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탄 게츠

 



''' 역대 그래미 시상식'''[1]
[image]
'''올해의 레코드상'''
'''제6회
(1964년)'''

'''제7회
(1965년)'''

'''제8회
(1966년)'''
"Days of Wine and Roses"
헨리 맨시니

'''"The Girl from Ipanema"
스탄 게츠&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

"A Taste of Honey"
허브 앨퍼트
본명: stanley Gayetzky
생몰연도: 1927-1991
1. 생애
2. 게츠의 음악


1. 생애


미국의 재즈 연주자. 주로 연주한 악기는 테너색소폰.
조부가 우크라이나 이민자였고 따라서 성도 우크라이나 성인 Gayetsky 였다.
하지만 프로 연주자로 활약하면서 Stan Getz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출생지는 필라델피아지만 성장은 뉴욕에서 했다. 어린 시절 우등생이었다고 한다. 6학년을 마칠 당시에 거의 탑 클래스였다고. 하지만 음악에 관심이 많았고 13세때 색소폰을 접한 이후 평생 이 길로 가게 된다.
16세에 당시 인기있던 밴드인 "잭 티가든 밴드"의 색소폰 주자로 입단하면서 프로 연주자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한다.
1950년대에 접어 들면서 자신이 참여하는 세션의 대부분에서 리더가 될 정도로 촉망받는 연주자가 되었다.
소리의 결이 아주 곱고 부드러우며 격렬한 즉흥 연주를 할 때에도 거친 면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게츠 특유의 소리도 이 때 완성이 된다. 여담으로 이 사람의 별명이 "The Sound"다. 존 콜트레인이나 소니 롤린즈처럼 음악적으로나 연주 실력으로나 게츠를 능가하는 연주자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게츠와 같은 소리를 내진 못 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다.[2]

그러나 50년대 중반부터 재즈의 인기가 미국에서 급전직하하면서 그나마 시장이 유지되던 유럽으로 가서 연주 생활을 하게 된다. 게츠의 경우 주로 북유럽의 재즈 클럽들에서 연주를 했다고 한다. [3] 사실 이런 일은 게츠에게만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재즈계의 제임스 딘으로까지 불리며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쳇 베이커비밥시대의 거장인 듀크 조던, 잘 생긴 외모와 뛰어난 테크닉으로 인기를 끌었던 덱스터 고든등 한다하는 연주자 대부분이 유럽으로 원치 않는 이민을 떠나야 했다.
게츠는 1961년 미국으로 돌아오는데 이 때 우연한 계기로 인해 대박을 터뜨리게 된다.
브라질에서 연주 여행을 하면서 보사노바의 매력에 흠뻑 빠진 기타리스트 찰리 버드와 Jazz Samba라는 앨범을 내는데 이 앨범이 대박이 터진 것이다.
이후 게츠는 보사 노바의 아버지인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 보사 노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보컬리스트라고 불리는 조앙 질베르토, 그의 아내이자 훗날 솔로가수로도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되는 아스트루드 질베르토와 함께 협연하면서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 시절의 성공 때문에 종종 게츠를 보사노바 뮤지션으로 분류하는 경우도 많은데, 기실 게츠가 보사노바를 했던 시절은 길지도 않고 음반도 많지 않다.
90년대에 Verve에서 Bossa Nova Years라는 게츠의 보사노바 시절을 총망라한 컴필레이션을 발매했는데 그 분량이 꼴랑 CD 4장이었다.
이후 상업적으로는 크게 성공하진 못 했지만 연주 활동을 정력적으로 이어가던 그는 1990년 간암 판정을 받고 1991년 사망한다.
그런데 연주자로서는 성공한 삶을 살았지만 인간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못 했다.
10대때부터 마약과 알코올에 중독되었고 매우 이기적이어서 주변과의 마찰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가족(아내와 딸)에게도 매우 폭력적인 아버지였다고 한다.

2. 게츠의 음악


스탄 게츠는 빅 밴드에서 커리어를 시작해서 쿨 재즈 연주자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하지만 그에게 가장 큰 상업적인 성공을 가져다 준 것은 "미국 음악"인 재즈가 아니라 "브라질 음악"인 보사노바였다.
쉽게 말 해 일생에 걸쳐 놀랄 정도로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고 그 분야에서 이름을 알린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것이 게츠의 천재성을 대변해주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재즈씬에서 현역으로 연주를 했던 뮤지션들 중에서 게츠보다 더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거나 아예 장르 그 자체를 창조한 이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마일즈 데이비스이다. 마일즈 데이비스는 재즈가 정체기에 있을 때마다 진보에 대한 새로운 해법을 제시했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많이 구사했다. 그에 비해서 게츠는 남이 이미 확립해 놓은 장르에서 연주자로서 명성을 얻은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게츠가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면서 그 장르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가징 큰 이유는 그의 소리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탄탄한 테크닉과 뛰어난 즉흥연주 실력을 바탕으로 한 것은 물론이지만 특유의 소리 때문에 어떤 장르에서도 평균 이상의 결과를 내어 준 것이다.
게츠의 소리가 지닌 힘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음반이 조앙 질베르토 부처와 함께한 "Getz & Gilberto #1"이다. 조앙 질베르토의 미성과 게츠의 비단결 같은 색소폰 사운드가 어우러져서 극상의 시너지를 낸다.
동시대의 흑인 연주자들, 특히 소니 롤린즈나 존 콜트레인처럼 엄청나게 다양한 코드를 빠르게 전개한다던지 한계에 가까운 테크닉을 뽐내는 스타일의 연주를 하지는 않는다. 즉흥연주 실력은 뛰어나지만 멜로디의 틀을 계속 유지하는 스타일이고 따라서 대중들이 듣기에 좋다. 아름다운 소리도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보사노바 음반들이 유명하지만 기실 이 시기는 게츠가 외도한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이 시기의 레코딩을 모두 다 긁어 모아도 CD 5-6장 정도에 불과할 정도이니....

[1] 그래미 시상식의 가장 중요한 상들로 여겨지는 올해의 레코드상, 올해의 앨범상, 올해의 노래상, 최고의 신인상만이 기록되어 있다. 나머지 부문의 상들은 따로 문서 내 수상 목록에 수록해주길 바랍니다.[2] 무려 존 콜트레인조차 스탄 게츠의 소리를 동경했다고한다. 콜트레인이 스탄 게츠를 평하길 "Let's face it--we'd all sound like that if we could"[3] 게츠의 대표작 중엔 스톡홀롬 라이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