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관완아
1. 개요
上官婉兒
(664 ~ 710)
당나라의 궁인이자 여류 시인. 상관의(上官儀)의 손녀. 뛰어난 달필에 상당히 총명하며, 외모도 굉장히 청초한 미인이었다고 전해진다.
2. 생애
섬주 출신. 할아버지 상관의가 측천무후에게 살해당할 때 상관씨 일가가 모두 주살당했지만, 상관완아는 어린데다 여자라서 외가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궁중의 노비가 되었다.
상관완아는 시서를 깊게 공부해 재능이 있었고, 677년 그녀의 재능에 대한 소문을 들은 측천무후의 부름을 받고 액정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뛰어난 글 솜씨 덕분에 측천무후에게 발탁되어 노비에서 면제되었다. 측천무후가 상관완아에게 "나를 원망하느냐??"고 묻자, 상관완아의 대답이 명답이었다.
이 말이 측천무후의 심기를 거슬렀지만, 상관완아의 재주를 아까워한 측천무후는 그녀를 죽이지 않고 대신 얼굴에 먹으로 글자를 새기는 형벌을 내렸다. 그래도 상관완아의 얼굴이 손상되는 걸 꺼린 측천무후는, 형리에게 최대한 작게 글자를 새기라고 명령해서, 조금만 떨어져서 보면 점처럼 보였다고 한다. 글자가 아니고 매화였고, 이 모양이 아름답게 보여 이 문양을 본떠서 화장한 것이 유행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부 야사에서는 상관완아가 측천무후의 남색 후궁인 장창종과 눈이 맞아서 썸을 타다가 발각되어서 금장도 혹은 비녀에 이마를 긁혀 흉터가 남았고, 그걸 가리기 위해 매화를 그린 게 유행을 탔다는 설도 있다.원망하면 불충이 되고, 원망하지 않으면 불효가 됩니다.
상관완아는 언변이 뛰어나고, 지혜롭고, 글을 잘 지었고 관리들의 일을 잘 익혔으며, 측천무후의 총애를 받아 698년부터 많은 관원들의 표문과 상주문은 대부분 그녀를 통해 결정하도록 하면서 내사인(內舍人)이라 불렸다. 측천무후가 즉위하자 제서, 명령을 맡아 관장했다가 측천무후가 더욱 맡기면서 벼슬을 주었고 궁중 안에서 권세를 휘둘러 건괵재상(巾幗宰相)이라 불렸다.[1]
측천무후의 아들 당중종이 복위하고 당중종의 후궁이 되어 정치에 관여했다. 710년 당중종이 죽자[2] , 그의 아내 위황후는 황제로 즉위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막내딸 안락공주를 황태녀에 책봉하려 하였다. 상관완아는 측천무후의 딸 태평공주와 함께 이를 견제했으며, 당현종의 정변을 지지하여 궁궐 내부에서 당현종에게 협력했다. 그러나 위황후와 안락공주 모녀를 제거할 때 궁궐로 쳐들어온 병사들에게 오인되어 살해당했다.[3] 측천무후 시기의 정치사와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대 재녀의 아까운 죽음이었다.
3. 대중매체
중국사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특이한 개성을 가진 인물이라[4] 측천무후 시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는 약방의 감초격으로 등장이 많다. 측천무후가 주인공일 경우 100% 상관완아 본인이 등장하고, 측천무후가 주인공이 아니라도 그 시대가 배경일 경우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관복차림의 남장을 하고 등장하면 상관완아 본인이거나 아니면 상관완아를 모델로 창작한 캐릭터다.[5]
[1] 건괵(巾幗)은 원래 여인의 머리덮개나 모자를 말했는데 여기서 여성이라는 의미가 파생되어 나왔다.[2] 위황후와 안락공주가 독살했다고 전해진다.[3] 오인에 의한 죽음이라는 게 정설이지만, 여자가 정치에 간섭하는 것을 꺼린 당현종 본인 혹은 측근의 의도적 살인이라는 설도 있긴 있다. 다만 이 설은 당시의 정치 상황에 따른 추측일 뿐이고 사료에는 분명히 오인에 의한 죽음으로 기록되어 있다.[4] 기나긴 중국/역사에서 여성이 황후나 후궁, 공주가 아니라 관료로 그 개성을 드러낸 경우가 상관완아 빼고 누가 있는 지 생각해보라.[5] 영화 <적인걸: 측천무후의 비밀>에서는 상관완아를 모티브로 한 상관정아(리빙빙 분)란 인물이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