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 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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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松 沈氏
청송 심씨
'''
}}}
'''관향'''
경상북도 청송군
'''시조'''
심홍부(沈洪孚)
'''집성촌'''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파천면
강원도 인제군 남면 관대리
경기도 파주시, 연천군, 화성시
경상남도 산청군, 합천군
전라남도 곡성군, 장성군
전라북도 군산시 나포면 부곡리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추산리
'''인구'''
240,768명(2015년)
'''링크'''
청송심씨대종회
1. 개요
2. 역사
3. 항렬
4. 인물
4.1. 25세손
4.2. 26세손
4.3. 27세손
4.4. 28세손
5. 다른 가문과의 인연
5.1. 신천 강씨(信川 康氏)[1]
5.2. 반남 박씨(潘南 朴氏)
5.3. 파평 윤씨(坡平 尹氏)
5.4. 남양 홍씨 당홍계(南陽 洪氏 唐洪系)
6. 관련 항목


1. 개요


경상북도 청송군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심홍부'''(沈洪孚)는 고려 충렬왕 때 문림랑(文林郞)으로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역임했다. 그의 생몰연대나 사적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없어 알 수가 없다.
막상 찾아보면 흔한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드문 편도 아니다. 그냥 마음만 먹으면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있다. 본관에 따라 대구경북 지역에 많을 것 같지만 의외로 부산경남 지역에 훨씬 많다[2]. 강원도 지역에도 꽤 많이 산다. 그렇다고 편중된 것은 아니고 전국적으로 고루 분포하고 있다. 다만 제주도 지역에는 인구가 상당히 적다.
세도가문으로서 역사에 자주 거론이 된다. 특히 조선조에 들어와서 종묘 배향 인물 1명을 배출했다. 이외 왕비 3명, 상신 13명, 문형 2명, 청백리 2명, 호당 2명, 공신 8명, 장신 1명, 문과 급제자 194명을 배출했는데 확실히 인구 순위를 감안하면 놀라운 강세다. 다만 문묘 배향공신은 배출하지 못했다.
서인의 태두 심의겸을 위시로 노론의 중핵 가문 중 하나.

2. 역사


4세손인 심덕부(沈德符)는 고려 충숙왕 때 왜구의 침입을 물리쳤고, 공민왕 때에는 중흥 9공신으로 충근양절익찬좌명공신벽상삼한삼중대광문하시중(忠勤亮節翊贊佐命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門下侍中)이 되기도 하였다. 우왕 때에는 안사공신(安社功臣)으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으며, 이성계를 도와 1392년 조선 건국 때 공을 세우고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봉해진 후 청성충의백(靑城忠義伯)에 진봉되어 후손들이 청송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면서 조선의 세도가문이 되었다.
반면에 심덕부(沈德符)의 아우 심원부(沈元符)는 고려 말에 여러관직을 거쳐 전리판사에 이르렀으나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새 왕조의 벼슬을 거부하고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켰으며, 후손들도 그의 유훈을 받들어 선훈불사(先訓不仕)라 하여 대대로 벼슬을 멀리 하였다
경파인 심덕부는 조선 개국 후에 좌정승을 지내고 그의 후손은 대대로 서울에 살면서 벼슬을 지냈으나, 향파인 심원부의 자손들은 고려가 망하자 새 왕조의 벼슬을 거부하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간 심원부의 유훈을 지켜 대대로 고향에 살면서 벼슬을 멀리하였다. 경(京)파는 심덕부의 아들 7형제에서 도총제공파(都摠制公派)·판사공파(判事公派)·성주지사공파(成州知事公派)·인수부윤공파(仁壽府尹公派)·안효공파(安孝公派)·청원군파(靑原君派)·동지총공파(同知摠公派)의 7파로 갈라진다. 그중에서 가장 번창한 파는 안효공파로 청송 심씨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3].
그의 아들 심온은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에 딸을 시집보냈는데 (소헌왕후) 다들 아시다시피 나중에 충녕대군은 세종으로 즉위하였다. 이때 태종에게 외척 경계의 일환으로 철퇴를 맞아 한동안 가문의 위세가 위축되었다가[4] 외손자 문종 때 심온 사건의 재조사를 벌여 복권된다[5].
심온의 둘째 아들인 심회가 심온의 외손자 세조영의정을 역임하게 되어 기세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나중에 폐비 윤씨의 일로 연산군에게 부관참시를 당하고 손자 심순문은 연산군의 어의에 대하여 크기를 논하다가 갑자사화참형을 당하는데[6] 폐비 윤씨는 파평 윤씨의 분파인 함안 윤씨라 나중에 아래에서도 설명할 산송을 생각하면 악연이라 하겠다.
어쨌거나 심순문의 손자 심강의 딸이 명종비 인순왕후, 아들이 심의겸이라 이 사람은 외척이면서도 권신들로부터 사림을 지킨 공으로 명성을 얻게 된다. 참고로 이전의 외척 이미지는 문정왕후 참고.
이 가문에서 세종비 소헌왕후, 명종비 인순왕후, 경종비 단의왕후 총 세 명의 왕비를 배출하였다.
일제강점기창씨개명을 할 때, 이 가문은 대체로 아오키(青木)로 창씨한 것으로 알려졌다[7]. 그외에는 본관인 청송을 일본어로 읽어서 아오마츠(靑松)로 하기도 하였다.

