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스톨리핀

 


[image]
''' 이름 '''
'''표트르 아르카디예비치 스톨리핀
(러시아어: Пётр Арка́дьевич Столы́пин)
(영어: Pyotr Arkadyevich Stolypin)'''
''' 국적 '''
러시아 제국[image]
''' 출생 '''
1862년 4월 14일, 작센 왕국, 드레스덴
''' 사망 '''
1911년 9월 18일, 러시아 제국, 키예프
''' 학력 '''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농업 전공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배우자 '''
올가 보리소브나 네이드하르트 (1884~1911)[1]
''' 자녀 '''
5녀 1남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같이보기


1. 개요


러시아 제국의 정치가이자 보수 개혁가. 1906년부터 1911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총리 및 내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독립자영농 경영이 농민들의 복지를 향상시키고 '위대한 러시아'건설을 약속한다고 믿었던 그는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인해 출범한 두마에서 국무총리로 재임하는 동안 그는 혁명 운동을 탄압하면서도 자영농 중산층을 육성하는 농업 개혁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그의 자영농 중산층 육성 정책[2]의 괄목할 만한 성과 때문에 보수적인 기득권층에게 미움을 받았다. 1906년에는 두마에서 귀족 대표를 32%에서 50%로 늘리고 농민 대표를 42%에서 22%로 줄이는 정책을 강행하여 진보 개혁가들에게도 미움을 받았다. 한마디로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미움을 받던 존재였다. 스톨리핀은 러시아의 구 귀족 계층과 키배를 벌이는 동시에, 체포된 혁명가들을 무조건 교수형시켜서 당시 혁명가들은 교수대를 '스톨리핀의 넥타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또한 당시 러시아 제국 내에 핀란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탄압하고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을 억압하기도 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처럼 재임 당시에 기득권층과 진보 개혁가 모두에게 미움을 받던 인물이 현재 러시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지만... 현재 러시아를 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스톨리핀의 개혁이 좀 더 오래 지속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을 수 밖에 없다. 1905년부터 1914년 1차대전 직전까지, 스톨리핀과 세르게이 비테의 개혁이 진행되던 당시의 러시아 제국은 농업과 광공업의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바탕으로 한 호황을 막 누리기 시작한 단계였으며 엄청난 인명피해를 야기하였던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 체제를 피할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가 바로 스톨리핀의 개혁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스톨리핀은 우선 농노 해방 이후에도 농민들에게 남아있던 법적, 사회적 제한들을 완전히 철폐하여 농민들을 평등한 시민으로 만들었으며, 경작지를 구입할 때 나라에서 돈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자영농 육성을 지원하였다.[3] 대출받은 금액은 자영농들이 새로운 영농 기술을 도입할 때도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그동안 러시아 농민들은 미르라는 일종의 마을 공동체에서 각 가정 구성원의 숫자만큼 땅을 그때그때 배분해서 경작하는 문화가 있었는데,[4] 스톨리핀은 이를 처음부터 가정 단위로 토지를 따로 소유하면서 경작하도록 장려하며 부농 계급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스톨리핀이 지방정부에 개혁을 도입하면서 젬스트보 제도를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지역에도 도입하였는데, 이 때문에 당장 눈앞의 이익에만 눈이 어두웠던 보수 지주층 사이에서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다. 결국 스톨리핀이 암살당하자[5] 지방정부 개혁을 비롯한 그의 부농 육성책은 많이 물건너갔으며, 그 덕분에(...) 볼셰비키 혁명이 많이 앞당겨졌다고 한다...
소련이 1921~22년의 기근 이후 식량난과 재정난을 타개할 목적으로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는 구호 하에 펼친 신경제정책도 사실은 레닌이 스톨리핀의 부농(쿨라크,кула́к) 육성정책[6]울 복붙한거나 다름없다는 평가가 있다. 1980년대의 페레스트로이카 역시 유사한 문제의 유사한 해결책이었다.
참고로 당시 스톨리핀의 개혁으로 육성된 자영농 중산층(쿨라크, кула́к)의 수는 러시아 전체 인구의 12%밖에 되지 않았는 반면 전체 곡물 생산량의 50%를 차지했었다.

