 몰빵했던[25] 일부 기업과는 달리 여2 : 야1 의 방식으로 김대중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해 DJ와 친분을 쌓았으며, 무엇보다 김우중은 90년대 초반에 김일성과 만나 '''독자적으로 대북 커넥션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다.[26] 그리고 협찬금을 냈다던 삼성그룹이나 현대그룹[27] 등 대우그룹을 제외한 30대 재벌 전원이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어 '''5일만에''' 시행 계획안을 제출한 사실이 있다.
더구나,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장치혁 고합그룹 창업주와 더불어 대북경협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현대그룹(1989년)보다 2 ~ 3년 늦게 대북사업에 뛰어들었지만, 빠른 행동력으로 초창기 남북경협을 대우그룹이 주도하게 된 것이다. 1992년 1월 남한 기업인으로는 두 번째로 북한을 방문해 무려 100만평 규모의 '남포공단' 투자 합의를 이끌어냈는데, 남포는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북한의 수도이자 핵심부인 평양의 위성도시이며, 서해로 나가는 관문이다. 남포공단을 조성하고 남한기업을 대규모로 유치하겠다는 결정은 '''남한으로 치면 인천을 통째로 북에 개방한 것과 마찬가지'''다.
사실 김대중 정권이 추진하던 개성공단도 위치만 남포에서 개성으로 바뀌었을뿐, 사업 내용이나 추진방식은 1992년 남포공단 합의와 똑같다. 민간 기업으로서 최초의 남북경제협력 사업으로 이후 북핵문제가 불거져 유야무야됐다가 1994년 제네바 합의 후 1995년 미국의 대북제재 1단계 해제가 이루어지면서 대북사업을 재개해 1996년 북한 조선삼천리총회사와 합자로 '민족산업총회사'를 세웠지만, 1999년 그룹 해체 후 이듬해 북한측이 직영하면서 철수했다. 이후에도 김우중은 독자적인 대북커넥션을 유지하면서[28] 남북경협에 대단히 적극적인 인물이었는데, 대북사업에 소홀했다고 정권의 보복을 당했다는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1998년 김대중 정권 출범 직후에 경제 부총리로 한때 김우중 회장이 거론될 정도로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쪽에선 김우중과 대우그룹에 호의적이었다. 결국 입각은 하지 않았지만, 당시 경제분야 민관협력 회의는 거의 김우중 회장이 주도하는 상황이었다. 재벌쪽에서도 김우중 회장을 국민회의 정권과의 의사소통 창구로 인정하고 있었다.
게다가, 김우중 회장의 경기고 동창이자 절친인 이종찬이 국가정보원장으로 발탁되면서 정권의 핵심 실세로 떠올랐기에 더더욱...비록 김우중 회장의 부총리 임명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당시 탱크주의 광고로 화제를 모으고 있던 배순훈 대우전자 사장이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입각하고 새정치국민회의 박정훈 의원이 김우중의 경기고 후배로 정계 입문 전 대우그룹 임원을 지냈을 정도로 국민회의 정권과 대우그룹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김우중 회장의 형인 김덕중씨를 대우그룹이 해체되는 와중에도 국민의 정부에서 교육부장관으로 임명했는데, 보복까지 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김우중 회장의 추징금이 괜히 '''17조원'''이나 되는 게 아니다. 다만 이 분식회계의 금액은 당시의 환율로 인해 뻥튀기된 것이지, 정확한 금액이 아니다. 기사 링크 분식회계, 가짜 장부 등으로 회계를 조작해서 은행을 속이고 빚을 내서 돈이 저 만큼인 것이다. 이는 심각한 범죄 행위이며 미국에서는 분식회계를 저지른 기업주에게 징역 150년형을 때릴 만큼 엄청난 중죄이다. 남의 돈으로 사기쳐서 다 날려먹었으니 당연히 토해내야 되고 그 돈이 엄청난 금액이다. 이는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금액이 아니었다.
참고로 1999년 기준으로 정부 예산이 84조원인데 대우그룹의 부채는 무려 70조원에 달하던 상황이었다. 즉, 정부차원에서 감당할수있는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던 것이었다. 또한 국제통화기금의 관리체제하에 있던지라 그 만한 돈을 보전해주기 쉽지 않았다. 물론, 주요 은행들이나 일부 기업들에게 공적자금을 투입하긴 했지만 이것은 구조조정을 전제로 지원해준 것이다.
8.3. 김대중 정부의 경제 관료간의 악연
정부가 기업어음(CP) 발행 한도 제한 조치와 회사채 발행 한도 제한 조치를 통해 '''1998년의 매출액은 62조원, 전년대비 24.7% 증가'''했지만 매출채권(9조 2천억 원)의 증가로 실질적인 현금 유입이 이루어지지 않아 부채 비율이 높아져 가게 만들었다는 주장.
'''하지만''' 대통령인 DJ(김대중)는 80년대 야당 시절에 김우중의 자금 지원을[29] 받았던 사람이다. DJ나 그 측근들이 굳이 대우 그룹만을 겨냥한 저격용 조치를 만들만큼 김우중을 미워할 이유는 사실 없었다.
잘 나가던 대우그룹이 갑작스레 좌초한 건 이런 정치적 변수보다는, 김우중 본인의 현실인식이 매우 낙관적이었던데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의 관리 체제에 속했던 김대중 정부의 초기정책에는 국제통화기금과의 권고 및 협약을 이행하는 방안이 많이 반영되었는데, 걔중에는 대기업의 구조조정으로 부채비율을 200% 이하를 두는 강수가 있었다. 30대 재벌 중 29개 재벌들은 이 구조조정 시행을 전제로 하는 계획서를 5일만에 제출 완료하였지만, 김우중은 오히려 IMF 사태 초기인 1998년 2월, 김대중을 만나 500억 달러의 무역흑자론을 내세운 국가 프로젝트를 내세웠으며, 3월에 전경련 회장을 맡으며 수출론을 주장하였다. 김우중은 '''현 경제위기 및 정권의 강한 구조조정 권고는 일시적이고, 대출을 더 받으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아 위기 중에도 세계 경영 및 국내 시장에 과감하게 뛰어드는 공격적인 투자에 나선 것이다.
일이 잘 풀릴 때는 이런 과감한 모습이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만, 90년대 중후반부터 김우중의 과감한 투자 여파로 대우그룹 실적이 조금씩 악화되어 지난날 김 회장 및 대우그룹에서 '''경영성과'''로 홍보해온 해외 회사들(예, 벨기에 Universal, 영국 자동차 연구소[30] )을 하나씩 매각하던 상황에서, 마침내 일본 노무라 증권이 '''<대우 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내기에 이른다.
또한 '''밀어내기식 수출'''은 당시 적자 수출과 맞물려 돌아가면서 수익 구조를 악화시켜 그룹 전체 수익은 '''1998년 기준으로 6천억 원 적자'''를 기록하고 금융비용의 증가를 초래시키며, 적자 규모는 조 단위를 넘어갔다. 게다가 이 상황에서 대우는 삼성과의 빅딜로 타개를 시도하였지만 실패했으며, 1999년 4월 구조조정을 실시하지만 실패한다. 결국 8월, 계열사 전부 워크아웃으로 들어가게 되고, 11월 초에 대우 사장단은 사퇴를 제출하고 계열사는 매각 상태가 된다.
