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지애나 구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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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올리언스에서 프랑스의 삼색기가 내려가고 미국의 성조기가 게양되고 있다.
1. 개요
2. 배경
3. 비슷한 사례
4. 후일담
5. 여담


1. 개요


1803년의 여름, 토머스 제퍼슨은 펜을 한 번 휘리릭 놀려서 미국 영토를 두 배로 늘려버렸다. 루이지애나 전체를 프랑스에게서 매입한다는,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일은 축제 분위기를 가져왔으며, 미국 여론과 언론은 한 목소리로 칭송을 했다. 이로써 제퍼슨은 멕시코만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미시시피 강 루트를 보호할 뿐 아니라, 영토범위를 북미 대륙을 가로질러 태평양까지 뻗는다는 “명백한 운명”을 실현하는 데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프랑스, 영국, 스페인이 아메리카에 손을 뻗치려는 팽창욕을 크게 억제할 수 있었다.

- 닉 래곤, 대통령의 결단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1803년, 뉴올리언스(누벨 오를레앙, Nouvelle-Orléans) 시의 통상권을 요구하러 간 미국 대사에게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북미 식민지 루이지애나(루이지안, Louisiane) 전체를 통 크게 단돈 1500만 미국 달러(7500만 프랑, 2016.12.13 기준 175억 500만 )에 팔아넘긴 사건이다.[1]
이 거래는 '''미국 역사상 가장 현명한 거래'''[2]이자 '''역사상 가장 평화적이고 즉흥적으로 진행된 최대의 영토 거래'''로 불린다. 1km2당 겨우 단돈 7달러의 가격이었다![3][4] 이 구매로 인해 얻은 영토로 미국의 영토는 2배로 불어났고[5], 현재의 미국 영토의 4분의 1 가량을 차지한다. 따라서 미국 역사에서 "서부개척시대"의 시작을 알린 가장 중대한 영토 변동이었다.
'루이지애나 구매'이지만 현재의 미국 남부의 한 로 있는 그 루이지애나가 아니다. 물론, 그 지역이 핵심이었고[6], 미국이 원래 사려고 했던 통상권 지역이긴 하지만... 나머지 내용은 후술한다.

