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리그 오브 레전드)/배경

 


1. 장문
2. 단편 소설
2.1. 망각의 동산
2.2. 공정한 거래
3. 구 설정
3.1. 출시 당시
3.2. 유니버스 출범 이후
3.3. 바스타야 설정 추가 이후


1. 장문


아리의 태생은 본인조차 모르는 수수께끼다.
아리는 평생 몸에 지니고 있던 한 쌍의 원석을 제외하곤 자신이 속한 바스타야 부족의 과거나 현재를 전혀 알지 못했다. 사실 아리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숀산 북쪽에서 얼음여우 무리와 뛰어다니는 것이었다. 아리도 자신이 얼음여우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았지만 얼음여우 무리는 아리를 동족으로 보고 무리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야생의 포식자로 살아가던 아리는 자신을 둘러싼 숲과 깊이 연결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곧 이것이 자신의 몸과 그 너머 영혼 세계에 흐르는 바스타야의 마법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아리는 가르쳐 주는 이가 없어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힘을 끌어내는 법을 터득해 주로 사냥에서 반사 신경을 강화하는 데 사용했다. 조심스레 가까이 다가가면 날뛰는 사슴을 진정시킬 수도 있었다. 그렇게 평온을 찾은 사슴은 아리와 얼음여우 무리가 물어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얼음여우 무리와 마찬가지로 아리에게 필멸자의 세계는 멀게만 느껴지는 불안한 곳이었다. 그러나 아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세계에 이끌렸다. 인간은 특히 천박하고 거친 생물이었다. 어느 날 한 사냥꾼 무리가 근처에서 야영하는 모습을 본 아리는 멀리서 그 뒤를 쫓으며 사냥꾼 무리가 잔혹하게 사냥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중 한 명이 빗나간 화살에 맞아 상처를 입게 되자 아리는 그 사냥꾼의 목숨이 새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포식자의 본능으로 사냥꾼의 몸을 떠나는 영혼의 정수를 맛보자 그와 함께 사냥꾼의 기억까지 흡수됐다. 전쟁에서 잃은 연인, 북쪽으로 오면서 두고 온 아이들의 기억이었다. 사냥꾼의 감정을 공포에서 슬픔으로, 그리고 기쁨으로 교묘히 바꾼 아리는 사냥꾼이 태양이 비추는 들판의 환영을 보며 편히 죽을 수 있도록 했다.
그때부터 인간의 말을 이해하기가 쉬워졌다. 어렴풋한 꿈을 떠올릴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리는 무리를 떠나야 할 때가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 사회를 기웃거리던 아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활력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포식자의 본능이 남아 있었지만 온갖 새로운 경험과 감정, 아이오니아 곳곳의 풍습에 사로잡혔다. 필멸자들도 그에 못지않게 아리에게 매료되는 듯했다. 아리는 이 점을 이용해 아름다운 추억이나 깊은 갈망의 환영, 가끔은 슬픔 그 자체로 얼룩진 꿈을 보여 주며 필멸자의 정수를 흡수했다.
자신의 것이 아닌 기억에 취한 아리는 자신이 희생자에게 불러온 슬픔과 비애를 느끼면서도 타인의 삶을 끝내며 환희를 느꼈다. 아리는 감질나는 기억 속에서 가슴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슬픔과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듯한 기쁨을 경험했다. 철과 돌로 이루어진 머나먼 땅에서 온 잔혹한 침략자의 모습을 보고는 눈물을 훔쳤다. 견디기 힘든 감정이었지만 거리를 두려고 할 때마다 힘이 약해지는 것이 느껴져 계속 생명을 갈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아리의 마음은 고통스러웠다.
아리는 자신이 훔친 수많은 환영을 보며 바스타야에 관해 점차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아리는 혼자가 아닌 듯했다. 많은 부족이 필멸자와의 관계에서 문제를 겪고 있었다. 마침내 아리는 바스타야의 옛 영광을 되돌리려는 저항 세력이 있다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어쩌면 이것이 아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와의 연결 고리일지도 몰랐다.
한 쌍의 원석을 손에 쥔 채, 아리는 동족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이제 다시는 빌린 기억과 낯선 꿈에 의존하지 않기로 다짐한 아리는 룬테라에 자신의 부족이 아직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흔적이 남아 있다면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

2. 단편 소설



2.1. 망각의 동산


돌풍이 한바탕 일어나 동산의 차가운 밤공기를 실어왔다. 농익은 과일의 달콤새큼한 냄새와 활짝 핀 꽃의 유혹적인 향이 같이 풍겨왔다. 아리는 동산 입구에 서 있었다. 암석과 흙이 뒤섞였고, 거대한 웅덩이처럼 깊숙이 패인 지형에는 좁다란 동굴들이 미로처럼 구불구불 얽힌 채 하늘을 향해 열려 있었다. 빽빽하게 나무가 늘어선 숲과 가시덤불 위로 달빛이 내려앉았고, 가지각색의 꽃들이 자리다툼하듯 무성하게 피어 있었다. 아리는 주저했다. 이렇게 아름답고도 위험한 풍경의 본성이 어떠한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신성한 숲에 대한 옛날 이야기와 전설은 숱하게 들었지만, 그 진위를 확인하러 저 얽히고설킨 동굴로 들어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옛날이야기에 따르면 동산의 입구 너머로 한번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나오거나, 아니면 아예 나오지를 못한다고 했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아리는 결심을 굳혔다. 동산 안으로 한 걸음 들여놓는 순간, 뒷덜미 털이 온통 곤두섰다. 마치 누가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숲속에는 인기척이라고는 없었지만, 동산은 고요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리의 눈길이 훑고 지나갈 때마다 꽃들이 순식간에 봉오리를 터뜨렸다. 아리가 이리저리 얽힌 덤불과 관목을 비집으며 나아갈 때마다 발밑 흙 속에서 나무뿌리들이 우르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뭇가지에 늘어져 있던 덩굴식물이 마치 관심을 구걸하기라도 하듯 아리에게 줄기를 뻗었다. 아리는 몸을 숙여 그 아래를 지나갔다. 그 순간 부드럽게 살랑거리는 나뭇잎들이 쉿! 하는 소리를 낸 것만 같았다. 머리 위를 뒤덮은 나뭇잎 지붕 틈새로 달빛이 내리꽂혀, 나무들이 금과 은으로 만든 이파리를 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꽃줄기들이 나무 둥치를 휘감으며 보석보다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꽃봉오리들을 여봐란듯이 흔들었다. 속이 꽉 찬 버찌 열매들이 서리에 한 겹 덮인 채 가지에 부딪치면서 가냘프게 잘랑잘랑 소리를 냈다.