물론 강봉균 경제부총리로 대표되는 일부 경제 관료들은 '''구조조정을 하지않고 추가 대출이나 신규투자를 기대'''하는 김우중의 모습을 '''막강한 부채를 빌미로 정부를 협박'''한다고 간주하며 대우그룹을 좋지않게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재계 2위'''인 대우그룹이 문제가 생길 경우 감당해야 할 후폭풍이 '''제2의 IMF 사태'''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만큼 컸기 때문에 함부로 대우를 건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정부 자금을 투입 가능한 법정관리안을 제시하였다. 당시 한국 정부와 동업자였던 제너럴 모터스이 동시에 손을 내밀었는데, 김우중은 정부의 제안을 받은 와중에도 GM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었다.
늘 그런 건 아니지만, (개인의) 성세가 끝나가는 상황에서는 이해관계가 얽힌 쪽보다는 일처리가 분명한 쪽에 의탁하는 것이, 오히려 생명이나 세(勢)를 유지하는데 유리한 경우가 있다. 1999년 위기 때 손을 내밀었던 제너럴 모터스와 한국 정부 중 어느 쪽이 더 나았을지?
9. 만약에 부도가 나지 않았다면?
긍정하는 쪽에서는 만약 대우그룹이 외환위기 당시에 위기를 잘 타개하여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면 현대를 제치고 삼성과 재계 서열 1~2위를 다투는 대기업이 되었을 것이며, 글로벌 경제위기에서 휘청거렸다 해도 재계 4위 안의 재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 있다. 또한 LG나 삼성에게 전자 쪽이 밀렸다 하더라도 다른 사업인 국방이나 자동차 생산 쪽에서는 한화, 현대와 경쟁하며, 한국 경제에 더 큰 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언제까지나 1999년 당시 대우가 '''70조원 가량의 대내외 부채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될 경우'''에만 해당되는 망상적인 예측에 불과하다. 부채 규모가 한 기업이나 당시 IMF 외환위기 체제하에서 국가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이러한 예측은 망상에 불과하며[31] 대마불사를 외치며 앞뒤도 보지 않고 30년간 사업규모만 확장하면서 규모만 늘리던 대기업이었던 것을 생각하자.
10. 부활 가능성?
2009년에는 부활 가능성에 대한 기사가 나왔었고 2015년에는 대우인터내셔널이 대우차 브랜드를 돌려달라고 GM을 상대로 상표권 반환을 요구했으나 무산되었다. 그러나 "대우자동차" 상호를 제외한 그룹의 CI와 상호는 대우그룹의 중심이었던 포스코인터내셔널(구 대우인터내셔널)이 아직도 보유하고 있는지라, 대우맨들과 구 계열사 임직원들이 동의만 한다면 다시 그룹이 부활할 수는 있다. 그러나 각 기업들로 쪼개진 대우출신 기업들의 재결합부터, 다양한 변수들이 산재하기에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또한 그룹 창업주인 김우중 회장 또한 생전에 그룹 재건을 바라지 않는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었고[32] 2019년 12월 타계함에 따라 현재는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볼수 있다.
11. 계열사 목록
11.1. 전자·정보통신
- 대우전자: 2006년 법원으로부터 파산선고를 받고 청산됨.
- 가전사업부문: 2002년 대우모터공업으로 양수됨.
- 대우모터공업(현 위니아전자): 1987년 미국 GE와 합작으로 설립되었다. 1988년 세탁기용 모터를 생산하였고, 1992년 청소기용 모터를 생산하였다. 1993년 GE와 결별하였고, 1995년에는 중국에 공장을 설립했다. 2002년 (구)대우전자로부터 전자/가전 사업부문을 양수받은 뒤 대우일렉트로닉스로 사명이 변경되었고, 2013년 1월 동부그룹이 인수해 동부대우전자가 되었으나 동부그룹이 워크아웃 후 금융 부문을 중심으로 구조 조정을 하는 과정에서 다시 매물로 나왔고 2018년 2월 대유그룹이 인수하면서 사명을 대우전자로 환원되었다가 2019년 7월 사명을 위니아대우로 변경하였다.
- 대우전자서비스(현:위니아에이드): 구 대우전자 서비스부문으로, 1998년에 분할→2005년 대우일렉서비스→2013년 동부대우전자서비스→2019년 대유위니아서비스(현 위니아SLS)에 합병됨. 동부대우전자, 대우디스플레이, 대우어플라이언스 제품의 사후서비스는 물론 코원, 코닥 및 iPhone의 한국내 A/S를 여기서 담당한다. 단, 대우어플라이언스와 대우전자서비스는 완전히 다른 회사이다. 대우어플라이언스의 사후지원을 대우전자서비스에서 응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의해야한다.
- 모니터사업부: 2002년에 종업원지주사로 분리됨. 2005년에 대우컴퓨터 사업부문을 합병함. 현 대우루컴즈
- 전장사업부문: 2002년 대우일렉트로닉스로 양도 후 2007년 '대우아이시스'로 분사됐다가, 2010년 휴맥스에 매각된 후 2017년 해당 업체에 합병됨.
- 오디오사업부문: 2002년 대우일렉트로닉스로 이관됐다가 2003년 종업원지주사 '대우디에이티'로 분사됐으나, 2013년에 폐업됨.
- 영상(TV)사업부문: 2002년 대우일렉트로닉스로 양도 후 2009년 종업원지주사로 분사됨. 현 대우디스플레이
- 특산사업부: 2001년 (주)한화(현 화약·방산 구미사업장)로 매각됨.
- 반도체사업부: 2001년 12월 (주)광전자로 매각됨.
- 보일러사업부: 2002년 종업원지주사 '대우가스보일러'로 분사됨. 현 알토엔대우
- 냉장고압축기사업부: 2002년 대우일렉트로닉스로 이관된 후 2015년 분리됨. 현 대우컴프레셔
- 청소기사업부: 동일 과정을 거쳐 2009년 에이스전자로 매각됨.
- 소형모터사업부: 동일 과정을 거쳐 2009년 하남전기로 매각됨.
- 에어컨사업부: 동일 과정을 거쳐 2009년 귀뚜라미로 매각됨.
- 디지털피아노사업부: 1998년에 종업원지주사 (주)벨로체로 분사됐으나, 2002년에 법인명을 '벨로체피아노(주)'로 변경했다가 2003년경에 신규법인 (주)벨로체를 거친 후 2009년부터 브이엠아이로 또 넘어갔다.
