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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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제 제1고등학교(現 도쿄대학 코마바캠퍼스 1호관)
舊制高等學校
旧制高等学校(일본 신자체 표기)
1. 개요
1.1. 교육내용
1.2. 상세
2. 역사
2.1. 고등중학교
2.2. 제1차 고등학교령(1894년)
2.3. 제2차 고등학교령(1918년)
2.4. 종전(1945년) 이후
3. 학교 일람
3.1. 넘버스쿨
3.2. 네임스쿨
3.4. 가쿠슈인 고등과
3.5. 공립고등학교
3.6. 사립고등학교
4. 기타
5. 예술작품 속의 구제고등학교
6. 한국인 출신자
7. 관련 문서


1. 개요


1894년 공포된 고등학교령에 의해 설립된 학교. 2차대전 패전 이후 1950년의 학제 개혁 때까지 일본제국 전국에 존재했던 고등교육기관. 구제고등학교는 전후 고등학교(신제 고등학교)와 같은 중등교육기관(중고등학교)[1]이 아닌, 지금의 대학교 1~2학년 정도에 상당하는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원래 일본의 구제대학은 유럽의 그것을 본따 만든 구제도쿄대학(1886년 제국대학으로 개편되었다가 도쿄제국대학을 거쳐 전후 도쿄대학이 되는) 시초이고[2] 초기의 교수진은 서양인들이 대부분이었기에, 학생들이 대학에서 수학하기 위해서는 외국어(특히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실력을 갖춰야 했는데, 그 외국어를 익히는 예비교육기관으로 만들어진 것이 구제고등학교의 출발인 (구제)도쿄대학 예비문(東京大學 預備門)이었다. 이 도쿄대학 예비문이 1886년 제국대학령에 이어 반포된 중학교령에 따라 고등중학교를 거쳐 1894년 고등학교령에 의거 개편된 것이 '''구제고등학교'''이다.
1945년 8월 2차대전 종전 당시를 기준으로 관립 32개교[3], 공립 2개교[4], 사립 4개교[5] 등 총 38개교가 있었다. 간혹 관립대학 예과 3개교[6]를 합쳐 총 41개교로 보기도 하나, 일반적으로 제국대학의 진학과정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구제고등학교는 38개교를 꼽는 것이 보통이다.[7] 이들 중에는 넘버스쿨 8개교와 제국대학예과 3개교가 최상급에 속했다고 한다.[8] 링크에는 구제고등학교 38개교 탐방기가 정리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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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당시 고등학교 분포 지도

1.1. 교육내용


제국대학 진학 준비과정인 구제고등학교의 대학예과(이후 고등과)는 제국대학 예과와 동일하게 고등교육의 기초교양을 가르쳤고 외국어 학습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초기 구제고등학교는 대학예과 외에도 의학부, 공학부 등의 전문학부까지 포함한 더 큰 교육기관이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당초 구제중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전문교육을 실시하는 4년제 학부(의학부, 공학부 등)와 제국대학 진학을 위한 교양교육을 실시하는 3년제 대학예과(이후 고등과로 개칭)가 별도로 존재했으나 이후 전자를 분리해 관립대학으로 승격시키거나 폐지하고 후자로만 이뤄진 3년제 대학 예과급 교육기관으로 변화되었다.
당시 한반도에는 구제고등학교가 없었지만, 경성제국대학예과를 설치하여 운영했으므로 구제중학교를 졸업한[9] 내지인(일본인)이나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조선인들이 바로 경성제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고등학교가 없었던 지방인 홋카이도홋카이도제국대학에도 예과가 설치되었고, 대만에는 다이호쿠고등학교(臺北高等學校)가 존재했지만 졸업생 중 의학부를 제외한 다이호쿠제국대학 진학자가 적어서 다이호쿠제국대학 예과를 별도로 설치하였다. 혼슈규슈의 제국대학 5곳은 예과를 설치하지 않고 구제고등학교 졸업자들을 최우선으로 하여 입학생을 모집하였다.[10]
문과, 이과로 분반했다고 한다. 독일의 김나지움을 본딴 교육기관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김나지움은 요즘으로 치자면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대학 저학년(교양과정)까지에 해당하는 중등교육기관이므로, 1:1로 비교할 수는 없다. 다만 교육내용이 대학 수준이라는 것에서 김나지움과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1.2. 상세


  • 제국대학에는 여학생의 입학도 가능했지만, 구제고등학교는 전부 남학교라 실질적으로 제국대학생의 대부분은 남학생이었다. 참고로 구제고등여학교구제중학교와 같은 급의 중등교육기관이었다.
  • 1886년 중학교령에서 1현1교 원칙하에 엄격하게 규정된 중학교의 설립 요건이 1891년 개정 중학교령에서 현내 복수 학교 설립이 가능해졌고 1899년 재개정 중학교령에서 사립 구제중학교 설립까지 허용되면서 중학교와 중학생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중학교 졸업생은 1895년(메이지 28년) 1170명에서 급격히 늘어 1915년(다이쇼 4년)에는 20852명에 이른다. 상급학교 진학열풍은 심화되었으나, 고등학교는 나고야의 제8고등학교 이후 추가로 설립되지 않아 고교 입시를 격화될 수밖에 없었다. 1918년 기준으로 구제중학교 졸업생 중 구제고등학교 지원자가 11833명이었는데 합격자는 2267명에 불과했다. 결국 대다수인 9566명은 눈물을 머금고 포기하거나 내년에 또 내년과 합격할 때까지 시험을 반복밖에 없었다고 한다(참조). 입시의 최고봉은 제국대학 입시가 아닌 구제고등학교 입시였던 것이다.
  • 고등중학교에서부터 1894년 이후 고등학교까지 관립고등학교의 입학정원과 제국대학의 입학정원 비율은 1918년 개정 고등학교령이 공포되기 이전에는 거의 1:1이었기에, 구제고교를 졸업하면 제국대학으로의 진학이 보장되었다. 다만 메이지 시대 후반인 1910년부터 이미 도쿄제대 법학부 등 인기학부는 지망자가 정원을 초과해 입시가 실시되기 시작했고, 다이쇼 말기에는 교토제대 법학부도 지원자가 모집 정원을 초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참조).
  • 1920년대에 당시 최고의 관립 의학전문학교들이 관립의과대학[11]으로 승격되었고, 이 관립의대들은 따로 예과를 설치하는 대신 구제고교 졸업자에게 수험자격을 부여하였다. 여기서 구제고등학교 진학=제국대학 진학 이라는 등식은 붕괴되었다. 어쨌거나 구제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제국대학이나 관립대학 중 최고 인기학교였던 관립의대 진학이 상당수[12] 보장되었으므로 언제나 고등학교 입시가 학생과 학부모들의 관심사였고, 재학생들의 프라이드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고 전해진다.
  • 그러나 제2차 고등학교령 반포(1918년) 이후 고등학교가 줄줄이 신설되면서 고교 졸업생 숫자가 급증하고, 제국대학 입학정원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1920년대부터는 입시 경쟁이 심화되었다. 1927년 당시 학부로 무시험 진학이 보장된 제국대학예과(홋카이도제대 예과, 경성제대 예과)[13]를 제외하고 24개 고등학교의 졸업예정자 숫자는 5377명에 달했는데,[참조] 1926년 제국대학 입학정원은 총합이 4744명으로,[14] 관립의과대학 5개교 모집정원 305명을[15] 합쳐도 5049명에 불과했다.[모집정원] 제국대학 기준으로는 13% 이상, 관립의대를 합쳐도 6% 이상이 탈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 제국대학 입시[과목] 경쟁의 격화로 고교 졸업 후 재수/삼수하는 학생들도 있었는데, 이들을 백선낭인(白線浪人)[16]이라고 불렀다. 구제고등학교의 학모에 하얀 선이 들어가서 붙은 별명이다. 결국 구제고등학교에 진학한다고 해서 입시가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1920년대에 고등학교 숫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대학입시 격화로 인한 재수생들이 사회문제가 되자, 정부는 제국대학의 정원을 늘리기 위해 기존에 도쿄제국대학교토제국대학에만 존재했던 문과 계열 학부들을 각 제국대학에 증설하기 시작했다. 1923년 도호쿠제국대학, 1925년 규슈제국대학, 1926년 경성제국대학 순서로 법문학부가 개설되어 신입생을 받았고, 1928년에는 다이호쿠제대에 문정학부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홋카이도제국대학 및 전쟁으로 인해 이학/공학 수요가 폭증하는 1930년대에 설립된 오사카제국대학, 나고야제국대학에는 1945년 종전시까지 문과계열 학부가 설치되지 않았다.
  • 제국대학들의 의학부와 도쿄제국대학의 법학부, 경제학부, 공학부 그리고 교토제국대학의 공학부 등 인기학부는 높은 경쟁률로 인해 구제고등학교 졸업생들 사이에서도 재수와 삼수까지 치러가며 빈번한 치열한 입시경쟁을 뚫어야 입학할 수 있었으나, 이외에는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조차도 구제고등학교를 졸업한 지원자 숫자가 모집정원 미달되는 상황이었고, 도호쿠제대, 규슈제대, 나고야제대는 구제고등학교 졸업자만으로는 정원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홋카이도제대 예과와 같은 제국대학예과 부설을 시도했으나, 지역내에 구제고등학교가 존재한다는 이유로 반려당하여 구제전문학교 출신의 '방계입학자'를 다수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17] 일본어 위키백과 참조.
  • 구제고등학교를 거치지 않더라도 고등상업학교 등의 구제전문학교를 거쳐서 제국대학에 입학할 수는 있었다.[18] 하지만 이들은 신입생 선발 순위에서 당연히 구제고등학교 출신에 밀려 2순위에 있었고, 1차모집 미달분에 대해 실시하는 2차모집에만 지원할 수 있었다.[19] 때문에 의학부/공학부 등 인기학부 진학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 이렇게 구제고등학교 및 제국대학예과를 제외한 다른 경로를 통해 입학한 학생들을 제국대학에서는 방계입학자라고 했는데, 인기가 있었던 도쿄제국대학과 교토제국대학의 일부 학부[20] 그리고 예과가 부설되어 있던[21] 4개교(홋카이도제국대학, 경성제국대학, 다이호쿠제국대학)를 제외한 나머지 4곳의 제국대학(도호쿠제국대학, 규슈제국대학, 오사카제국대학, 나고야제국대학) 학생들 중에는 이러한 방계입학자들이 상당수 존재했다고 한다.
  • 각 고등학교는 애교심과 자부심 폭발하게 만드는 교가들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38개 고등학교의 교가 모음은 링크 참조.