눈꽃백합 한 송이가 아리의 얼굴로 다가오더니 부드럽게 뺨을 쓸었다. 뿌리치기에는 너무나 고혹적이었다. 아리는 백합 꽃잎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강렬한 향기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콧속이 오싹해지면서 희미하게 오렌지 향, 여름의 미풍, 방금 죽인 사냥감의 알싸한 피 냄새가 났다. 백합 꽃잎이 바르르 떨며 붉은색을 띠었고, 아리는 숨을 들이켜다 멈추었다. 현기증이 나며 몸이 비틀거렸다.
싹둑!
눈꽃백합은 줄기가 잘려 땅에 떨어졌다. 잘린 부분에서 끈적끈적한 액체가 스며 나왔다. 아리는 멈추었던 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맑아졌고, 아홉 개의 꼬리가 경련을 일으키듯 꿈틀거렸다.
갑자기 회색을 띤 백발 머리의 여자가 눈앞에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아리는 깜짝 놀랐다. 여자는 손에 큼지막한 가위를 들었고, 몸에는 형형색색의 숄을 둘렀으며, 긴 속눈썹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여자가 푸르스름한 녹색 눈으로 쏘아보자, 아리는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불안감이 들었다. 눈앞의 여자가 아까 백합 줄기를 자르듯 손쉽게 자신의 몸을 갈라버릴 것만 같은, 낯선 감정이었다. 여자의 얼굴은 고목 껍질처럼 주름이 가득했고, 도무지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문득 아리는 더 이상 불안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깜짝 놀랐잖아요, 할머님.” 옛이야기 속에서 저 여인은 ‘비밀을 먹는 자,’ ‘망각의 존재,’ 아니면 ‘동산지기 마녀’ 같은 이름으로 나왔다. 하지만 아리는 그토록 강한 힘을 지닌 여인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할머님’이라고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꽃은 우리에게 항상 뭘 바라지.” 여인이 말했다. “우리가 꽃에게서 뭘 바라듯이 말이야. 그러니 그 향기에 너무 빠지지 않는 게 좋아. 내가 잘 알지. 이 배고픈 것들을 먹여 살리는 게 바로 나니까.”
“그럼 할머님이 바로 그 ‘동산지기’시군요.” 아리가 말했다.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도 있지. 하지만 우리가 할 얘기는 그게 아닌데? 난 네가 왜 여기 왔는지 알고 있단다, 아가.”
아가라니. 가족 사이에서 쓰는 말 아닌가. 아리는 왠지 그 말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넌 용서를 구하고 있잖니.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으니까.” 동산지기가 말했다.
여인은 줄기를 움츠리는 고사리를 넘어서며 아리에게 손짓을 했다.
“이리 오렴.”
둘은 달빛이 비치는 동산을 걸었다. 그들이 지나가는 길목에 핀 꽃들이 여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치 여인이 태양이기라도 한 듯, 잎을 따사롭게 데워주고 줄기가 자라나게 도와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니, 어쩌면 꽃들은 그 여인에게 등을 돌리기를 바라지 않는 것인지도 몰랐다.

늙은 여인은 옹이가 잔뜩 난 구름열매나무 앞 긴 의자를 아리에게 가리켜 보이고, 자신도 아리의 반대편에 앉았다.
“어디 보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여인이 미소를 짓자 입가에 주름이 패었다.
아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걱정할 것 없다. 네가 처음은 아니니까. 암, 그렇고말고.” 늙은 여인이 말했다. “그래, 어떤 남자였니? 병사? 모험가? 자기 나라에서 쫓겨난 용사?”
“화가였어요.” 아리가 말했다. 아리는 1년 넘게 남자의 이름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지금도 도저히 발음할 수가 없었다. 마치 목에 가시가 잔뜩 걸린 것 같았다. “음… 꽃을 그렸죠.”
“오호라, 낭만적인 이야기군.” 여인이 말했다.
“근데 내가 죽였어요.” 아리는 내뱉듯 말했다. “그래도 낭만적인가요?”
쓰디쓴 진실의 맛이 입안에 배었고, 말투에도 그대로 묻어났다.
“그 남자는 내 품에서 죽어갔어요. 난 그 입술에서 생명력을 빨아들였고요. 그 사람은 누구보다도 착했고,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했어요. 나는…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내 욕망을 억누를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하지만 그 남자의 꿈과 기억은 너무나 달콤했어요. 뿌리칠 수가 없었죠. 남자도 나더러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이젠… 내가 저질렀던 일을 기억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할머님, 부탁이니 제게 망각이란 선물을 주세요. 기억을 잃어버리게 해주세요. 그러실 수 있죠?”
동산지기 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인은 몸을 일으키더니 나무에서 잘 익은 구름열매를 하나 따서 천천히,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껍질을 벗겼다. 껍질은 갈라지지 않고 모양을 유지한 채 벗겨졌고, 여섯 조각으로 나뉜 황적색 과육이 드러났다. 여인은 아리에게 과육을 내밀었다.
“한 조각 먹어볼래?”
아리는 여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염려할 것 없다. 이 열매는 너한테서 뭘 바라지 않으니까. 꽃하고는 달라. 열매는 절대 뭘 바라지 않아. 식물 중에서 가장 관대하고 자비로운 부분이거든. 가장 감미롭고 즙이 많은 부분이기도 하고, 또 제일 맛있는 곳이지. 열매는 그저 마음을 끌어당기고 싶어할 뿐이야.”
“어떤 음식도 내 입에 넣으면 재로 변해 버려요.” 아리가 말했다. “난 괴물이에요. 괴물 따위는 뭘 먹을 자격도 없어요.”
“괴물도 먹어야지. 안 그러니?” 동산지기 여인이 부드럽게 웃었다.
여인은 과육 한 조각을 자신의 입에 넣고 씹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시큼하잖아! 이 동산에서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이렇게 신맛은 정말이지 익숙해지질 않는다니까.”
그러면서도 늙은 여인은 남은 과육을 다 먹어치웠다. 아리는 묵묵히 앉아 있었다. 여인은 입가에 묻은 과즙을 손으로 닦았다.
“그래, 넌 네 것이 아닌 생명력을 훔쳤다 이거구나.” 문득 여인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일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고.”
“더는 못 견디겠어요.” 아리가 말했다.
“원래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지.” 동산지기 여인이 말했다.
눈꽃백합 봉우리가 주렁주렁 달린 덩굴 하나가 꿈틀꿈틀 뻗어와 늙은 여인의 팔에 감겼다. 여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그 남자를 죽였다는 기억을 잊어버리고 싶어요.” 아리가 애원조로 말했다.
“기억을 잃은 건 자신을 잃는 거야. 대가가 아주 크단다, 아가.”
동산지기 여인은 손을 뻗어 아리의 한 손을 잡더니 꾹 눌렀다. 여인의 푸르스름한 녹색 눈이 달빛을 받아 번득였다. 아리는 그 눈 속에서 아까까지는 보지 못했던 감정을 읽었다. 저건 혹시… 갈망인가?
“넌 무너질 거야.” 늙은 여인이 말했다. “다시는 온전한 존재가 되지 못할 거고.”
“전 이미 산산조각난 거나 다름없어요. 게다가 한순간 한순간이 지나갈 때마다 더 잘게 쪼개지는 느낌이에요. 그러니 제발, 할머님. 그렇게 해주세요!”
늙은 여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동산은 제 발로 걸어온 선물을 절대 마다하지 않아. 항상 굶주려 있으니까 말이야.”
여인은 눈꽃백합 덩굴이 칭칭 감긴 팔을 아리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백합꽃 봉오리들이 손을 펼치듯 꽃잎을 활짝 벌렸다.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을 떠올리면서, 이 꽃에다 숨을 내쉬렴.” 여인이 길다란 종 모양의 백합꽃을 가리켰다. “그러면 이 꽃이 그 기억을 먹어버릴 거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숨을 다시 들이쉬면 안 돼.”
아리는 조심스럽게 꽃 하나를 손으로 쥐었다. 동산지기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는 한껏 숨을 들이켜고는, 꽃 속으로 숨을 내쉬었다.

