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옥성
'''陳玉成'''
(1837~1862.5.1)
1. 개요
태평천국의 군사 지도자로 '''영왕(英王)'''에 봉해졌다.
2. 군사 활동
1837년경 광서성의 농민 집안에서 태어난 진옥성은 1851년 장강으로의 행진 중 태평천국 운동에 가담한다. 그의 나이는 15세에 불과했으나 그의 용기와 지략으로 빠르게 승진할 수 있었다. 1856년 천경사변을 뒷처리할 때 진옥성은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장수로 승진한다. 1857년 진옥성은 태평천국의 군사적 최고 영예인 의안(義安)을 수여받는다.
1856~1858년 천경의 서쪽에서 군사작전을 연이어 성공시킨 다음 해 진옥성은 영왕(英王)에 봉해진다. 또다른 태평천국의 장군인 이수성과 함께 진옥성은 1860년 2차 강남대영 공략을 지휘했다.
1861년 2월 진옥성은 우한을 공격하기 위해 1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정했다. 하지만 태평군의 시궁창스러워진 보급과 전력 때문에 진옥성은 방어 태세로 전환하다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증국번의 상군이 안경 공략에 매진할 수 있도록 했다. 태평천국의 상군을 향한 의미있는 마지막 작전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만다.
1856~1858년 천경의 서쪽에서 군사작전을 연이어 성공시킨 다음 해 진옥성은 영왕(英王)에 봉해진다. 또다른 태평천국의 장군인 이수성과 함께 진옥성은 1860년 2차 강남대영 공략을 지휘했다.
1861년 2월 진옥성은 우한을 공격하기 위해 1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정했다. 하지만 태평군의 시궁창스러워진 보급과 전력 때문에 진옥성은 방어 태세로 전환하다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증국번의 상군이 안경 공략에 매진할 수 있도록 했다. 태평천국의 상군을 향한 의미있는 마지막 작전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만다.
3. 죽음
이 패배 이후 진옥성의 군세는 계속 약화되었고 결국 그는 마지막 승부수로 하남을 공략하려고 한다. 하남을 공략하기 위해 염군의 주왕 묘패림[1] 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묘패림은 청군 장수인 수완구왈기야 싱포(수완과이가 승보)에게로 전향한 상태였다. 진옥성의 수하들은 묘패림을 믿을 수 없다고 조언했지만 진옥성은 듣지 않았고, 결국 묘패림에게 사로잡힌 뒤 1862년 5월 1일 능지처참되었다.
진옥성의 군사적 재능 때문에 청나라에서는 그에게 전향을 권유하였지만 거절했다. 진옥성은 처형되기 전에 "나는 내가 죽은 뒤 태평천국이 장강 북부를 모두 잃을 것이 걱정된다!"라고 탄식했다. 결국 그 유언대로 태평천국은 장강 북부를 잃고 만다.
진옥성의 군사적 재능 때문에 청나라에서는 그에게 전향을 권유하였지만 거절했다. 진옥성은 처형되기 전에 "나는 내가 죽은 뒤 태평천국이 장강 북부를 모두 잃을 것이 걱정된다!"라고 탄식했다. 결국 그 유언대로 태평천국은 장강 북부를 잃고 만다.
4. 평가
태평천국 최고의 용장으로 손꼽힌다. 무시무시한 군공으로 불과 23세의 나이에 왕으로 봉해졌으며, 그것도 이수성보다 먼저 왕으로 봉해졌다.[2] 이름뿐인 왕이 아닌 실제 태평천국의 군사 책임자 중 한 명의 역할을 맡았을 정도로 굉장한 무용을 보여 준 인물이다. 창술의 달인으로서 개인의 무력도 인간흉기 급이었다는 전승이 내려오며 그저 눈 앞의 싸움만 잘하는 게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전술 능력과 당대 최고 수준의 기동전 능력까지 겸비한 인물이었다. 강남대영 전투, 강북대영 전투, 삼하 전투 등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무용과 기동전 능력은 말이 안 나올 정도. 다만 대국적인 전략을 보는 부분에서 다소 부족함이 있었고, 아무리 가공할 능력을 가진 용장이라도 혼자서 대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