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만갑

 


1. 소개
2. 생애
3. 예술세계
4. 대중매체에서


1. 소개


'''“극창가(劇唱家)는 주단 포목상과 같이 비단을 요구하는 사람에게는 비단을 주고, 무명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무명을 주어야 한다”'''
근대 5명창[1] 중 한 사람으로 선대인 송흥록(宋興祿), 송광록(宋光祿), 송우룡(宋雨龍)으로 이어진 동편제 송씨 가문의 소리 법통을 토대로 서편제 명창이었던 정창업(丁昌業, 1847년~1889년)의 소릿제를 접목시켜 동편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인물. 위의 발언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한 말로 이 때문에 선배 동편제 명창이었던 박기홍(朴基洪, ?~?), 전도성(全道成, 1864년~?) 등에게 '''"송문의 소리를 통속화 시켰다."'''는 비난을 듣기도 하였다.

2. 생애


전라남도 구례에서 태어났다.[2][3] 본관은 여산으로 그의 제적등본 윗면에 '무(巫)'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세습 무업가문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4]
<송만갑 가계도>
송흥록
송광록-송우룡-송만갑-송기덕
그의 큰할아버지 송흥록은 가왕(歌王)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대단한 명창이었다.[5] 그가 명창으로 이름을 얻은 이래 그 동생인 송광록 역시 형을 따라 고수 노릇을 하다가 명창이 되었으며, 아버지 송우룡 역시 명창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 역시 부친에게 7살 때부터 소리를 배웠다고 한다.[6] 어려서부터 명창의 자질을 갖추어 13세 때에는 이미 소년명창으로 이름을 얻었다. 후일 서편제 명창이었던 정창업의 소릿제를 참고하여 계면조를 수용하고 또 서울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경서도 토리 특유의 경드름제[7]를 받아들이는 등 동편제의 소리 지향을 넓히는데 힘썼다. 이 때문에 선배 명창이었던 박기홍은 물론, 동시대의 전도성, 아버지 송우룡에게까지 송씨 가문의 소리를 망친 '''패려자식''' 소리를 들어야 했으며, 그로 인해 가문의 족보에서도 할명 당했다느니 아버지 송우룡에게 독살을 당할 뻔 했다느니 하는 전설이 유명하다.
30대 후반부터 서울에 머무르면서 최초의 서양식 극장이었던 원각사(圓覺社)[8] 무대에 자주 섰으며, 이때 '어전광대' 노릇을 해 감찰 벼슬에 제수 받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를 '송감찰'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거나 그의 소릿제를 '감찰제'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9] 60대 이후에는 김창룡, 이동백, 정정렬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의 일원으로 참여하였고, 협률사를 조직해 공연활동에 나서기도 하면서 판소리 뿐만 아니라 창극 운동에도 주력했다. 1906년~1907년부터 음반을 취입[10]하기 시작하여 많은 녹음을 남겼는데 현재 유명한 것으로는 단가인 진국명산(Victor Junior KJ1001-A), 흥보가 박타령(Columbia 40219-A), 적벽가 조조금무가(닛뽀노홍 K202-A)[11], 춘향가 십장가(Columbia 40145-B)[12], 적벽가 적벽원조사(닛뽀노홍 K188-B)[13], 춘향가 농부가(Victor Record 13536 Korean Male Song With Drum)[14] 등이 유명하다.
1939년, 왕십리에서 별세했으며, 아들 송기덕 역시 어려서 그와 함께 음반을 취입하는 등 소년 명창 대우를 받았으나 후일 고등계 형사 노릇을 하다 죽었다.

3. 예술세계


송만갑의 음색은 거친 수리성에 단단한 철성이라는 평을 받는다. 그만큼 통성으로 전력을 다해 내지르는 면모가 보이며. 여기에 상청의 음역을 중심으로 소리를 구사하는 것이 특징이다.[15] 소리를 구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현대식으로 이야기 하면 키가 남들보다 높은데다 최고음에 해당하는 시상청마저도 통성을 주로 쓴다는 점에서 동시기에 역시 고음으로 유명했던 이동백(李東伯, 1897년~1949년)과는 차이가 있다.[16] 또 저음에서 시작해 급작스레 고음으로 뛰어 오르는 음의 변화는 그의 장기 중 하나로 꼽혔다.