3. 항렬


대략적으로 근현대에 분포하고 있는 항렬자는 다음과 같다. 항렬자를 철저히 지키는 가문으로 유명한데 보통 22~27세손 항렬자를 쓰는 사람이 많다. 단 이 부분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니 참고로만 한다.
'''19세'''
○지(之)
'''20세'''
능(能)○
'''21세'''
의(宜)○
'''22세'''
○택(澤)
'''23세'''
상(相)○
'''24세'''
○섭(燮)
'''25세'''
재(載)○
'''26세'''
○보(輔)
'''27세'''
규(揆)○
'''28세'''
○용(用)
'''29세'''
영(寧)○
'''30세'''
○기(起)
인수부윤공파와 효창공파는 다른 항렬을 쓴다.
  • 인수부윤공파
'''19세'''
○영(永)
'''20세'''
낙(樂)○
'''21세'''
노(魯)○
'''22세'''
원(遠)○
'''23세'''
종(鍾)○
'''24세'''
○구(求)
'''25세'''
○식(植)
'''26세'''
우(愚)○
'''27세'''
기(基)○
'''28세'''
○석(錫)
'''29세'''
태(泰)○
'''30세'''
○수(秀)
  • 효창공파
'''19세'''
계(啓)○
'''20세'''
학(學)○
'''21세'''
우(雨)○
'''22세'''
승(承)○
'''23세'''
○래(來)
'''24세'''
○섭(燮)
'''25세'''
○규(圭)
'''26세'''
○호(鎬)
'''27세'''
영(永)○
'''28세'''
정(楨)○
'''29세'''
○열(烈)
'''30세'''
○기(基)

4. 인물


이름
생몰년도

비고
'''20세 이전 '''
심환지(沈煥之)
1730 ~ 1802
안효공파 온양공파
19세, 조선 문신
'''21세(宜) '''
심의환(沈宜渙)
1927 ~ 1979
악은공파 증참판공파
장관
'''22세(澤) '''
심순택(沈舜澤)
1824 ~ 1906
안효공파 온양공파
조선 문신
'''23세(相) '''
심상우(沈相宇)
1938 ~ 1983
안효공파 훈도공파
기업인, 국회의원
심상명(沈相明)
1942 ~
지성주사공파 감찰공파
법조인, 장관
심형래(沈炯來)
1958 ~
안효공파 문정공파
코미디언
심상정(沈相奵)
1959 ~
불명
국회의원
'''24세(燮) '''
심훈(沈薰)
1901 ~ 1936
안효공파 온양공파
독립유공자, 소설가, 언론인, 본명 대섭(大燮)
심완구(沈完求)
1938 ~ 2020
인수부윤공파 충의위공파
국회의원
심규섭(沈奎燮)
1958 ~ 2002
안효공파 정언공파
국회의원
심승섭(沈勝燮)
1963 ~
불명
군인, 해군참모총장
심승한(沈勝韓)
1978 ~
지성주사공파 감찰공파
성우
심현섭(沈賢燮)
1970 ~
안효공파 훈도공파
코미디언
심윤섭(沈潤燮)
1977 ~
봉익공파 전서공파
응원단장
심희섭(沈熙燮)
1986 ~
안효공파 부평공파
배우
심동섭(沈東燮)
1991 ~
불명
야구선수