...아리는 호숫가에서 까마귀 깃털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 옆에 서 있었다. 둘은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어린아이처럼 물장구를 치며 즐겁게 소리를 질렀다.
머릿속에 그 모습이 떠오르자 아리의 고통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고요한 겨울 숲속에서, 아리는 까마귀 깃털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의 남자가 꽃 한 송이를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당신 꽃이 아닌 거야?” 아리는 그렇게 물으며 옷에 달린 끈을 풀었다. 남자는 붓을 들어 아리의 맨살이 드러난 등에 물감을 바르기 시작했다. 등에 꽃이 피어나는 동안 붓의 촉감에 살갗이 간질간질했다. “당신은 내 꽃이야. 나의 꽃.” 남자는 꽃이라는 말을 할 때마다 아리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
아리의 머릿속은 다음에 일어날 일을 두려워했지만, 아리의 마음은 점점 차가워지고 감각이 없어졌다.
...아리는 호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품에는 한때 사랑했던 남자의 생명 없는 몸뚱이가 안겨 있었다. 남자의 몸뚱이는 물 아래로 가라앉았고, 물에 들어간 시신은 점점 시야에서 흐릿해졌다.
조금 전까지는 그 모습만 떠올리면 온몸이 칼에 찔리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이젠 희미하게 마음 한구석이 저릿한 정도에 그쳤다.
...아리는 동굴 속에서 바닥에 쓰러진 나무꾼의 몸 위로 상체를 숙이고 생명력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갑자기 바깥에서 눈을 밟고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아리는 흠칫 놀랐다. 까마귀 깃털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가 우뚝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리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남자에게 이런 광경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당신에게 맞는 짝이 아니야.” 아리가 말했다. “이 꼴을 봐. 죽어가는 사람의 영혼을 못 먹어서 안달이지. 그러니 이만 가줘. 난 좋은 사람이 아니야.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없어.”
까마귀 깃털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을 지닌, 아리의 연인이 말했다. “상관없어.” 처음이었다. 아리의 정체를 알아차리고도 아리를 전적으로 사랑하는 남자를 기억 속에 떠올린 것은. 남자의 목소리는 따스했고 한없이 부드러운 감정이 느껴졌다. “난 당신 거야.”
목구멍 안에서 기억이 콱 막혔다. 아리는 내쉬던 숨을 멈추고 백합꽃의 주문에서 벗어났다.
안 돼. 이 기억을 잃지 않을 거야.
아리는 숨을 들이쉬려고 했지만, 공기는 마치 올가미처럼 아리의 목을 감고 숨통을 조였다. 독을 들이마시는 느낌이었다.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아리는 기를 쓰고 숨을 들이켰다. 허파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이 기억을 잃으면 그 남자를 또 죽이는 거나 다름없어, 안 돼!
아리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리는 눈꽃백합을 손에 쥔 채 땅바닥에 고꾸라졌다. 백합에서 들이마신 낯선 향이 아리의 몸과 마음에 스며들어 기묘하고도 혼란스러운 환각을 만들어냈다.