그의 장기 중 하나인 적벽가 새타령. 그의 나이 49세 때의 녹음이다. 57초 부분부터 간간히 나오기 시작하는 새소리를 들어보자.
다섯 바탕 소리를 두루 잘한 것으로 유명한데, 《심청가》의 경우 본래 그의 대표적인 레퍼토리중 하나였으나 중년에 상처(喪妻)한 이후 아내 생각으로 부르지 못하고 그 대신 《흥보가》를 불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꽤나 애처가였던 듯. 디스코그라피 역시 다섯바탕이 두루 포함되어 있는데, 그 중 상대적으로 비중이 높은 것은 《춘향가》와 《적벽가》, 《흥보가》이며 《심청가》, 《수궁가》는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다. 현재 그의 소릿제로 전해지는 것이 《적벽가》[17], 《흥보가》[18], 《수궁가》[19]라는 것을 생각하면 의외의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심청가는 중년 이전 송만갑의 대표적인 레퍼토리였던 것에 비해 그의 녹음 이외에는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어 동편제 심청가 자체의 맥이 완전히 끊어졌다는 점에서 아쉽다.[20] 반면 춘향가의 경우 박봉술 사후 잊혀져 있다가 그가 남긴 음원이 국악학자 이보형 등에 의해 세상에 소개되면서 그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고, 현재는 박봉술에게서 한 때 소리를 배운 전인삼이 자주 부르고 있다.[21]
조선성악연구회에 참여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길렀는데 장판개, 박중근, 감정문 등은 그 가운데 선배 그룹으로 꼽힌다. 특히 장판개의 경우에는 송만갑의 소릿제를 비교적 충실이 구사한 것으로 유명한데 송만갑이 자주 불렀다는 단가 진국명산을 녹음한 바가 있어 서로 비교가 가능하다. 그 외에 박녹주 역시 비교적 송만갑의 소릿제를 잘 구사한 명창으로 이름이 높다. 박녹주는 당시 정정렬이나 이동백 등에게도 소리를 배우는 등 조선성악연구회 활동에 매우 활발히 참여하고 있었으며, 성음 자체가 남성적이어서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창극 녹음에서 남자를 맡은 적도 있다.[22] 그 외에 박봉술, 강도근 역시 송만갑에게서 소리를 배웠고, 박동진이나 김소희 역시 송만갑에게서 배운 바 있다.[23]
이 가운데 박녹주, 박봉술, 강도근은 모두 송만갑제 소리로 중요무형문화재(現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박녹주는 이들 가운데 키가 조금 낮은 편이지만 장단을 구사하는 방식이 송만갑의 소릿제를 충실히 구사하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박봉술은 상청을 중심으로 하는 소리 구사, 강도근은 철성을 위주로 구사하는 창법 등이 송만갑의 소릿제와 닮아 있다고 한다. 특히 강도근은 송만갑이 시상청의 고음에서도 통성을 고수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고음을 구사하고 있다. 박봉술이 일찍 목이 망가지면서 가성을 섞은 희성으로 소리하는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부분.[24]