- 대우통신: 1967년 신성전기산업을 모태로 하여 1969년 대한전선에 인수된 후 대한음향, 대한통신공업을 거쳐 1982년 대우그룹에 인수돼 이듬해 대우통신으로 변경됐다. 컴퓨터와 통신기기를 주로 만들다가 1999년 대우정밀공업을 합병하고 자동차부품 사업도 했으나, 그룹 해체 후 사업부를 차례차례 분사시키고 2002년에 상장폐지됐으며, 이후 청산절차를 밟고 2019년에 법인이 폐업됐다. 그 외에 경기도 시흥시 대야동에도 공장을 두었으나 2000년부터 대한제분 등 여러 기업에 소유권이 넘어가며 의류 창고정리 판매장으로도 쓰이다가 2017년에 철거되어 2019년에 대림 e편한세상 단지가 들어섰다.
- 컴퓨터사업부문: 데스크탑 브랜드 '코러스'와 노트북 브랜드 '솔로'로 유명하며, 2002년 종업원지주사 '대우컴퓨터'로 분사 후 2005년에 사업부를 대우루컴즈에 넘기고 이듬해 말에 폐업됨.
- OA사업부문: 1999년 '데이통콤'으로 분사 후 2003년 '인코믹스'로 사명을 변경했으나, 2005년에 폐업됨.
- 통신기기사업부문: 2001년 '대우텔레텍'으로 분사됐으나, 2005년에 사업부를 또다시 신규법인 '대우글로벌'로 재분사시킴.
- 특수사업부문: 2001년 엠텍에 양도함.
- 통신사업부문: 2000년 외국인 투자기업 머큐리에 매각됨. 해당 기업은 SK, LG, KT 통신사의 모뎀 및 공유기를 공급하고있다.
- PCS사업부: PCS 통신장비 생산을 담당하는 부서로, 2000년에 인송정보통신으로 양도됨.
- 임상사업부: 2000년에 성원디앤텍으로 양도됨.
- 자동차부품부문: 구 대우정밀공업. 1999년 합병됨.
- 부산공장(현 S&T모티브): 2002년 '대우정밀'로 분사됨.
- 보령공장: 2002년 '대우파워트레인'으로 분사→GM대우에 자산을 매각하고 2005년 폐업. 현 한국GM 보령공장.
- 구미공장: 2002년 '대우프라스틱'으로 분사 후 2006년 SM그룹에 매각되어 '대우라이프'가 됐으나, 2008년 남선알미늄에 합병됨.
- 금속사업부문(현 경남금속): 합병 전에도 경남금속이었으나, 1999년 합병 후 2001년 종업원지주사로 재분사됨.
- 대우에이피언테크놀러지: 구 대우자이모스테크놀러지. 미국 에이피언 사와의 합작사로 1994년 청산됨.
- 대우전자부품: 1973년 설립돼 대우그룹 소속으로 DY, FBT 등의 전자기기부품과 자동차용 전장 제품 등을 판매한 회사였으나 그룹 해체 이후 어려움을 겪다가(이 과정에서 잠시 파츠닉으로 이름이 바뀌기도 했다.) 2008년 법정관리, 현대자동차의 부품협력사인 아진산업이 인수했다.# 매출 2166억에 임직원 667명 정도의 규모를 가진 회사이다. #
- 대우캐리어: 1985년 미국의 캐리어 사와 대우가 합작한 에어컨 전문 회사. 대우캐리어를 시작으로 PAC/RAC 등의 룸에어컨과 시스템에어컨을 생산해 한국시장에 소개했다. 1991년 7월 대우그룹에서 계열 분리되었고, 2000년 5월 캐리어가 옛 대우 계열사의 지분을 인수하면서 캐리어 주식회사로 한국에서 새출발해 운영하다 정평캐리어를 거쳐 2011년 오텍에 인수돼[33] 오텍캐리어란 회사로 운영 중이다.[34] 에어컨, 냉난방기, 공기청정기, 시스템에어컨, 보일러, 냉동공조시스템 등을 제조한다. 본사 및 공장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장덕동에 위치. 2014년 매출 3,200억에 영업이익 50억.
- 대우정보시스템: 시스템관리(SI) 회사. 1989년에 대우그룹 계열사로 설립돼 1999년에 계열분리됐으며, 2012년에 경영컨설팅 회사 한국AT커니에 인수됐다.# 2014년 매출 1,590억에 임직원 637명.
- 오리온전기: 1965년에 설립돼 국내 최초로 TV브라운관을 생산했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기업이었다. 1974년 대한전선이 지분을 인수했다가 1983년 대우그룹에 편입됐고 한때 사원이 5천 명에 이르는 큰 회사였지만 그룹 해체 후 2002년에 상장폐지되고, 2005년 미국 매들린패터슨에 넘어갔다가 반년 후 청산절차를 밟아 서서히 사라졌다.# 지금도 오리온전기란 이름이 언론에서 가끔씩 언급되는데 중국 기업에서 일부 사업부문을 인수해 상표를 그대로 쓴다는 말도 있고 상술한 대우디스플레이에서 디스플레이 부문을 인수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 과정에서 외국 자본이 연루돼 먹튀 논란이 일고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섰지만, 회사는 살리지 못했다.#
- PDP사업부문(현 오리온): 2002년 '오리온PDP'로 분사됨.
- 오리온전기부품: 1998년 오리온전기에 합병됨.
- 한국전기초자: 1975년에 한국유리공업 자회사로 세워져 컴퓨터 및 TV에 사용되는 브라운관용 유리를 생산했다. 1998년에 대우가 한글라스그룹으로부터 인수했지만 1년도 안 돼서 다시 뱉었다. 일본 아사히글라스가[35] 재인수했으며 2011년에 자진 상장폐지했다.# 그런데 상폐 이후 구미공단에 있는 공장을 쪼개파는 등 뭘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감사보고서가 있긴 한데 매출 항목이 아예 비어있는 등 이쪽도 장사를 접어버린 듯. 2014년 기준 감사보고서를 보면 매출, 매출원가, 매출총이익은 존재하지 않고 2억 3천의 판관비가 그대로 영업손실에 반영됐으며, 이자수익 등으로 230억의 영업외수익을 올렸는데 법인세는 전혀 내지 않고 이게 고스란히 당기순이익이 됐다. 정상적인 사업활동을 영위하고 있는 회사가 아닌 것으로 추정됨.
- 한국산업전자: 1999년 청산됨.
- 대우반도체: 1984년 설립했으나 얼마 못 가 돌연 사업포기했고, 1986년 2월 대우통신으로 합병됨.
- 대우ST반도체설계: 프랑스 SGS-톰슨 사와의 합작사로, 1999년에 경영권을 ST마이크로일렉트릭에 넘기고 2002년에 폐업됨.
- 동흥전기(현 SG고려): 1988년 독립 후 1996년 (구)고려를 합병해 '(주)고려'로 변경했으나, 1999년 그룹 워크아웃 여파로 법정관리를 받다가 2003년 가로수닷컴에 매각됨.
