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태튼 아일랜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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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대륙군
3.2. 영국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


미국 독립 전쟁 시기인 1777년 8월 22일 뉴욕 인근 스태튼 아일랜드에서 대륙군과 영국군이 맞붙은 전투. 존 설리반 소장의 대륙군이 뉴욕의 영국군이 필라델피아로 쳐들어간 틈을 타 뉴욕을 탈환하고자 벌인 전투였지만 끝내 실패했다.

2. 배경


1777년 초, 뉴욕 주둔 영국군 사령관 윌리엄 하우 소장은 대륙군의 본거지인 필라델피아를 점령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는 필라델피아로 가기 위해 펜실베이니아 주로 진입하려 했지만, 조지 워싱턴의 대륙군이 델라웨어 강을 방어선으로 삼고 버티고 있어서 쉽게 뚫을 수 없었다. 윌리엄 하우는 적을 끌여들이기 위해 일부러 군대를 후퇴시키기도 했고 별동대를 파견해 적 분견대를 기습해 소소한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워싱턴은 끝까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에 하우는 델라웨어 강을 돌파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하고 함대에 군대를 싣고 바다를 거슬러 내려가 기습 상륙하기로 결심했다.
1777년 7월 23일, 뉴저지에서 수개월간의 준비를 갖춘 윌리엄 하우 소장과 그의 형인 리처드 하우 제독은 대륙군의 수도 필라델피아를 점령하기 위해 뉴욕에 주둔한 군대 대부분을 남쪽으로 수송하는 함대를 출범시켰다. 뉴욕의 군대는 함선에 몸을 싣고 남하하여 체사피크 만 상단에 상륙한 뒤 필라델피아를 향해 북쪽으로 진군할 예정이었다. 조지 워싱턴은 며칠 후 적 함대가 출항했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그들이 어디로 가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적이 존 버고인 소장 휘하 캐나다 방면 영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허드슨 강으로 갈수도 있다고 봤고, 델라웨어 강을 돌파하기 위해 델라웨어 강 입구로 향할 수도 있다고 여겼다. 이후 영국 함대가 델라웨어 강으로 향하지 않고 남쪽으로 향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워싱턴은 여전히 윌리엄 하우의 목표가 필라델피아인지, 더 남쪽에 위치한 사우스캐롤리나의 찰스턴 인지를 확신하지 못하고 그저 적의 행보를 지켜보기만 했다.
8월 21일, 워싱턴은 영국 함대가 체사피크 만 하구에서 일주일 전에 목격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제야 필라델피아가 위험하다는 걸 깨달은 워싱턴은 즉시 전군을 남쪽으로 전속력으로 이동시켰다. 이때 워싱턴은 뉴저지 동부 일대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던 존 설리번 소장에게 휘하 병력을 이끌고 가급적 빨리 본군과 합류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설리번은 하우의 영국군이 이탈하면서 뉴욕의 방어력이 떨어졌다고 판단하고 이참에 뉴욕을 탈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먼저 뉴욕 인근의 스태튼 아일랜드를 공략해 뉴욕을 탈환할 교두보로 삼기로 했다. 이리하여 1777년 8월 22일, 존 설리반 소장은 뉴욕 탈환을 위한 공세를 개시한다.