2. 배경


이런 큰 영토를 한 번에 팔아넘기는 것이 일반적으로 순조로운 과정은 아닌데, 그렇지 않은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본래 루이지애나 지역은 스페인 탐험가 나르바예즈(1528)와 에르난도 데 소토(1542)가 최초로 발견한 곳으로 스페인 제국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근거로 이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러다가 1683년 프랑스 탐험가 르네 로베르 카벨리에 드 라살이 일리노이에서 출발해 미시시피 강을 따라 멕시코 만까지 도달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이곳을 루이 14세의 식민지, 루이의 땅이라고 “루이지앵”이라 이름붙었고, 나중에 미국식으로 “루이지애나”라 불리는 기원이 되었다.
1699년, 프랑스 해군의 드 이베르빌 제독이 정착지를 세웠고,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당시 스페인은 이 지역을 프랑스에 넘겼다. 이후 루이지애나는 절대왕정 식민지 개척 시대에 프랑스 식민제국의 확장으로 차지한 땅 중에 하나가 되었다. 거의 영국의 동부 해안을 제외하고는 모든 북미를 차지하고 있던[7] 프랑스령 루이지애나는 당시 프랑스의 북미 식민지인 누벨 프랑스(뉴 프랑스)의 이명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에 뉴올리언스가 있는 오를레앙(올리언스) 지역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1763년 7년 전쟁[8]의 결과로 북미, 인도에서 모두 철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평화조약에 따라 현재의 캐나다 퀘벡 북쪽과 미시시피 강 동부의 영토는 영국에게, 미시시피 강 서부의 루이지애나 영토는 스페인에게 모두 할양했고, 카리브해 도서지역을 빼고는 북미의 모든 식민지를 포기했다.
그런데 이후 나폴레옹 전쟁의 와중 1800년 나폴레옹이 스페인과의 산 일데폰소 조약을 통해 미시시피 강 서부의 옛 루이지애나 영토를 다시 빼앗았다. 미국은 스페인에 이어서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갓 독립한 미합중국 옆에 자국 영토와 비슷한 크기의 프랑스 식민지가 등장한 건 신생국인 미국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당장 미시시피 강에서 흙파고 살던 농민[9]들이 물 등을 위해 루이지애나의 뉴올리언스 근교를 지나며 통행세를 내야 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 정도면 좀 괜찮은데, 남부의 농업 교역에 미시시피 강 수운이 필수적이었다는 점이 더 치명적이었다. 뉴올리언스를 비롯한 프랑스령 식민지가 미시시피강 하류를 정확히 차지하고 있는데, 이 상황에서 만약 프랑스가 미시시피 강을 봉쇄했다간 남부가 의존하는 수운은 끝장이었다.[10][11]
그래서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여기의 교역권이나 협상하자고 사람을 보냈는데[12] 정작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덜컥 그냥 '''"차라리 1500만 달러(7300만 프랑)로 땅 전체를 다 사는 게 어떰?"'''는 식으로 나선 것이다.
땅 크기만 보면 나폴레옹이 정신줄을 놓았나 싶지만, 나폴레옹에겐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들이 있었다. 대혁명 이후 계속 전쟁을 치르고 있는 나폴레옹으로서는 북미 영국 식민지로부터의 침략 위협도 많고, 당시 프랑스 식민지에서 일어났던 아이티 혁명까지 부담스러운 일이 마구 터지고 있었다. 당장 영국 해군의 함대 때문에 프랑스군을 아이티 등 카리브 식민지에 파견하는 것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이지애나가 아무리 큰 잠재력을 가진 땅이라지만 무역항인 뉴올리언스 정도를 제외하면 당장 나오는 이익도 별로 없는 마당에 유지비는 크게 드는 등 제대로 손쓸 수 없는 상황. 당시 뉴올리언스를 비롯한 미시시피강 하구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역에 대한 탐사도 제대로 되지 않아서 이 지역에 대한 정보는 미국이 구입한 뒤인 메리웨더 루이스와 윌리엄 클라크의 탐사 뒤에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위에서 말한대로 군사적 효용은 컸지만 정작 당사국인 미국은 프랑스와는 우호적인 관계라서 당장은 큰 효용을 발휘할 수도 없었다.[13]
즉 처음에는 스페인으로부터 새롭게 돌려받은 영토로 프랑스의 확장을 꿈꿨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자 3년 만에 접은 것.[14] 토마스 재퍼슨은 제꺼덕 제안을 받아들였다. 한마디로 당시 정황을 고려할 때 나폴레옹 전쟁이 유럽 전체로 점점 퍼져나가고 있다는 상황을 고려하면 이는 나폴레옹의 몇 수 앞을 내다본 전략적 판단이었던 셈이다. 후세에 역사책을 보고 단순히 땅 크기의 문제로 생각하면 나폴레옹이 이해가 잘 안 되긴 하지만 또 따지고 보면 나폴레옹이 계속 소유했어도 패전 이후 다시 영국, 미국 등에 할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나폴레옹도 훗날 세인트헬레나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어차피 가지고 있어봤자 영국한테 빼앗길게 100%인데 그냥 판거다" 라고 밝혔다.[15][16]
실제로 스페인과 프랑스가 대조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당시 스페인은 카리브해의 쿠바, 그리고 아시아의 필리핀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스페인한테는 거꾸로 미국이 쿠바의 매각을 제안했지만[17], 사실상 아메리카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쿠바를 포기할 수 없었던 스페인은 이를 거절하였고 이후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결과적으로는 쿠바에다 멀리 아시아의 필리핀까지 죄다 뺏기고 스페인 제국은 몰락해버린다. 당시 스페인 상태로도 많이 투자를 했어도 도저히 지금 국력 상태로는 나라를 먹이고 살리기 바쁜 상태에서 필리핀까지 관리하기란 힘들었고 오히려 매각을 했다면 그 돈으로 스페인 재정에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야사에서는 나폴레옹이 이 매각 서류에 서명하면서 '''"이것으로 미국은 영국에겐 해양에서 가장 강력한 상대가 될 것이며, 결국 영국은 머지않아 그 오만한 머리를 미국에 숙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3. 비슷한 사례