11.2. 건설
- (주)대우 건설부문(현 대우건설): 구 영진토건-대우건설-대우개발. 한때 (주)대우의 존속법인이었으나 2000년 그룹 해체 후 기존 법인에서[36] 분사 후 시공능력평가에서 3년 연속 1위를 차지하는 등# 5대건설사[37] 로 명성이 높다. 2008년 금호아시아나그룹 인수 후 M&A와 관련된 우여곡절 끝에 지난 2010년 산업은행이 인수했다. 산업은행 체재 후에도 역대급 영업실적을 기록하는 등 대형 건설사의 위상은 이어지고 있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 대우엔지니어링: 1976년 설립하여 1990년에 종업원지주사로 분사됐다. 이후 2008년 포스코가 인수하고 포스코엔지니어링으로 사명 변경했으나, 2016년 포스코건설과 합병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 경남기업: 1984년 10월 대우그룹이 지분 26.81%를 인수했고, 1987년에 정식 편입됐다. 그러나 1999년 워크아웃 대상 기업으로 지정돼 2000년 그룹 해체 후 2003년 대아건설이 인수했으나, 이듬해에 대아건설을 역합병했다. 그러나 2015년 워크아웃을 또 거쳐 이듬해 SM그룹으로 매각됨.
- 경남시니어타운: 경기도 분당신도시 시니어타운 개발업체로, 1998년 폐업됨.
- 광주제2순환도로: 그룹 해체 후 대우건설 자회사가 되어 2003년 '한국도로관리'가 됐으나, 2006년 금호아시아나그룹에 매각된 후 2009년 금호개발상사에 합병됨.
- 한일·대우시멘트: (주)대우와 한일시멘트의 합작사로, 1999년에 지분매각함.
- 경우정화기술(현 경우크린텍): 한동안 위장계열사였으나, 1998년 정식 편입됐다가 1999년에 지분매각함.
11.3. 자동차·중공업
- 대우자동차: 2000년 그룹 해체 후 법정관리를 거쳐 2002년에 사업 분야별로 4개로 쪼개졌으며, 이에 따라 기존 법인은 청산법인이 되었다.
- 자동차사업부문(현 한국GM): 2002년 GM에 매각 후 'GM대우오토앤테크놀로지'로 분사됨.
- 부평공장: 2002년 '대우인천자동차'로 분사됐다가 2005년 GM대우에 자산양도 후 청산됨.
- 국민차사업부문: 1999년 대우중공업에서 양도받음.
- 상용차사업부문(현 타타대우상용차): 2002년 '대우상용차'로 분사됐다가 2004년 인도 타타그룹으로 인수됨.
- 버스사업부문(현 자일대우상용차): 2002년 '대우버스'로 분사 후 이듬해 영안모자에 매각돼 2013년 '자일대우버스'가 됐다가 2016년 자일상용차에 역합병됨.
- 대우-FSO: 폴란드 현지 합작법인으로, 그룹 해체 후 사실상 폴란드 정부가 운영하다가 2005년 우크라이나 아브토자즈에 매각됨.
- 대우모터 폴스카: 폴란드 국영 자동차회사 FSL과의 합작법인으로, 2001년 파산됨.
- 대우모터 이집트: 이집트 현지법인으로, 2005년 미국 제너럴 모터스에 매각됨.
- 대우 오토모빌 루마니아: 구 오토모빌 크라이오바. 2006년 루마니아 정부에 매각됨.
- AVIA: 체코 자동차회사로, 그룹 해체 후 2006년 영국 애쇽-레일랜드에 매각됨.
- 우즈대우-아브토(현 우즈오토): 우즈베키스탄 정부와의 합작법인으로, 그룹 해체 후 2002년 미국 제너럴 모터스에 매각됨.
- VIDAMCO: 베트남 하노이 현지법인으로, 이하 동일함.
- 계림대우객차유한공사: 중국 구이린시 현지법인으로, 2002년 영안모자에 매각됨.
- 워딩연구소: 구 IAD. 2001년 영국 TWR 사에 매각됨.
- 자동차사업부문(현 한국GM): 2002년 GM에 매각 후 'GM대우오토앤테크놀로지'로 분사됨.
- 대우자동차판매: 구 한독산업. 1997년 그룹에 정식 편입됐다가 1999년 그룹 해체 후 채권단이 관리했으나, 2010년 영안모자에 매각되어 2011년 '대우송도개발'이란 청산법인이 됨.
- 자동차판매부문(현 자일대우자동차판매): 구 우리자동차판매. 1993년 대우차 종업원들이 한화섬유를 인수한 후 업종을 바꿔 출범했으며, 1996년 한독산업에 합병됐다가, 2011년 재분사됨.
- 건설부문(현 대우산업개발): 구 한독종합건설.
- 대우기전공업(현 이래오토모티브): 1984년 대우와 GM이 합작하여 대우자동차부품으로 설립되어, 1989년 대우기전공업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1999년 GM의 부품 사업부가 자동차부품 그룹인 델파이그룹으로 분사되고 2000년에 그룹이 해체되면서 대부분의 지분이 델파이로 넘어갔다. 사명도 한국델파이로 다시 변경. 한국의 중견 자동차 부품사 이래CS가 2011년, 2015년 두 번에 걸쳐 지분의 90% 이상을 인수하면서 완전한 한국계 기업이 됐다.# 사명은 이래오토모티브로 또 다시 변경. 장제품, 제동 장치, 조향 및 구동 장치, 공기조화장치, 배기가스 정화장치, 자동온도 조절장치, 에어백, 엔진 제어시스템 등 약 40가지 이상의 자동차 핵심 부품을 연간 200만 대 분 이상 생산한다. 매출이 1조를 넘고 직원수 2,000명에 달하는 대기업이다. 본사는 대구광역시 달성군에 있으며, 공장은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과 경기도 여주시 점봉동에 있다.
- 한국자동차연료시스템: 자동차 연료펌프 전문 회사. 1994년에 설립했으나 그룹 해체 이후 개인 투자자에게 매각. 2010년 사명을 코아비스로 변경했다. 한동안 성장이 정체됐다가 2012년에 토종 사모펀드 한앤컴퍼니가 지분 100%를 인수했다. 주요 납품처는 역시 한국GM으로 뛰어난 기술력을 인정받아 2008년부터 2012년까지 5년 연속으로 GM이 우수 파트너사에게 수여하는 ‘소이(SOY) 상’을 받고, 폴크스바겐의 미래 자동차 프로젝트(FAST)의 공동 개발사로 선정되기도 했다. 여기에 선정된 44개 기업 중에 국내기업은 코아비스를 포함해 LG전자와 LG화학, 포스코 등 단 4개사 뿐이라고. 다만 회사의 규모 자체는 크지 않아 매출은 1,000억대지만, 사모펀드와의 시너지 효과로 크게 증가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기사를 참고바람.#
- 쌍용자동차: 1997년에 쌍용그룹에서 인수한 자동차 제조업체로, 시기가 시기였던지라 당연히 다시 뱉었다. 이후 채권단이 관리했다가 2004년 중국 상하이기차(SAIC)가 먹었는데 거기서도 뱉어버렸다. 심지어 이쪽은 먹튀였다. 2009년 부도 후 회사의 정리해고 방침에 노동조합은 파업으로 맞섰고, 회사는 강경 일변도로 대처하면서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이후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통해 2011년 인도 마힌드라 그룹에 인수됐다.
