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윅스 요새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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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윅스 요새.
1. 개요
미국 독립 전쟁 시기인 1777년 8월 2일 ~ 22일 뉴욕주 스탠윅스 요새에서 영국군과 대륙군이 맞붙은 전투. 영국군은 20일 동안 요새를 포위했지만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철수했다.
2. 배경
1777년 초, 캐나다 방면 영국군 사령관 존 버고인 소장은 미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했다. 뉴잉글랜드가 반란의 본거지라고 확신한 그는 자신의 군대가 챔플레인 호수를 건너 허드슨 강을 따라 내려가 올버니에니로 진군하는 동안 배리 세인트 리저 중령이 이끄는 별동대가 온타리오 호수에서 동쪽으로 이동해 모하크 계곡을 통과하여 올버니로 나아가기로 했다. 한편 버고인 소장은 뉴욕의 윌리엄 하우 소장에게도 허드슨 강을 따라 북상해 자신과 합세할 것을 제안했고, 미국 식민지문제 국무장관 조지 사크빌 역시 하우에게 버고인과 협조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하우는 사크빌의 지시에서 자신이 어떻게 버고인과 협조해야 하는 지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빌미로 삼아 허드슨 강을 따라 북상하기보다는 반란군의 중심지인 필라델피아로 곧장 진격하는 것을 선택했다.
리저는 몬트리올 근처에서 제8, 34 영국 보병 연대와 영국 충성파 민병대, 헤센 부대, 모호크 인디언 부대를 규합했다. 버고인은 리저가 출발하기 전에 그를 준장으로 진급시켜 사기를 올려줬다. 리저 준장의 진군로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오네이다 호와 모호크 강 사이의 진입로에 위치한 스탠윅스 요새였다. 프랑스-인디언 전쟁 중에 건설된 이 요새는 사용한 지 오래되어 황폐해졌으며 약 60명의 수비대가 지키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리저는 이 요새를 처리하기 위해 대포 4문과 박격포 4문을 가지고 갔다. 한편 북부 대륙군 사령관 필립 슈일러 장군은 페터 간세보르트 대령의 제3 뉴욕 연대를 스탠윅스 요새로 급파했다. 5월에 도착한 간세보르트 대령은 요새를 수리하고 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리저는 세인트로렌스 강을 거슬러 내려가 온타리오 호로 진격하면서 스탠윅스 요새가 수리되었으며 약 600명의 군인이 지키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7월 14일 오스위고에 도착한 그는 병력을 더 많이 모으기로 하고 조셉 브랜트, 다니엘 크로스가 이끄는 800명의 인디언 전사들을 모집했다. 이렇게 해서 병력을 증강시킨 그는 스탠윅스 요새를 향한 공세를 개시한다.
3. 양측의 전력
3.1. 대륙군
- 지휘관: 페터 간세보르트 대령 + 구원군 지휘관 니콜라스 허키머 대령 + 구원군 지휘관 베네딕트 아놀드
- 병력: 요새 수비군 650명 + 허키머 대령 소속 800명 + 아놀드 소속 100~300명
3.2. 영국군
- 지휘관: 배리 세인트 리저 준장
- 병력: 영국군 750명 + 인디언 800명
4. 전투 경과
8월 초, 리저 준장은 요새를 지원을 하기 위한 적 보급대가 요새로 접근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에 그는 브랜트 중령에게 230명의 병력을 줘서 보급대를 요격하게 했다. 그러나 8월 2일 스탠윅스 요새에 도착한 브랜트는 적 보급대가 이미 요새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브랜트는 요새 외곽에 진을 쳤고, 리저 장군은 다음날 브랜트와 합세했다. 아직 포병대가 도착하지 않았지만, 리저 준장은 8월 3일 오후 스탠윅스 요새 수비대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간세보르트 대령이 항복을 거부하자, 리저 준장은 정규군을 요새 북쪽에 배치하고 인디언들과 영국 충성파 민병대를 남쪽에 진을 치게 해 요새 포위 작전을 시작했다.