위의 플로리다 구입오리건 구입도 유명한 사례지만, 루이지애나에 맞먹게 유명한 미국의 영토 구입은 제정 러시아알래스카 매각이다. 이 거래도 역시 미국이 횡재를 한 케이스다. 당시 국무장관 슈워드는 "720만 달러[18]짜리 비싼 냉장고를 샀다."라고 비웃음을 샀지만 사실 정치인들은 찬성한 케이스였다.
제2차 영란전쟁(1665~1667)에서 아직 미국이 영국식민지였을 때 네덜란드는 승전의 대가로 "뉴암스테르담"이라는 작은 식민지와 인도네시아의 영국 식민지를 교환했다. 당시는 뉴암스테르담의 가치가 훨씬 떨어졌다. 왜냐하면 당시 뉴암스테르담은 아메리카의 식민지 거점 도시 중 하나인 곳에 불과했던 반면, 뉴암스테르담과 교환한 인도네시아 식민지는 당시 유럽에서 엄청난 가격으로 팔리는 '''육두구'''의 주요 산지였다. 그러나 그 뉴암스테르담이 바로 나중에 그 유명한 '''뉴욕'''이 되었다. 이 역시 현재의 시각(당대에는 미래의 시각)으로만 당대의 영토 거래를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사례이다. 더구나 비연속국에 지키기도 힘든 루이지애나와 뉴암스테르담이 안보적으로 보장되었을 가능성도 적었고 말이다.
땅크기와 가격으로만 보면 캐나다가 오늘날의 베이인 허드슨 베이 컴퍼니에게서 루퍼츠랜드를 사들인 건데 루퍼츠랜드는 390만 제곱킬로미터로 루이지애나보다 크지만 가격은 단돈 30만 달러였다. 13제곱로미터당 1달러다...물론 대부분은 추워서 후진 땅이지만.