아리는 환각에 빠졌다. 눈 덮인 고요한 숲속에서, 아홉 개 꼬리 하나하나가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고, 다시 꼬리가 돋아났다가 떨어져 나가는 광경이 반복되었다.
동굴 벽에는 아리의 초상화가 먹으로 수십 편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어느 초상화든 아리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없이 텅 비었고 차가웠다.
다음 순간 아리의 몸뚱이는 호수 한가운데 공중에 무게가 없는 것처럼 둥둥 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호수는 물이 아니라 피로 가득 차 있었다.
당신, 어디 있어?
아리의 마음속, 겹겹이 둘러싸인 기억 속에서 얼굴 하나가 흐릿하게 떠올랐다. 이미 잊혀가던 남자의 얼굴이었다. 남자의 얼굴 자체라기보다는 남자를 그린 그림 속의 얼굴 같았다. 남자는 아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똑바로 쏘아보고 있었다. 아리는 차마 그 강렬한 시선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아리는 눈을 떴다. 동산지기 여인이 땅바닥에 쓰러진 아리를 굽어보고 있었다. 여인의 손에는 여전히 백합 덩굴이 감겨 있었지만, 눈처럼 하얗던 백합은 까마귀 깃털처럼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지금도 그 남자가 보이니?” 늙은 여인이 물었다.
아리는 마음속 희미한 모습에 정신을 집중했다. 얼굴의 형체가 또렷해질 때까지 정신을 집중했다. 그 남자의 얼굴.
“네. 좀 흐릿하지만… 기억이 나요.” 아리는 눈앞에 떠오른 남자의 얼굴을 세세한 부분 하나하나까지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다시는 사라지게 하지 않을 거야.
늙은 여인의 눈이 반짝였다. 이번에는 갈망이 아니라 애석함이 읽혔다.
“그럼 너는 웬만한 사람들이 해내지 못한 것을 해냈구나. 평온함에 굴복하지 않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굴복하지 않았다기보다는… 굴복할 수 없었어요.” 아리는 목에 걸려 있던 말을 토해냈다. “그 남자를 포기할 수 없었어요. 내가 괴물이 되더라도 그럴 수는 없어요. 매일매일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기분이 든다 해도, 하루가 지나면 괴로움이 백 배는 더 커지는 느낌이 든다 해도요. 망각은 그보다 더 나쁜 거예요. 훨씬 더.”
망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개 속에 가려진 듯 흐릿한 천 개의 얼굴이, 한결같이 텅 빈 눈으로 아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네가 이미 내놓은 것을 돌려받을 순 없단다, 아가.” 동산지기 여인이 말했다. “꽃은 거저 받은 것은 절대 다시 내주지 않으니까 말이야. 그러니 네가 내주지 않은 기억을 더욱 소중히 간직하렴. 자, 이제 가거라. 이 동산이 너를 사로잡기 전에 어서 나가야 한다.” 여인이 속삭이듯 말했다. 백합 덩굴은 이제 동산지기 여인의 양어깨를 휘감고 푸르스름한 초록색 꽃잎을 피워내고 있었다. “동산에 사로잡혀 나가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단다.”
아리는 일어서려 했지만 눈꽃백합 덩굴이 아리의 꼬리를 칭칭 감고 있었다. 아리는 단단히 휘감긴 덩굴손을 기를 쓰고 떼어냈다. 털 속에 점점이 박힌 가시도 파내 버린 다음, 간신히 일어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땅속에서 마디마디가 굵직한 뿌리들이 꿈틀거리며 솟아나더니 다리를 붙잡으려 덤볐다. 아리는 뿌리들을 훌쩍훌쩍 뛰어넘으며 정신없이 달렸다. 가시가 잔뜩 돋아난 달장미 덩굴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장막을 만들더니, 아리의 앞쪽으로 길게 늘어져 길을 막았다. 아리는 숨을 들이켜고는 몸을 숙여 그 밑으로 빠져나갔다. 아리가 땅바닥을 구르다시피 하여 달장미 장막을 벗어날 때, 가시 돋친 덩굴이 아리의 머리칼을 휘어잡았다.

동산에서 나가는 길에는 온갖 색깔의 눈꽃백합이 어지러울 정도로 잔뜩 피어 있었다. 칼날처럼 예리한 잎이 아리의 살갗을 베었고, 두툼한 줄기는 얼굴과 목을 휘감으며 입을 막으려고 덤벼들었다. 아리는 입속으로 들어오는 줄기를 닥치는 대로 물어뜯었다. 시큼한 피 맛이 입 안에 가득 찼다. 아리는 겨우겨우 식물들의 공격을 뿌리치고 미로 같은 동굴 입구에 도달했다.
귓가에 동산지기 여인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너의 일부는 이 안에 있을 거야. 언제까지나. ‘우리’와 달리 동산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거든.”
아리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2.2. 공정한 거래