2. 역사



2.1. 고등중학교


구제고등학교의 출발은 중학교령(1886년)에 의거 설립된 7곳의 관립 고등중학교이다. 1886년 3월 2일 '제국대학령' 반포로 구제 도쿄대학을 모체로 제국대학을 설립하며 동년 4월 10일 '중학교령'을 반포해 제국대학 진학예정자에게 예비교육을 실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등중학교를 설립하였다.
고등중학교는 구제 도쿄대학 예비문[22]을 모체로 한 제1고등중학교를 필두로 전국 각지를 5개 지역으로 나누어 각각을 담당한 고등중학교를 설립하고, 가장 세력이 강한 번이었던 조슈와 사쓰마에서 각각 야마구치와 가고시마에 1개교씩을 더해 7개교가 존재했다. 이 고등중학교에는 제국대학(도쿄제국대학) 진학 예비교육을 실시하는 2년제 본과[23]와 함께 의학·법학·공학 등의 분야에서 지역사회에 필요한 고위 전문가와 상급 실무지도자를 양성하는 3년제 전문과[24]를 두어 지방의 최고학부로 기능하도록 의도하였다.
  • 제1고등중학교 - 1886년 4월 도쿄대학 예비문을 개칭
  • 제3고등중학교 - 1886년 4월 오사카에 있던 대학분교를 개칭
  • 야마구치고등중학교 - 1886년 11월 야마구치중학교를 개편
  • 제2고등중학교 - 1887년 4월 센다이에 설립
  • 제4고등중학교 - 1887년 4월 가나자와에 설립
  • 제5고등중학교 - 1887년 5월 구마모토에 설립
  • 가고시마고등중학조사관 - 1887년 11월 가고시마중학교조사관을 개편

2.2. 제1차 고등학교령(1894년)


위 7곳의 고등중학교들이 고등학교령(1894년)에 의거 고등학교로 개편되어 출범하였다. 이에 따라 제국대학의 예비교 역할을 하던 고등중학교 본과는 고등학교 대학예과로 개칭되며 수업연한이 1년 증가된 3년으로 연장되었고, 고등중학교 전문과도 1년 늘어난 4년제 고등학교 전문학과가 되나 실제로는 의학부에서도 약학과를 제외한 의학과만 4년제로 이행하였다.
이듬해인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로 청일전쟁을 종결한 일본제국청나라로부터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받게 되었는데, 사이온지 긴모치가 이 전쟁배상금을 이용해 제3고등학교를 교토제국대학으로 승격시키자고 주장하여 채택되었다. 이에 따라 전문학부로만 구성되어있던 제3고등학교에 대학예과를 현재 교토대학 요시다캠퍼스 자리에 신설하고 제3고등학교 법학부와 공학부를 모체로 1897년 교토제국대학이 설치된다. 전문학부로만 구성되어있던 제3고가 대학예과로 변화하면서, 다른 고등학교들도 전문학부를 구제전문학교로 독립시키고 고등학교는 다시 '''대학예과'''(1918년 제2차 고등학교령 이후 '고등과')로 변모하게 된다. 구제고등학교 발족 당시에는 법학부, 공학부, 의학부 등의 전문학과(4년)을 主로 삼고, 장래 제국대학 진학을 위한 대학예과(3년)를 副로 마련하기로 했지만, 실제로는 전문학과보다 대학예과가 주체가 되었던 것이다.
1901년 각 고등학교들에 남아있던 의학부가 구제전문학교인 의학전문학교로 다시 분리되었고[25] 1906년 구마모토의 제5고등학교 공학부가 구마모토고등공업학교로 독립하면서 구제고등학교의 전문학부는 완전히 소멸하였다. 동시에 고등학교의 지방 최고학부로서의 역할은 교토제국대학, 도호쿠제국대학, 규슈제국대학 등 지방 중심지에 설치되는 제국대학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2.3. 제2차 고등학교령(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으로서 명실상부한 세계 열강으로 자리매김한 일본 제국의 제국의회는 제국대학, 관립대학과 구제전문학교 등 고등교육기관의 대폭 확대를 골자로 한 '고등제학교창설급확장계획'을 채택한다. 그 일환으로 1918년 12월 6일 개정반포되어 1919년 4월 1일부 시행된 제2차 고등학교령에서는 그 목적을 "남자의 고등보통교육을 완성하는 기관"이라 정의하여 심상 소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하는 심상과(4년제)와 중학교 4년 수료자를 대상으로 하는 고등과(3년제)을 갖춘 7년제 고등학교를 기본으로 하되 예외적으로 고등과로만 이루어진 학교도 둘 수 있게 하여 구제고등학교의 대학예과가 '''고등과'''로 개칭되었다. 여러 문제로 7년제 고등학교가 기본이 되지는 못했으나, 이 시기에 구제중학교를 기반으로 고등과를 병설하여 고등학교로 승격하는 학교들이 생겨났고 학교 숫자도 증가하였다. 관립고교 중 도쿄고등학교, 다이호쿠고등학교 2개교와 나니와고등학교(오사카부), 도야마고등학교(도야마현), 부립고등학교(도쿄부) 등 공립 3개교, 사립 4개교는 모두 7년제로 만들어졌고 가쿠슈인 고등과(중등과 5년, 고등과 3년 도합 8년제)도 1921년부터 구제고등학교와 동격으로 인정되었다.
다만 구제중학교와 구제고등학교를 합쳐 7년제로 수학연한을 단축하면서 보다 적은 재정 부담으로 지방 각지에 고등학교를 증설하려던 일본제국이 당초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는 실패하면서 7년제 중고일관 고등학교 제도는 정착되지 못했다. 기존 고등학교들은 고등과 3년으로만 구성된 원래의 체제를 계속 유지했고, 신설된 7년제 관립/공립고등학교[26]들도 최초의 7년제 고등학교인 도쿄고등학교가 1934년 심상과를 폐지하는 것을 시작으로 대부분 구제중학교에 해당하는 심상과(4년제)를 폐지하고 고등과(3년)로만 구성된 3년제 고등학교로 개편되었다. 그 이후 신설되는 관립/공립고등학교들은 3년제 고등학교 체제를 취했다.[27] 그러나 막대한 재정 부담이 힘겨웠던 사립고등학교 네 곳은[28] 개교시부터 종전시까지 심상과를 통합한 7년제 시스템을 유지하였다.

2.4. 종전(1945년) 이후


1947년 제국대학령이 국립종합대학령으로 개정되면서 구제고등학교의 본과였던 제국대학들이 각지의 고등교육기관을 흡수해 신제대학으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인근의 구제고등학교들이 교양부로 흡수(제1고등학교 및 도쿄고등학교 → 도쿄대학 교양부)[29]되었다.
조선, 대만, 관동주 등 외지에 있던 구제고등학교(경성제대예과, 다이호쿠제대예과, 다이호쿠고교, 여순고교 등) 생도들은 내지의 각 구제고등학교로 전입학하였다.[학교별전입인원] 교원들 또한 내지의 고교나 제국대학으로 자리를 많이 옮겼지만, 일부는 동아동문서원(아이치대학) 같은 신설학교 창설의 주역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참조)
그리고 1950년 3월부로 일본의 학제가 미국식 6-3-4-4제로 바뀜에 따라 제국대학에 흡수되지 않은 고등학교들은 관립대학 교양과정으로 재편되거나, 주위의 구제전문학교 등과 통합되어 신제 국립대학을 창설하며 문리학부(법문학부, 이학부 등)를 구성했다. 궁내성 소관 관립학교에서 재단법인(1951년 학교법인)으로 전환된 가쿠슈인 고등과와 기타 사립 고등학교 4개교는 각각 개별적으로 사립대학으로 전환되었고(리버럴아츠 5학원), 도쿄도 내에서는 도쿄 4대학 그룹을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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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별 상세 내용은 하단의 고교 일람 참조.