4.1. 25세손


  • 심소영 - 모델.[8]
  • 심영(배우)[9][B] - 일제강점기북한배우. 본명은 심재설이다.
  • 심재권 - 정치인.
  • 심재권(교수) - 교수.
  • 심재덕 - 정치인.
  • 심재민 - 야구선수.
  • 심재원(안무가) - 안무가.
  • 심재원(야구선수) - 야구선수.
  • 심재원(축구선수) - 축구선수.
  • 심재철 - 정치인.
  • 심재학 - 야구선수.
  • 심재홍 - 정치인.
  • 햄재희[10] - 유튜버.
  • 새벽(API)[11] - 걸그룹 아이돌.

4.2. 26세손


  • 심대평 - 정치인.[12]
  • 심명보[B] - 정치인.
  • 심보균[13] - 정치인.
  • 심우준 - 야구선수.[14]
  • 심수봉 - 가수.[15]
  • 심성보 - 야구선수.
  • 심승보 - 영화감독, 영화 각본가.
  • 심진보 - 배우.
  • 심창민 - 야구선수.[16]
  • 심현보 - 가수.
  • 심형탁 - 배우.[17]
  • 심현보(디보) - 래퍼
  • 최강창민 - 가수.[18]

4.3. 27세손


  • 심규명[B]- 정치인.
  • 심규범 - 야구선수.
  • 심규선 - 가수.
  • 심규성 - 프로게이머.
  • 심규철[B] - 정치인.
  • 심규혁 - 성우.
  • 심기준 - 정치인.[19]
  • 심문규[20] - 코미디언.
  • 심서연 - 여자 축구선수
  • 심신[B] - 가수.[21]

4.4. 28세손


  • 심진화[B] - 코미디언.[22]

5. 다른 가문과의 인연



5.1. 신천 강씨(信川 康氏)[23]


심온의 아들 중 나중에 영의정이 된 심회에 관한 이야기이다. 심온이 화를 입을 때 다른 자식들은 다 죽고 유모가 아직 젖먹이이던 심회 만을 업고 달아나 경상도 선산(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에 편입된 구 선산군 일대) 땅에 이르렀을 때 날이 저물자 인근 삼밭에 들어가 잠들었다. 이 때 꿈 속에서 삼밭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꾼 강거민(康居敏)이라는 사람이 달려와 이들을 거두었다. 강거민 슬하에서 자란 심회는 세종 말기에 아버지 심온의 억울함이 밝혀져 신원되자 도성으로 올라가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길에 올라 영의정까지 올랐으며 나중에 강거민과 그 부인이 잇달아 세상을 떠나자 선산으로 내려가 6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이에 자신들의 선조를 보살펴준 은혜를 생각해 청송 심씨는 지금도 신천 강씨(信川 康氏)와는 혼사를 맺지 않는다고 한다. 즉, 이 둘은 서로 같은 혈족이나 다름없게 여긴다. 물론 이 이야기는 어느 정도 과장됐을 가능성이 높다.

5.2. 반남 박씨(潘南 朴氏)