시장 곳곳에 피어오르는 분향의 자욱한 연기 사이로 썩은 양배추 냄새가 진동하며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망토 속으로 아홉 개의 꼬리를 단단히 감춘 아리는 한 쌍의 태양돌 조각을 손가락 사이로 굴리고, 다시 끼우고, 만지작거리며 악취를 떨쳐내려고 했다. 두 개의 조각은 불타는 화염을 형상화했지만, 뾰족한 가장자리가 맞물리도록 조각되었다. 조각을 맞추면 완벽히 매끄러운 구체가 되었다. 기억나기 이전부터 황금빛 돌들을 들고 있었지만, 어디서 얻었는지, 어떤 물건인지는 전혀 몰랐다.
낯선 환경을 거닐었지만, 아리는 주변에 가득한 마법의 기운에 그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섬세하게 짜인 수십 개의 바구니에 잡동사니들이 가득 담긴 가판대를 지났다. 반짝이는 돌, 바닷가 부족의 전설이 각인된 조개껍데기, 뼈로 조각된 도박용 주사위 등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보물이 한가득이었지만, 아리가 가진 조각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의 청명함을 담은 원석은 어떤가?” 회색 수염의 상인이 물었다. “그대를 위해서라면 이 청색의 방울을 울음까마귀 깃털 하나 가격에 팔지. 주브지나무의 씨앗도 나쁘지 않아. 난 아주 융통성이 있다네.”
아리는 그에게 미소 지었지만, 고개를 저으며 시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태양돌을 손에 쥐고, 그녀는 뾰족한 주황색 야채로 가득한 가판대, 날씨에 따라 색이 변하는 과일을 파는 아이를 지났으며, 그 사이 최소 세 명의 행상인이 향이 들어있는 통을 흔들며 가장 깊은 형태의 명상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운명! 운명을 점쳐 드립니다!” 연보라색의 눈동자와 부드러운 턱선을 가진 젊은 여자가 외쳤다. “누구와 사랑에 빠지게 될지 알아보거나, 우엉 뿌리 한 줌으로 불운을 피하는 방법을 알아보세요. 미래는 신들의 일로 남겨두고 싶다면, 과거에 대한 질문도 대답해드려요. 아, 물론, 그보다 독살당할 위험이 있는지 먼저 알아보는 걸 추천하지만요.”
고양이 귀를 가진 큰 키의 바스타야가 향신료를 뿌린 빵을 한 입 베어먹으려던 순간이었다. 그는 깜짝 놀라 점술가를 쳐다봤다.
“참고로 그건 괜찮아요. 방금 건 공짜로 해드리죠,” 그에게 허리를 굽혀 우아하게 인사한 뒤, 몸을 돌려 지나가던 아리에게 말을 걸었다. “아, 당신은 정말 어둡고 신비로운 과거를 가진 것 같군요. 아니면 최소한 멋진 이야깃거리가 있겠죠. 무언가 묻고 싶은 건 없나요, 아가씨?”
아리는 자욱한 분향 냄새를 뚫고 여자의 목덜미에서 감도는 축축한 털과 향신료에 절인 가죽 냄새를 맡으며 잠시 멈춰섰다.
“감사하지만, 없습니다.” 아리가 대답했다. “그냥 둘러보고 있어요.”
“안타깝지만, 이 시장에서는 이멜로 조각을 더 찾을 순 없을 거예요.” 여자가 아리의 태양돌을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이 들고 있는 것 같은 거 말이에요.”
아리는 여자에게 가까이 가며 목 뒤에 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로 다짐하며 말했다. “이걸 알아보시겠어요? 어디서 구할 수 있죠?”
여자는 아리를 눈에 담았다.
“이멜로 작품이 맞을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실물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요. 그는 전성기일 때 적은 수의 조각품만을 남겼고, 대부분은 전쟁 도중에 흩어져버렸죠. 그거, 굉장히 희귀한 거랍니다.”
여자가 말을 한 단어씩 꺼낼 때마다 아리는 점점 다가왔다.
“참, 저는 히린이라고 합니다.” 여자가 말했다.
“이 조각사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아시나요?” 아리가 물어봤다.
히린이 웃었다.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들어오시면 제가 아는 것을 알려드리죠.”
아리는 어깨에 두른 망토를 다시 가다듬고 점술가의 가판대를 지나 동물의 가죽으로 벽이 장식된 천막에 도착했다.
“차 좀 드시겠어요?” 히린이 물었다. “오늘 아침에 끓였답니다.”
그녀는 두 개의 잔에 자두와인 색의 액체를 따랐다. 히린은 한 잔을 가져가고, 한 잔은 아리 앞에 내밀었다. 씁쓸한 오크나무 껍질 맛의 차였다. 쓴맛을 숨기려는 듯 꿀이 지나칠 정도로 많이 들어가 있었다. 히린은 돌을 보여달라는 뜻으로 손을 내밀어 보았지만 아리는 건네주지 않았다.
“그 돌들은 당신에게 무척이나 소중한가 보군요.” 히린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훔친 태양돌을 장물로 팔 생각은 없습니다. 제 평판이 어떻게 되겠어요.”
“이게 어디서 왔는지 알려줄 수 있나요?” 아리가 조심스럽게 건네주며 물었다.
히린은 돌들을 들어 올려 빛에 가져다 댔다.
“정말 아름답군요.” 그녀가 말했다. “어쩜 이렇게 완벽하게 잘 맞물리는지 모르겠네요. 이런 건 처음 봅니다.”
아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여자를 쫓을 뿐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이멜로라는 조각가가 천 년 된 도마뱀 알의 화석을 모아, 세밀한 모양으로 조각했다고 합니다. 고대의 도마뱀들은 게투 바다가 사막으로 말라버리기 전에 살고 있었고, 오직 석화된 뼈와 먼지만을 남겨두었죠.”
말을 하는 도중에 히린은 작게 기침했다. 아리는 그녀의 숨 냄새에 쓴 향기를 감지했다. 마치 식초를 마신 것 같았다.
“이멜로 돌은 작은 조각들이 더욱 거대한 조각에 맞춰지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녀는 계속 말했다.
히린은 아리의 얼굴 앞에 황금 조각들을 늘어뜨렸다.
“당신의 과거가 소중한 정보의 흔적을 남겨둔 것처럼, 이 조각품에도 숨겨진 부분이 더 많습니다. 전부 모아 합쳐놓으면 완전히 다른 모양이 되지요. 당신의 역사를 추적해보면 당신이 뭐가 될지 누가 알까요. 잃어버린 조각들로부터 기대를 뛰어넘는 무언가를 배울지도 모릅니다”
“말씀을 잘하시네요.” 아리가 히린을 보며 중얼거렸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자, 히린이 히죽 웃었다. “몇 가닥의 진실에, 몇 가닥의 창작을 엮어보았지요. 점술가의 직물에는 이음새가 보이면 안 됩니다.”
히린은 찬장에서 사냥꾼이 쓸법한 칼을 꺼냈다.
“당신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적당히 엮어 넣어 당신이 떠날 수 없게 하지요.” 그녀가 말했다. “차가 당신의 근육을 마비시킬 때까지 말이에요.”
아리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당장 이 여자를 공격하고 싶었다. 히린을 덮치려 했지만,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나무마냥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아가씨. 그냥 꼬리 하나만 있으면 돼요. 여러 물약에 쓸모 있고, 아주 귀중하기도 하고요. 적어도 제 생각에는 그럴 거 같네요. 여우 꼬리를 가진 바스타야는 본적이 없거든요. 차는 고통을 느낄 수 없게 만들어줘요. 움직일 수도 없게 하고요.”
히린은 아리의 꼬리 중 하나에 붕대를 감았다. 아리는 저항하려 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내일은 멀쩡하게 일어날 수 있을 거예요!” 여인이 말했다. “물론 꼬리 하나는 없겠지만요. 정말 꼬리 아홉 개를 다 쓰나요?”
아리는 눈을 감고 주변에 있는 마법의 보고에 정신을 집중했다. 주변의 환경에는 넘칠 정도로 많은 마법이 넘실거렸지만, 차 때문에 약해진 아리는 하나도 끌어모을 수 없었다. 대신, 그녀는 히린의 정신에 손을 뻗었다. 이쪽이 훨씬 더 주무르기 쉬웠다. 그리고 밀었다.
아리는 눈을 뜨고 히린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히린의 눈동자는 연보랏빛에서 짙은 자줏빛 색으로 깊어졌다.
“히린,” 그녀가 말했다. “더 가까이 와요. 날 속인 자의 얼굴이 보고 싶군요.”
“물론이죠, 아가씨.” 히린이 대답했다. 의지를 빼앗긴 히린의 목소리는 텅 빈 것처럼 들렸다. 마치 우물의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그녀는 얼굴 사이의 거리가 고작 몇 한 뼘도 되지 않을 때까지 가까이 다가왔다. 아리는 숨을 들이마시며 히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숨결에서 생명의 정수를 빨아들였다.
…시장의 가판대 밑에 숨은 히린은 배고프고 두려운 어린 여자아이였다. 그녀의 위로 두 명의 사내가 서로 화를 내며 그녀를 찾고 있었다. 그녀의 일당이 있어야 할 금고는 텅텅 비어 있었다...
아리는 계속 히린의 삶을 빨아들이며 순수한 감정의 기억을 맛봤다. 기억들은 아리의 입속에 감미롭게 퍼져나갔으며, 그녀는 각 감정에 담긴 고유한 맛을 음미했다.
...히린은 신비로운 마녀 의사의 운세를 말해주며 동전 한 닢을 받았다. 그녀는 동전으로 빵을 사서 고작 몇 초 만에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지저분한 여인숙에서, 요란하고 거친 무리가 카드놀이를 했다. 나비 날개를 연상시키는 눈썹을 가진 남자가 황금빛 이멜로 돌을 도박에 걸었다. 히린은 그림자 속에서 지켜봤다…
...히린은 시장을 걷는 아리를 추적했다. 그녀의 망토 아래에 여우 꼬리 하나가 보였다. 그녀는 바스타야를 자신의 천막으로 유인했다—
충분해.
아리는 멈췄다. 그녀의 머리는 새롭게 얻은 활력으로 핑핑 돌았다. 히린에게서 기억을 훔칠 때마다 약해진 근육에 에너지가 다시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독도 정화되었다.
다시 힘을 얻은 그녀는 사지를 깨우고 꼬리를 흔들며 기지개를 켜보았다. 바늘로 찌른 것처럼 온몸이 따끔거렸다.
히린은 눈을 크게 뜬 채로 멍하게 서 있었다. 아직 확실히 살아있었다. 비록 없어도 될만한 기억 몇 개는 부족한 상태겠지만, 내일 멀쩡하게 일어나는 쪽은 그녀일 것이다.
히린의 인생에 대해 알게 되자, 아리의 분노는 사그라들었다. 그녀는 점술가의 뺨에 손을 한 번 스치고, 어깨에 망토를 단단히 두른 다음, 태양이 내리쬐는 시장으로 다시 나갔다.
히린은 아리의 존재나, 그들의 조우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아리는 거래의 결과로 사냥감의 이름, ‘이멜로’를 알아냈다. 부드러운 날개 눈썹을 가진 남자의 모습이 그녀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불탔다.

