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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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중종의 계후(繼后)로 의덕태자(이중윤, 당중종의 장남.), 장녕공주(당중종의 4녀), 영태공주(이선혜, 당중종의 7녀), 안락공주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다만 폐위되어 폐황후 내지 서인으로 불려서 시호가 없고, 보통은 그냥 위황후로 불린다.
능력은 없으면서 시어머니 측천무후의 흉내를 내려다가 몰락한 인물.
2. 생애
2.1. 신분 상승과 초고속 광탈
본래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궁녀로 입궁하여 당시 영왕(英王)이었던 중종 이현의 총애를 받아 그의 후궁이 되었다. 그런데 이현의 정실인 영왕비 조씨가 시어머니인 측천무후의 미움을 받아 감옥에 갇혀 굶어죽자 위씨가 새 영왕비가 되었다. 그 후로 680년에 남편이 황태자가 되자 황태자비, 그리고 683년, 당고종이 죽고 중종이 황위에 오르자 황후가 된다.
위씨는 중종에게 자신의 친정 가문을 좀 일으켜 세워 달라고 계속 청탁을 넣었다. 중종은 이에 위씨의 친정아버지 위현정을 참군(종8품)에서 예주자사(정4품)로 승진시켰으나, 계속된 위씨의 수작으로 결국 시중(정2품)에 내정했다.
아무 공도 없이 단지 황후의 아버지란 이유로 초고속으로 재상에 앉히는 말도 안 되는 미친 짓을 황제가 강행하자 다른 재상들과 대신들은 벌떼같이 일어나 중종에게 따지지만 중종은 아래의 명언으로 재상들을 데꿀멍시켰다.
내버려뒀다면 당나라는 국가 막장 테크를 밟았겠지만, 황태후로서 실권을 갖고 있던 측천무후는 정신 나간 며느리와 얼뜨기 아들의 촌극을 방치하지 않았다. 측천무후는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중종의 황관과 곤룡포, 신발, 옥새 등을 다 빼앗은 다음 여릉군왕으로 강등시키고 옥좌에서 끌어내렸으며 위황후 역시 여릉왕비로 내쳐 방주로 유배보냈다. 친정을 일으켜 보겠다고 남편을 꼬드긴 결과는 결국 폐위였으니, 위씨 스스로 아무 생각 없이 바보짓을 하다가 자신과 남편의 신세를 망친 것이다. 위씨는 그 검열삭제의 결과로 유배 가는 도중 안락공주를 낳았는데, 비단보자기가 없어서 낡은 천으로 아이를 감쌌다고 한다."짐이 천하를 위현정에게 준다 하더라도 불가하다 할 건가? 시중이란 자리가 그리도 중요하단 말인가?"
「我就算把整個天下讓給韋玄貞,又有何不可?!難道就稀罕一個侍中的職位?!」
15년 동안의 방주 생활 동안 위씨는 남편을 길들이는데, 그녀는 언젠가 돌아가면 자기가 시어머니와 똑같이 천하를 호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일화로는 어머니 측천무후의 위세에 눌리고 인생퇴갤했다 생각한 중종이 자살을 시도하자 위씨가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지, 벌써 죽어버리게"라고 하여 중종이 칼을 내려놓았다고 한다. 덕분에 중종은 더더욱 위씨에게 의존하게 되었다고.
중종은 점점 무능해졌고, 위씨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궁녀 때 궁중에서 시아버지 당고종을 철저히 주무르던 시어머니 측천무후를 보며, 위황후는 고종과 다를 바 없던 중종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더군다나 측천무후는 690년 당나라를 없애버리고 주나라#s-2.4를 세워 측천황제로 즉위했다.
한편, 딸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몰락한 위현정은 유배지에서 낙심하다가 죽었다. 이후 산적 두목이 위씨의 여동생과 결혼하고 싶다고 하자 위씨와 위씨의 어머니 최씨는 강력히 반대하였는데, 두목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위씨의 오빠 4명을 밤중에 습격해서 암살해버린다.
2.2. 재기, 막장, 그리고 간통
당시 당나라에서 이름만 바꿨을 뿐인 주나라는 성신황제(측천무후)가 다스리고 전 황제인 이단, 즉 예종이 황태자로 격하되어 있었으나 어머니인 황제가 워낙 경계하느라 동궁에 쳐박혀 있었다. 더군다나 황태자 자리를 놓고 벌인 조카 무승사와 무삼사 간의 '''개념없는''' 다툼[1] 이 심화되자, 개념도 능력도 없이 권력만 추구하는 얼간이둘의 싸움에 질린 성신황제는 여릉왕, 즉 중종 일가를 불러들여 699년, 그를 다시 태자로 삼고 예종 이단은 상왕으로 삼았다.