세종께서 새로이 즉위하셨을 때 태종께서는 상왕의 자리에 있었다. 박은(朴訔)[24]이 총애를 받아 태종 곁에서 일을 맡고 있었는데, 심온(沈溫)[25]이 세종의 장인인 것을 시기하여 마침 그가 중국에 사신으로 간 틈을 타 백방으로 근거 없는 비방을 퍼뜨리고는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상왕(태종)은 심온이 돌아오는대로 압록강에서 그를 잡아 사사시키도록 명하였는데, 세종과 소헌후께서도 막을 수 없었다. 박은은 사사로이 자신의 병사를 내어 심온의 집을 포위하고 그 자손들을 남김 없이 잡아 죽였다.
(중략)
심온이 이를 갈며 말하기를, "내 자손 가운데 혹 살아 남는 이가 있어 다행히 내 말을 전해 듣거든, 앞으로 영원히 박은의 집안과는 혼사를 맺지 말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출처 : 홍한주 - 지수염필
위의 이야기는 청송 심씨 집안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로 반대로 반남 박씨의 집안에는 이런 이야기는 한 조각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실록 등에도 박은이 태종의 명을 받아 심온의 집안을 멸문시킨 것에 대한 내용이 있으나 박은이 사적으로 심씨 집안을 몰락시키려 했다고는 볼 수는 없을 듯하다.
오히려 실록에는 그의 동생인 심정이 박습, 강상인과 함께 상왕인 태종을 공공연히 비난하고 선위한 태종의 군권을 축소시키다 태종의 노여움을 사 참수되는 과정에서 심온이 배후로 지목되어 자결을 명받고 죽었다가 세종때 무고로 밝혀졌다고 기록되어있다[27].
야사에 따르면, 심온의 인덕으로 인해 그의 죽음의 후폭풍을 두려워한 태종은 심온을 '''아무도 없는 곳'''으로 대려가 자결하게 만들라고 박은에게 명한데다 난리통 속에서 유일하게 도망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심온의 자식은 갓난아기였다. 지수염필에서는 심온의 몸종이 자기 자식을 심온의 자식이라고 속여 포졸에게 넘겨 죽게 한 후 심온의 자식을 빼돌려 선산 지역의 강씨 집안으로 피신하였는데, 아이는 자라서 강씨 성을 따라쓰며 감히 세상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그 생을 마쳤다. 심온의 손자 대에 이르러 마침내 심씨 성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 상황에서 박은 자신이 양심고백이라도 하지 않은 이상 심온이 남긴 유언이 정상적으로 자손에게 전달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근데 이 이야기는 그냥 전해져오는 이야기이고, 손자 대까지 갈 것도 없이 심온의 첫째 아들 심준(沈濬)은 세종때 영중추원사를 지냈고, 둘째 아들 심회(沈澮)는 세조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세째 아들 심결(沈決) 역시 세조 때 영중추부사를 지냈다. 더해서 굳이 박은이 양심 고백을 하지 않더라도 박은이 혼자서 심온을 데려간 것은 아닐테니 박은이 데리고 간 군사들이나 당시 심온을 모시던 노비들이 살아남아 자식들에게 전했을 수도 있다.

태종의 외척 견제로 억울하게 죽었지만 후손들의 입장에서는 선왕인 태종을 욕할 수도 없어 애꿎은 박은만 원망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이다.[28]

5.3. 파평 윤씨(坡平 尹氏)


윤관과 심지원 묘는 파주에 있다. 윤씨가 먼저 이곳에다가 묘를 썼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그에 대한 기록을 잃어버리게 되니 심씨가 그 산을 점령하고는 심지원의 묘로 썼다.
출처 : 영조실록
파평 윤씨 가문의 윤관 장군은 함흥평야에 9성을 쌓아 여진족과 싸운 고려시대 명장으로 1111년 사망하였는데 이때 예종이 친히 그의 묘를 정해주었다.
양 문중 사이의 묘지 다툼은 조선 중기인 1614년 청송 심씨의 수장으로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이 윤관 장군 묘 바로 위에 부친 묘를 조성한 뒤 일대 땅을 하사받아 문중 묘역을 조성하면서 비롯됐다. 파평 윤씨 일가는 이에 반발해 100여년이 지난 1763년 윤관 장군 묘를 되찾겠다며 심지원 묘를 일부 파헤쳤고 청송 심씨 일가가 이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며 오랜 다툼으로 발전했다. 파평 윤씨-청송 심씨 400년 묘지 다툼 종결
사실 양 문중은 모두 조선시대 왕비를 3~4명씩 배출한 대표적인 외척 가문으로 당시 임금이던 영조가 고민 끝에 두개의 묘를 그대로 받들도록 해 화해를 구했으나 파평 윤씨 일가가 이에 불복해 심지원 묘를 이장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매를 맞아 죽는 형을 당하는 등 원한 만 깊어졌다.
두 문중은 조선시대 왕비를 4명(파평 윤씨), 3명(청송 심씨)씩 배출한 외척 가문이었기 때문에 당시에 '''영조조차도 손을 쓰기 힘들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도 산송을 반복하다보니 영조도 빡쳐서(...) 대표자들을 귀양보낸 적도 있고 귀양 도중 윤씨 집안 사람이 죽기도 하는 등 정말 살벌하게 산송이 진행되었다. 두 가문의 산송은 일제강점기 떄도 법원 재판으로 이어졌다.[29]
첫 산송이 있은지 '''무려 392년''' 만인 2006년 원래 묘지로부터 120m 떨어진 장소의 땅을 파평 윤씨 집안의 재산으로 장만하여 청송 심씨 집안에 넘기고 심지원과 일가의 묘를 그 쪽으로 이장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청송 심씨 집안에서 이를 받아들임에 따라 두 가문의 살벌한 산송 다툼은 막을 내렸다.