3. 구 설정



3.1. 출시 당시


아이오니아 남부의 울창한 숲 속. 무리 지어 살아가는 여느 평범한 여우들 사이에 이상한 여우 한 마리가 있었다. 그 여우는 자기가 여우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지금 걸치고 있는 털가죽은 자신의 본 모습이 아니라고 믿었고, 언젠가 사람이 되고야 말겠다는 꿈을 남몰래 키워갔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사람이 될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고 방법도 알 수 없었다. 여우는 허망함과 실망감 속에 자신의 꿈이 희미하게 스러져 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여우의 발길이 인간들의 전투로 피범벅 된 들판에 닿았다. 깊은 상처를 입고 죽어가는 군인들이 대지를 온통 뒤덮었다.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눈앞에 그려진 끔찍한 광경 속에서 헤매던 중, 여우는 로브를 걸친 어떤 남자 앞으로 이끌리듯 걸어갔다. 그 남자는 희미한 마법의 기운에 둘러싸여 엎드린 채로 죽어가고 있었다. 생명의 불꽃이 막 사그라지는 참이었다. 그때, 여우는 본능이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그 남자에게서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생명의 정기, 마법의 가닥들이 쏟아져 나와 여우의 몸 속으로 빨려 들어갔던 것이다. 여우는 표현할 수 없이 달콤하고 저항할 수 없는 감각에 압도되어 버렸다. 흐릿한 최면 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여우는 자신의 외형이 크게 변한 것을 깨달았다. 윤기 나는 하얀 털이 사라지면서 주위에 널려 있는 부상자들과 같이 길쭉하고 나긋나긋한 인간의 몸으로 변했던 것이다! 이 여우의 이름은 아리. 아름다운 여성이자 약삭빠른 짐승이다.
비록 겉모습은 사람으로 변했지만, 아직 뼛속까지 인간이 된 것은 아니란 걸 아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태생이 여우였던 탓일까? 아리는 인간들의 풍습에 빠르게 적응했고, 엄청난 미모와 마법으로 순진한 남자들을 매혹했다. 꼼짝 못하게 만든 다음 생명의 정기를 빨아들였다. 아리는 그렇게 남자들의 욕망을 이용해 사람이 되고자 하는 꿈을 키워나갔다. 그런데 아무리 태생이 여우였어도 인간은 인간인 것일까? 사람들을 희생시킬수록 아리의 마음속엔 점점 회한이라는 생소한 감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여우였던 시절엔 아무 거리낄 게 없었던 행동도 어쩐지 주저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음속에 도덕이 자리를 잡아 생명을 빼앗는 고통과 번뇌를 더 이상 극복할 수 없게 되자, 아리는 자신을 완전한 인간으로 만들어줄 룬테라 최고의 마법사를 찾아 길을 나섰다.

3.2. 유니버스 출범 이후


아이오니아의 전원 지대가 불탔다. 녹서스 군단은 아이오니아를 톱날 단검처럼 찢고 지나갔다. 그들의 빛나는 갑옷은 지는 해 아래에서 핏빛으로 물들었다. 불타는 사원들이 스러지는 태양빛에 힘을 보탰고, 멀리서 들려오는 고통의 절규가 대기를 채웠다.

테바사 산 기슭에는 100명 정도가 사는 마을이 있었다. 위대한 전사들이 사는 마을은 아니었다. 몇몇 집은 도망쳤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했다. 사랑하는 이들을 꼭 잡고 우는 이들도 있었다. 용감한 자 50명이 싸울 준비를 했다. 그들은 쇠스랑에서 흙을 털어내고 빗자루 손잡이 끝에 칼을 묶었다.