- 대우남서울서비스(현 자일남서울서비스): 한동안 위장계열사였다가 1998년 인수 후 이듬해 지분매각됨.
- 대우분당서비스(현 자일분당서비스): 이하 동일함.
- 대우중공업: 2000년 그룹 해체 후 사업분야별로 4개로 쪼개졌고, 기존 법인은 청산작업을 거쳐 2005년 4월 1일 파산하였다.
- 동명중공업(현 (주)두산 모트롤BG): 옛 동명그룹 계열사로, 1984년 인수 후 1987년경에 지분매각했다가, 2007년 '동명모트롤'로 바꾸고 이듬해 두산그룹으로 매각된 뒤 2010년 (주)두산에 합병됨.
- 한국철도차량(현 현대로템): 구 대우중공업-현대정공-한진중공업 철도차량사업부문. 출범 당시 현대와 함께 계열사로 분류됐으나 2000년 법률개정으로 계열제외됨.
11.4. 섬유·화학
- (주)대우 섬유사업부문(현 정산인터내셔널): 1986년 내수의류사업을 신성통상에 넘겼으며, 2000년 대우인터내셔널로 이관 후 2013년 태광실업에 매각함.
- 대우어패럴(현 SG세계물산): 구 원림산업. 1984년 종업원지주사로 독립했으나 열악한 노동환경 및 노동자에 대한 박한 처우로 1984~1985년에 파업이 터졌다.[40] 1985년 이미지 개선을 위해 '세계물산'으로 바꾸어 대우의 관계사로 자리매김했다. 1999년 그룹 워크아웃 여파로 법정관리를 받다가 2003년 SK그룹에 넘어간 후 'SG위카스'로 바꾸고 2005년에 고려-KTB컨소시엄으로 매각됨.
- 신성통상: 1984년 계열분리 후 독자경영을 해 오다가 1999년 그룹 워크아웃 여파로 법정관리를 받았으나, 2002년 텐트 제조업체 '가나안'에 매각됨.
- (주)고려: 구 고려피혁. 1986년 종업원지주사로 독립 후 1998년 동흥전기에 합병됨.
- 이수화학: 1987년경 지분감소로 분리됨.
- 일광화학공업: 1986년 이수화학에 합병됨.
- 풍국정유공업: 1989년 포항제철에 지분매각 후 1993년 청산됨.
- 제철화학(현 OCI): 1989년 포항제철에 지분매각 후 1994년 거평그룹으로 넘어갔으나, 1998년 모기업 부도 후 법정관리를 받다가 2000년 동양화학으로 넘어감.
11.5. 무역·서비스
- (주)대우 무역부문(현 포스코인터내셔널): 구 대우실업. 2000년 (주)대우에서 분사된 후 2010년 포스코에 매각됨.
- 물류팀: 1999년 종업원지주사 '대우로지스틱스'로 분사됨.
- 유통사업본부
- 영상사업본부: 원래 대우전자 산하였다가 1996년에 양수했다. 1995년 우진필름으로부터 씨네하우스를 인수하는 등 영화 및 미디어 산업에 적극 뛰어들었지만 1999년 4월 그룹 구조조정에 따라 동양그룹에 분할 방식으로 팔렸다.
- 대우시네마네트워크(현 OCN): 1999년 '오리온시네마네트워크'로 분사 후 동양그룹에 매각됐다가 2001년 오리온그룹으로 합류했고, 2009년 CJ그룹으로 매각된 후 2013년 CJ E&M에 합병되어 산하 채널로 존속중이다.
- 메가플렉스(현 메가박스중앙): 1997년부터 준비해 온 영화관 체인 브랜드로, 1999년 '메가씨네플렉스'로 분사된 후 동양그룹에 매각됐으나, 2001년 오리온그룹으로 합류 후 2007년 호주 맥쿼리파트너스를 거쳐 2010년 씨너스에 매각됨.
- 씨네하우스: 1995년 우진필름으로부터 사들인 서울 강남의 복합상영관으로, 1999년 동양그룹에 매각된 후 한동안 메가박스가 소유했다가 2002년 폐관됨.
- 부영극장: 부산 충무동2가 소재. 1996년부터 3년간 임대운영했다.
- 영화사업부 및 홈비디오사업부: 우일영상 등과 비디오테이프 공급/판매계약을 맺어왔으며, 1999년에 인력 등을 세음미디어로 넘겼다가 2000년에는 씨넥서스로 또 분사됨.
- 대우개발(현 우양산업개발): 구 대우트리아드개발-동우개발. 김우중 회장의 부인 정희자 몫으로 호텔 운영 및 푸드서비스 사업을 담당하며, 2000년 그룹 해체 후 케이만 군도 페이퍼컴퍼니 '퍼시픽인터내셔널'로 대주주가 변경된 후 '필코리아리미티드'로 사명이 변경되었다. 2007년 베스트리드리미티드를 거쳐 2012년 우양수산에 매각됐다.
- 호텔사업부문
- 서울힐튼(현 밀레니엄 서울힐튼): 1999년 싱가포르 CDL에 매각됨. 그룹 해체 전까지 23층엔 김우중 회장 집무실이 있었다.
- 경주힐튼
- 하노이대우호텔: 2000년경 대우건설로 이관됐다가 2012년 베트남 국영기업 '하넬'에 매각됨.
- 연변대우호텔(현 연길대종호텔): 그룹 해체 후 2002년 중국 법원에 의해 파산선고를 받고 2009년경 베이징대종호텔에 매각됨.
- 힐튼외식사업부: 포항 영일대에서도 외식사업을 했으나 2003년 동우개발로 넘겼다.
- 선재미술관(현 우양미술관): 경북 경주시 보문로 소재. 해당 미술관은 1990년에 요절한 김우중 회장 장남 김선재의 이름을 땄으며 2013년 우양수산에 매각됨.
- 호텔사업부문
- 설악개발: 뉴설악호텔(현 켄싱턴스타호텔 설악) 운영사로, 1989년 논노그룹에 넘어갔다가 1995년 모기업의 부도로 호텔을 이랜드에 넘기고 이듬해 폐업됨.
- 아도니스: 구 서호레저-대우레저. 양산 및 포천 아도니스CC 운영업체로, 대우개발처럼 정희자의 몫이었다. 2005년 차남 김선협에게 넘어갔다가 2010년 이경재에게 넘어갔다.
- 동우공영: 1978년 설립 이래 대우센터(그룹 본사) 등 대우 계열사 소유 빌딩을 관리해왔으며, 1999년에 종업원지주사로 분사했다. 시설관리, 임대관리, 보안관리, 미화관리, 전자경비 등 건물관리 사업을 중심으로 부동산관리, 건설업 등에 진출해 있다. 2014년 기준 매출 500억에 임직원 1500여 명이다.
- 유화개발: 재개발 전문 임대업체로, 1998년 그룹에 편입됐으나 2000년 해체 후 이듬해 싱가포르 흥융그룹에 팔려 '서울시티타워'로 변경하고 2002년에 동명의 빌딩을 완공했다. 2003년 독일 TMW로 매각됐다가 2008년 폐업됨.