영국군은 포위전 초반 뉴욕 주 민병대에 의해 쓰러진 나무들에 의해 차단한 우드 크릭으로 포병대를 끌어올리려 애썼다. 그러던 8월 5일, 리저 장군은 적 구원군이 요새를 향해 이동하고 있따는 소식을 접했다. 리저는 이를 격파하기 위해 존 존슨 대령이 이끄는 약 500명의 병사들을 급파했다. 8월 6일 오리스카니 숲에 매복한 존 존슨의 영국군은 니콜라스 허키머가 이끄는 뉴욕 민병대 800명을 습격했다.(오리스카니 전투) 허키머는 갑작스런 매복으로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고, 대륙군은 막심한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하지만 그 사이 간세보르트 대령의 부관 매리너 윌렛 중령이 요새에서 출격해 영국군 진영을 습격했다. 이로 인해 많은 손실을 입은 영국군과 인더인의 사기는 떨어졌고, 윌렛은 리저 장군의 작전 계획서가 포함된 많은 영국군 문서들을 입수했다.
오스카리니 숲에서 돌아온 인디언들은 적군이 진영을 습격해 자신들의 소지품들을 뺴앗고 동료들을 해쳤다는 걸 알게 되자 격분해 요새 주변 일대 마을들을 약탈했다. 이후 리저 준장은 요새에 다시 항복을 권유했지만 거부당하자 8월 8일에 포격을 개시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래도 리저 준장은 포기하지 않고 요새 수비대에게 항복하지 않을 시 모호크 족 인디언들이 요새를 공략한 후 모두 죽일 거라고 협박했다. 그러자 윌렛 대령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날 저녁, 간세보르트 대령은 윌렛에게 소규모 일행을 이끌고 적진을 뚫고 가서 구원을 청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습지를 헤치고 나아간 윌렛은 동쪽으로 달려가다가 베네딕트 아놀드의 구원군과 마주쳤다. 윌렛으로부터 요새의 상황을 전해들은 아놀드는 요새를 얼른 구해야겠다고 판단했지만, 당시 그가 이끌고 온 병력은 100~300명 정도에 불과했다. 이 정도로는 요새를 구하는 건 어림도 없다고 판단한 그는 적을 교란시키기 위해 속임수를 쓰기로 결심했다. 아놀드는 미리 붙잡아뒀던 영국 충성파 간첩 한 요스트 슈일러에게 목숨을 건지는 대가로 레거의 진영에 가서 대규모 미군이 진군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트리라고 지시했다. 그는 슈일러가 자신의 지시를 따르게 만들기 위해 그의 형을 인질로 잡아뒀다."제복을 보니 당신은 영국 장교로군. 그러므로 당신이 가지고 온 메시지는 영국 장교가 보낼 수 있는 불명예스러운 것이며, 결코 영국 장교가 가지고 다닐 수 있는 평판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겠소."
슈일러는 아놀드의 지시에 따라 리저의 영국군 진영에 가서 적의 대규모 병력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이내 적 구원군 규모는 갈수록 늘어났고, 리저는 곧 적이 3천 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8월 21일 전쟁 평의회를 개최한 리저 준장은 이미 소문을 듣고 겁이난 인디언 일부가 달아났고 나머지 인디언들은 포위를 풀지 않으면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결국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고 다음날 포위망을 풀고 오네이다 호를 향해 철수했다. 이리하여 스탠웍스 요새 포위전은 대륙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5. 결과
영국군은 스탠웍스 요새 공방전에서 5명이 전사하고 47명이 부상당했으며 41명이 포로로 잡히거나 실종되었다. 반면 대륙군은 392명이 전사하고 68명이 부상당하고 30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9명이 실종되었다. 아놀드는 영국군이 물러간 지 하루 뒤인 8월 23일에 스탠윅스 요새에 도착했다. 다음날 그는 요새 수비대에서 병력을 차출해 500명을 이끌고 적을 추격했다. 아놀드의 부대가 오네이다 호수에 도착했을 때, 리저 준장의 영국군은 이미 떠난 뒤였다. 아놀드는 주력군과 다시 합류하기 위해 철수했고, 리거와 그의 부하들은 버고인과 합세하기 위해 9월 말에 티콘데로가 요새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그와 합류하지 못한 버고인의 영국군은 새러토가 전투에서 대륙군에게 항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