방어하는 이들 모두의 눈에 공포가 차오르고 있었다. 희망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녹서스 군이 진군하면서 일어나는 흙먼지가 저 멀리 보였지만 신들에게 기도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이오니아의 아들과 딸들은 산속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고 별이 총총한 황혼을 바라보면서 곧 다가올 살육의 시간을 기다렸다.
아리의 아홉 꼬리가 휙 움직였다. 긴장한 것이다. 날카로운 감각이 위험을 알렸다. 우뚝 솟은 버드나무 그림자 아래에 웅크린 아리는 귀 기울이고 지켜보며 기다렸다. 그녀는 몇 주 동안 마을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 절대 접근하지 않았다. 가족들이 저녁 식사를 하며 나누는 대화 소리, 언니 동생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여자들의 웃음소리, 아이들이 노는 소리를 들었다. 몇 시간이고 그 소리들을 듣다가 자기 안의 갈망을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자리를 떴다.
아리는 국가나 정치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지만 직감만으로 지금 세상이 뭔가 매우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호기심이 많으면서도 마을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아리는 코를 킁킁거렸다. 그녀는 불안의 원인을 찾아내고는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녹서스 정찰병 일곱 명이 덤불을 헤치고 그 어느 때보다 산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검은 눈을 가진 이 신중한 사내들은 손에 무기를 쥐고 지는 땅거미 속을 조심스레 나아갔다.
아리는 금세 이들을 발견했고 그들을 따라 숲 속으로 들어갔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휙휙 지나가며 그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의심이 커졌다. 그들의 임무가 무엇인지 추측밖에 할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 아리는 살인자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전투를 치뤘다.
정찰병 대장이 덤불을 살폈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뒤에 있는 남자에게 귓속말로 짧은 명령을 내렸고, 그 남자는 다시 자기 뒤의 남자에게 이를 전달했다. 아리는 이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조용히 추적을 계속했다.
갑자기 일곱 개의 손이 일곱 개의 화살에 닿았다.
“지금이다!” 대장이 외쳤다. 정찰병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놓자 매의 깃털을 단 화살들이 아리에게로 휙 날아왔다.
아리가 덤불에서 몸을 던지는 순간 화살 두 개가 소매를 가르고 지나갔다. 소매를 뜯어낸 그녀는 몸을 숨길 곳으로 뛰어들어갔다. 노란 두 눈이 충격과 분노로 타올랐다. 아리는 거리낌 없이 이들을 처단할 것이었다.
아리는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고 자신의 혼령이 내뿜는 원초적인 힘이 모여드는 것을 느꼈다. 아홉 개의 꼬리가 사방으로 펼쳐졌고 으르렁거림과 함께 공기로부터 흰 불꽃을 끌어냈다. 그녀는 손목을 휙 움직여 불꽃 세 개를 소환했다. 또 한 번의 화살 세례를 피한 아리는 가까운 나무로 뛰어가 꼬리를 감았다가 나무 몸통에 튕겨 정찰병들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녀가 한가운데로 들어오자 정찰병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아리와 가장 가까이 있던 남자가 칼을 불쑥 내밀었지만 공기를 가를 뿐이었다. 아리는 정신 없는 속도로 적들 사이를 춤추듯 움직였다.
아리 주위에 있던 불꽃들이 가장 가까운 정찰병 세 명을 집어삼켰다. 흰 불꽃이 그들을 태웠지만 아리에게는 더 잔인한 힘이 있었다. 그녀는 나무에서 나무로 도약하면서 뛰어오를 때마다 더 높이 올라갔다. 얽혀 있는 나무 뿌리에 몸을 쭈그린 정찰병 대장이 활시위를 팽팽히 당기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금이라도 기회를 준다면 자신의 눈에 화살을 박을 것을 아리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대장을 가리고 있는 나뭇가지 위로 슬그머니 올라가 묘한 힘을 가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인간이여.” 아리가 속삭였다. “나에게 오세요.”
대장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활을 놓고 엄호로부터 걸어 나왔다. 그는 절망과 욕망이 깃든 눈을 크게 뜨고 위를 올려다 봤다.
“이제 올라와요.” 그에게 키스를 날리며 아리가 말했다.
완전히 아리의 노예가 된 대장은 나무 몸통에서 발 디딜 곳을 찾았다. 아리는 손바닥 위에 희미하게 빛나는 구형의 에너지를 불러냈다. 언뜻 무해해 보이는 이 구슬은 거대한 힘을 감추고 있었다. 아리는 팔을 뒤로 젖혔다가 여우 같은 미소를 지으며 구슬을 아래로 내던졌다.
구슬이 대장을 관통한 뒤 아리의 손바닥으로 되돌아왔다. 대장의 몸이 연기를 내며 숲 바닥에 쿵 하고 떨어졌다. 남은 정찰병들은 공포에 질려 도망가려 했지만 도망은 숨는 것만큼이나 헛된 일이었다. 아리는 소용돌이 치는 꼬리를 뒤로 하고 가지에서 가지로 몸을 날리며 벼락 같은 에너지로 두 명을 쓰러뜨렸다.
마지막 정찰병이 다리가 꼬여 넘어졌고 부러진 뼈를 움켜잡았다. 그의 옆에 아리가 우아하게 착지했다. 정찰병의 목을 부여잡은 아리는 그의 얼굴 가까이로 얼굴을 가져갔다.
“너희들이 자초한 거야.” 그녀는 쉬익 소리를 내며 엄청난 힘으로 남자의 목을 꺾었다.
남은 과제는 하나뿐이다.
아리는 인간답지 않은 자들에게서 인간성을 빼앗는 데 꺼림칙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녀는 쓰러진 정찰병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맥박이 희미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양손을 그의 얼굴 양쪽에 갖다 댔다. 그의 정기가 눈과 입을 통해 흘러나왔고 아리의 안에서 황홀한 감각이 솟구쳤다. 그의 인간성이 아리에게로 쏟아져 들어왔고, 그녀는 심장이 뛸 때마다 자기 안의 여우가 약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꼬리들은 기쁨에 차 동그랗게 말리고 얼굴은 희열에 찼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감각에 넋을 잃은 상태에서도 아리는 점점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전투 소리를 들은 마을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오는 것이었다. 그녀는 죽어가는 사람의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빨아먹는 장면을 마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는 아리가 끔찍한 불가사의로 보일 것이다.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저주 받을 잡종.
아리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려 나무와 덤불 사이로 형체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멀리서 바라봤던 사람들을 알아봤다. 언젠가 그들과 나누게 되길 바라는 우정을 생각하면서.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아리는 숲속으로 도망쳤다.
아리의 갑작스런 움직임에 축 쳐진 꼬리들이 뒤를 이었다.

