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인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심재인'''
'''沈載仁'''

[image]
<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청송 심씨[1]
<color=#fff> '''출생'''
1918년 10월 6일[2]
경상남도 고성군 대가면 연지리
<color=#fff> '''사망'''
1950년 7월[3]
경상남도 고성군
<color=#fff> '''초명'''
심재현(沈載現)
<color=#fff> '''창씨명'''
아오마쓰 다다마사(靑松忠正)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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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심재인은 1918년 10월 6일 경상남도 고성군 대가면 연지리에서 아버지 심수열(沈守烈)[4]과 어머니 김해 김씨 김돈선(金敦善) 사이의 4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정의감이 남달리 뛰어나고 총명했다고 하며, 1938년 고성농업실수학교(固城農業實修學校)[5]를 졸업하고 은사 이구희(李久喜) 선생의 주선으로 동료 학생들과 함께 일본에 있는 상급학교에 진학했다.
일본 나가사키현 소재 히사하야(諫早)농업학교에 진학하여 학업에 열중하고 있을 때 일본인 학생들의 심한 멸시와 민족적 차별에 강한 반감을 품고 한국어 사용이 금지당한 것에도 분노를 느꼈다. 그러던 1939년 11월에 심재인의 하숙집에 박근철, 이상만(李相晩), 이재관(李在官) 등이 모여 일본 학생인 테라사키 유키오(寺埼行雄)에게 박근철이 구타까지 당하고 '조선인이면서 건방지다'는 질책을 받은 것에 대한 분노를 토로했다. 이들은 이렇듯 자신들이 업신여겨지는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첫째, 조선 사람이 이렇게 일본인에게 멸시당하고 있는 원인은 조선이 일본에 비하여 문화수준이 낮으며 일본의 식민지가 된 때문에 일본 정부는 조선 사람에 대하여 교육을 시행하지 않고 차별대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관청의 상석(上席)은 모두 일본인이 점령하고 있고, 급료도 내지인(일본인)에게는 한국인의 배액을 지급하고 있으며 소학교(초등학교)도 내지인은 모두 입학시키고 있으나 한국인은 불과 몇 할 정도만 입학시키고 있으며, 졸업자의 취직도 한국인에 대하여는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고 모든 영달도 불리하게 되어 있다.

셋째, 이와 같은 차별의 악습을 없애기 위해 한국인이 분기하여 일본제국주의로부터 떠나 독립해야 된다고 각오하며 모든 것은 민족적으로 관철해야 한다.

이후 1940년 4월 장기현 간조시 선월정에 소재한 임우칠(林友七)의 집에서 이상만(李相晩)·박근철 등과 함께 비밀결사 재일학생단(在日學生團)을 조직하고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과 농업정책 등에 반대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중일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독립운동의 방안을 협의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는 1941년 간조농학교를 졸업하고 우쓰노미야 고등농림학교(현 우쓰노미야대학 농학부)에 진학한 이후에도 일본에서 동지를 규합하였으며 귀국한 동지들을 통해 국내에 조직 거점을 확보하는 등의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942년 2월 경북 예천에서 몇 몇 동지들이 밀회를 하고 있다가 심부름하는 아이의 실수로 조직문서를 떨어뜨려 당시 예천경찰서 고등계 한국인 형사 다카마쓰(高松)에게 발각되어 조직이 노출되면서 국내와 일본에 있는 동지들이 일망타진당했다.
이로 인해 체포된 그는 1943년 5월 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면서 심한 고문을 받다 8.15 광복 직후 출옥했지만 고문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1950년 7월 3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심재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안효공파 좌의정공 통원파 25세 재(載) 항렬.[2] 청송 심씨 대동보에는 10월 16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청송 심씨 대동보에는 6월 25일에 별세했다고 기재되어 있다.[4] 족보명 심수섭(沈守燮).[5] 현 경남항공고등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