3. 학교 일람


1945년 8월 종전 당시 기준으로 38개교가 존재.
  • 관립 32개교
- 넘버스쿨 8개교[31]
- 네임스쿨 20개교[32]
- 제국대학예과 3개교[33]
- 가쿠슈인 고등과
  • 공립 2개교[34]
  • 사립 4개교[35]

3.1. 넘버스쿨


고등중학교 시절부터 이어진 최초의 관립고등학교들로, 숫자를 따서 제1고등학교(도쿄도), 제2고등학교(센다이시), 제3고등학교(교토시)... 제8고등학교(나고야시)까지 생겨 '''넘버스쿨'''(番號校)로 불렸다.[36] 관립고등학교들 사이에는 역사의 길고 짧음은 있어도 상하 서열은 없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넘버 스쿨(특히 제1고) 쪽이 역사가 길고 유력 동문들이 많았기 때문에 더 무게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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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고등학교
  • 제1고등학교 - 도쿄도 분쿄구, 메구로구도쿄대학 교양학부[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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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고등학교[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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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고등학교
  • 제3고등학교 - 교토부 교토시교토대학 교양부[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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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고등학교[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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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고등학교[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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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6고등학교[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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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고등학교조사관[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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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고등학교[44]

3.2. 네임스쿨


구제 관립고등학교 중 1918년 12월 개정 고등학교령 공포 후 설립된 20개의 네임스쿨(地名校) 고등과가 있었다.
  • 니가타고등학교[45] - 니가타현 니가타시니가타대학 인문학부/이학부
  • 마츠모토고등학교[46] - 나가노현 마츠모토시신슈대학 문리학부[47]
  • 야마구치고등학교[48] - 야마구치현 야마구치시야마구치대학 문리학부
  • 마츠야마고등학교[49] - 에히메현 마츠야마시에히메대학 문리학부
  • 미토고등학교[50] - 이바라키현 미토시이바라키대학 문리학부
  • 야마가타고등학교[51] - 야마가타현 야마가타시야마가타대학 문리학부
  • 사가고등학교[52] - 사가현 사가시사가대학 문리학부
  • 히로사키고등학교[53] - 아오모리현 히로사키시 → 히로사키대학 문리학부
  • 마츠에고등학교[54] - 시마네현 마츠에시시마네대학 문리학부
  • 도쿄고등학교[55] - 도쿄부 나카노구도쿄대학 교양학부[56]
  • 오사카고등학교[57] - 오사카부 오사카시오사카대학 남교(南校)[58]
  • 우라와고등학교[59] - 사이타마현 우라와정 → 사이타마대학 문리학부
  • 후쿠오카고등학교[60] -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규슈대학 교양부[61]
  • 대만총독부 다이호쿠고등학교[62] - 다이호쿠주(臺北州) 다이호쿠시(臺北市) → 국립타이완사범대학[63]
  • 시즈오카고등학교[64] -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시즈오카대학 문리학부
  • 고치고등학교[65] - 고치현 고치시고치대학 문리학부
  • 히메지고등학교[66] - 효고현 히메지시고베대학 문리학부
  • 히로시마고등학교[67] -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히로시마대학 교양부
  • 관동주청 여순고등학교[68] - 관동주 료준시(旅順市) → 폐교[69]
  • 도야마고등학교[70] - 토야마현 토야마시도야마대학 문리학부

3.3. 제국대학예과


홋카이도, 조선, 대만제국대학에는 부속 예과가 존재했다. 이 제국대학예과 3개교는 해당 제국대학 관제에 의거해 설립되어 각 제국대학 소속기관으로 존재했다는 점에서, 고등학교령을 근거 법령으로 설립된 타 구제고교들과 법제상의 차이가 있었으나, 교육내용은 차이가 없었다. 예과 수료생은 각 제국대학 관제에 의거해 소속 제국대학 학부(본과)로 무시험 진학이 보장되었으므로[71] 도쿄제국대학이나 교토제국대학 인기학부 진학을 위해 수험 공부(주로 외국어 과목)를 해야했던 여타 구제고교생들과 달리 예과 시절부터 철학/문학 서적을 탐독하는 등 여유로운 예과 생활을 즐겼다고 한다.[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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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홋카이도제국대학 예과[73]
  • 홋카이도제국대학 예과[76] - 메이지 43년(1910년) 칙령 제447호 도호쿠제국대학 관제 제12조에 의거 설치,[77] 다이쇼 7년(1918년) 칙령 제44호 홋카이도제국대학 관제 제11조에 의거 개편.[78] 홋카이도 삿포로시 키타구홋카이도대학 법문학부[79], 교양부(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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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제국대학 예과
  • 경성제국대학 예과[80] - 다이쇼 13년(1924년) 칙령 제103호 경성제국대학 관제 제4조에 의거 설치.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청량리[81]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82] 의예과[83], 교양과정부(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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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호쿠제국대학 예과
  • 다이호쿠제국대학 예과[84] - 쇼와 16년(1941년) 칙령 제388호 다이호쿠제국대학 관제 제16조의2에 의거 설치.[85] 다이호쿠주(臺北州) 시치세이군(七星郡) 시린마치(士林街)[86]국립타이완대학 선수반(先修班, 우리나라의 의예과)[87]

3.4. 가쿠슈인 고등과


제2차 고등학교령 공포(1918년 12월) 이후 초등학과(6년제), 중등학과(6년제), 고등학과(2년제)[88]로 구성된 가쿠슈인[89] 고등학과가 고등과로 개칭되며[90] 구제고등학교와 동격, 동급의 학교가 되었다.[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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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쿠슈인 고등과[92][93]
  • 가쿠슈인 고등과 - 도쿄부 도시마구가쿠슈인대학[94]

3.5. 공립고등학교


제2차 고등학교령(1918년)에 의거해 공립고등학교의 설립도 가능해졌으나, 그 주체는 홋카이도·부·현으로 한정되어 도도부현당 1개교 원칙하에 진행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공립고교는 토야마현[95], 오사카부[96]), 도쿄부[97] 3곳의 지방에 설립되었고 3개교 모두 심상과(4년)와 고등과(3년)을 병설한 7년제 고등학교로 설립되었다. 그러나 도야마고등학교는 1943년 관립으로 이관되며 심상과를 폐지했고, 나니와고등학교는 1944년 심상과를 폐지한 3년제 고교가 되어 종전시까지 7년제 고교로 남아있던 곳은 (도쿄)부립고등학교가 유일했다.[98]
  • [99] - 1943년 3월 문부성 소관의 관립 도야마고등학교로 개편.
  • 오사카부 나니와고등학교[100] - 오사카부 토요노군 토요나카정오사카대학 일반교양부 북교(北校)[101]
  • 도쿄부부립고등학교[102] - 도쿄부 치요다구, 메구로구도쿄도립대학 인문학부/이학부(고등과)[103]

3.6. 사립고등학교


제2차 고등학교령(1918년)에 의거해 공립/사립고등학교 설립이 가능해졌으나, 그 요건이 사립학교는 '설비자금을 제외하고 50만엔 이상의 기본재산을 문부대신에 공탁할 수 있는 재단법인'으로 매우 까다로웠다(문부성 학제120년사 참조). 이 때문에 구제고교로 설립된 사립고등학교는 4개교에 그쳤고, 모두 심상과(4년)와 고등과(3년)을 병설한 7년제 고등학교로 설립되어 1945년 종전시까지 7년제로 유지되었다. 3년제 고등학교가 7년제 고등학교(중고일관)보다 더 높이 평가받았고, 관립이 우선하고 사립은 선호되지 않는 일본의 특성상 7년제인 이 사립고등학교들은 이질적인 존재로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대학 입시 성적도 좋지 않아서[104] 치열한 입시를 뚫어야 하는 도쿄제대 진학자는 소수였고 상당수는 무시험 진학이 가능했던 교토제대 문학부 등으로 진학했다고. 이 4개 고교는 전후 학제개혁에 따라 모두 신제대학으로 개편되었다(리버럴아츠 5학원 참조).
[image]
▲ 무사시고등학교[105]
  • 사립 무사시고등학교[106] - 도쿄부 네리마구무사시대학[107](고등과)[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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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난고등학교[109]
  • 사립 코난고등학교[110] - 효고현 모토야마무라(本山村) → 코난대학[111](고등과)[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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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이케이고등학교
  • 사립 세이케이고등학교[113] - 도쿄부 무사시노시세이케이대학[114](고등과)[115]
[image]
▲ 세이조고등학교
  • 사립 세이조고등학교[116] - 도쿄부 기타타마군세이조대학[117](고등과)[118]

4. 기타


제국대학으로 진학하는 코스가 아니므로 일반적으로 '구제고교'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지만, 구제고등학교에 대한 설명 중 간혹 관립대학도쿄상과대학, 여순공과대학(료준공과대학), 고베상과대학 예과 3개교를 포함하여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旧制高等学校記念館 참조.
이외에도 구제고등학교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여러 공립/사립 구제대학들이 자체적으로 예과를 설치해 운영했다고 한다. 1918년 공포된 대학령에 따르면 구제전문학교에서 승격된 공립/사립대학들 역시 고등학교 졸업자를 뽑아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구제고교생들이 제국대학 또는 관립의과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지원할 리 만무했다. 그래서 주로 구제전문학교 졸업자를 입학시키는 동시에, 구제중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하는 예과를 설치 운영하며 예과-본과 체제를 갖추게 된다.[119]

4.1. 관립대학 예과


  • 도쿄상과대학[120] 예과[121] - 도쿄시 칸다구 → 구제 도쿄상과대학이 신제 히토쓰바시대학으로 개편되며 1950년 예과 폐지.
  • 여순공과대학[122](료준공과대학) 예과[123] - 관동주 뤼순소련군8월의 폭풍 작전으로 만주가 점령당한 후 1945년 폐교
  • 도쿄공업대학[124] 특설예과[125] - 도쿄부 메구로구 → 구제 도쿄공업대학이 1949년 신제 도쿄공업대학으로 개편되며 기존 재학생이 모두 졸업한 1952년 예과(부속 예비부) 폐지.
  • 고베상업대학[126] 예과[127] - 효고현 고베시 → 고베상업대학(고베경제대학)이 고베대학으로 통합되며 1950년 예과를 고베대학 문리학부・교양부 미카케분교(御影分校)로 개편.[128]
  • 신궁황학관대학(고각칸대학)[129] 예과[130] - 미에현 이세시미군정에 의해 신궁황학관대학이 1946년 폐교[131]
이외에 관립대학 중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관립의과대학 6개교는 제국대학과 함께 '''구제고등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입시를 실시하여 신입생을 충원했다(1926년 기준 각 관립의대별 60명선).[모집정원][132]고등사범학교 졸업생들을 교육하던 관립문리과대학 2개교(도쿄, 히로시마)는 그 설립 모체였던 고등사범학교가 산하에 존치되고[133] 기타 고등사범학교/여자고등사범학교들도 계속 신입생 자원을 공급해주었기 때문에 별도의 예과를 두지 않았다.[134]

4.2. 공립대학예과


  • 오사카부 오사카의과대학[135] 예과[136] - 오사카부 오사카시부립 오사카의과대학이 오사카제국대학으로 승격되는 1931년 예과 마지막 신입생(1928년 입학)이 졸업하는 1931년 예과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부립 나니와고등학교 설립.
  • 아이치현 아이치의과대학[137] 예과[138] - 아이치현 나고야시 → 1931년 관립으로 이관되어[139] 예과 신입생 모집을 정지하고 기존 재학생이 모두 졸업하는[140] 1933년 예과 폐지.
  • 교토부 교토부립의과대학[141] 예과[142] - 교토부 교토시미군정에 의한 학제개혁에 따라 1951년 폐지.
  •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의과대학[143] 예과[144] -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 → 1929년 관립으로 이관되어[145] 1935년 예과 폐지.
  • 오사카시 오사카상과대학[146] 예과[147] - 오사카부 오사카시[148]미군정에 의한 학제개혁에 따라 1949년 신제 오사카시립대학이 발족하며 예과 신입생 모집을 정지하고, 1950년 예과 폐지.[149]

4.3. 사립대학예과


사립대학에는 1945년 종전 당시 기준으로 게이오기주쿠대학, 와세다대학, 메이지대학 등 28개교에 예과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링크 참조.