원래 스토리라인인 '여우였던 아리가 인간의 모습을 하게 된 뒤 인간을 닮아가려는 모습'을 약간 변형해 '인간을 닮고 싶어하기에 인간성을 저버린 자들을 가차없이 사냥하는 모습'으로 변했다. 인간의 정기를 흡수하는 것으로 희열을 얻지만 정작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 데에서 인간의 모습을 닮아 인간이 되길 원하는 구미호의 모습이 더 부각되는 스토리로 바뀌었다.
특이하게도, 신 배경이 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니버스와 신 클라이언트 양측에서 구 배경만이 서술되어 있다. 새로운 배경 변경이 있을지는 불명이었는데, 바스타야 설정이 추가되면서 새로운 배경 스토리로 바뀌었다.

3.3. 바스타야 설정 추가 이후


룬테라가 가진 잠재력과 선천적으로 연결된 아리는 마법을 순수한 에너지의 구체로 변환할 수 있는 바스타야다. 아리는 먹잇감의 감정을 질리도록 조종하며 가지고 놀다가 마지막에 생명의 정수를 흡수하는 것을 즐긴다. 타고난 포식자지만, 먹어치우는 영혼에 담긴 기억의 편린을 받아들일 때마다 거기에 감정 이입하게 된다.
아이오니아 북쪽의 눈 덮인 숲속에 버려진 아리는 그녀에게 남겨진 한 쌍의 원석 외에 원래 가족에 대해 무엇도 알지 못한다. 홀로 남겨진 아리는 아침 사냥에 나선 얼음여우 무리와 합류했고, 머지않아 그들 무리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마법을 가르쳐줄 사람이 없어도 아리는 본능적으로 주변 환경에서 마력을 끌어내 사용할 방법을 터득했다. 그녀는 파괴적인 구체를 만들거나 반사신경을 강화하여 먹이를 사냥했다. 가까운 거리에서는 사슴을 평온한 상태로 만들어 그녀가 이빨로 공격해도 미동도 하지 않도록 진정시킬 수 있었다.
어느 날, 외국의 병사들이 그녀의 굴 근처에 야영하게 되면서 아리는 처음으로 인간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의 행동은 아리에게 너무나 생소했고, 호기심이 발동한 그녀는 멀리서 그들을 지켜봤다. 특히, 낭비가 심한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그녀의 여우 가족들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알뜰살뜰하게 사냥감을 해체하는 사냥꾼에게 눈길이 갔다.
지켜보던 사냥꾼이 화살을 맞아 상처 입게 됐을 때, 아리는 그의 목숨이 새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그의 몸을 떠나는 정수를 빨아들이자, 그의 기억들이 흡수됐다. 전쟁에서 잃은 연인도, 철과 돌로 이루어진 기묘한 땅의 아이들도 보았다. 그러다 아리는 사냥꾼의 감정을 공포에서 슬픔으로, 그리고 기쁨으로 자유롭게 조종하는 방법을 터득했고, 그가 죽어갈 때 태양이 비추는 들판을 볼 수 있도록 매혹했다.
사냥꾼의 인생을 흡수하면서 찾아온 쾌감에 도취된 아리는 어느 때보다도 활력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더 많은 제물을 찾아 아이오니아를 여행했다. 아리는 생명의 정수를 포식하기 전에 먹이의 감정을 마음껏 유린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아름다운 환상이나, 깊은 갈망의 환영, 가끔은 슬픔 그 자체로 얼룩진 꿈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녀의 것이 아닌 기억에 취한 아리는 타인의 삶을 엿보며 환희를 느꼈다. 훔친 기억을 통해 아리는 그림자 신전 앞에 충성을 맹세하고 태양신의 화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모습, 오직 노래로만 말하는 조류 바스타야 부족, 이전에 본 적 없는 거대한 산맥의 풍경 등을 보았다. 아리는 감질나는 기억 속에서 가슴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슬픔과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듯한 기쁨을 경험했고, 녹서스 침략자들이 벌이는 대학살에 아이오니아 마을 사람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고 눈물을 훔쳤다.
아리는 흡수한 기억을 통해 섬뜩한 여우 악마 이야기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많은 생명의 정수를 흡수하면서 아리는 피해자들의 감정에 더욱 이입하게 되었고, 너무나 많은 목숨을 앗아간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아리는 여우 악마의 전설이 사실이라는 게 괴로웠다. 그녀는 잔혹한 괴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정수를 먹고 시간이 흐르면 힘이 약해지는 것이 느껴져 다시 생명을 갈구할 수밖에 없었다.
아리는 자제력을 시험하며 생명의 정수를 조금씩 먹어보았다. 기억을 한두 개 정도 받아들일 수 있지만, 사람이 목숨을 잃지 않을 정도로 흡수하는 데 성공했다. 한동안은 괜찮았지만, 끊임없이 굶주림에 시달리던 아리는 더는 유혹을 참지 못하고 근처에 있던 바닷가 마을 전체의 꿈을 먹어치워 버렸다.
크나큰 실수에 괴로워한 아리는 도저히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슬픔을 느끼며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리는 끊이지 않는 욕망을 제어하고자 숲속의 동굴에 자신을 스스로 가두었다. 수년 뒤 세상에 다시 나온 아리는 삶의 모든 부분을 자신의 눈을 통해 직접 경험하고자 했다. 가끔은 정수를 탐닉하더라도 목숨을 빼앗지 않도록 조심했다. 유일한 단서인 한 쌍의 원석만을 지닌 채, 아리는 동족과 자신의 기원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이제 다시는 빌린 기억과 낯선 꿈에 의존하지 않기로 다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