5.4. 남양 홍씨 당홍계(南陽 洪氏 唐洪系)


1963년 11월 16일 김의창, 최재호, 김영빈, 김봉렬, 김헌 씨 등 재야 체신인 들은 친목 단체로 대한 체우회를 만들고 64년 우정 80년 기념사업으로 홍영식이 청병의 칼 아래 쓰러진 창덕궁 안 옥류천 상류에 동상을 세우기로 결의, 이 사실을 신문에 실었던 것이 다행스런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 기사를 본 오류 우체국 교환원 이우금 씨가 홍영식의 증손 홍석호 씨(27)와 묘소가 있는 곳을 재야 체신인 이응주 씨에게 전화로 연락해 온 것이다. 이응주 씨는 석호 씨의 어머니 심재봉 씨를 만나 갑신정변 실패 이후 홍 선생 가문의 참혹했던 일을 들을 수 있었다[30].
심씨에 의하면 갑신정변이 실패되자 홍영식은 역신으로 몰렸고 가족은 멸문지화를 당했다는 것이다. 수구파들의 강권으로 어명이 내려 홍영식의 5세난 아들은 조부의 손에 독사 당했다. 선생의 동생 정표는 그때 2세, 같은 운명에 처해 있었지만 유모가 수구문 밖 공동묘지에서 유아시체를 가져다 죽은 것처럼 꾸며 화를 면했지만 16세 때 요절하고 말았다.
이처럼 홍영식의 후손이 끊기자 문중에서 선생의 4촌형 홍만식의 2남 성겸을 선생의 양자로 입양시켰다. 그러나 홍만식도 을사 때 자결하고 말았다. 성겸에게서 현기·응기 두 아들이 태어나고 현기도 아들을 두었으나 이들은 모두 6·25 때 실종되고 지금은 응기의 아들 석호 씨와 딸 해진 양이 홍영식의 유일한 혈육으로 남게되었다. 또한 응기가 서울서 중앙고등보통학교(현 중앙중학교·중앙고등학교)에 다닐 때 박영효가 뒷바라지를 했다는 사실도 들을 수 있었다. 6·25 때 심씨는 친정 심호섭 씨 집(충청남도 당진군 합덕면 운산리)으로 내려가 석호 씨와 해진 양은 외조부 손에서 커왔다.

