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라리온-라이베리아 관계
1. 개요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의 관계.
2. 역사적 관계
2.1. 20세기 이전
두 지역들은 서아프리카 남대서양 해안에 있는데 18세기 이전까지는 양 지역간에 갈등은 없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의 노예 무역과 노예 제도로 유럽과 아메리카로 팔려 나간 흑인들은 이 지역 출신들이 많았다. 근대 유럽에서 노예 해방운동이 나타나고, 아메리카에서는 아이티 독립 운동, 미국에서는 노예제를 폐지하자는 주장과 노예제를 유지하겠다는 주장이 부딪혀 남북전쟁이 발발, 북군의 승리로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유럽과 아메리카에는 흑인들의 주장이 강하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영국 역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영국에 끌려온 아프리카 노예들과의 분쟁을 해결해야 했는데 서아프리카 남부 해안에 어느 열강들도 점령하지 못한 지역이 있었고 영국은 그곳에 점령한 후 점령지에 정착하라며 영국의 아프리카 흑인들에게 땅을 주었는데 이는 시에라리온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에라리온은 1808년 영국의 지배를 받다가 1961년에 독립했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는데, 미국에서 백인들과 흑인들의 갈등을 최소한 해결하려고 영국이 점령한 곳 근처에 미국 흑인들이 이주할 수 있도록 했고, 나라도 세울 수 있게 했는데 미국의 도움을 받아 아프리카에서 독립되어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지 않은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2.2. 20세기
그러나 두 나라들은 국경문제로 갈등이 있기도 했었으며, 훗날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독재자들 및 이후의 반체제 집단들과의 내전은 두 나라 국가들의 분쟁을 더욱 크게 심화시켰다. 두 나라 국가들의 내전은 이곳에 정착한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온 노예출신들의 흑인들이 이 지역들에 살던 원주민들을 탄압하면서 정치를 유지시켰기에 해당 지역들 원주민들과의 악연도 성립되고 말았다.
라이베리아에서 내전이 터진 후 시에라리온에서도 1990년대에 복잡한 전개의 내전이 나타났다. 라이베리아의 독재자 찰스 테일러는 국경의 라이베리아군들을 반군으로 위장시키거나 시에라리온 반군들인 혁명연합전선과 동맹을 맺어 시에라리온 내전에 개입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혁명연합전선들은 처음에 독재를 몰아내자고 했었으나 변질되어 이들도 대다수는 자신들의 욕심, 이점을 챙기려는 목표를 챙겨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온갖 잔인한 방법들을 동원해서 모든 사람들을 학살하는 군벌들로 변했고, 라이베리아에서도 처음에는 독재자를 몰아냈던 찰스 테일러 역시 독재자로 변질되면서 두 나라들간의 전쟁, 그리고 이후의 인권 억압과 경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특히 두 나라들은 소년병 문제 때문에 큰 비난을 듣기도 했었다. 2000년까지 두 나라들의 복잡한 전쟁이 끝나진 않았다.
2.3. 21세기
그래도 2001년 이후를 중심으로 서서히 내전들이 조금씩 와해되기 시작했으나 완전히 끝나진 않았으며, 라이베리아는 2003년 8월까지 전쟁이 나타났으며, 시에라리온 역시 2001년에 공식적으로 내전이 끝났지만 본격적으로는 2005년이 되어서야 종결되었다. 시에라리온의 4대 대통령이었던 어니스트 바이 코로마는 2007년 라이베리아와 불가침조약을 맺은 후에 적대 관계를 청산했다. 그러나 여전히 두 나라들은 옛 전쟁으로 인해 썩 좋은 관계는 아니다. 다만 시에라리온에 온 라이베리아 난민, 반대로 라이베리아로 온 시에라리온 난민들이 서로 다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오고 가는 정책을 유엔과 함께 시행하기도 했었다#.
2011년 1월 12일에도 양국 관계는 화해를 시도했다#.
2019년 9월 시에라리온에서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이 축구를 했을 때 라이베리아에 패배하여 월드컵 진출에 실패하자 경기에서 진 선수의 집에 들어가 난동을 피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