이것은 위씨의 로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위씨는 시누이인 태평공주에게 유배에서 풀어달라며 편지와 패물 등을 보냈고, 태평공주가 당시 최고의 재상 적인걸과 합심하여 "여릉왕 가족을 유배에서 풀어달라"고 청하자 황제가 응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태자비에 다시 오른 위씨는 이제 다시는 폐위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정계 쪽의 실력자들과 연줄을 만들고 시어머니인 황제에겐 태자 좀 잘 봐달라며 립서비스까지 부탁한다. 이때 자신의 딸들을 각기 무승사와 무삼사의 아들들에게 시집보냈다. 특히 여기서부터 무삼사랑 친해져서 불륜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705년, 황제가 늙자 일부 구 대신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그녀를 퇴위시켰다. 측천무후는 황위를 태자에게 물려주니 중종이 다시 복위하고, 얼마 안 가 무후는 사망했다. 다시 황후로 복귀한 위씨는 정신줄을 완전히 놓은 상태로 이 상황에서 아주 제2의 측천무후가 되겠다며 수렴을 내리고 정사를 들었지만, 여자가 싫어 중종을 앉힌 구대신들은 진저리를 쳤다. 대신들은 "여자가 한 번 나라를 다스렸으면 족하지, 그보다도 훨씬 못한 여자가 다시 한 번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며 정변을 일으켰지만, 무삼사의 도움으로 손쉽게 제압하고 대신들을 숙청한다. 이 과정에서 죽은 자신의 아버지 위현정을 상낙군왕에 추존하고 어머니 역시 상낙왕비에 추존하는 등, 시어머니 측천무후가 하던 짓을 그대로 오마쥬하면서 한미한 자신의 친정을 명문가로 위장하여 있는대로 과시했다. 당연하지만 측천무후 정도의 능력과 안목이 없이 권력욕에 취해 겉만 따라한 행동이었다.
이제 대놓고 무삼사와 간통질을 했다. 이와 관련된 일화로는, 위씨와 무삼사가 검열삭제 직전까지 갈 때 중종이 중궁전으로 온다고 하자 옷을 주섬주섬 입고(...) 바둑 두는 척하면서 몰래 손을 만지며 정분을 나눴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정부 무삼사의 며느리가 된 딸 안락공주와 은밀히 도모하여 안락공주를 황태녀로 만들려고 했으나, 중종의 엄청난 반대로 실패하였다. 이로 인하여 안락공주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증오로 바뀌었으며, 위씨 또한 능력 있는 딸을 무시하고 남존여비 꼴통사상에 빠져 있다 하여 역시 남편을 증오하면서 오히려 무삼사랑 더 정분이 났다. 참고로 안락공주는 남편인 무삼사의 장남이 맘에 안 들자 남동생인 무삼사의 차남과도 간통하였다.
이후에 무삼사가 간통을 벌이는 것을 혐오하던 황태자 이중준은 이다조 등의 장군들과 짜고 무삼사를 처단했다. 하지만 위씨는 중종에게 "태자가 함부로 국가의 재상(?)을 죽였으니 이 역시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중종은 반대했으나 위씨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태자였던 이중준을 죽여버렸다. 이중준은 위황후 사후에야 삼촌인 예종에 의해 '''절민태자(節愍太子)'''라는 시호를 받게 된다.
2.3. 안습한 최후
위씨가 간통을 하고 태자를 죽이자 이로 인해 중종은 그녀를 불신하며 종친들과 대신들의 요청으로 위씨의 정치간섭을 막은다음 위씨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려 하지 않게 된다. 그러자 격분한 위씨는 결국 안락공주와 야합하여 자기는 황제, 딸은 황태녀가 되기로 하고 중종에게 독이 든 떡을 먹여 독살했다.[2][3]
이후엔 직접 황위에 오르려 하나 황제인 측천무후가 쿠데타로 물러난 선례도 있고 직접 황위에 오르기에는 시기상조란 판단도 있어서, 맘을 바꾸고 당중종의 4남 이중무를 꼭두각시로 황위에 앉히고 황태후 노릇을 하려 했지만 위씨가 황제를 독살한것이 사실로 밝혀진 데다 그것을 두고 볼 정적들이 아니었다. 이에 위황후는 정적들 중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시숙 당예종(당시엔 안국상황)과 시누이 태평공주를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을 눈치챈 당예종의 아들 이융기(후의 당현종)는 역으로 위씨를 증오하는 신하들과 고모인 태평공주와 손을 잡고 정변을 일으켰다. 이때 위씨를 치는 명분은 '위씨가 선황을 시해하고 자신의 친족을 이용하여 금군을 장악한후 종친들을 몰아내 황위에 즉위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사태가 너무 급박하게 전개된 까닭에, 안락공주는 눈썹을 그리고 있다가 반란군이 쳐들어오자 반란군인 줄도 모르고 "눈썹 비뚤어진다"고 군인들에게 호통을 치다가 목이 잘리는 끔살을 당했다. 모녀의 시체는 갈기갈기 찢기고 머리는 참수되어 장안 저자거리에 효수되었으며 황후와 공주 자리에서 모두 폐위당해 대역무도죄인, 패역서인이라 불리며 당나라 내내 조롱받았다. 또 상관완아와 장녕공주도 이에 관련되어 죽음을 당했다. 다만 상관완아는 쿠데타 세력의 궁궐 내 협력자였는데, 이 사실을 몰랐던 쿠데타 측 군인이 마주치자마자 다짜고짜 죽여버려서 제일 억울한 희생자가 되었다.