6. 관련 항목



[1] 왕건의 먼 조상인 호경의 후손들이며 조선조에는 신덕왕후 강씨 등의 왕후를 배출한 가문이었다. [2] 보통 부산경남 지역이 대구경북 지역보다 1.5배 이상 많다.[3] 이 안효공파는 정치적으로 서인 노론에 속했다. 한때 서인의 거두였던 심의겸, 김효원의 반대로 이조정랑에 등용되지 못한 심충겸, 노론 벽파의 영수였던 심환지 등이 바로 안효공파 벌족이었다.[4] 아래의 반남 박씨란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사실 태종이 외척을 경계했다기 보다는 청송 심씨 쪽에서 태종을 경계하다가 분노를 산 것이다. 그런데 태종은 그 이전에 자신의 비인 원경왕후 민씨의 집안도 외척의 발호를 경계해 숙청해버린 전례가 있다.[5] 사실 세종도 장인어른을 신원하고 싶었지만 그 처분을 내린 것이 아버지 태종이었기 때문에 자기 대에서는 할 수 없었던 듯 싶다.[6] 일설에는 순문이 아끼던 기생을 연산군이 빼앗아가자 불평을 늘어놓다가 걸러서 형을 받았다는 설도 있고 조부의 연좌를 받았다는 설도 있다. 현재는 전자의 내용에 무게가 실리고 있는 편이다.[7] 대표적인 인물로 '''아오키 진에이'''가 있다!!![8] 아버지가 전 오리온스 단장인 심용섭으로 24세손 '燮'자 항렬이다.[9] 안효공파 온양공계 후손.[B] A B C D E F [10] 본명은 심재희(沈載熙)다.[11] 본명은 심재영(沈載榮). 안효공파 도사공계 후손이다.[12] 일명 용석(勇錫)이다. 안효공파 온양공파로 이 문중은 보(輔)자 대신 석(錫)자를 쓴다.[13] 본래는 심x보로 "보"자가 뒤에 들어가야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보"자가 가운데로 빠졌다.[14] 안효공파 훈도공파 26세손으로 이 문중은 '선(善)'자 항렬을 쓰는데 이름에 항렬을 쓰지 않았다.[15] 본명 심민경. 아버지가 25세손 심재덕이니 26세손이 맞다.[16] 안효공파 수사공파 26세손이다. 항렬을 쓰지 않았다.[17] 안효공파 첨정공파 26세손으로 이 문중은 '선(善)'자 항렬을 쓰는데 이름에 항렬을 쓰지 않았다.[18] 인수부윤공파 26세손 '우(愚)'자 항렬로 족보상 이름이 우민(愚珉)이다.[19] 인수부윤공파 27세손 '基'자 항렬이다.[20] 본래는 심규x으로 "규"자가 가운데에 들어가야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규"자가 뒤로 빠졌다.[21] 족보상 이름이 '규태(揆泰)'이다.[22] 악은공파 목사공계 28세손 '用'자 항렬이다. 앞에서 언급된 향파인 심원부의 자손이다.[23] 왕건의 먼 조상인 호경의 후손들이며 조선조에는 신덕왕후 강씨 등의 왕후를 배출한 가문이었다. [24] 고려 말 조선 전기의 문신. 조선 개국 후 2번의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좌명공신에 책록되었다. 의금부판사 때 신장의 정수를 1차에 30으로 정하여 합리적 형정제도를 시행했다. 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냈다. 세종 원년 영의정에 오른다. 고려말, 이인임을 탄핵하다가 역으로 매를 맞고 귀양길에서 죽은 신진사대부 박상충의 아들이다.[25]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세종의 장인'''이다.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고, 1392년 조선이 개국한 뒤 병조·공조의 의랑을 지내고, 정종 때 대호군, 1411년 풍해도관찰사, 대사헌, 1414년 형조, 호조 판서, 한성부판윤, 이조판서를 지냈다.[26] 한마디로 잡혀가자마자 바로 불었다는 이야기다.[27]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에 의하면, 병사의 배치를 태종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하여 죄를 받은 강상인, 박습, 심정은 본래 귀양형을 받게 되었으나, 이후 태종이 심온에 대해 불편한 기색을 비치자 병조좌랑 안헌오가 아뢰길 심정이 박습, 강상인과 함께 사사롭게 말을 나눌때 '지금 명령이 상왕과 주상의 두 곳에서 나오니 이는 한 곳에서 나오는것만 못하다'고 하였다고 하여, 태종이 박습, 강상인, 심정을 유배지에서 잡아들여 다시 국문하자 심온이 연루되어있다는 고백이 나왔다고 한다. 이에 대해 청송 심씨 집안에서는 '고문을 못이겨 거짓증언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잡아들인 날짜와 자백을 한 날짜가 동일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26] 급한 김에 형을 방패로 벗어나려 했다 집안을 말아먹었다는 쪽이 더 설득력이 있을지도 모른다.[28] 왕조국가에선 흔한 일인 게 기묘사화의 원흉으로 지탄받던 남곤이나 기축옥사정철도 그들이 악독해서 정적을 다 죽였다기 보다는 각각 중종선조의 의중을 따른 것이지만, 왕이 충신을 죽였다고 할 수 없어 신하인 그들이 간신으로 규정당했다는 게 중론이다. 청송 심씨가 박은을 원망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29] KBS 역사스페셜에서 조선시대 산송 문제에 대한 다큐가 방영됐을 때, 이 두 가문의 산송이 나왔는데, 청송 심씨나 파평 윤씨의 각 어르신들의 회상에 따르면, 매년 제사를 치루러 갈 때면, 서로 묘를 파 버리겠다며, 땅을 팔 수 있는 도구를 가지고 제사에 다녔다고(...), 청송 심씨도 윤관 묘 위에 위치한 심지원의 묘를 지키기 위해 묘 주위에 담을 쌓았다고 한다.[30] 참고로 심재봉 씨의 직계 6대조는 노론(老論) 벽파(僻派)의 영수였던 심환지(沈煥之)의 둘째 동생인 심위지(沈煒之)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