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진(국악인)

 


[image]

朴東鎭
1916년 7월 12일2003년 7월 8일
1. 생애
2. 국악계의 영향


1. 생애


대한민국판소리 명창이었다. 충청남도 공주군(현 공주시) 장기면[1] 출신의 판소리 명창이다. 호는 인당(忍堂)이다. 종교는 본래 무종교였으나 나중에 개신교(한국기독교장로회)에 귀의하였다.
1962년 국립국악원 국악사보가 되었고, 1968년, 국악원장 성경린(成慶麟, 1911년~2008년)의 주선과 당시 각종 창극단에서 악사로 활동하던 한일섭(韓一燮, 1929년~1973년)의 공조로 판소리 《흥보가》의 5시간 완창 발표를 가졌다. 이 발표회는 UN군 사령부 방송 VUNC를 통해 방송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것을 기점으로 1969년 《춘향가》 8시간, 1970년 《심청가》 6시간, 1971년 《적벽가》 5시간,《수궁가》 4시간의 완창 발표를 연달아 진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1970년 《변강쇠타령》, 1972년 《배비장타령》, 《숙영낭자전》, 《옹고집타령》등을 복원, 완창 발표를 가졌고,《성웅 이순신》, 《성서 판소리》등 새 판소리를 작창하는 등 소리꾼으로서 전면적인 활동에 나섰다.
특히 《적벽가》의 완창 능력을 인정받아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또한 같은 해 국립창극단의 단장에 취임하는 등 판소리계 중진 인사로 활약하기 시작하여 90년대까지 연 1회 이상의 연창회를 가졌다. 판소리계에서 소리꾼의 능력을 보여주는 완창 발표회라는 걸 국내에서 정착시킨 게 바로 이 사람이다.
1980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고, 1981년에 미국 일주 공연에 참가하였으며, 1982년에는 미국에서 《성서 판소리》를 발표하였다. 1985년 국립국악원 판소리 원로사범에 임명되었고, 1987년 국립국악원 지도위원이 되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후진 양성에 힘쓰기 위해 고향 공주로 내려와 전수관을 개관하는 한편, 여전히 공연 활동을 활발히 펼쳤고,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완창과 장시간 연창을 감행하는 등 정렬적으로 활동하였다.
2003년 공주 전수관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안타깝게도 87세 생일이 겨우 4일 앞이었다.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공주시에서는 매년 그를 기리는 추모 음악회를 열고 있다.