3. 양측의 전력



3.1. 대륙군


  • 지휘관: 존 설리번 소장
  • 병력: 1,000명

3.2. 영국군


  • 지휘관: 존 캠벨 준장, 코르틀란트 스키너 준장
  • 병력: 정규군 900명, 영국 충성파 민병대 400명

4. 전투 경과


당시 스태튼 아일랜드의 수비군은 존 캠벨의 지휘를 받는 900명의 영국 정규군과 코르틀란트 스키너 준장 휘하의 민병대(일명 '스키너의 여단') 400명으로 구성되었다. 캠벨의 영국군은 섬 북동쪽 끝 부근에 주둔했고, 스키너의 여단은 덱스터의 페리와 워드 포인트 사이의 섬 서쪽 해안을 따라 배치되었다. 설리번은 먼저 엘리자베스 타운의 지점에서 군대를 2개의 부대로 나눈 뒤 각각 섬을 건너서 민병대 전초기지를 급습해 포로를 확보하고 보급품을 피괴한 뒤, 본토로 돌아가기 위해 올드 블라징 스타 페리로 이동하기로 했다.
8월 20일, 설리번은 뉴저지 하노버에 위치한 자신의 기지에서 부관들에게 다음날 행군을 위해 군대를 준비시키라고 명령했다. 이후 8월 21일 오후, 약 1,000 명의 대륙군이 진지에서 출발했다. 한 부대는 윌리엄 스몰우드 준장이 이끌었고, 다른 부대는 존리번 본인이 프랑스 출신 장교 필리프 위베르 프뢰돔 드 보뢰의 보좌를 받으며 지휘했다. 그날 저녁 엘리자베스 타운에 도착한 대륙군은 몇 시간 동안 쉬었고, 다음날 아침 일찍 섬 도하 작전을 개시했다. 마티아스 오그덴 대령이 이끄는 한 분대는 그들의 목표인 엘리사 로렌스 대령의 민병 여단에 접근하기 위해 프레쉬 킬스 맞은편으로 가로질러 일렬로 진군했다. 남은 부대는 섬 북쪽의 파머즈 런 근처를 건넜고, 그곳에서 다시 세 분대로 나뉘었다. 스몰우드와 설리번은 두 분대를 이끌고 목표로 삼은 지점을 향해 진군했고, 나머지 한 분대는 퇴로를 지키기 위해 남겨졌다.
오그덴 대령은 8월 22일 새벽에 로렌스 대령의 전초기지를 공격해 영국 충성파 민병대를 경악시키게 만들었다. 그는 몇 분간의 전투 끝에 80명의 포로를 확보했고 뒤이어 스키너 여단의 제 3대대를 지휘하는 에드워드 반 돈간 중령의 전초기지를 공격했다. 그러나 돈간의 부하들은 적의 급습에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끈질기게 저항했다. 이에 오그덴 대령은 일단 올드 블라징 스타 페리로 후퇴한 뒤 영국군의 반격을 두려워하다가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부하들을 이끌고 스태튼 아일랜드를 떠나 본토로 돌아갔다.
한편, 설리번은 뉴 블라징 스타 페리에서 조셉 바튼 중령의 지휘를 받는 스키너 여단 제 5대대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 부대는 적이 접근하는 걸 진작부터 간파하고 즉시 후퇴했다. 설리번은 도주하는 적을 요격하기 위해 추격했지만, 바튼의 많은 부하들은 섬을 건너가거나 숲과 늪에 숨어서 탈출했다. 그래도 설리번은 바튼을 포함한 40명의 포로를 확보했다. 그의 부하들 중 일부는 스키너의 본부로 진격했지만, 그곳의 방비가 강하다는 걸 깨닫고 일찌감치 후퇴했다.
이무렵 스몰우드의 분대는 아브라함 반 버스커크의 민병 대대 전면으로 진군했다. 버스커크의 부하들은 스키너 준장에 의해 집결될 때까지 도망쳤고, 스몰우드는 적의 숙영지를 장악한 뒤 물자를 약탈하려고 드는 부하들을 가까스로 제지하고 전투 대형을 갖췄다. 이후 스몰우드와 설리번은 섬 중앙에 있는 리치몬드 마을 인근에서 힘을 합쳐 올드 블라징 스타 페리로 이동했다. 그러나 오그덴이 앞서 건너기 위해 배들을 대거 끌고 갔기 때문에, 그는 배를 새로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 사이, 스키너 준장이 섬에 흩어진 민병대를 수습한 뒤 적을 향해 접근했고 영국군도 뒤늦게 적의 급습 소식을 듣고 서둘러 대륙군을 추격했다. 이에 설리번은 스튜어트 소령과 틸라드 소령의 부대 80명에게 퇴로를 엄호하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모든 대륙군이 본토로 건너갈 때까지 적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저지했지만, 많은 대륙군이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하고 적군이 쏜 포도탄에 목숨을 잃거나 포로로 전락했다. 이리하여 스태튼 아일랜드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대륙군은 스태튼 아일랜드 전투에서 10명이 전사하고 20명이 부상당했으며 259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반면 영국군의 손실은 전사자 5명, 부상자 7명, 실종자 84명이었다. 이후 설리번은 잔존 병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진군해 9월 11일 워싱턴과 합세해 브랜디와인 전투에 참가했다. 그 후 그는 워싱턴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제멋대로 공세를 취했다가 큰 손실을 입었다는 비난을 받고 법원에 소환되었지만 무죄 판결을 받아 가까스로 불명예 전역을 모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