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제정책
'''Новая Экономическая Политика''' (New Economic Policy)
적백내전기인 1921년, 블라디미르 레닌에 의해 시행된 소비에트 연방의 경제정책. 시장경제의 부분적인 허용을 골자로 한다. 제정 러시아 시기 표트르 스톨리핀의 정책과 유사성이 있었다.
보통 '신경제정책'으로 번역되지만 '새로운 경제정책'이라는 일반용어로 오해를 살 여지가 있는만큼[1] 소련의 것을 가리킬때는 명확하게 NEP, 혹은 네프라고 표기하는 것이 보통.
시장경제의 부분적 재도입을 특징으로 한다. 볼셰비키 혁명 후 소비에트 정부가 사유재산을 불허함에 따라 자신의 농토를 국가에 빼앗기는 토지개혁에 따라 농민들의 저항이 엄청났고, 이 때문에 곡물 생산량이 줄어들수밖에 없었다. 또한 1918년부터 1922년까지의 내전으로 산업기반이 파괴된데다가 설상가상격으로 1921년에 들어닥친 기록적인 가뭄으로 인해 대기근이 닥쳐왔고, 장티푸스, 콜레라같은 전염병까지 나돌면서 약 500만명 가량이 죽어나갔다. 내전에서 어렵게 승리한 볼셰비키였지만 이러한 경제상황을 극복하지 못하면 내전이 재개될 위험성이 높았기에 외국으로부터 식량을 지원받아 구호에 나서는 한 편, 원할한 전후 재건을 위해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강령을 토대로 수정된 신경제정책을 발표했다.
농민 개인이 자기 생산물을 팔 수 있도록 허가하고, 일정한 기준의 사기업 활동도 허가하였으며, 외국 자본을 허용하는 등 시장경제의 요소들을 대거 도입했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일체 허용하지 않던 기존 마르크스주의 강령에 전적으로 배치되는 정책이었기 때문에 소비에트 러시아 공산당 내에서 많은 논쟁과 반발이 야기되기도 했으나 전후복구와 기근을 조속히 종식시켜야된다는 레닌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 관철되었다.
NEP 실시 후에 소련 경제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하여 1923년에 이르러 기근에서 벗어났고, 1928년 들어서는 전쟁전인 1913년도의 경제수준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신경제정책이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아져갔지만 한편 빈부격차도 점차 벌어져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이오시프 스탈린은 공산당의 부분-시장경제파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장악했음에도 계획경제파의 정책을 받아들여 5개년 계획을 내세워 신경제정책을 뒤엎고, 농업집산화를 시행하면서 동시에 무지막지한 스케일로 산업화를 밀어붙이게 된다.
적백내전기인 1921년, 블라디미르 레닌에 의해 시행된 소비에트 연방의 경제정책. 시장경제의 부분적인 허용을 골자로 한다. 제정 러시아 시기 표트르 스톨리핀의 정책과 유사성이 있었다.
보통 '신경제정책'으로 번역되지만 '새로운 경제정책'이라는 일반용어로 오해를 살 여지가 있는만큼[1] 소련의 것을 가리킬때는 명확하게 NEP, 혹은 네프라고 표기하는 것이 보통.
시장경제의 부분적 재도입을 특징으로 한다. 볼셰비키 혁명 후 소비에트 정부가 사유재산을 불허함에 따라 자신의 농토를 국가에 빼앗기는 토지개혁에 따라 농민들의 저항이 엄청났고, 이 때문에 곡물 생산량이 줄어들수밖에 없었다. 또한 1918년부터 1922년까지의 내전으로 산업기반이 파괴된데다가 설상가상격으로 1921년에 들어닥친 기록적인 가뭄으로 인해 대기근이 닥쳐왔고, 장티푸스, 콜레라같은 전염병까지 나돌면서 약 500만명 가량이 죽어나갔다. 내전에서 어렵게 승리한 볼셰비키였지만 이러한 경제상황을 극복하지 못하면 내전이 재개될 위험성이 높았기에 외국으로부터 식량을 지원받아 구호에 나서는 한 편, 원할한 전후 재건을 위해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강령을 토대로 수정된 신경제정책을 발표했다.
농민 개인이 자기 생산물을 팔 수 있도록 허가하고, 일정한 기준의 사기업 활동도 허가하였으며, 외국 자본을 허용하는 등 시장경제의 요소들을 대거 도입했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일체 허용하지 않던 기존 마르크스주의 강령에 전적으로 배치되는 정책이었기 때문에 소비에트 러시아 공산당 내에서 많은 논쟁과 반발이 야기되기도 했으나 전후복구와 기근을 조속히 종식시켜야된다는 레닌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 관철되었다.
NEP 실시 후에 소련 경제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하여 1923년에 이르러 기근에서 벗어났고, 1928년 들어서는 전쟁전인 1913년도의 경제수준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신경제정책이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아져갔지만 한편 빈부격차도 점차 벌어져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이오시프 스탈린은 공산당의 부분-시장경제파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장악했음에도 계획경제파의 정책을 받아들여 5개년 계획을 내세워 신경제정책을 뒤엎고, 농업집산화를 시행하면서 동시에 무지막지한 스케일로 산업화를 밀어붙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