3. 평가
위씨는 시어머니 측천무후에 비해 전반적인 면에서 능력이 크게 뒤떨어졌다. 어느 설을 채택하든 결국 살해당한 역사의 패자라는 점에서 정국 장악력은 결코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감각, 처세술 등 크게 부족한 능력에 비해서 욕심만 컸던 셈이다. 측천무후는 항목에 설명돼있듯이 악행에 대해 논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4] 훗날 손자 당현종이 이룩한 "개원의 치"라는 당나라 전성기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도 받을 만큼 통치력 자체는 괜찮았으나 위황후는 이러한 능력도 전혀 드러난 바 없다. 무엇보다 남편도 살아있는 상황에서 대놓고 간통을 펴고 태자를 죽이면서 남편과의 관계를 스스로 파탄냈고 그녀를 싫어하게 된 남편이 친정에 나서자 오히려 앙심을 품고는 딸과 함께 남편을 독살하여 정적들의 반격 명분을 자발적으로 갖다 바치고 말았다.
사실 측천무후는 수많은 남첩을 두었지만 그것은 남편 당고종의 사망 이후에 일어난 일이었고,[5] 당고종 생전시에는 신하들에게 '성격은 좀 강해도 현명하고 믿을 만한 황후마마'로 칭송받았다. 그리고 직접 당고종의 병수발을 행하고 자신은 어디까지나 황제의 아내라는 것을 수없이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이 황제의 아내인 황후이기 때문에 생겼다는 것을 망각하지 않는 탁월한 정치감각을 보여주었다. 측천무후가 고종의 아내라는 타이틀을 떼고 자신의 생각대로 정치를 행한 것은 황제 즉위 후에도 몇 년이 지난 뒤로 통치기간 말기에 해당한다. 게다가 그 시기에 이르러서도 정부(情夫)가 대놓고 멍청한 짓을 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6] 그런데 위황후는 측천무후가 모든 권력을 장악한 말기 시절에야 조심스럽게 행한 짓들을 황후 위치에 있을 때부터 대놓고 행하는 전혀 신중치 못한 행동을 보여줬다. 그러니 그런 그녀에게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더 많았을 것이고 그녀의 죽음은 어찌보면 예견되었던 일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권력장악 능력도 시어머니 측천무후에 비하면 아주 바보가 따로 없다. 측천무후는 권력을 장악할 때 수단은 냉혹했어도 정적들을 상황을 보면서 교묘하게 명분을 잡으면서 세력을 축소시킨 다음 숙청하였는데 위황후는 정적들이 건재했었는데도 상황을 보면서 그들의 세력을 위축시키려하지 않고 오히려 나는 황제를 독살한 대역죄인이니 날 잡아 잡수쇼하고 정적들에게 공격할 명분만 만들어주고 노골적인 자살골만 넣었다.
4. 둘러보기
[1] 측천무후는 자신의 자식에게 제위를 물려줄 생각이었다. 게다가 이단은 결격사유도 없었다.[2] 중종도 안습이지만 이 이야기는 조선의 문정왕후와 인종과의 관계와도 비슷하다. 차이점이라면 중종의 독살은 정사에 기록된 사실이고, 인종의 독살은 야사에 불과하다는 점.[3] 다만 중종도 독살이 아닌 중풍으로 죽은거 아니냐는 설도 있긴 하다. 독살설은 후에 위황후, 안락공주 등을 처단하고 즉위한 당현종이 이들을 매도하기 위해 내세운 근거 아니냐는 것. 다만 어떤 사료에 근거한 주장은 아니고 정황에 의한 추측일 뿐이다. 정사인 구당서나 신당서 모두 안락공주가 떡을 먹여 아버지 중종을 시해했다고 적혀있다.[4] 그녀가 행했다는 다수의 악행이 사료간의 교차 검증이 안 된다.[5] 더욱이 황제가 된 이후에도 남첩들의 단속에 신경을 썼다.[6] 수당가화에 실린 일화에 따르면, 측천무후의 정부로 총애를 믿고 황족들 앞에서도 거만하게 굴던 설회의(薛懷義)가 하루는 조정의 남문으로 들어오다 복야(僕射, 재상)인 소량사(蘇良嗣)와 마주치고도 인사도 안 하고 지나치자, 빡친 소량사가 "너 뭐하는 놈이야?" 하고는 설회의를 잡아다 따귀를 쳤다. 설회의는 측천무후에게 달려가 울고불고 다 일러바쳤지만 측천무후는 오히려 "그러게 다른 신하들 눈에 안 띄게 북문으로 들어오라니까, 왜 신하들도 많이 오가는 남문으로 들어와서 안 맞아도 될 매를 버냐?" 하면서 소량사를 벌하지 않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