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남철
申南徹
1903~?
1. 생애
190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3월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거쳐 1928년 법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1931년 졸업한 뒤에 경성제국대학 철학과 조수로 일하였는데, 이 무렵 조선사회사정연구소 회원이 되었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미야케 교수의 지도를 받아 마르크스 철학을 연구하였다. 그 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학회지에 헤겔과 관련된 논문을 내기도 하였다.[1]
보성전문학교 연구부에서 주최한 강연회에서 ‘최근 철학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1934년에는 「실존철학의 의의」와 「조선연구의 방법론」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 4월에는 제2회 철학연구회 공개강연회에 참석하여 ‘현상학적 세계관’을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2]
1935년에는 문예비평에도 참여하였고 1937년에는 논문을 여러차례 기고했었던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학회지인 『신흥』에 「역사철학의 기초론」을 또다시 발표하였다. 기자생활을 하다가 일제 말 경성제국대학 조교수를 지냈으며, 그 뒤에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1945년 8월 해방이 된 후 조선학술원 서기국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이때 민족문화연구소 연구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같은 해 12월 조선독립동맹 환영준비위원회에 참여하여 선전부원이 되었다.[3]
1946년 2월 좌익단체의 통일조직인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참석하였고, 여기에서 중앙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남조선신민당에 가입하였고, 학술원 기관지 『학술』에 논문 「역사의 발전과 개인의 실천」을 발표하였다. 이 무렵 개최된 문학자대회에서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이라는 특별보고를 하였고, 1947년 2월 조선과학자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현하의 과학 정세와 과학자의 임무’를 발표하였다.[4]
1948년 총 3권으로 이루어진 ‘역사철학’을 출간하였고, 같은 해 4월에 있던 남북회담을 지지하는 ‘남북회담 지지 108인 성명’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에서는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57년에 다시 한 번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재선되었으며, 1957년 9월 법제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북한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나던 숙청과정에 휘말려 1956년 8월 전원회의 석상에서 들고 일어난 반김일성 세력들을 숙청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던 1958년 3월에 열린 제1차 당대표자회에서 자유주의자로 비판을 받았다. 그 후 이로 인한 심적 고통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