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사크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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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일생
2.1. 초기 경력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2.3. 7년 전쟁
2.4. 북미 식민지 담당 장관
2.5. 말년


1. 개요


영국의 군인, 정치인.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에서 장성으로서 활동했고 조지 3세 시기 북미 식민지 담당 장관을 맡았다.
7년 전쟁시기 민덴 전투의 명령 불복종과 미국 독립전쟁을 거하게 말하먹은걸로 유명한 인물이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사크빌은 1716년 1월 26일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1대 도르셋 공작 리오넬 사크빌과 월터 필립 콜리어 중장의 딸 엘리자베스의 아들이었다. 조지 1세는 사크빌의 세례식에 참석했고 그의 대부가 되어줬다. 사크빌은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1730년 아일랜드 총독을 맡게 된 아버지를 따라 더블린으로 가서 1737년까지 지내면서 유명 작가 조나단 스위프트와 친분을 맺었다. 또한 그는 나중에 자신의 군대 경력에 힘을 실어주게 될 리고니어 경과 면식을 가졌다. 1733년, 사크빌은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을 졸업한 후 아버지의 초대 비서 겸 아일랜드 하원의 포르탈링턴 의원으로 재직했다. 1737년, 사크빌은 제7 기병대의 대위가 되었고 1740년에는 제28 보병대의 중령으로 전근했다.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을 무렵, 그가 속한 보병 연대는 독일로 이동했다. 1743년, 사크빌은 대령으로 승진했고 1745년 5월 11일 퐁트누아 전투에서 보병 연대의 공격을 지휘하다가 프랑스의 진지 깊숙이 침투하던 중 부상을 입은 후 포로가 되었다. 포로 교환을 통해 집으로 돌아온 그는 자코바이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투입된 제20 보병대의 지휘관으로 부임해 스코틀랜드로 이동했다. 자코바이트 반란이 진압된 이후인 1747년 플랑다르로 돌아온 사크빌은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오거스터스의 부관이 되었고 제3 기병대의 대령으로 부임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후인 1751년, 사크빌은 아일랜드 방면 영국군 사령관으로 부임해 2년간 이 직책을 맡았고 1754년 9월 3일 다이애나 샘브룩과 결혼했으며 1755년 소장으로 진급했다. 이때 그는 듀케인 요새를 향한 원정을 개시했다가 머농거힐라 전투에서 매복에 걸려 전사한 에드워드 브래독을 대신해 북미 식민지 방면 영국군을 지휘할 적임자로 고려되었으나 실제로 부임하지 않았다.

2.3. 7년 전쟁


7년 전쟁이 발발한 후인 1758년 1월 추밀원에 들어간 사크빌은 같은 해 제4 연대를 부여받고 프랑스 해안에 대한 영국의 습격 작전을 지휘했다. 비록 프랑스 해안의 생 말로 마을을 점령하는 계획은 실패했지만, 사크빌은 적지를 습격해 상당한 타격을 입힌 점을 높이 평가받았다. 이후 그는 7월에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가 지휘하는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을 보강하기 위해 독일로 파견된 영국군 부대와 동행했으며 10월 20일 연합군 내 영국군 지휘관이 되었다.
1759년 8월 1일, 사크빌은 민덴 전투에서 영국인과 하노버인으로 구성된 우익 기병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그는 이 전투 내내 명령 불복종을 일삼았다. 페르디난트가 영국 기병대에게 적진을 돌파하라고 명령했을 때 사크빌은 조금 진격했다가 도로 주저앉았다. 이에 페르디난트가 여러 차례 전령을 보내 진군 명령을 전했고 나중에는 진격하지 않을 거면 후퇴해서 다른 아군 부대가 지나갈 길을 열어주라고 명령하기도 했지만, 사크빌은 끝내 진격하지도 않고 후퇴하지도 않은 채 제 자리에 머물렀다. 결국 페르디난트는 사크빌의 지휘관 직책을 박탈하고 그랜비 후작 존 메너즈에게 영국 기병대 지휘를 맡기기로 했다. 이에 사크빌이 항의하자, 페르디난트는 차디찬 어조로 대꾸했다.

이제 기회는 지나갔소.

이후 영국으로 소환된 사크빌은 자신이 명령을 불복종했다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군사 재판을 요구해 1760년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법원은 유죄를 선고하고 그가 "어떤 군대로도 폐하께 봉사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고 판결한 뒤 영국 육군의 모든 연대에 판결문을 보내기로 했다. 결국 사크빌은 불명예 전역했으며 조지 2세에 의해 추밀원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그는 7년 전쟁 내내 실의에 빠진 채 자택에 은거해야 했다.

2.4. 북미 식민지 담당 장관


1760년 조지 3세가 즉위하자, 사크빌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재건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조지 3세는 그의 거듭된 청원을 마침내 받아들여 1765년 추밀원에 복귀시켜줬다. 1769년, 사크빌은 조지 그렌빌의 파벌과 손을 잡았고 같은 해 엘리자베스 저메인 부인이 자연 상속인 없이 사망하자 그가 그녀의 땅을 상속받음으로서 막대한 재정을 확보해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770년 이후 조지 저메인 경으로 불리게 된다.
1775년 11월 10일, 사크빌은 다트머스 경을 대신해 북미 식민지 담당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영국 수상 프레드릭 노스의 내각에는 유럽, 미국, 나머지 전 세계의 문제를 담당하는 3명의 장관이 있었다. 그들은 국제 관계 외에도 식민지 행정과 그 지역 내의 군사 작전에 많은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래서 사크빌은 1775년 식민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떠맡아 북미 식민지에 파견된 장군들을 승진시키거나 경질하고 식량과 물자를 지원하며 전반적인 전략을 수립했다.
1776년, 사크빌은 존 버고인 장군에게 새러토가 전역을 실시히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윌리엄 하우 장군에게 버고인 장군을 돕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지 못했고, 하우는 필라델피아를 공략하는 전공을 세웠으나 사크빌의 불분명한 지시 때문에 새러토가로 진격한 버고인을 돕는 데 애를 먹었다. 결국 버고인 장군은 1777년 9~10월 새러토가 전투에서 대패하고 대륙군에게 항복했다. 이후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가 전쟁에 뛰어들어 대륙군을 지원하자, 사크빌은 필라델피아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게 하고 설탕이 많이 생산되는 서인도 제도에 증원군을 투입시켰다.
1779년, 사크빌은 리처드 컴벌랜드 경을 마드리드로 파견해 스페인과 별도의 평화 협상을 벌이게 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1781년, 찰스 콘월리스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 9천명이 요크타운에서 대륙군에게 포위된 끝에 항복해 버리면서 전쟁은 영국에게 극도로 불리해졌다. 11월 25일 요크타운의 항복 소식을 접한 사크빌은 프레드릭 노스 총리는 제껴두고 국왕 조지 3세에게 이 소식을 전한 뒤 고위 관료들에 대한 야당의 사퇴 요구로 시달리는 와중에도 전쟁을 계속하기로 마음먹고 찰스턴, 뉴욕, 캐나다 등지에서 대륙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또한 그는 뉴잉글랜드에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로드아일랜드에 뉴포트 항구를 재점령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곧 전쟁을 엉망으로 이끌고 있다는 반대파의 비난에 시달리다가 사퇴했다.

2.5. 말년


정계에서 물러난 사크빌은 곧 건강이 악화되면서 서섹스의 스토넬랜드 로지로 가서 병을 치료하다가 1785년 8월 26일에 사망했다. 향년 69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