2. 생애


독일 주재 러시아 특사인 아버지[7] 아래에서 자라, 188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농업을 전공한 후[8], 1889년부터 1902년에 코브노에서 보안관을 지냈다. 당시 코브노는 농촌공동체의 해체가 진행되고 자영농의 비율이 높았던 지역으로써 스톨리핀은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농업과 관련하여 많은 경험을 하였으며 그는 농장 운영체제와 행정 체제를 개편하였다. 이러한 수완을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인정받아 그는 1901년 국회의원으로 승진하게 된다. 1902년 5월,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스톨리핀은 그로드노의 주지사로 임명받았으며, 1903년 2월, 사라토프의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1905년 사라토프 주지사로 재임하던 당시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파업을 젬스트보[9]와 협력하여 성공적으로 진압하여 자신의 지역을 확고히 장악하였다. 그는 시위에 나선 대중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비무장한 상태로 대중 앞으로 나섰으며 자신을 몽둥이로 때리려는 청년에게 자신의 코트를 던지고는 가지고 있으라고 말하고 대중들을 설득해 모두 귀가시켰다. 설득 도중에 누군가 자신을 총으로 겨누자, 당당하게 쏘라고 말하는 용기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혁명 운동만 진압한 것은 아니었다. 극우 폭력 조직인 '검은 백인대'가 파업 중인 젬스트보 소속 의사들을 테러하려 하자, 카자키 수백 명을 동원하여 직접 의사들을 기차역으로 안전하게 이동시키고 자신이 돌을 맞는 수모까지 감당했다.
이렇게 혁명 운동을 진압하고 치안을 유지하는데 남다른 수완을 인정받은 그는 1906년 4월 내무장관에 임명되고, 두 달 후 고레미킨이 사임했을 때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06년 8월 25일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대중 환영회를 하던 도중 급진사회주의 혁명가 연합의 암살자들이 설치한 폭탄이 터졌으나 스톨리핀은 파편에 의한 부상만 입었을 뿐 멀쩡했다. 그의 15살된 딸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나 딸과 같이 서있던 3살짜리 아들은 가벼운 상처만 입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차르의 요청으로, 1906년 10월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부상당한 딸을 방문했다. 이 테러 사건을 전후로 해 스톨리핀은 강력한 반혁명 정책을 실시하고 혁명가들을 탄압해 수천이 넘는 사회주의자들을 교수대로 보냈다. 이러한 스톨리핀의 행보는 혁명가들이 교수대를 '스톨리핀의 넥타이'라고 부를 정도로 냉혹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추진하려는 정책을 집행하고 법을 더욱 빠르게 통과시키기 위해서 두마의 변화을 꾀하였다. 1907년 2대 두마를 해산시키고 혁명 세력과 접촉하던 15명의 의원을 체포한 후 귀족에게 더욱 많은 투표권을 주었다. 이러한 변화는 3대 두마를 더욱 더 보수적으로 만들었다. 또한 그는 농민들의 불만을 해결하고 반대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1차 두마 해산 이후에 입법한 토지개혁을 밀어붙였다. 당시 농업부 장관이었던 알렉산더 키보신의 도움을 받아 소규모 지주와 부농 · 자영농 계층을 만들어 이들이 황실을 지지하게 하고 농민들의 불안을 막으려 했다. 또한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고 지방 정부의 힘을 늘리기 위해 노력했으나, 10월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 및 정치 세력의 반대, 차르의 지원 거부로 인해 실패했다.
1911년 3월, 그가 제안한 토지개혁법이 부결되고 두마가 혼란스러워지자 그는 직책을 내려놓았다.
1911년 9월 14일, 그에 대한 암살 음모가 계획중이라는 경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키예프에 공연을 보러 갔다. 공연 도중 그의 개인 경호원이 담배를 피기 위해 나간 사이에 좌익 혁명가인 드미트리 보그로프에 의해 두 번 총격을 맞고 쓰러져 즉시 황실로 이송되었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3일 후에 사망하였다. 드미트리 보그로프는 공연장 앞에서 바로 잡혔으며 암살 10일 후 교수형에 처해졌다.
스톨리핀은 그의 요청대로 사망 후 자신이 죽은 키예프의 라브라 수도원에 묻혔다.