2. 국악계의 영향


고음과 저음이 두루 잘 나와서 소리 능력도 좋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재담과 육담의 대가였다. 서슬퍼런 5공 시절, 정부 행사에 초청을 받아 소리를 하러 갔는데, 그 자리에 당시 대통령 '''전두환'''이 와 있었다.
그때 사회를 보던 김동건 아나운서가 "영감님이 소리도 잘 하시지만 욕도 아주 잘 하신다던데, 한번 들려주십시오."라고 하자, 대통령 칭찬을 즉석에서 하더니 대뜸 대통령을 지목하며 "''저기 저 머리 벗겨진 놈'''' 이라면서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다는 둥, 수상쩍은 구린내를 폴폴 풍겨댄다는 둥 하며 욕을 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를 들은 전두환은 그 욕을 듣고 가만히 있다가 파안대소를 했다고 하며, 덕분에 마음 졸이던 청중들은 마음을 놓게 되었다고 한다.[2]
여하간, 그 걸죽한 재담과 육담은 그의 기가 막힌 즉흥성과 예능감(?)에서 나왔는데, 때문에 SBS의 코미디전망대에 고정 조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여하간, 이러한 예능감으로 인해 판소리가 사장길에 접어들었다고 하던 7~80년대에도 이 분의 무대에는 관객들이 제법 많이 들어찼다. 그러나 이 분이 만년에까지 명성을 떨치게 되었던 것은 위의 우황청심원 CF에서 흥보가를 부르면서였다.
흥보가에서 놀부가 흥부가 부자가 된 연유를 듣고 제비 다리를 분지르러 가는 대목 '''"제비 몰러 나간다~ 제비 후리러 나간다~"''' 로 시작하여 '우리의 것은 소중한 것이여.'로 끝나는 CF였는데 당시 이 CF를 모르는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 이후에도 1990년대 중반까지 솔표 브랜드 의약품 전속모델로 나섰고, 2003년 사망 후 조선무약이 추모 광고를 신문에 실었다.
심지어 모 인간문화재가 그걸 따라한다고 같은 제약 회사의 광고를 찍었는데, 그 목소리가 갸냘퍼서(...) 성우를 썼다고 하는 후문. 이건 박동진 본인이 모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해 직접 했던 소리이기도 하고, 후속 광고 영상에서도 성우의 목소리로 더빙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재담과 재미를 중시하는 성향 때문에 국악계 내부에서는 아니리 광대[3]라고 폄하하거나, 계보 없는 소리라며 평가절하하기도 했지만 판소리가 사멸되다시피 한 시대에 판소리를 대중에 알린 공로는 독보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심지어, 그를 평가절하하면서 '계보있는 소리'를 추켜올리던 학자들마저도 그의 사후, 대중화에 대한 그의 공로와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하간 공연이 재밌으니 기회가 있다면 유투브 같은 곳에서 한 번 봐도 좋다. 생전의 공연 영상을 보면 걸쭉하고 신박한 재치에 본인도 모르게 웃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부르는 자리는 안 가리고, 또 공연 하는 것을 제자 양성보다 좋아하기로 유명했다. 이것 때문에 후진 양성에 소흘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고, 즉흥성이 짙어서 제자들이 배우기 어려워했더라는 후문이다. 그래서 제자가 적은 편이다. 몇 안되는 애제자 중에는 외국인 박칼린이 있었다. 박칼린을 제자로 삼은 것도 박칼린이 국악을 전공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어느 날 박칼린을 보고 불현듯 "자네는 소리를 해야 쓰겄네?"라면서 그녀를 제자로 삼았다고...
박칼린을 자기 후계자로 키우려 했지만 중요무형문화재 관련 법령에 외국인은 이수자나 전수자[4]가 될 수 없다는 규정때문에 아깝게 실패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 외에도 마당놀이로 유명한 배우 김종엽도 그에게서 소리를 배웠다.
이러한 이력 때문인지 김종엽은 국악인 역으로 TV 단막극에 출연한 예가 꽤 된다. 1986년작 '초혼가'와 2006년작 '노래여! 마지막 노래여!'가 대표적이다. 그 외에 1996년작 임꺽정에서도 광대패 모가비로 출연하여 소리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 외에 전업 국악인으로써 박동진의 후계자로 인정되는 이는 적벽가의 전수교육조교인 강정자와 김양숙 등 두 사람이 있다. 대외적으로는 박동진판소리전수관의 관장으로 있는 김양숙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한국문화재재단을 통해서 선보이는 문화재 전승 공개 공연에서는 강정자가 자주 서고 있다.
이 이야기가 지금 현재 국악방송의 박동진 소개 란에 명시 되어 있다.
박동진 판소리를 논할 때 또 하나의 재미있는 점은 바로 소리판에서의 걸쭉한 욕의 활용(?)이다. 어마어마한 욕들을 내뱉는데
단 한사람도 기분 나쁘게 듣지를 않으며 오히려 이게 박동진 판소리를 보는 또 하나의 매력이며 재미이다.
판소리는 필히 고수와 함께 하는 만큼 욕의 타겟이 고수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북 장단을 쉬는 아니리에서 고수를 쳐다보며
"손 뒀다가 어따 쓰냐 이 시러베 아들놈아, 옆에 물이나 좀 따라놔라. 이 똥물에 튀겨죽일놈아(...)"
소리 시작하기 전에, "너는 오늘 북을 제대로 못치믄 대구빡에 구멍이 뚤릴것이여"
이 밖에 유독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치는 사람에게 "저 염병할 놈이 또 또 지x병 하고 자빠졌다"
등..

[1] 장기면은 현재 세종특별자치시로 편입되어 장군면으로 변경되었다. 다만, 박동진의 출신지(무릉리)는 현재도 공주시에 무릉동으로 남아 있다.[2] 이 일화는 전두환 임기 말엽이다. 그때면 대통령의 힘이 전같지 못했을 때니 함부로 잡아 넣기 어려운 사정도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권위주의가 만연했던 80년대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감안하면 분명 엄청난 일이다.[3] 소리는 못하고 아니리만 할 줄 아는 광대라는 뜻이다. 그러나 박동진 그 자신은 스스로 '광대'를 자처하기도 하였고 아니리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인물이다. 그래서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자랑삼아 '광대'라고 자칭하고 다녔다.[4] 무형문화재 제도에서 보유자 및 전승자 체계는 기·예능보유자가 전승을 총괄하며, 그를 보조하는 전수교육조교 ('준문화재'라고 호칭되기도 한다.), 그들에게 교육을 받는 이수자와 전수자로 이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