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완구왈기야 싱포
'''ᠰᡠᠸᠠᠨ ᡤᡡᠸᠠᠯᡤᡳᠶᠠ ᠰᡞᠩ'''
'''蘇完瓜爾佳勝保'''(소완과이가 승보)
(1821~1863.8.31)
1. 개요
청나라의 군인이자 관료.
2. 과거 합격, 그리고 태평천국 운동
싱포는 1840년 과거를 통해 거인이 되었고[1] 순천부교수, 좌찬선, 국자감제주, 한림원 학사를 역임했다. 뭔가에 대해 계속 반복해서 말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1853년 강북대영의 건설을 맡는 군무대신이 되었으며 태평천국의 북벌을 격퇴했다. 같은 해 그는 흠차대신에 임명된다. 그러나 고당 공격 실패로 흠차대신에서 해임되고 신강성으로 유배되었다. 1856년 싱포는 복권되어 허난성의 군무를 맡아 적군을 무찌르기 위해 화베이성으로 갔다. 8년 동안 그는 염군의 장수인 이소수와 묘패림을 전향시켰다. 그러나 내란 진압에서 별다른 군공을 세우지 못하여 1860년 베이징으로 소환되어 광록시경으로 좌천되었다. 2차 아편전쟁으로 영불연합군이 들이닥치고 조정은 보르지기트 셍게린첸을 도와 싱포를 퉁저우의 팔리교 전투에 참전시킨다. 그러나 청군은 참패하고 승보는 포탄 파편에 부상을 입는다. 이듬해 싱포는 병부시랑 겸 흠차대신으로 승진한다. 그리고 신유정변에서 동태후, 서태후, 공친왕을 지원했다. 그 후 산동성으로 가서 송경시의 흑기군을 매수한다.[2]
1862년, 묘패림이 태평천국의 진옥성을 생포했다. 이듬해 싱포는 흠차대신섬서군무에 임명되었고 회족 반란을 진압했다. 그러나 싱포는 연패했고 패보(敗保, 패배를 보장함)[3] , 매전필패 매전필이성문(每战必败,每败必以胜闻, 들리는 모든 전투마다 패배)라는 조롱을 당했다.
싱포는 신유정변으로 권력을 얻은 이후 사치와 향략을 일삼으며 정신을 놓았다. 그러나 묘패림과 송정시가 다시 청조를 배신했고, 회족 반군에게의 연패로 싱포의 위신은 실추되었기 때문에, 많은 각료들[4] 에게 탄핵을 당했다. 호북총독인 엄수삼은 그의 행실을 증언하고 그를 "심장마비와 같다(...)"라며 비난했다.
결국 싱포는 태후에게 자결을 명 받고 1863년 8월 31일 자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