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지오 2세
- 생몰년: 795년 ~ 847년 1월 24일
- 재위기간: 844년 1월 ~ 847년 1월 24일
당시 교황은 로마 헌장에 따라 프랑크 황제의 승인을 받아 선출되어야 했지만, 세르지오 2세는 급하게 선출되었기에 이러한 절차를 거치지 못했고, 황제 로타리우스 1세는 이를 문제 삼았다. 로타리우스 1세는 아들 루도비코(훗날 루도비코 2세)로 하여금 로마로 군을 이끌고 가게 한다. 세르지오 2세는 로마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루도비코 2세를 맞이하고, 일련의 사태들에 대해 조율을 하게 된다. 결론은 교황이 루도비코 2세가 이탈리아 왕국의 국왕[2] 으로서 즉위하는 대관식을 거행하면 황제에 승인 없이 교황으로 선출되어 착좌한 것을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차후의 교황 선출은 황제가 보낸 특사 앞에서 진행해야 한다는 칙령을 반포해야 했다. 이러한 조율에 따라 844년 6월 15일 세르지오 2세는 루도비코 2세를 이탈리아 왕국의 국왕으로 대관하였다. 한 발 더 나아가 로마 시민은 루도비코 2세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으나 이 요구만큼은 세르지오 2세와 주교들의 적극적인 반대로 관철되지 못했다.[3]
세르지오 2세는 어렵게 교황의 자리를 굳혔지만, 말년에는 사라센의 침입으로 또 한 번 풍파를 겪어야 했다. 사라센은 이미 북아프리카를 점령하고 있었고 시칠리아에서 비록 격퇴 되었으나 언제든 남이탈리아를 쳐들어 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사라센의 침입을 예견할 수 있었으나 세르지오 2세는 사라센족의 침략을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였고[4] , 846년 8월 23일에 침입을 받아 여러 성당이 파괴당하고, 사도들의 무덤이 파헤쳐 졌다. 로타리우스 1세는 아들 루도비코 2세에게 군대를 주어 로마를 지키고, 사라센의 침입을 격퇴하게 했다. 루도비코 2세는 사라센 세력을 남부 이탈리아로 몰아내었으나 완전히 뿌리뽑지는 못했다.
사라센의 침입으로부터 5개월 후인 847년 1월 24일 세르지오 2세는 로마에서 사망하였고, 이후 혼란의 수습은 후임자 레오 4세에게 맡겨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