- 일산역사: 대우전자와 철도청 등이 출자한 일산역 민자역사 개발사업자로, 1997년 외환위기로 개발이 취소되어 이듬해 법인이 청산되었다.
11.6. 금융
- 다이너스클럽코리아(현 현대카드): 1995년에 대우가 인수했으나, IMF로 인해 몰락 위기를 맞았다가 2001년에 현대자동차그룹에 매각됨.
- 대우증권(현 미래에셋대우): 2000년에 한국산업은행이 인수함. 원래는 관리를 거쳐 되팔이하려 했으나, 빅3 증권사를 데리고 있는 편이 산은측에선 훨씬 이익이라 매각을 포기하고 완전히 자회사로 편입했다가 2015년 미래에셋금융그룹에 매각했고, 이듬해 미래에셋증권을 역합병하고 미래에셋대우로 사명이 변경됐다.
- 대우경제연구소: 국내 최초의 민간 경제연구소였다고 한다. 지금의 삼성경제연구소, 현대경제연구원과 비슷한 포지션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대우증권이 60%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고. 1999년 계열제외 후 2001년에 크리스탈투자자문에 매각했다.# 2013년에 채용공고를 내고 직원을 뽑은 것으로 보아 망하진 않은 듯. 박근혜 정부 시절에 잘 나가던 사람들 여럿이 대우경제연구소 출신이여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42]
- 대우투자자문: 대우증권의 투자자문 자회사로 1998년에 스커더 켐퍼사에 매각하려다 이듬해 산업은행 채권단에 팔았다. 이에 따라 대우증권이 99.99% 가까운 지분을 갖고 있있고, NICE기업정보에 따르면 2001년 11월 문을 닫았다.
- 서울투자신탁운용(현 멀티에셋자산운용): 2000년 그룹 해체 후 한국산업은행에 매각되어 2004년 '산은자산운용'이 됐으나, 2015년 미래에셋금융그룹으로 매각됨.
- 대우선물: 1999년 폐업됨.
- 대우투자금융: 1990년 동양그룹에 매각되어 '동양투자금융'이 됐다가 1996년 '동양종합금융'을 거쳐 2001년 울산종합금융 합병 후 '동양현대종합금융'이 됐으나, 얼마 못가 동양증권에 합병됨.
- 대우캐피탈(현 아주캐피탈): 구 한국할부금융-대우할부금융. 2005년 6월에 아주그룹으로 편입됨. 자세한 연혁은 여기를 참고. 2014년에 6조 4천억의 자산을 굴리며 500억 정도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 대우창업투자: 1999년 지분매각 후 '지오인베스트먼트'가 됐으나, 2008년 중소기업투자회사 등록을 반납했다.
11.7. 공익사업
- 대우재단(홈피): 대우 해체 이후에도 보건복지, 교육지원, 학술, 문화예술 등 4가지 분야의 사업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 산하에 아트선재센터가 있다.
- 옥포대우병원: 거제시의 대우조선 의료재단 운영 병원이다.
- 고등기술연구원: 과거 김우중 회장은 '기술은 사서 쓰면 된다'라는 말을 한 적도 있을 정도로 대우그룹은 신기술 개발을 소홀히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연구개발의 중요성이 대두된 후, 첨단 기술을 확보할 수 있는 기관의 필요성이 생겼다. 이에 따라 1992년 로봇 생산, 에너지 환경, 자원 재활용 분야의 핵심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아주대학교, KAIST, 한국원자력연구소 등이 참여해 설립된 산·학·연 협력복합체로 고등기술연구원이 설립되었다. 연구원 건물 일부는 외부에 세미나실처럼 대관해서 수익을 충당하기도 한다.
- 지성학원
- 대우초등학교: 1982년 거제도에 있는 대우조선 직원 자녀들이 다닐 수 있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 거제군 옥포리에 있던 대우쇼핑센터에서 시작한 대우의 사립학교. 1982년 당시 거제군 장승포읍(현 장승포동)에는 국민학교라고는 옥포국민학교 등 열악한 시골 학교 밖에 없어 노동자들이 이주를 꺼리는 상황이었는데, 당시로선 매우 파격적인 투자로 대우국민학교를 건립했다. 1983년 거제군 장승포읍 아주리(현 아주동)에 있던 아주산으로 당시로선 매우 큰 규모의 건물을 신축해서 이전. 1982년에는 1학년만 있다가 1983년부터 전 학년으로 확대. 1980년대만 해도 대한민국 최고의 사립 국민학교였다. 실제로 1980년대 초에는 한 반의 인원이 23명 수준. 국내 최초의 국민학교 요트부와 밴드부가 있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도 거제도만 오면 꼭 들리던 곳었는데 물론 땡전뉴스에도 단골이었다. 1993년 아름다운학교 운동본부가 주최한 ‘아름다운 학교’ 대상을 받을 정도로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김우중 회장의 부인 정희자 씨가 이사장이었는데, 대우그룹 해체 후 그냥 평범한 사립 학교가 되어버렸다. 지금은 대우조선해양 산하의 사립 학교로 덕분에 학교의 셔틀버스 이외에도 대우조선해양의 모든 버스가 셔틀버스로 운영된다. 말만 잘하면, 지나가는 대우조선해양의 셔틀버스를 붙잡고 타도 된다. 섬 유일의 사립 초등학교[43] 로서, 주변 공립 초등학교 학생들로부터 질투의 대상이 되곤 한다. 이를테면 "대우초등학교 애들은 다들 부잣집 애들이라서 텃세와 학부모들의 치맛바람이 심하다더라" 라든가, "대우초등학교 애들은 돈이 많아서 다른학교 리코더 배울 때 플룻을 배운다더라"는 등의 설.
- 거제중학교
- 거제고등학교: 거제중학교와 거제고등학교는 위의 대우초등학교와는 달리 대우그룹이 1980년에 기존에 존재하던 사립 학교를 인수해 1983~1985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한 것으로 역시나 대우그룹이 해체된 이후엔 평범한 사립학교로 남았다.
- 대우학원
- 세영학원
11.8. 관계사
- 부산매일신문: 정식 계열사는 아니지만, 관계사 (주)고려 등이 지분을 지닌 터라 대우 관계사로 분류된다.
- 삼신올스테이트생명: 세계물산이나 신한기공 등 관계사들이 지분을 보유했다.
- 피어리스: 1957년에 '금강실업'으로 세워진 화장품 회사로, 1975년에 주식을 인수했으나 이후 조중민 대표가 독자경영했고, 일본 맥스팩터 등과 기술제휴를 맺었다. 1997년 외환위기 타격으로 2000년 최종부도를 맞아 청산 절차를 밟았다. 이후 2002년에 조중민 대표 아들이 '아이피어리스'를 세우고 스킨푸드 제품을 생산해 명맥을 잇고 있다.
11.9. 관련 단체
- 대우세계경영연구회: 글로벌 청년사업가 양성과정을 운영하는 단체이다. 홈페이지
- 대우인회: 그룹 임직원 친목모임이다.
