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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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évolution haïtienne''', 1791-1804.[1]
1. 개요
2. 배경
3. 혁명의 전개
4. 이후
5. 의의와 한계
6. 여담


1. 개요


1791년 프랑스 식민지 생도맹그에서 일어난 혁명이다. 혁명의 결과로 식민지의 아프리카인 노예들이 해방되었으며, 새로운 국가 아이티가 세워졌다.

2. 배경


카리브 해의 지주들은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설탕을 얻었고 이것을 통해 큰 이익을 얻었다. 그 중 프랑스 식민지인 생도맹그는 자메이카와 더불어 최대의 설탕 생산지였다. 지주들은 설탕을 생산하기 위해 흑인 노예들을 부려먹었는데, 이들의 노동 환경은 매우 열악하여 영양 부족, 의료 부족 등의 가혹한 환경으로 사망률이 높았다. 반면 흑인과 백인 사이의 혼혈인 물라토는 백인들에게 차별받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자유민으로 취급받아 흑인들에 비해 우대받았다. 이러한 인종차별과 가혹한 노동으로 흑인 노예들의 불만은 점차 고조되어 백인들과의 무력 충돌로 발산되었다.
그러던 중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생도맹그의 식민지민들에게 혁명 정신을 심어주었다. 뱅승 오제를 비롯한 물라토들은 백인과의 평등을 위해 식민지 총독에게 투표권 등의 권리를 요구했다. 하지만 식민지 총독이 이를 거부하자 물라토들은 뱅승 오제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이들은 진압되어 모두 잔인한 형벌에 처해졌다. 백인들이 물라토들을 진압하는 과정을 지켜본 흑인 노예들은 아이티 혁명에 불을 지폈다.

3. 혁명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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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생 루베르튀르
1791년 8월 22일 아이티 혁명이 발발했다. 한편 일부 흑인 노예들은 가사 노동이나 하인 일을 하면서 크레올 엘리트 층을 이루기도 했는데, 아이티 혁명의 지도자인 투생 루베르튀르가 이 계층에 속했다. 투생 루베르튀르는 독학으로 전술을 공부한 뛰어난 지휘관이었고 혁명의 지도자가 되어 반란을 이끌었다. 투생이 이끈 혁명 세력은 생도맹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1798년 투생은 자메이카에서 보낸 영국 군대를 무찔렀다. 그리고 산토도밍고를 공격하여 그곳의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1801년 생도맹그에 자치 정부를 수립하였다. 1802년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처남인 샤를르 르클레르를 보내 생도맹그를 다시 차지하고자 했다. 프랑스군 사령관 르클레르는 투생에게 항복하면 자유를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투생은 그 말을 믿고 협상하러 갔지만 그 약속은 프랑스의 거짓 계략이었다. 투생은 투옥되어 1803년에 사망하였다.
르클레르가 생도맹그를 탈환한 뒤 나폴레옹이 생도맹그의 노예 제도를 부활시키려 하자 장 자크 드샬린고 페숑이 다시 반기를 들었다. 프랑스군은 우수한 무기로 무장했지만 황열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했다.[2] 지휘관인 르클레르가 황열병으로 사망하고 난 뒤 후임 지휘관이 혁명군을 잔인하게 진압하여 왕당파 일부가 반란군에 붙은 것과 프랑스 본국이 영국의 해상 봉쇄로 지원군을 보내기 어려웠던 것도 패배에 일조했다. 혁명군은 1803년 마지막 전투인 베르티에르 전투에서 승리하고 나서 1804년 아이티 공화국을 세웠다.

4. 이후


이 전쟁으로 프랑스는 최대의 설탕 생산지를 잃어 큰 타격을 입었으며 나폴레옹은 북아메리카 재식민화 계획을 포기하고 루이지애나를 매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생도맹그, 즉 아이티는 전쟁으로 인구가 55만 명에서 30만 명으로 크게 줄었다. 전쟁 후 아이티 주민 중 일부는 뉴올리언스로 이주하였다.
아이티의 총독이 된 드살린은 나폴레옹을 흉내내어 1804년에 칭제했다가가 1805년 동지였던 공화파에게 암살당했다. 그 후 아이티는 정치적 혼란에 빠져 물라토들의 지지를 받는 알렉상드르 페숑의 남부 공화국과 흑인들의 지지를 받는 앙리 크리스토프의 북부 왕국이 내전을 벌였고, 앙리 크리스토프가 죽은 1820년에 페숑의 후임 대통령인 장 피에르 부이예의 남부의 주도로 통일된다.
1834년에 프랑스는 아이티의 독립을 인정했지만, 그 대가로 아이티에 노예주들에 대한 거액의 배상금을 요구했다. 아이티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인정받기 위해, 그리고 경제적 봉쇄를 풀기 위해 배상금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100년동안 아이티의 경제를 발목잡았고 국내 정치도 안정되지 못해서[3] 아이티는 가난한 나라가 되었다.
2004년 아이티에서 독립 200주년을 기념했다.