4. 대중매체에서


판소리 공연 자체 이외에 다른 대중매체에서 소비되는 부분이 없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의외로 송만갑의 경우에는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단막극이 제작된 바 있다. 1986년 KBS에서 방송한 김종엽 주연의 《초혼가》가 그것. 김종엽은 현재 마당놀이로 유명한 배우로 박동진의 문하에서 소리를 배우기도 한 인물이로 당연히 송만갑을 맡아서 직접 소리를 보여주기도 한다.[25][26] 당시 KBS 사극에서 자주 얼굴을 비추던 안대용, 안병경, 김성겸 등이 당대의 명창들로 출연하는데 이 중에 소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김종엽 뿐이다.(...) 안병경이 판소리를 조금 할 줄 안다고는 하지만 그 외의 배우들은 그렇지 않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것. 여기서 송만갑의 아버지 송우룡 역할로는 이순재가 열연했는데 역시 판소리하는 모습을 보여주진 않는다.[27]
[1] 중고제의 김창룡, 이동백, 동편제의 송만갑, 서편제의 김창환, 정정렬 등을 말하며, 동시기의 유성준, 이선유 등을 포함시키기도 한다.[2] 송만갑의 출신지에 대해서는 전라남도 순천이라는 설과 전라남도 구례라는 설이 대립 중에 있다. 여기서는 우선 대다수의 백과사전류에서 취하고 있는 통설에 따른다.[3] 그 외의 소수설로 전라북도 남원, 경상남도 진주라는 설이 있다.[4] 《한국전통연희사전》[5] 《춘향가》 가운데 옥중가의 귀곡성이 송흥록의 더늠이라고 한다. 그가 진주성 촉석루에서 이 대목을 소리하자 갑자기 바람이 불고 구름이 몰려오는 조화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현상을 전설로 달고 내려 오는 것은 서편제 명창인 이날치가 새타령을 부르자 새가 날아 들었다고 하는 설화와 더불어 유이한 사례로 꼽힌다.[6] 그 자신은 주덕기의 제자인 박만순에게 10여년 동안 소리를 배웠다고 하였다. 《한겨례음악대사전》[7] 경조, 경제, 경토리라고도 한다. 경쾌하고 건들거리는 리듬으로 짜인 창제를 말한다.[8] 지금의 새문안교회 자리에 있었다.[9] 원각사 폐쇄 뒤에는 궁내부 별순검 직을 3개월 정도 역임했다고 한다.[10] 이 시기의 녹음은 저 유명한 헐버트에 의해서 주선된 것이었다. 자세한 것은 배연형·석지훈, 「20세기 초 유성기음반 녹음 연구 - 1906년 녹음 미국 콜럼비아와 빅터 레코드를 중심으로」, 『한국음악연구』 58, 한국국악학회, 2015 참조.[11] 현재 송판 적벽가에서 '이놈 저놈 다듣거라'하는 중중몰이 장단의 대목이다.[12] 정확히는 십장가 바로 뒷대목인 '남원 오입쟁이' 사설이다.[13] 원판에는 '적벽원조자'로 되어 있다. 아마 '적벽원조가'이거나 '적벽원조사'의 오자일 가능성이 높다. 일반적으로 '적벽가 새타령'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14] 이 녹음이 그의 최초 녹음 중 하나로 보인다. 《한국전통연희사전》[15] 시상청까지도 가성이 아닌 통성을 구사하는 것을 '외장목'이라고 한다.(전인삼)[16] 두 사람은 당대에도 여러모로 라이벌로 꼽혔던 듯 싶다. 그들 자신도 서로를 라이벌로 인식했는지 만나면 고음 대결을 펼치기도 했다고.(...)[17] 박봉래를 거쳐 그 동생 박봉술에게로 이어진 바디로 현재까지도 가장 대표적인 적벽가 바디로 손꼽히고 있다.[18] 3가지 버전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박봉술에게로 이어진 갈래가 있고, 김정문을 거쳐 박녹주에게 이어진 갈래가 있으며, 역시 김정문을 거쳐 강도근에게 이어진 갈래가 있다. 이 가운데 박녹주와 강도근이 보유한 사설은 대동소이하고, 박봉술이 보유한 사설은 다소 차이가 있다.[19] 박봉술을 거쳐 현재는 송순섭에게 이어지고 있다.[20] 김연수는 자신이 새로 짠 심청가가 동편제라고는 했지만 확실하지 않다. 무엇보다 김연수가 짠 심청가는 동편제라기 보다 신재효본과 강산제 심청가와 더 유사하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떨어진다.[21] 단, 박봉술의 춘향가가 얼마나 송만갑의 그것과 근접해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으로 어사 출도 대목 같은 경우에는 정정렬제로 대체되어 있기도 하고, 송만갑의 녹음과 비교해 상이한 부분도 제법 발견되기 때문이다.[22] 정정렬이 도창해 녹음한 빅터 판 창극 춘향전이 바로 그것이다. 본래 이 녹음에서 이몽룡 역은 임방울이 맡고 있었으나, 당시 김소희와 함께 정정렬에게서 소리를 배우고 있었던 박녹주가 이별가 대목에서는 이몽룡 역을 맡고 있다.[23] 단, 박동진의 경우에는 단가 진국명산과 몇몇 토막소리를 위주로 배웠다고 한다. 김소희의 경우에는 당시 박녹주와 함께 조선성악연구회 활동에 활발히 참여 하고 있었으므로 상대적으로 영향을 더 많이 받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 자신이 송만갑의 십장가를 듣고 매료되었다고 누차 이야기 하기도 했고.[24] 사실 박봉술은 장단의 부침새를 다양하게 준다는 점에서 송만갑의 그것과 또한 차이가 있다.[25] 일반 배우들 가운데 판소리를 가장 제대로 구사하는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그 외에 김성환, 안병경 등도 판소리를 제대로 구사하고 있으며, 서편제로 유명한 김명곤 역시 마찬가지. 애초에 김명곤은 창작판소리를 발표하기도 했던 인물이다.[26] 김종엽은 2000년대에도 판소리 명창 역할로 KBS 단막극에 출연한바 있다.[27] 애초에 이순재는 방송에서 노래하는 모습도 제대로 보여준 적이 별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