12. 여담
- 그룹 로고의 상징에 대해 말하자면, 외곽을 타원으로 가장 넓고 큰 공간을 형성시켜 미래 지향적인 넓은 세계, 곧 5대양 6대주를 의미하며 전체가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청색 부분은 창조와 도전, 흰색 바탕은 희생과 봉사를 상징한다. 다만 1974년에 이 로고를 쓸 때부터 표절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왔다.
- 외환위기를 다룬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사 "대우가 위험합니다. 김우중 회장이 특별면담 신청했습니다"로 언급된다. 당시 정부 상황대응팀은 100대 기업의 이름을 출력해놓고 부도가 나는 기업은 전부 빨간 펜으로 죽죽 긋고 있었는데, 웬만한 기업들이 날아가도 바쁘게 일만 하던 직원들이 대우란 이름이 나오자 다들 손을 멈추고 충격에 휩싸인다. 대우는 당시만 해도 확고부동한 빅4 중 하나였으며 현대의 입지를 추월하기 힘들어도 한때 재계 2위까지 올랐던 거인이었다. 그런 대우까지 넘어갈 조짐을 보이자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대우그룹은 IMF 사태가 터진 직후에도 공격적인 경영을 하다가 한국 정부의 자체적인 구조조정 과정에서 해체에 이른 것으로 IMF사태와 직접 맞물려 망한 것은 아니다.
- 과거 대우그룹 계열사 직원들은 '대우맨'이라고 자칭타칭하며 그 위세가 대단했다. 특히 소속감과 프라이드가 높았는데, 오죽하면 워크아웃이 된지 한참 지난 뒤에도 포스코인터내셔널[45] 이나 미래에셋대우[46] 에서는 사명을 바꾸거나 임원 인사 문제에서 대우맨들이 결집해서 모기업조차 이를 무시하기 힘들었을 정도. 또한 대우가 무너진지 근 20여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옛 대우 임직원들의 모임이 존속하고 있다. 대우 창립 49주년 기념행사를 가질 정도로 연대감을 가지고 있다.. 같은 이유로 대우그룹은 공중분해되었지만 대우그룹 출신 기업(대우건설, 대우조선해양 등)의 업무용 차량은 2019년 현재도 자일대우상용차나 쉐보레[47] 를 많이 뽑고 있다.[48] 이것도 대우그룹의 소속감과 프라이드를 느낄 수 있는 흔적이다. 의리 따위 집어치우고 정통파를 주장하는 것마저 포기한 한진중공업이나 메리츠금융지주[49] 와는 다른 모습이다.[50]
- 대우 시절에 썼던 로고는 현재 대우네트웍스[51] , 대우로지스틱스, 대우재단, 대우세계경영연구회가 쓰고 있다.
13. 스포츠 후원
- 부산 대우 로얄즈 (1980~1999)
- 인천 대우 제우스 (1996~1999)
- UC 삼프도리아 (1997~1999)
- 레기아 바르샤바 (1996~2001)
- FC 한자 로스토크 (1996~1997)
- AC 페루자 (2000~2002)
[1] 그룹 명칭인 대우는 창업하는데 도움을 준 도재환 사장의 회사인 대도섬유의 '''대(大)'''와 김우중 회장의 이름인 '''우(宇)'''에서 따 왔다. 여담으로 대도섬유는 이후 도재환 사장이 김우중 회장과의 갈등 끝에 절연하면서 대우와의 관계가 없어졌고, 현재까지도 살아남아 섬유를 생산하고 있다.[2] 삼성그룹, 현대그룹, LG그룹, '''대우그룹'''. 물론 선경그룹(現 SK그룹)도 제법 크긴 했지만 지금과 같이 규모를 키운 것은 훗날 일이다.[3] 김우중 회장의 선친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대구사범학교 은사였다.[4] 당시에는 럭키(또는 금성)그룹[5] 쌍용차 인수만 안 했어도 최소한 그룹 자체는 남아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외환 위기 속에서 대우의 쌍용차 인수에는 매우 복잡한 정치적 및 금융적인 목적이 있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인 설은 쌍용차의 모든 자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대우의 위기를 해결하는데 사용하려 했다는 설이다. 쌍용차를 깡통으로 만들어 대우를 살리자는 건데 당시만해도 기업가치 산정 수준이 지금처럼 정교하지 않았기에 가능했을 수 있다.[6] 1997년까지만 해도 현대그룹이 압도적인 1위, LG와 삼성이 2~3위, 대우는 4위였다.[7] 당시 한보철강, 아시아자동차, 기아자동차, 동아건설 등 총 4개 대기업들의 분식회계 규모가 6조원 가까이 됐는데, 대우그룹 혼자서 사기대출 '''10조원'''에 '''41조 원에 달하는 거대한 분식회계'''를 저질렀다. 사실 아시아자동차는 기아자동차가 속한 기아그룹 산하였으니 어떻게 보면 3개 대기업이지만. 참고로 김우중이 도피하고 대우그룹이 해체된 1999년 기준으로 국가예산이 84조원이었는데 '''그 국가예산의 거의 절반에 달하는 수치였던것이었다'''.[8] 현 시점에서 대우는 말 할 것도 없고, 현대그룹은 형제의 난으로 쪼개졌고, 삼성그룹은 대한민국 재벌 1위가 되었다.[9] 예를 들어, 한국기계공업→대우중공업→(현)두산인프라코어.[10] 이 쪽은 알짜 계열사인 웅진코웨이를 팔고서 살아나기 라도 했지, 완전히 망해버린 대우그룹, STX 따위와 비견될 정도는 아니다.[11] 정확히는 1999년에 제작되었으며 광고의 내용과 아래의 대사로 보아서는 완전한 해체는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고, 자동차관련 계열사만 남기는 구조개혁을 통해 자동차 전문 기업으로 변화하겠다는 내용을 담고있다. 하지만 이 때는 워크아웃을 결정한 상태라 이미 늦은 시기였다. 참고로 광고에 나오는 음악은 가을의 전설 OST에 수록된 제임스 호너의 'The Ludlows'이다.[12] 1976년에 설립된 영국 톰 월킨쇼 레이싱 소속의 연구소로, 마티즈와 누비라의 아이디어를 낸 곳이다.[13] 자사의 승합차인 루블린을 한국에 수입할 계획이었던 자동차 회사.[14] 이 와중에도 쌍용자동차 인수를 그대로 질렀다.[15] 물론 둘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은 전혀 없다. 대우가 지으려던 마천루는 오직 계열사들이 사용할 업무용이었을테고 인천타워는 업무와 호텔, 아파트까지 결합된 복합시설이다. 쉽게 생각하자면 글로벌비즈니스센터와 롯데월드타워의 차이라고 보면 된다.[16] 탱크주의 광고 이후 탤런트 조문정은 그 다음해인 1994년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으며, 또한 배순훈 사장은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정보통신부 장관을 맡았다.