5. 예술작품 속의 구제고등학교


  • 작가 이병주의 <지리산>을 보면 진주중학교를 졸업한 주인공 이규가 교토의 제3고등학교를 다니는 장면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작중에서는 삼고(三高)라고 나온다. 학교에 대한 자부심과 우러러 보는 주변의 시선을 잘 알 수 있다. 주인공은 프랑스어반을 졸업하고 도쿄대학에 진학했으나, 태평양 전쟁 말기에 강제 병역을 피해 지리산에서 빨치산생활을 잠시 한다.

6. 한국인 출신자


고교졸업 후 제국대학으로 자동 진학하게 되다보니 자연히 이들 대부분은 일본 본토의 제국대학 출신자이다. 하지만 주요한과 같은 예외도 있었다. 일본인 출신자까지 언급했다가는 문서가 상당히 길어질 우려가 있기에 한국인 출신자만 열거한다. (가나다순)
  • 계광순 - 마쓰야마고교 졸업. 국회의원
  • 권녕대 - 세이조고교 졸업. 물리학자
  • 권중휘 - 3고 졸업. 서울대 총장
  • 김상협 - 야마구치고교 졸업. 국무총리, 고려대 총장[150]
  • 김연수 - 3고 졸업. 삼양사 창업주
  • 김준연 - 6고 졸업. 정치인
  • 도상록 - 6고 졸업. 서울대 교수. 월북.
  • 리승기 - 마쓰야마고교 졸업. 교토제대 교수. 서울공대 학장. 월북.
  • 박석윤 - 3고 졸업. 일제치하 관료. 야구인
  • 박종태 - 미토고교[151] 졸업. 국회의원
  • 박준규(1925) - 마쓰야마고교 졸업. 국회의장
  • 서돈각 - 마쓰에고교 졸업. 동국대 총장.
  • 유기천 - 히메지고교 졸업. 서울대 총장
  • 유억겸 - 3고 졸업. 연전 교장, 미군정기 문교부장관
  • 윤일선 - 6고 졸업. 서울대 총장
  • 윤종화 - 사가고교 졸업. 일제 관료.
  • 윤천주 - 4고 졸업. 문교부 장관, 서울대 총장
  • 윤태동 - 6고 졸업. 경성제대 교수, 만주국 간도성장
  • 이양하 - 3고 졸업. 서울대 교수, 수필가
  • 이재철(李在澈, 1923~1999) - 7고 졸업. 교통부 차관, 인하대, 국민대, 중앙대 총장을 역임한 인물. 이명희의 부친
  • 이한기 - 4고 졸업. 국무총리 서리
  • 이해익 - 마쓰야마고교 졸업. 경기도지사, 농림부장관.
  • 이호 - 사가고교 졸업. 내무장관
  • 이효상 - 야마구치고교 졸업. 국회의장
  • 인태식 - 야마구치고교 졸업. 재무장관
  • 장경근 - 3고 졸업. 국회의원
  • 장경학 - 마쓰야마고교 졸업. 동국대 교수
  • 정광현 - 6고 졸업. 서울법대 교수
  • 주요한 - 1고 졸업. 시인, 정치인. 3.1운동을 계기로 중국으로 건너가는 바람에 제국대학 출신이 아니다.
  • 최병우 - 고치고교 졸업. 언론인.
  • 최하영 - 마쓰에고교 졸업. 국회의원, 일제 관료.

