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스마츠리

 

師走祭り

일본의 큐슈 지방 미야자키 현의 미사토 정 남향촌(난고손)에서 매년 음력 12월(시와스)에 진행되는 축제이다.(마츠리)
현지에서 신으로 모셔지는 백제 왕족 정가왕과 그 맏아들 복지왕의 전설에서 시작되어 그 두 부자의 넋을 기리는 마츠리이다. 백제의 마지막 왕족으로 불리는 정가왕과 두 아들이 나라현에 망명했으나 전국시대 내란으로 인해 미야자키현으로 도망오고, 철기문명을 전파해 이곳에서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현지에서 직접 보고 들은 이들의 전설은 이러하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할 당시, 백제의 지배계층 대부분은 왜로 망명을 떠났다. 그 중에는 직계 왕족인 정가왕과 그의 맏아들 복지왕, 둘째 아들 화지왕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가왕 부자는 지금의 나라 지방으로 가서 정착하려 했으나 곧 다시 쫓기는 신세가 되어, 정가왕 일행은 다시 남쪽으로 피신하게 된다.[1] 정가왕의 맏아들인 복지왕은 휴가에 터전을 잡았고, 아버지인 정가왕은 거의 백리 정도 내륙 산악지대로 더 들어간 남향촌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그리 오래지 않아 추격군들은 미야자키까지 이들을 쫓아왔다.[2] 이들은 있는 힘을 다해 맞서 싸웠지만 추격군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정가왕과 둘째 아들 화지왕은 1년 뒤 살아남으면 이 장소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각자 흩어져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첫째 아들 복지왕은 아버지와 동생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소식을 듣고 휘하들을 모아 달려왔지만 이미 때는 늦어 정가왕과 화지왕은 숨을 거둔 후였다고 한다. 전설이나 민담, 신화 등이 으레 그렇듯이 여러 버전이 존재하는데 형제들은 휴가에, 아버지만 남향촌에 정착했다고 하기도 하는 버전도 있고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같이 싸우러 온 복지왕이 흩어지면서 꼭 살아서 보자고 했다는 버전도 있다.
정가왕과 두 아들은 추격해온 병사에 의해 사망한 이후 각각 다른 신사[3]에 신으로서 모셔지게 되었는데, 이 형제가 1년에 한 번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준비를 하고서(신물을 옮기는 일행들이 가는 길목에 있는 곳곳의 바다와 강물에 뛰어들어 몸을 씻는 의식을 한다.) [4] 백리 길을 걸어와서 아버지를 만나고 다음날 하루종일 회포를 풀다가, 다음날 낮에 슬픔을 가리기 위해 얼굴에 잿가루를 칠하고 작별하는 내용을 축제에서 매년 다룬다.
일본에서는 가장 오래 이어지고 있는 마츠리 행사로 알려져 있는데, 지금은 마을축제 수준으로 작아졌다. 한국인이 참여하게 되면 대단히 기쁘게 받아준다.
여담으로 남향촌 촌장 님의 명함은 한글로 되어 있고, 이 동네 사람들은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약간씩 한국어를 할 줄 안다.
정가왕 신사 비문을 보면 정가제(帝)로 무려 칭제를 해 주고 있으며 정가제와 복지왕, 화지왕의 곁을 지키던 백제 사람들의 후손이 곧 이 마을 사람들이라 씌어 있다. 신사 자체보다는 신사 옆에 있는 서정창원(니시노 쇼쇼인)이 좀 더 볼만한데, 촌구석 중에 촌구석인 미야자키에 나라에 있는 정창원과 거의 급이 비슷한 유물이 소장되어 있었다고 하며, 180억 정도의 예산을 들여서 건물을 복구하여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신사 아래와는 충청남도와 결연하여 꾸며놓은 특별전시관 비스무리한 백제관도 있다.
[1] 마을 사람들은 신라 본국의 추격군이 왔다고도 하고, 당시 신라쪽의 지원을 받는 왜의 세력에게 쫓기게 되었다고도 한다. 물론 후자 쪽이 중론이다.[2] 하천 따라 나 있는 길 말고 산길을 통해서 남향촌으로 들어왔다고 하는데 그 길을 차로 가보면 어떻게 여기까지 도망을 왔고 또 추격을 해왔나 싶다.[3] 아버지 정가왕의 신사는 미야자키 남향촌의 고도 신사, 아들 복지왕이 모셔진 신사는 휴가의 히키 신사이다. 정가왕을 모신 고도 신사는 벽지에 있는 만큼 좀 쇠락한 느낌이 있지만 맏아들 복지왕을 모신 히키 신사는 덴노가 직접 방문한 적도 있고 지역 신토 신앙의 중심지로 기능한다고 한다.[4] 음력 12월이라고 해봤자 우리나라 초겨울 정도라서 한낮에 직접 물에 들어가 본 결과 그럭저럭 들어갈만 했다. 물론 밤과 새벽은 산간지방이니만큼 서릿발처럼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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