[17] 탱크주의를 내세우기 전인 1991년에는 당시 대우 IC 냉장고란 제품을 구입한 몇몇 소비자의 경우엔 구입하자 마자 몇 달 만에 냉장고가 고장이 나고 냉각이 제대로 안 되면서 걸핏하면 문제를 일으키는 현상을 겪었고 이후에 수차례 AS를 불러도 개선이 되지 않는 터에 결국 이사갈 때 대우 냉장고는 그냥 두고 가는 게 낫겠다며 이사 간 집에서 멀쩡히 대우 IC 냉장고가 있던 웃지 못할 상황도 발생했을 정도. * [18] 경찰과 대한전선 측이 제시한 결과도 황당했는데, 경찰 측은 동반자살이라 단정짓고, 대한전선 측도 광고에서까지 안전성까지 강조했지만, 소용이 없었다.[19] TV를 예로 들면 스위치 키고 채널 돌리고 볼륨 조절하면 끝! 에서 자동화면 조정 기능, 예약 on/off 기능, 리모콘 채널 기억 등 갖가지 복잡한 기능들이 추가되기 시작했다. 종이장 몇 개 정도였던 사용 설명서가 점점 두꺼워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20] 물론 그러한 전략 자체가 꼭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 무인양품참조.[21] 의외로 대우는 1978년 새한자동차 인수 이후 파워 트레인 쪽 기술 개발을 단행해, 1981년에 독자적으로 XQ엔진을 개발하였으며, 이후에도 후신 격 되는 엔진인 론지 엔진을 개발한 바 있다. 이들 엔진의 경우 기본 베이스는 제법 괜찮았지만, 적용대상이 하필 소형차 뿐만이 아니라 중형차까지라(...) 욕먹은 케이스. 소형 급인 맵시에서는 제법 좋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해외 유수의 기업에서도 한계라고 느껴지던 세계 최초의 횡치 직렬 6기통 엔진인 대우 XK엔진을 개발해 양산에 성공한 바 있다.[22] 사실 이 문제는 부평 연구소와 부평 공장의 연구 인력과 노동자들의 경험이 숙련되기 시작하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해결된다.[23] 비록 1년 뿐이었지만 1999년 폴란드에서는 그동안 이어졌던 피아트의 점유율 1위 독주를 끝내고, 폴란드 국영 자동차업체인 FSO 인수와 현지 생산 거점 확보 및 공격적인 판매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폴란드의 자동차시장 점유율 1위를 대우가 차지했다. 또 중앙아시아의 경우에는 우즈베키스탄에서 현지 정부와 함께 설립한 '우즈 대우'의 인기가 가히 폭발적이어서, 공장이 가동된 1996년부터 대우 브랜드가 사라진 2017년 현재까지도 부동의 점유율 1위를 기록 중이다.[24] 당시 버스 정류장 명칭은 "서울역앞, 대우"였으나, 그 후에 "서울역.대우건설"로 변경, 2009년 "서울역 버스 환승센터"로 통합됐다.[25]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맹희 전 삼성그룹 부회장 회고록에는 '''정치권에 댈 "줄을 찾는" 과정에서 힘을 소모해 타격을 입은''' 몇몇 기업의 사례가 나와있다[26] 김일성이 특히 김우중을 마음에 들어해 '''"김우중 같은 사람 5명이 있으면 그 나라가 일어날 수 있다"'''는 덕담을 해주었다고 한다[27] 현대그룹은 김대중 정부가 대북사업에 직접 나서기 이전인 '''1989년'''부터 대북사업을 추진했다.[28] 김우중은 대우그룹이 해체되고 해외를 떠돌던 2000년대에도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하는 등 대북사업에는 대단한 열의를 보인 인물이다.[29] 야권에도 손을 내미는 기업들이 대개 여권 2 : 야권 1의 비율로 정치자금을 조심스레 지원하는데, '''친화력 9단'''인데다 선친이 호남과 인연이 닿은 김우중은 이런 행보를 밟아도 별 탈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30] 중형 승용차 레간자가 이곳에서 개발한 작품이다[31] KBS 및 MBC 보도자료 참고.[32] 게다가 아들과 같은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본인이 직접 부활 시키는 것은 애초부터 생존 당시의 이건희 회장의 재산을 다 털어도 감당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추징금 때문에 자금 자체가 확보될 수가 없어서 사실상 불가능하기도 했다.[33] 모회사인 오텍은 응급 의료장비 전문업체로, 앰블런스, 특수 구급차, 검진차, 장애인차, 들것 등을 취급한다.[34] 그 외에도 LG산전 자판기사업부를 인수해 캐리어LG란 회사를 설립했다.[35] 세계 3대 유리 생산 회사로 매출이 10조를 넘으며 한국에도 공장을 세우고 진출해 1조원 가까운 매출을 올리고 있다.[36] 2001년 상장폐지 후 2006년 파산절차에 돌입했다.[37] 삼성, 현대, 대우, GS, 대림[38] 2020년 12월 10일, 현대중공업이 두산인프라코어를 인수하기로 결정하였다[39] 현대중공업에 인수될 예정이다[40] 이 파업은 1985년 구로동맹파업으로 이어진다.[41] 정확히는 임시법인 롯데백화점마산으로 매각됐다.[42] 이한구 前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원장, 사장을 지냈었고 그의 밑에서 일하던 인물들은 안종범, 강석훈 등이 있다.[43] 사실 이곳 이외에도 포스코의 광양제철초와 광양제철남초가 섬에 있긴 하다. 다만, 이곳은 섬 대부분이 제철소로 이루어져 있다. 참고로 섬 유일의 국립 초등학교는 제주대학교 교육대학 (구 제주교육대학교) 부설초등학교이다. 더나아가 섬 유일의 국립 중학교도 제주대학교 부설학교이다. 여담으로 농촌지역 유일의 사립 초등학교는 남양주에 있는 심석초등학교.[44] 2011년 미국 유나이티드 항공에 합병되어 사라졌다.[45] 구 대우인터내셔널. 포스코가 인수했음에도 꽤 오랫동안 모기업 사명이 안들어갔다. 예전 대우맨들은 아직도 '주대우'라고 부르며 대우그룹의 중심이었던 '주식회사 대우'에서 일했다는 프라이드를 드러내고 있다. 이 회사는 대우 상표권을 소유하고 있기도 하다.[46] 구 KDB대우증권.[47] 자일대우상용차의 공식 AS용 이동차량도 올란도가 주력 모델이다.[48] 여담으로 2019년에 포스코인터내셔널은 임원 관용차를 현대자동차 그랜저에서 쉐보레 임팔라로 교체했는데, 모기업인 포스코와 현대자동차그룹의 계열사인 현대제철은 라이벌 관계이기 때문에 바꿨다는 이야기가 있다.[49] 사내 내규에 의해 대한항공 이용시 항공료 미지원.[50] 물론 인수한 모기업에서는 이런 점을 싫어하기도 한다. 냉정하게 얘기하면 한참 전에 망한 회사인데 자사 소속 임직원들이 해당 모기업의 문화에 융화되기보다는 대우의 아이덴티티를 고집한다는 게 달가울 리가 없다[51] 2016년 대우 시절 임직원들이 세운 중소기업 지원업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