7. 관련 문서



[1] 오늘날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친 개념은 그냥 '중학교'로 불렀으며 지금은 이것도 '구제중학교'로 부른다.[2] 그래서 이 구제고등학교도 영어권의 'High school' 개념이 아닌, 독일어 'Hochschule'의 번역명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3] 넘버스쿨 8개교, 네임스쿨 20개교, 제국대학예과 3개교, 가쿠슈인 고등과.[4] 나니와, 부립[5] 무사시, 코난, 세이케이, 세이조. 이 4개 사립고교는 전후 신제대학으로 개편되어, 마찬가지로 사립대학인 가쿠슈인대학이 된 가쿠슈인 고등과와 함께 리버럴아츠 5학원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 중 간사이의 코난대학을 제외한 나머지 4개교는 도쿄 4대학 연합을 형성해 매우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6] 도쿄상과대학, 여순공과대학, 고베상업대학의 예과[7] 관립대학 외에 기타 공립대학과 사립대학도 구제중학교 졸업 학력을 가진 사람들을 선발해 교육하는 예과를 부설한 경우가 다수 존재했으나 구제고등학교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본 문서에서는 통설인 구제고교 38개교설을 취하고 기타 관립대학예과 등에 대해서는 간략히 설명한다. 학교 목록은 정종현,「제국대학의 조센징」, 휴머니스트, p.67의 편제를 인용하였다.[8] 일본의 구제고등학교기념관 관람기 참조.[9] 구제고등학교 입학시험 응시자격은 구제중학교 4년 수료였으며 이를 이유로 경성제국대학 예과는 개교시 2년제를 취하였으나, 1934년 3년제로 예과의 수학 연한을 연장하면서 구제고등학교와 마찬가지로 구제중학교 4년 수료자 이상에게 응시 자격을 부여하였다.[10] 예를 들어, 조선에서 경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이태규는 일본 본토의 제국대학에 바로 진학할 수 없었고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를 거쳐서 교토제국대학에 진학했다. 같은 교토제국대학 진학자인 장경학 또한 경복중학을 졸업한 후 도일, 구제 마츠야마고교로 진학하였다. 마츠야마고교는 실력만 있으면 조선 유학생도 입학허가가 상대적으로 쉬웠다는 듯하다.[11] 니가타의과대학, 오카야마의과대학, 치바의과대학, 가나자와의과대학, 나가사키의과대학, 구마모토의과대학. 이들을 현재 일본에서 구6의대(旧六医大)라고 한다.[12] 바로 아래에서 서술하는 바와 같이 고교졸업자의 수가 대학 입학정원을 초과하여 입시경쟁과 백선재수생 문제가 나날이 심화되었다.[13] 1927년 졸업예정자 기준으로 홋카이도제국대학 예과는 농학부(120명), 의학부(80명), 공학부(120명)로 진학할 320명을 선발해 교육했고, 경성제국대학 예과는 법문학부(80명), 의학부(80명)로 진학할 160명을 선발해 교육했다. 예과를 졸업하지 못한 중도탈락자(질병, 사망 등)분의 결원은 우선 내지의 구제고등학교 졸업생으로 충원했다. 홋카이도제국대학 예과는 1907년 도호쿠제국대학농과대학 예과시절 정원 100명으로 출발해 1919년 의학부 설치와 함께 200명으로 배증되어 영어반 80명(2개조), 독어반 120명(3개조)으로 구성되었으며, 공학부 설치로 인해 1922년부터 320명으로 증원되어 農類영어반 80명, 農類독어반 40명, 醫類(모두 독어) 80명, 工類(모두 영어) 120명이 되었다. 1924년 입학생부터는 農類는 모두 영어반으로 편성되어 영어 240명(6개조), 독어 80명(2개조)이 되었다(홋카이도대학 논문 11~12쪽 참조). 경성제국대학 예과는 당시 법문학부로 진학할 문과 80명은 영어, 의학부로 진학할 이과 80명은 독일어를 제1외국어를 기본으로 하고 학생 희망에 따라 제1외국어를 독일어/영어로 바꿀 수 있게 하였다(경성제국대학예과규정 제5~6조 참조)[참조] [image][14] 도쿄제대 2363명, 교토제대 1381명, 규슈제대 608명, 도호쿠제대 392명 등. 홋카이도제대경성제대는 부속예과 졸업생으로 신입생을 충원했고, 다이호쿠제국대학오사카제대나고야제대는 1927년 당시 아직 설립되기 이전인 상황이었다.[15] 니가타의대 60명, 오카야마의대 61명, 치바의대 61명, 가나자와의대 60명, 나가사키의대 63명.[모집정원] A B [image][과목] 제국대학의 대표적인 학부들의 입시 과목은 다음과 같았다. 도쿄제대 법학부: 영문일역, 일문영역의 논문식 시험 / 도쿄제대 이학부: 외국어, 수학, 역학, 물리 / 규슈제대 공학부: 수학 및 역학, 물리학, 화학 / 규슈제대 의학부: 외국어(영, 독, 불 중 택2), 수학, 물리, 화학, 동식물학.[16] 백선은 말그대로 하얀선으로 구제고등학교의 제모에 흰 줄이 둘려 있었음을 빗댄것이며, 낭인(로닝)은 떠돌이 무사를 일컫지만, 속어로 일본어에서는 지금도 재수생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구제고등학교 입시 재수생이라는 말. [17] 일본어 위키백과의 '제8고등학교' 항목을 보면 나고야제국대학을 설립하면서 제8고 학생들이 다수 진학할 것을 기대했으나 정작 제8고 학생들은 신설 나고야제대 보다는 도쿄제대교토제대로 지원을 계속하여 미달 문제가 심각했고, 방계입학자를 대량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대만총독부 역시 다이호쿠제국대학 설립 시 다이호쿠고등학교 학생들의 지원을 예상하고 그 졸업생에게 예과처럼 최우선 입학기회를 부여하였으나, 인기학부인 의학부 및 특화에 성공해 그럭저럭 정원을 채워갔던 이농학부와 달리 문정학부는 다이호쿠고등학교 졸업생들로는 정원의 20~30% 밖에 못 채워서 일본 내지의 구제전문학교 출신 방계입학생들을 다수 받다가 결국 다이호쿠제국대학 예과를 설치하게 되었다고 한다.[18] 도호쿠제국대학 설립 당시에는 센다이에 신설되는 이과대학의 미달이 확실시되었기 때문에 고등공업학교 등 구제전문학교 졸업생 및 중학교/사범학교 교원자격증 소지자(고등사범학교 졸업생)에게 입학시험 응시자격을 부여했다고 한다. 이 때 지원자와 합격자 중 최다는 고등상업학교 졸업자였다고 한다.[19] 1925년 규슈제대 법문학부 창설 당시 신입생 모집은 2월 15일에 마감된 1차 모집에서 고등학교 졸업자 및 학사학위소지자(제국대학 졸업자)를 선발해 우선입학자로 결정해 놓고, 이후 3월 31일까지 실시된 2차 모집에서 구제고등학교과 함께 구제전문학교 출신자에게까지 입시자격을 부여하였고 미달을 전부 채웠다고 한다(2차모집 경쟁률 2.5:1) 규슈대학 100년사 참고.[20] 심지어 교토제대의 경우도 문학부 같은 경우는 미달이 기본이라 연희전문학교 출신인 송몽규가 입학자격검정시험을 통과하여 선과생으로 입학하기도 했다.[21] 경성제대의 경우 학부 학생들 중 경성제대 예과 출신이 90% 이상을 점유했고, 경성제대 예과 출신이 아닌 자들을 전부 비예과로 분류하였는데 이 비예과생 중 80~90%가 내지(및 소수의 대만, 관동주) 소재 구제고등학교 졸업생들이었다고 한다. 법문학부 조선사학전공 이인영, 이공학부 남기동 선생 등이 일본 내지의 고등학교 졸업 후 경성제대로 진학한 케이스이다(경성제대 동문 참조). 이외에 구제고등학교가 아닌 다른 학교 출신으로 본과에 진학한 방계입학생의 비율은 전체 학생 중 2~3%에 불과했다고 한다.[22] 1877년 도쿄가이세이학교(동경개성학교, 東京開成學校)와 도쿄의학교(東京醫學校)를 통합하여 구제 도쿄대학을 설립하면서, 기존 가이세이학교 보통과(예과)를 관립도쿄외국어학교와 4년제 도쿄대학 예비문으로 분리하여 구제 도쿄대학 중 3학부(법학부, 문학부, 이학부)의 진학예정자를 대상으로 예비교육을 실시하는 예과기관으로 삼은 것으로 1882년 의학부의 예과도 흡수 통합하여 명실상부한 구제 도쿄대학의 예과가 된다.[23] 제1부(법학부 문학부 진학예정자), 제2부(이학부 공학부 농학부 진학예정자), 제3부(의학부 진학예정자)[24] 의학부, 공학부, 법학부(법학부는 제3고등중학교에만 설치)[25] 제1고등학교 의학부는 치바의학전문학교로 독립하여 이후 신제 치바대학의 모체가 되었고, 제2고등학교 의학부는 센다이의학전문학교로 독립했다가 이후 도호쿠제국대학 의학전문부로 재흡수되었다. 제3고등학교 의학부는 오카야마의학전문학교로 독립하여 신제 오카야마대학의 모체가 되었고, 제4고등학교 의학부도 가나자와의학전문학교로 독립했다가 신제 가나자와대학에 의학부로 통합되었다. 제5고등학교 의학부 역시 나가사키의학전문학교로 독립하여 전후 구마모토대학으로 승격된 제5고등학교 대학예과와 별개 대학인 나가사키대학의 모체가 되었다.[26] 도쿄고등학교, 대만총독부 다이호쿠고등학교 등 관립 2개교, 오사카부립나니와고등학교, 도야마현립도야마고등학교, 도쿄부립고등학교 등 공립 3개교.[27] 1945년 8월 종전 당시를 기준으로 7년제로 남아있던 학교로는 관립으로 대만총독부 다이호쿠고등학교와 공립으로 도쿄부립고등학교 등 총 2개교에 불과했다.[28] 무사시, 코난, 세이케이, 세이조[29] 제1고등학교는 도쿄대학 교양학부가 되어 현재 도쿄대학 코마바 캠퍼스가 되었다.7년제였던 도쿄고등학교의 심상과(4년)는 고등학교에서 분리되어 오늘날 도쿄대학 교육학부 중등교육학교가 되었다.[학교별전입인원] [image] 주로 서일본, 특히 규슈 지방 출신이 많았던 경성제대의 학생 구성이 반영되어있다.[30] 출처 [31] 제1~8고등학교.[32] 설립 순서대로 니가타, 마츠모토, 야마구치, 마츠야마, 미토, 야마가타, 사가, 히로사키, 마쓰에, 도쿄, 오사카, 우라와, 후쿠오카, 다이호쿠, 시즈오카, 고치, 히메지, 히로시마, 여순, 도야마(1943년 공립에서 관립 이관).[33] 홋카이도제국대학예과, 경성제국대학예과, 다이호쿠제국대학예과.[34] 도야마현립, 오사카부립 나니와, 도쿄부립 등 3개교(모두 7년제)가 설치되어 이 중 도야마현립은 1943년 관립 도야마고등학교로 개편.[35] 무사시, 코난, 세이케이, 세이조. 모두 7년제로 개교, 1945년 종전시까지 유지.[36] 제2차 고등학교령(1918년) 반포 후에 설치된 학교들은 소재지의 이름을 따서 '''네임스쿨'''(地名校)로 불렸다.[37] 現 도쿄대학에서 교양과정용으로 사용되는 코마바 캠퍼스는 과거 제1고등학교의 부지로서 건물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38] 미군 폭격으로 소실. 現도호쿠대학 캠퍼스 내부[39] 삼양사 창립주 김연수가 이 코스를 밟아서 한국 최초의 경제학 전공자가 되었다.