3. 평가


스톨리핀의 재임기간중 추진된 개혁의 괄목할만한 성과는 러시아 경제가 서구와 같은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여줬으며, 러시아인들 입장에서는 만약에 스톨리핀이 중간에 암살당하지 않고 그의 개혁이 지속되었더라면 볼셰비키 혁명 같은 극단적인 실험 없이도 러시아가 산업화되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크다고 한다. 그래서 스톨리핀을 단순한 반동 정치가 정도로 알고 있는 한국 학생들이 그의 러시아 내에서의 입지를 접하고 깜짝 놀라곤 한다.(...) 미완의 개혁가임에도 불구하고 외국에서도 이름이 높은 쟁쟁한 정치가들과 문필가들, 군주들을 제치고 러시아의 인물 2위에 선정된 사실은 러시아인들이 가지는 그 아쉬움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10]
스톨리핀의 농업 개혁의 결과 20세기 초 35억 뿌드[11]이던 곡물 수확량이 스톨리핀의 암살 이후인 1913년에는 50억 뿌드로 곡물 수확량이 40%가 증가했다. 이 가운데 44억 뿌드는 주로 부농 경영으로 수확한 것이었다. 6억 뿌드만이 지주 경작지에서 수확되었다. 곡물 경작에 의한 소득은 86%, 축산에 의한 소득은 108% 증가했다. '''1911년부터 1913년까지 러시아는 미국, 캐나다 그리고 아르헨티나를 전부 합친 것보다 28퍼센트가 더 많은 곡물을 수확했다.''' 또한 젬스트보와 농민토지은행 덕분에 러시아 농촌 각지에 여러가지 민영 협동조합이 생겨나며 급격히 성장했다. 이외에도 노동자들의 노동력 상실, 노령, 질병에 대한 보험, 의료지원 그리고 어린이와 미성년자들의 노동시간 제한에 관한 법안도 작성했지만, 이 때문에 근시안적인 수구 자본가들의 극심한 반대를 겪기도 했다. [12]
러시아 내전 이후 만신창이가 된 소련 경제를 복구시킨 신경제정책은 스톨리핀이 세워놓았던 경제정책[13]을 복붙하다시피 한 것이다.[14]
스톨리핀은 산업(농업), 사법, 행정기구에 걸쳐 광범위한 개혁을 단행했으며, 특히 극동지역의 가치에 주목하여 "러시아 독수리는 머리가 두개 달린 독수리다(한개는 서쪽, 한개는 동쪽)"라고 극동의 개발을 역설하였다.#[15] 특히 스톨리핀의 농지개혁은 레닌으로 하여금 "아마 나는 살아서 혁명을 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고 탄식하게 만들었을 정도였으나,[16] 암살로 스톨리핀의 개혁은 좌절되어 버리고 니콜라이 2세는 황후와 함께 라스푸틴을 감싸며 막장의 길로 달려나갔고,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과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키며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진다.

4. 같이보기



[1] Olga Borisovna Neidhart, 1859년 출생, 1944년 사망[2] 농노 해방 이후에도 러시아의 농업은 한동안 마을 공동체(미르) 단위의 공동 농업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서유럽의 자영농들에 비해서 생산성이 현저하게 낮았었다. 농노 해방 이후에도 정체되어 있던 러시아의 농업 생산성은 스톨리핀의 자영농 중산층 육성 정책 이후에야 비로써 괄목할 만한 생산성 향상이 이루어졌다.[3] 농민토지은행이라는 기관을 설립한 후 지주들의 토지를 자율적으로 매점하고 이를 농민들에게 판매하는 역할을 했다. 이 은행의 역할로 인해 혁명이나 몰수 없이도 지주의 소유지가 대폭 감소했다.[4] 러시아 전통 농촌 공동체가 땅을 이런 방식으로 배분하는 바람에 농민들은 영농 기술을 개발할 생각보다는 덮어놓고 애를 많이 낳아서 더 많은 땅을 분배받을 생각을 주로 했다고.[5] 암살을 뒤에서 조종한 사람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현재도 밝혀지지 못했다고 한다.[6] 농민과 도시민 사이의 평등한 권리 장전 및 자영농의 근로 의욕 향상을 통한 식량 생산 증대[7] 아르카디 드미트리비치 스톨리핀(1821~1899)[8] 여담으로 이당시 스톨리핀을 가르친 교수 중 한 명이 드미트리 멘델레예프이다.[9] земство,러시아 제국의 지방의회[10] 이는 한국인들이 전 경제수석이었던 김재익의 이른 죽음을 아쉬워하고 때로는 고평가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 둘은 모두 반동적 정치세력 밑에서 개혁적인 청사진을 제시했으며, 테러로 일찍 생을 마감했다.[11] Пуд, 러시아 제국의 질량 측정 단위, 1 Пуд = 16.3804964 kg[12] 심지어 니콜라이 2세도 스톨리핀의 부고 소식을 들은 후 “이제 더 이상 개혁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황후와 함께 내심 좋아했다고 한다.(...)[13] 자영농 지원을 통한 농업 생산성 향상[14] 1921~22년 사이에 기근에 빠졌던 소련은 신경제정책 이후에 기근을 탈출하고, 이후 신경제정책이 폐지되기 전까지 사이의 기간동안 잠시 호황(?...)에 접어든다.[15] 극동, 알타이, 시베리아, 중앙아시아로 이주하는 주민들에게 '''모든 체납금 탕감''', 기차표 가격 인하, '''5년 동안의 세금 면제, 무이자 대출''' 등 엄청난 특혜를 밀어주었다. 이주 도중에도 식량과 의료 원조를 제공했다.[16] 한편 스톨리핀은 개혁의 성과에 만족하며 "이대로 20년만 지나면 러시아는 몰라보게 달라질것이다"고 자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