5. 의의와 한계


노예 혁명은 다른 국가에서도 일어난 적이 있었지만 그것이 성공한 케이스는 아이티 혁명이 유일하다. 또한 아이티의 혁명은 다른 국가의 노예 해방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이티 혁명 이후 많은 국가의 노예들이 아이티 혁명에서 영감을 받아 혁명을 시도했고 영국은 1807년에 노예 무역을, 1834년에 노예제를 폐지했다.

하지만 흑인의 대부분이 농민이고 물라토가 사회적 자본과 토지를 독점하는 식민지의 계층구조는 변하지 않았다는 한계도 있다. 아이티 독립 후에도 이들의 갈등은 지속되어 두 파벌로 나뉘어 싸웠다.

6. 여담


참고로 흑인들을 진압하기 위해 투입된 부대는 프랑스군 휘하의 폴란드군들이었다. 이들은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에 맞서 프랑스의 힘으로 조국의 광복을 되찾기 위해 입대한 것이었으나, 막상 고향과는 전혀 상관도 없고, 무엇보다 '''자신들도 조국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데 반란 노예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압제자의 용병으로 파병 되었다는 사실'''에 동기 부여가 바닥을 쳤다. 따라서 나폴레옹 휘하의 폴란드 의용병들이 유럽 내에서는 용맹을 떨친 것과 반대로 아이티에선 부당 대우, 열대병과 함께 만성적인 사기 저하에 시달리며, 심지어 수백명 규모로 탈영, 전향하여 아이티 혁명군에 붙기도 했다. 정예병과 오합지졸의 차이는 그야 말로 해당 군대의 정치적 문맥에 따라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걸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런 폴란드 진압군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루베르튀르와 데살린은 적극적인 심리전을 펴며 아이티 해방 이후에도 폴란드인 탈영병이나 전향을 희망하는 폴란드인들을 적극적으로 받아주어 폴란드에서 머나먼 아이티 땅에 카잘(Cazale)[4]이란 마을엔 폴란드인 집단촌이 생기기도 했다. 아직도 구글 이미지 검색이나 관련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저 마을 주민들은 흑백혼혈의 흔적이 명백한 편이고, 상호간 고향, 조상 찾기도 활발한 18-19세기 범대서양 자유주의 혁명 시대의 역사적 유산으로 살아가고 있다.

[1] 예리한 역덕후나 전공자라면 그림의 유럽인 진압군의 모자가 프랑스군이 아니라 오히려 폴란드군이 많이 쓰던 사각모 샤프카라는걸 알아볼 것이다. 본격적인 유럽 열강간의 전쟁도 아니고, 자연 환경과 질병 때문에 비전투 손실이 막대할 것이 뻔한 전장이라 프랑스가 의도적으로 당시 폴란드 분할에 저항하며 프랑스군에 붙었던 폴란드 의용병들을 아이티의 진압군으로 대규모 투입했기 때문이다.[2] 참고로 이때 파병된 프랑스군의 구성원 대부분은 프랑스군내의 '폴란드 군단'에 속해있던 폴란드인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자신들의 나라를 멸망 시킨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싸우기 위해 프랑스군에 입대했던 것인데, 오히려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다. '''조국의 자유를 위해 다른 이들의 자유를 핍박해야 했던 역사의 아이러니'''인 셈.[3] 1843~1915년까지 집권한 대통령 22명 중에서 21명이 쫓겨나거나 암살당했다. 그 전에도 드살린(암살), 크리스토프(자살)가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 1849년~1859년에는 포스탱 엘리 술루크 대통령이 드살린을 흉내내서 칭제했다가 쫓겨났다. 포스탱은 영국으로 망명한 뒤 아이티로 귀국하는 걸 허락받고 돌아와 1867년에 죽었다.[4] 마을 이름의 유래는 폴란드에서 가장 흔한 성씨 중 하나인 잘레프스키의 집(kay Zalewski). 의미가 통하게 한국식으로 생각해보면 생뚱맞은 바다건너 전혀 다른 언어 쓰는 먼나라에 "김씨집"이란 마을이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