[40]이시카와현 4고기념관&근대문학관으로 사용 중[41]구마모토대학 제5고기념관으로 사용 중. 참조.[42] 미군 폭격으로 소실되고 종전 후 폐교. 현재 오카야마현립 오카야마아사히고등학교 부지에 위치[43] 미군 폭격으로 소실. 현재 가고시마현 역사자료센터 여명관 및 현립도서관 부지에 위치.[44] 미군 폭격으로 소실. 現 나고야시립대학 타키코토 캠퍼스(滝子)에 위치.[45] 9번째 고등학교 설립을 놓고 나가노현 마츠모토시와 치열한 경쟁이 벌어져 양 지역에 신설되는 고등학교부터 제9고등학교로 명명되는 대신 지명을 딴 네임스쿨로 1919년 4월 15일 설립되었다.[46] 1899년 이자와 슈지 등에 제7고등학교 마츠모토시 유치운동이 전개되었으나 가고시마시에 패하였고, 1910년에는 마츠모토에 제9고등학교 설치가 내정되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으며 1918년 제9고등학교 설립을 놓고 마츠모토시니가타시 사이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져 이 때부터 신설 고등학교가 제9고등학교로 명명되는 대신 지명을 딴 네임스쿨로 1919년 4월 설립되었다.[47] 현재 마츠모토시립 구제고등학교기념관이 과거 마츠모토고등학교 건물에 위치해 있다.[48] 1886년 11월 세 번째 고등중학교로 관립 야마구치고등중학교가 설립되었고 이 학교가 1894년 고등학교령 반포에 따라 야마구치고등학교로 개칭되면서 대학예과가 설치되었으나, 이 야마구치고등학교는 1905년 야마구치고등상업학교로 전환되어 폐교되었다. 이후 야마구치고등상업학교와 별도로 재흥(再興)야마구치고등학교 설립 운동이 일어나 1919년 4월 문부성령 제13호에 의거해 니가타, 마츠모토, 마츠야마와 함께 (재흥)야마구치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49] 1919년 4월 문부성령 제13호에 의거 1919년 4월 시코쿠 최초의 고등학교로서 니가타, 마츠모토, 야마구치와 함께 마츠야마시에 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50] 1920년 미토의 번교를 계승하여 미토시에 13번째 고등학교로 설립되었다.[51] 1920년 4월 칙령 제110호에 의거 15번째 고등학교로 설립, 1920년 8월 2일 입학식 후 9월 4일 개교[52] 1920년 4월 칙령 제110호에 의거 15번째 고등학교로 설립, 1920년 9월 개교[53] 1920년 11월 칙령 제551호에 의거 17번째 고등학교로 설립, 1921년 4월 16일 개교[54] 1920년 11월 칙령 제551호에 의거 17번째 고등학교로 설립, 1921년 4월 16일 개교[55] 제2차 고등학교령에 의거 최초로 설립된 7년제 고등학교로 1921년 11월 설립, 1922년 4월 개교하였다. 그러나 수학연한 단축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며 1934년에 심상과(4년)는 폐지되었다. 문이과에 모두 프랑스어를 전공하는 병류가 설치되어있었으며 자유주의 학풍으로 유명했고 졸업생의 8할이 도쿄제대에 진학할 정도로 입시명문으로 명성을 자랑했다고 한다.[56] 1934년 폐지된 심상과는 전후 1946년 다시 학생을 모집했으나 1947년 다시 모집 정지, 1948년 재개하는 등 파행을 겪다가 교육학부 부속 중학교/고등학교(현재의 교육학부 부속 중등교육학교)로 계승되었다.[57] 1921년 10월 칙령 제432호에 의거 17번째 고등학교로 설립, 1922년 4월 개교. 도쿄고등학교와 함께 유이하게 프랑스어를 배우는 이과 병류가 설치됨[58] 1949년 5월 신제 오사카대학 소속 오사카고등학교로 개편된 후 오사카부립 나니와고등학교와 함께 오사카대학 일반교양부를 구성. 오사카고등학교는 남교(南校)가 되었다가 나니와고등학교 캠퍼스인 북교(北校)로 통합.[59] 1921년 11월 칙령 제432호에 의거 20번째 고등학교로 설립되었고, 1922년 3월 제1회 입학[60] 1921년 11월 9일 칙령 제432호에 의거 20번째 고등학교로 설립되어, 1922년 4월 개교하였다.[61] 1949년 5월 신제 규슈대학 소속 후쿠오카고등학교로 개편된 후 신제 규슈대학 교양부(舊롯폰마츠 캠퍼스)를 구성.[62] 1922년 4월 1일 외지 최초의 고교(7년제)로서 대만총독부고등학교(臺灣總督部高等學校)가 설립되고, 1925년 고등과(3년제) 설치. 1927년 대만총독부 다이호쿠고등학교(臺北高等學校)로 개칭되었다.[63] 일본 패전 이후 1945년 대만에 진주한 중화민국군에 접수되었다. 이후 대만성립사범학원(1946년)을 거쳐 국립타이완사범대학(1967년)으로 승격. 상세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64] 1922년 8월 칙령 제391호에 의거 설립.[65] 1922년 8월 칙령 제391호에 의거 설립, 1923년 4월 개교.[66] 1923년 12월 11일 25번째 고등학교로 1918년 개정 반포된 제2차 고등학교령에 의거해 증설에 나선 고등학교로서는 히로시마고교와 함께 마지막으로 설립.[67] 1923년 칙령 제501호에 의거 25번째 고등학교로 설립, 1924년 4월 개교[68] 1940년 3월 주만주국 일본대사관 관동국 소관 학교로 3년제 여순고등학교(료준고등학교) 설립.[69] 8월의 폭풍 작전으로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에 접수된 후 폐교. 당시 캠퍼스는 현재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 북해함대 뤼순기지로 이용 중.[70] 1923년 10월 설치된 도야마현립 7년제 공립고등학교가 1943년 3월 칙령 제249호에 의거 관립으로 이관되면서 심상과를 폐지하고 3년제 관립고등학교로 전환[71] 홋카이도제국대학의 경우는 이학부를 기준으로 1순위로 홋카이도제국대학 예과 수료자, 2순위로 구제고등학교 고등과 이과 졸업생 및 가쿠슈인 고등과 이과 졸업자, 3순위로 구제고등학교 고등과 문과 졸업생 및 가쿠슈인 고등과 문과 졸업자를 입학시켰고, 이후에도 결원이 있는 경우 4순위로 고등사범학교와 여자고등사범학교 이과 졸업생, 5순위로 기타 구제전문학교 졸업생으로 자격검정시험 합격자, 마지막 6순위로 구제중학교 교원면허소지자로 자격검정시험에 합격한 자를 입학시켰다고 한다. 경성제국대학 대학규정에 따르면 경성제대 학부는 예과수료자를 먼저 입학시킨 뒤(제4조), 예과 수료자를 입학시키고 남은 결원이 있을 경우 1순위로 구제고등학교 및 학습원 고등과의 문과 수료자로 법문학부에 지원한 자, 이과 수료자로 의학부 및 이공학부에 지원한 자를 입학시키고(제5조 1) 수용인원을 초과하는 경우 선발시험을 행할 수 있으며, 그래도 결원이 남는 경우 2순위로 법문학부 선과생 및 선과수료자, 공/사립대학 예과, 고등사범학교, 여자고등사범학교, 고등상업학교, 외국어학교 및 동등 이상의 학교 졸업자로서 학부에서 적당하다고 판단하는 자를 대상으로 시행하는 학력검정시험의 합격자를 입학시켰다(제5조 2). 다이호쿠제국대학 역시 이와 유사하게 자교 예과수료자를 최우선으로 받은 후 구제고등학교 졸업자를 입학시키고, 이후 남은 결원에 대해 방계입학생을 받았다.[72] 소수 학생들은 부속 예과 졸업 후 내지의 타 제국대학으로 진학한 경우도 발견되는데, 도쿄제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학부가 구제고교 졸업생 지원이 정원 미달로 결원을 차순위 구제전문학교 졸업생 등 이른바 '방계입학생'으로 채우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절반까지 달하던 방계입학자를 줄이기 위해 규슈제국대학도 예과 개설을 추진했으나, 주변 지역에 구제고등학교가 존재한다는 이유로 중앙정부에 의해 거부당함) 별 어려움 없이 입학가능하여 수험 압박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73]홋카이도대학 사무국(대학본부)으로 사용 중. 1935년에 건설된 건물로, 정문 입구 차양은 1977년에 덧붙여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1935년 이전 예과 건물은 목조였다고 한다. 아래 사진 및 링크 참조. [image][74] 원래 메이지 시대구제대학은 그 학생들에게 외국인으로부터 바로 전문적인 고등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 본과 진학 이전에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 외국어를 가르치는 대학예과를 두었던 것이고, 구제전문학교는 외국어가 아닌 일본어로 기초적인 전문교육을 단기간 실시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삿포로농학교의 경우는 도쿄제국대학의 전신인 도쿄가이세이학교 도쿄의학교 그리고 공부학교와 마찬가지로 미국인에게 직접 농학을 배우는 곳이었고 최초로 학사칭호 수여가 가능했던 만큼 구제전문학교라기 보다는 구제대학에 가까운 고등교육기관이었고, 당연히 예비 교육이 별도로 이루어지던 전통이 있었다.[75] 이 예과는 도호쿠제국대학 농과대학이 홋카이도제국대학으로 분리되면서 자연히 이관되었고 전후 법문학부를 설치하는 데 활용된다. 기능적으로는 오늘날 홋카이도대학의 종합교육부(예과교육)와 케이테키료(기숙사)로 계승되었다.[76] 사실상 외지 취급을 받던 홋카이도에는 구제고교가 설치되어있지 않았는데, 제국대학 모체였던 삿포로농학교가 재학생들에게 본과 진학 전에 예수과(預修科)를 거치도록 하고 있었으므로,[74] 1907년 삿포로농학교를 도호쿠제국대학 농과대학으로 승격시키며 삿포로농학교 예수과를 모체로 농과대학 예과를 설치했다. 도호쿠제국대학 농과대학은 예과 출신자를 최우선으로 입학시킨 후, 결원이 발생하는 경우에만 타 구제고등학교 출신자를 받아들이기로 했다.[75] 이러한 제국대학예과 제도는 이후 개설된 경성제국대학다이호쿠제국대학에도 도입되었다.[77] 삿포로농학교를 도호쿠제국대학농과대학으로 하면서, 삿포로농학교 예수과(預修科)를 도호쿠제국대학농과대학 예과로 삼았다.[78] 홋카이도제국대학을 설립하여 도호쿠제국대학농과대학을 이관하고, 도호쿠제국대학농과대학 예과는 홋카이도제국대학 예과로 개편.[79] 예과 기숙사는 케이테키료로 계승. 참조.[80] 조선총독부는 1924년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하며 조선의 구제중학교 졸업생들이 당지의 제국대학으로 진학할 수 있도록 경성제국대학 부속으로 구제고등학교 고등과(舊대학예과)에 해당하는 경성제대 예과를 설치했다. 해당 제국대학으로 진학할 학생들을 구제중학교 졸업자 중에서 시험 선발하여 교육하였다. 1918년 제2차 고등학교령이 반포될 당시에는 이미 도쿄제국대학 출신으로 해외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 각지의 제국대학 교수진의 중추를 이루어 과거 메이지 시대와 같이 외국인으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는 시대가 지난 상태였으므로, 교육연한 단축을 추진해 기존 5년제 구제중학교와 3년제 고등학교 대신 7년제 고등학교를 기본으로 삼은 바 있었다. 이러한 정부 시책에 발 맞추어 경성제대 예과는 2년제로 개교하여 1933년까지는 구제중학교(고등보통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입시를 시행하여 2년간 교육하였으나, 교육기간 합계 8년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7년제 일관 고등학교로 통합하려던 정부의 정책이 정착하지 못하게 되면서, 7년제 고등학교들이 심상과(4년제)를 폐지하고 고등과(3년제)만 남겨서 기존의 3년제 고등학교 체제가 굳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오히려 2년제 예과가 3년제 고등학교보다 못하다는 인식이 퍼지게 되었고 경성제대 교수진과 학생들은 예과 수업연한 연장을 요구하게 된다. 이 때문에 경성제대 예과는 1934년 입시부터는 타 고등학교와 마찬가지로 중학교 4년 수료자에게도 수험자격을 부여하면서 수학연한 역시 내지의 고등학교와 동일한 3년으로 통일하였다. 이 때 최초의 7년제 고교로 개교한 도쿄고등학교 역시 1934년 심상과를 폐지하고 3년제 고등학교로 변신해버렸다(네임스쿨 중 도쿄고등학교 설명 참조).[81] 1924년 설립 당시 주소이며, 1936년 경성부로 편입되었고 現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이다.[82] 청량리의 경성제대예과 캠퍼스는 국대안으로 경성제대와 10개 전문학교가 국립서울대학교로 통합된 후에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이공학부 이학계열과 함께 예과가 통합되어 구성한 문리과대학 소속으로 있었다. 참조.[83]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학제개편으로 예과가 본과와 통합되면서, 경성대학 예과도 본과로 흡수되었는데, 의학부는 예과 제도를 유지하면서 청량리의 경성제국대학 예과캠퍼스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의예과가 위치해 있었다. 1975년 관악캠퍼스 종합화 이후 민간에 불하되어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한림대학교 의과대학 강의실 등으로 쓰이다가 2015년 4월에 철거되었다. 그림 참조.[84] 대만은 구제고등학교가 존재했음에도 제국대학예과를 설치한 경우이다. 1922년 제2차 대만교육령 반포 당시에 이미 제국대학 설립까지 계획한 대만총독부에서는 총독이 도쿄로 상경시위를 벌이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다이호쿠고등학교 고등과 제1회 졸업생이 배출되는 1928년에 맞추어 다이호쿠제국대학(臺北帝國大學)을 설립하게 되었는데, 당시 다이호쿠제국대학의 예과처럼 생각했던 다이호쿠고등학교 졸업생에게 다이호쿠제국대학 무시험 입학자격을 부여하고 별도의 예과를 설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이호쿠고등학교 졸업생들은 내지의 제국대학을 선호했고(리덩후이 총통도 다이호쿠고등학교 졸업 후 교토제국대학으로 진학), 대만총독부에서는 그들을 다이호쿠제국대학 입학으로 유도하기 위해 다이호쿠의학전문학교를 흡수하여 1936년 의학부를 설치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다이호쿠고등학교를 졸업한 대만인들은 의학부로만 지원자가 몰릴 뿐이었고 그나마 나은 농학부를 제외한 문정학부, 이학부는 미달이 심했다. 특히 문정학부가 심각했는데, 도쿄제대 일부와 교토제대 대부분의 학부도 구제고교 학생들로 정원을 채우지 못해 미달이 나던 상황에, 외지의 신설 제국대학이 문과계열 정원을 모두 채우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대만총독부는 1941년 다이호쿠제국대학에 부속 예과를 설치하게 된다. 예과 참조. 이 다이호쿠제국대학 예과는 다이호쿠고등학교와 교류전을 벌이는 라이벌이었다고 한다(링크 참조). 다이호쿠제국대학 예과가 개교한 1941년 개최된 제1회 교류전은 다이호쿠고등학교가 승리, 이듬해 1942년 제2회는 다이호쿠제국대학 예과가 승리하여 1승1패를 기록했으나 1943년 전쟁의 격화로 운동회가 중단되면서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끝나버렸다고 한다. 관련 자료는 현재 국립대만대학에 보관 중.[85] 1941년 당시 다이호쿠제국대학 학부 교지(現 국립타이완대학 公館캠퍼스)에서 예과를 개교하고 이듬해인 1942년 臺北州 七星郡 士林街 石角의 예과캠퍼스로 이전.[86] 1941년 설립 당시 주소로 臺北州七星郡士林街石角字大石角42番地, 現 타이베이시 스린구 雨聲街와 雨聲國小 사이에 해당. 참조[87] 士林의 다이호쿠제국대학 예과캠퍼스는 종전 직전인 1945년 일본 제국 해군에 징발되었다가 일본의 항복 후 대만에 진주한 중화민국 국군에 의해 접수되어 현재까지 중화민국 국군 군사정보국 청사(속칭 芝山莊)로 사용 중이다. 국립타이완대학 도서관 참조. 예과 관련 보다 상세한 설명은 일본어 블로그를 참조.[88] 기타 보습과, 대학별과(1905년 폐지) 등이 존재.[89] 1847년 교토에 개설된 學習室을 기원으로, 화족회관(和族會館)이 운영하는 화족학교 가쿠슈인(學習院)이 1877년 개교하여 1884년 궁내성 관할 관립학교가 되었고, 1890년 고등학과를 설치했다.[90] 이 때 중등학과도 중등과로 개칭. 이후 중등과는 5년제, 고등과는 3년제로 개편된다.[91] 다만, 1919년 당시까지 가쿠슈인 고등과는 중등과 졸업생 대상 2년제 교육기관으로 인식되어, 중등과(6년)+고등과(2년) 도합 8년으로 구제중학교(5년)+구제고등학교(3년) 코스와 동일한 수학연한을 갖고 있었음에도(초등과는 소학교와 동일한 6년제였다.) 3년제 고등학교가 기본이었던 당시에 구제고등학교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가쿠슈인 고등과 졸업생의 제국대학 진학은 제국대학에 미달이 발생한 경우나 원장의 제청에 의해 제국대학이 허락한 경우에만 가능했는데, 1921년 문부성령 제27호에 의해서 가쿠슈인 고등과 졸업생들이 구제고등학교 졸업생과 동등한 제국대학 진학 허가를 보장받으면서 가쿠슈인 고등과는 명실상부한 구제고등학교로서 지위를 확립하게 되었다. 고등과 졸업생의 1/3이 도쿄제국대학으로 진학한 것을 비롯해 거의 대부분이 제국대학과 관립대학으로 진학했다고 한다. 미시마 유키오가 가쿠슈인 고등과를 거쳐 도쿄제국대학으로 진학한 사례.[92] 구제 가쿠슈인 고등과의 이과 건물로 사용되던 곳으로 現 가쿠슈인대학 이학부 연구동(南1号館)으로 사용 중.[93] 상단 사진은 1927년(쇼와 2년) 졸업식에 쇼와천황이 방문하는 모습.[94] 現 가쿠슈인의 중등과 및 고등과는 戰前 가쿠슈인 중등과를 모체로 하는 중등학교이다. 구제고등학교격이었던 戰前 가쿠슈인 고등과는 戰後 1947년 궁내성 관할에서 해제되어 재단법인 가쿠슈인으로 사립 이관되어 1949년 新制 가쿠슈인대학으로 출범했다.[95] 1923년 인가[96] 1926년 인가[97] 1929년 인가[98] 관립고교인 다이호쿠고등학교와 함께 관공립고교 중 유이한 7년제 고교였다.[99] 1923년 10월 도야마현 현립으로 7년제 공립고등학교 설치. 1943년 3월 칙령 제249호에 의거 관립으로 이관되면서 심상과를 폐지하고 3년제 관립고등학교로 전환[100] 오사카부립의과대학 예과를 전신으로 하는 7년제 공립고교인 부립 나니와고등학교가 1926년 설립 및 심상과 설치, 1927년 4월 고등과 설치, 1944년 심상과 폐지.[101] 신제 오사카대학 소속 나니와고등학교로 개편(1949년 5월) 후 일반교양부 남교(南校)를 이룬 관립 오사카고등학교와 함께 오사카대학 일반교양부를 구성. 남교와 북교로 나뉘어있던 오사카대학 일반교양부는 이후 나니와고등학교 부지인 북교(北校) 캠퍼스로 통합.[102] 1929년 2월 도쿄부 부립으로 7년제 공립고등학교 설립, 1929년 4월 개교. 1943년 7월 도성제 시행에 따라 도립고등학교로 개칭.[103] 학제개혁에 따라 구제중학교에 해당하는 심상과는 분리되어 도쿄도립대학 교육학부 부속고등학교(現 도쿄도립 앵수관 중등교육학교)로 계승.[104] 무사시고등학교는 예외로, 관립고교 이상으로 스파르타식 입시교육이 실시되어 좋은 대입 실적을 거두었다고 한다.[105] 1922년 본관 준공 당시 사진[106] 최초의 사립고등학교로서 1922년 도부철도 재단에 의해 7년제 무사시고등학교 설립.[107] 구제 무사시고등학교를 모체로 설립된 신제 무사시대학은 1949년 경제학부 1학부 경제학과로 시작해 1959년 경제학부에 경영학과를 증설하고, 1969년 인문학부를 설치했으며 인문학부 사회학과를 모체로 1998년 사회학부를 설치하는 등 단계적으로 확대 발전해왔다.[108] 학제개혁에 따라 구제중학교에 해당하는 심상과는 분리되어, 1948년 (신제)무사시고등학교 및 1949년 (신제)무사시중학교 창설의 모체가 되었다.[109] [image] 정문 방향에서 본 건물 우측편. 코난고등학교 본관 건물은 일본에서 최초로 철근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로서 코난대학 1호관으로도 사용됐으나 1995년 효고현 남부 지진의 피해로 심각하게 파괴되어 철거 후 당시 모습을 본딴 신1호관이 지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110] 무사시고등학교에 이은 두 번째 사립 구제고등학교이자 서일본 유일의 사립고등학교, 7년제 고등학교이다. 1918년 12월 설립 인가를 받고 1919년 4월 개교한 코난중학교를 모체로 심상과(4년)에 고등과(5년)를 병설한 7년제 고등학교로서 1923년 1월 설립 인가를 받고 1923년 4월 개교. 1924년 구제중학교(심상과) 제1회 졸업, 1926년 고등과 제1회 졸업.[111] 구제 코난고등학교를 모체로 설립된 신제 코난대학은 1951년 문리학부 1학부로 시작해 경제학부 등을 설치해가며 확대 발전해왔다.[112] 학제개혁에 따라 구제중학교에 해당하는 심상과는 분리되어, 1947년 (신제)코난중학교 및 1948년 (신제)코난고등학교 창설의 모체가 되었다.[113] 미쓰비시 그룹의 도움을 얻어 1919년 재단법인 '세이케이학원'을 설립하고, 1914년 설립된 세이케이중학교를 기반으로 1925년 7년제 구제고등학교인 세이케이고등학교가 되었다.[114] 1949년 출범 당시 정치경제학부 1학부로 시작해 1962년 공학부, 1965년 문학부를 설치하고 1968년 정치경제학부를 법학부와 경제학부로 분리하며 확장.[115] 학제개혁에 따라 구제중학교에 해당하는 심상과는 분리되어 1947년 (신제)세이케이중학교, 1948년 (신제)세이케이고등학교 창설의 모체가 되었다.[116] 가장 늦게 설립된 사립고등학교로, 1917년 설립된 사립 세이조소학교를 바탕으로 1922년 세이조제2중학교를 설립하고, 제1회 졸업생이 배출되는 1926년 3월 7년제 고등학교인 세이조고등학교 인가를 받고 고등과를 설치하여 1926년 4월 개교. 세이조제2중학교는 심상과(4년)로 흡수, 1929년 고등과 제1회 졸업생 배출.[117] 1954년 이학부를 폐지하고 문예학부 설치, 1977년 법학부 설치, 2005년 사회이노베이션학부 설치.[118] 학제개혁에 따라 구제중학교에 해당하는 심상과는 분리되어 1947년 (신제)세이조가쿠인중학교, 1948년 (신제)세이조가쿠인고등학교 창설의 모체가 되었다.[119] 이와 별도로 대학 승격의 모체가 된 구제전문학교는 대학 '''전문부'''로 존속하여 구제중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했으며, 전문부 졸업자는 구제전문학교 졸업으로 취급되어 대학 졸업자에게 수여되는 학사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120] 도쿄부에서 농상무성을 거쳐 문부성으로 이관된 도쿄상업학교가 1887년 10월 최초의 고등상업학교(예과 1년, 본과 3년)로 개편. 고등상업학교 본과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하던 전공부(2년 과정)가 1901년 졸업생부터 '상업학사'를 수여하기 시작. 1902년 고베고등상업학교가 설립되면서 도쿄의 고등상업학교는 도쿄고등상업학교(도쿄고상)으로 개칭. 이 도쿄고상 전공부가 1920년 4월 1일 칙령 제71호 대학령에 의거하여 도쿄상과대학으로 승격.[121] 1920년 4월 도쿄고등상업학교의 '도쿄상과대학' 승격시 본과 상학부(3년제)에 예과(3년제)를 부설.[122] 1909년 5월 10일 칙령 제133호 여순공과학당제가 공포되었고 이를 근간으로 1909년 9월 6일 관동도독부령 여순공과학당규칙이 제정되어 1910년 개교한 구제전문학교 여순공과학당이 1922년 3월 31일 칙령 제160호 여순공과대학관제가 반포되면서 관립대학으로 승격[123] 1923년 4월 수업연한 3년의 대학예과를 여순공과대학에 부설.[124] 1874년 도쿄가이세이학교(東京開成學校)내에 설치된 제작학교장을 기원으로 1881년 도쿄직공학교가 설립(화학공예과, 기계공예과 2개과로 구성). 도쿄대학 공학부의 전신인 공부대학교(工夫大學校)를 제외하면 당시 유일한 공학교육기관으로 1890년 도쿄공업학교로 개칭하고 1896년 염직공과, 요업과, 응용화학과, 기계과, 전기과 5개과 구성으로 개편. 1901년 도쿄고등공업학교로 승격되며 공업도안과와 건축과를 신설. 1929년 도쿄공업대학이 설치되고 전신인 도쿄고등공업학교는 부속 공학전문부(1931년 폐지)로 흡수되었다.[125] 도쿄공업대학은 원칙적으로 고등공업학교 졸업생들을 신입생으로 받아 대학 교육을 실시했기 때문에 별도 예과가 필요없었으나, 1929년 4월 대학 승격 당시 본래 도쿄고등공업학교 재학생들을 계속 교육시킬 공학전문부/공업교원양성소(1931년 도쿄고공 마지막 신입생 졸업과 함께 폐교)와 더불어 특설예과를 설치하여 기존의 고등공업학교 교육을 지속하였다. 이 특설예과는 1932년 9월 부속 예비부로 개칭된다.[126] 1902년 3월 칙령 제98호로 구제전문학교고베고등상업학교가 설립되어 1903년 5월 개교. 당시 예과 1년과 본과 3년으로 도쿄고등상업학교와 함께 유이한 4년제 고등상업학교였기 때문에 졸업 후 도쿄고등상업학교 전공부(2년제) 진학이 가능했고, 전공부 졸업시 제국대학과 동일한 6년 수학으로 인정받아 학사 칭호에 버금가는 상업학사를 수여받았다. 이 고베고등상업학교에도 도쿄와 같은 전공부를 설치하는 형태로 발전, 고베고상을 모체로 1929년 4월 관립대학인 고베상업대학을 설립.[127] 1940년 5월 수업연한 3년의 대학예과를 부설.[128] 신제 고베대학은 캠퍼스를 통합하기 전까지 교양부는 미카게분교(고베상업대학 예과의 後身)와 히메지분교(히메지고등학교의 後身)로 나뉘어있었다.[129] 1903년 9월 칙령 제130호 신궁황학관관제에 의거해 관립전문학교급으로 인정된 내무성 소관 신궁황학관이 일본 기원 2600년을 맞이해 1940년 칙령 제288호 신궁황학관대학 관제 반포로 문부성 소관의 관립대학으로 설립된 신궁황학관대학(고각칸대학)의 모체. 전후 연합군 점령하 일본에 의해 폐교 후 1962년 재흥 신궁황학관대학(고각칸대학) 설립.[130] 1940년 신궁황학관대학 설립과 동시에 수학연한 3년의 예과를 설치. 학부(3년제) 진학 코스인 예과와 별도로 부속전문부(3년제)가 존재.[131] 1946년 칙령 제135호 신궁황학관대학폐지령으로 학부 2회 졸업생 2회, 부속전문부 3회 졸업생 배출 후 폐교.[132] 구6의대 중 한 곳인 구마모토의대는 표의 기준연도인 1926년 당시 아직 관립으로 이관되기 전이라 미포함. 당시 현립 구마모토의과대학으로 아래 공립대학예과탭에 설명한 바와 같이 예과를 따로 두고 신입생을 모집했다.[133] 도쿄고등공업학교, 도쿄고등상업학교, 고베고등상업학교 등 다른 관립대학 사례를 보면 전공부의 대학 승격 후 모체 학교는 신설 대학의 부속 전문부로 흡수되거나 폐지되는 경우가 많았다.[134] 물론 도쿄문리과대학히로시마문리과대학에는 고등상업학교, 고등농림학교 등 기타 고등실업학교 졸업생들이 입학하기도 했다. 참조.[135] 1838년 데키주쿠를 기원으로 1873년 오사카부립병원, 1880년 오사카부립의학교가 설립되고 1903년 전문학교령에 의거 부립 의학전문학교가 된 오사카고등의학교가 1915년부터 부립 오사카의과대학을 칭하고 있다가 대학령이 반포되자 1919년 대학령에 의거한 최초의 공립대학으로 정립되었다. 이를 모체로 1931년 오사카제국대학이 설립된다(1931년 출범 당시 의학부, 이학부 2학부 체제 구성).[136] 1915년부터 부립 오사카의과대학 개칭과 동시에 예과를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여 본과와 합쳐서 7년으로 제국대학 의학부와 동일하게 맞추었고, 1919년 대학령에 준거한 구제대학이 되면서 공인되었다. 참조.[137] 1871년 오와리번에 개설된 仮病院, 仮醫學校를 기원으로 1901년 설치된 아이치현립의학교가 1920년 대학령에 의거한 아이치현립 아이치의과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이 현립 아이치의과대학이 1931년관립으로 이관되어 관립 나고야의과대학이 되는데, 이 나고야의과대학을 모체로 1939년 나고야제국대학이 설립된다(1939년 출범 당시 의학부 1학부 체제 구성).[138] 1920년 현립 아이치의과대학 승격시 예과 설치.[139] 공립(현립) 아이치의과대학이 1931년 관립 이관되어 관립의과대학인 나고야의과대학이 되면서 구제고교생을 대상으로 입시를 실시하게 된다. 이 관립 아이치의과대학은 1939년 나고야제국대학의 설립 모체로서 나고야제국대학 의학부가 된다.[140] 관립 이관 이전 마지막 예과생 신입인 1930년 입학생이 1933년 졸업.[141] 1872년 교토료병원(京都療病院)이 설립되고 1879년 교토부의학교를 교토료병원에 부설. 1903년 전문학교령에 준거한 교토부립의학전문학교를 거쳐 1921년 대학령에 의거한 교토부립의과대학으로 승격. 1952년 신제 교토부립의과대학으로 개편.[142] 1921년 구제 교토부립의과대학 승격과 함께 예과 설치.[143] 1871년 구마모토 번주 호소카와가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 군의관 만스 펠트를 초빙해 창설한 번립 의학소가 기원으로, 폐번치현 후 관립의학소·병원(통칭 古城醫學所)를 거쳐 세이난 전쟁으로 소실되었다가 1878년 현립으로 재건되었고 1904년 전문학교령에 의거한 사립 구마모토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1921년에는 현립으로 이관되었고 1922년 대학령에 근거한 현립 구마모토의과대학으로 승격되었으며, 1929년 관립으로 이관되어 관립 구마모토의과대학이 되었다. 1949년 신학제에 따라 구마모토대학 의과대학을 거쳐 1960년 구마모토대학 의학부로 통합되었다.[144] 대학령에 의거 1922년 현립 구마모토의과대학 승격시 예과 설치.[145] 공립(현립) 구마모토의과대학이 1929년 관립 이관되어 관립의과대학인 구마모토의과대학이 되면서 구제고교생을 대상으로 입시를 실시하게 된다.[146] 1880년 사립 오사카상업강습소가 기원으로 1881년 부립 오사카상업강습소를 거쳐 1889년 시립 오사카상업학교를 모체로 1901년 시립 오사카고등상업학교(구제전문학교)를 설립. 이 오사카시립고등상업학교가 대학령에 의거 1928년 구제대학인 오사카상과대학으로 승격. 1949년 종전 후 일본 최초의 시립대학인 신제(新制) 오사카시립대학이 되고 1955년 오사카시립의과대학을 의학부로 흡수해 종합대학화.[147] 1928년 시립 오사카상과대학 설립 당시 예과(3년)를 부설하고, 기존 오사카시립고등상업학교는 부속 고등상업부로 흡수. 본과(3년)는 1929년 개교.[148] 스기모토초[149] 1948년 예과와 고등상업부 신입생은 시험을 거쳐 1950년 신제 오사카시립대학 1학년으로 편입.[150] 바로 아래에 있는 김연수의 차남이다.[151] 현 이바라키대학. 9대 총선 포스터에는 '미도고등학교'라고 인쇄되어있는데, 이는 '미토(水戸)'의 오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