4. 후일담


루이지애나 구입 이후 제퍼슨 대통령은 미합중국 육군 장교인 메리웨더 루이스 대위와 윌리엄 클라크 소위가 지휘하는 탐험대를 보내 루이지애나 지역을 탐사했다. 루이스와 클라크 탐험 여기서 사카자위아가 활약한다.
오늘날의 루이지애나 주, 즉 뉴 올리언스 지역은 1804년 10월 "루이지애나 준주(territory)"에서 분리되어 한동안 올리언스(오를레앙) 구역으로 불리다가, 1812년 4월 정식 주인 루이지애나로 가입했다. 두 달간 "루이지애나 주"와 "루이지애나 준주"는 이름이 공존하다가 6월 이름이 미주리 준주로 변경되었다.
제퍼슨 후임 대통령인 제임스 매디슨 때의 미영전쟁에서 가장 큰 전투인 뉴올리언스 전투가 벌어지면서 대 전장이 되었다. 1815년 1월 6일에 벌어진 이 전투에서 미국은 크게 승리하며 평화 협상 중이던 미영간의 전쟁 승패에 쐐기를 박았고[19], 앤드루 잭슨 장군은 전쟁 영웅이 되어 9년 뒤 대통령에 당선 되어 재선한다. 1818년 10월, 영국과 미국은 북위 49선을 기점으로 국경을 정하기로 하면서 루이지애나는 영국령 "루퍼트 랜드"의 일부를 편입하고 대신 북위 49도선 이북 지역을 넘겨준다. # 또한 1819년, 미주리 준주의 북위 36도 30분 이남이 "아칸소 준주"로 독립했다.
1819년에 맺어져 1821년 3월 적용 된 애덤스 오니스 조약 역시 일시적으로나마 중요한 조약이다. 애매했던 루이지애나의 서쪽 경계(즉, 미국의 서쪽 끝이자 스페인과 만나는 국경)를 둔 문제였다. 미국은 서부 경계를 로키 산맥 정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스페인은 미시시피 강이 닿는 곳이 다라고 보았던 것. 또 스페인이 오레건 지방으로 북상하는 것도 미국 입장에선 좀 불편했다. 반면 스페인은 독립 전쟁이 빗발치고 영국의 견제가 심하자 더 이상 북미 식민지를 제대로 관리하기가 어려웠는데, 플로리다도 반쯤 미국인들이 늘어나는 상황이었다. 결국 협상을 하려던 점에서 양국의 의견이 일치했다.
이번에도 어떻게든 영토를 늘리려는 미국이 스페인의 요구를 들어 많이 양보를 했다. 새바인 강(Sabine river), 경도 서위 100도, 미시시피 강의 상류 지류인 아칸소 강 등을 미국의 루이지애나와 스페인의 식민지 "누에바에스파냐(뉴 스페인)"의 경계로 하는 대신 스페인의 북상을 위도 42도선으로 제한한 것. 결과적으로 루이지애나 영토는 일부 스페인에 양도되고, 대신 미국이 거진 반 영토가 된 플로리다(1845년)를 사들이기로 했다. # 결과 그런데 그 직후인 1821년 9월 멕시코가 독립하면서 스페인으로서는 별로 이득 본 게 없게 되었다.
루이지애나를 제외하고 가장 먼저 주로 승격된 주는 1821년의 '''미주리'''. 노예주였는데, 이를 문제로 위도 북위 36도 30분(미주리의 남부 주계)을 기준으로 남부는 노예주, 북부는 자유주로 하는 미주리 협정이 그 전 해인 1820년 맺어졌다. 이로서 루이지애나 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미주리 준주"로 불렸던 이 지역은 이름이 없어졌다. 북서부 일부가 1834년 미시간 준주의 일부가 되었다가 미시간이 1837년 승격되고 그해 3월 위스콘신을 거쳐 다시 아이오와 준주가 되었다. '''아칸소''' 역시 노예주로 1836년 승격하면서 아칸소 준주 역시 폐지되었다.
한편 루이지애나 이서에 텍사스가 자립을 시도했으나 멕시코에 재정복당하면서 루이지애나 지역과 그 이서 지역은 이 정치적 변동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미국의 주요 관심사가 된다. 멕시코는 스페인과 달리 국경을 열었고(...) 결국 텍사스에 미국 출신 이주자가 넘쳐나면서 1835년 봉기로 루이지애나 이서에 바로 텍사스 공화국이 들어선 것. 텍사스 공화국은 서부 국경을 리오그란데 강이라고 주장하면서 결국 미국-멕시코 전쟁(1844~1846)이 벌어지고 말았고, 결과는 당연히 미국의 대승. 스페인이 따내서 멕시코에 넘겨준 루이지애나의 일부는 다시 고스란히 거대한 텍사스 주의 영토로 들어가버린다. 1850년 텍사스 주의 다시 대폭 재조정되어서 지금 크기의 텍사스가 되는데 이 영역은 후에 콜로라도와 뉴멕시코가 된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미시시피 강 서부로 유배보낸 눈물의 길 역시 루이지애나 구입의 산물이다. 그러면서 1824년부터 "인디언 준주(인디언 구역, Indian territory)"가 설정되었다. 1854년 약간의 구역 변경(축소)은 있었지만 이 곳이 오늘날의 오클라호마.[20] 그 이북에 캔자스 준주와 네브래스카 준주가 생성 된 것도 같은 해인 1854년인데, 결국 이들이 주로 가입하면서 남북전쟁의 큰 떡밥이 되고 말았다. 제임스 뷰캐넌 참조.[21]
그렇게 미주리, 아칸소, 텍사스 이래 아이오와(1846년), 미네소타(이전에 준주, 1858년), 캔자스(1861년), 네브래스카(1867), 콜로라도(1876),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몬태나 주(1889)가 주로 편입되면서 흡수 86년만에 사실상 구 루이지애나의 모든 지역이 미국의 주가 되었다. 그리고 1907년 대망의 오클라호마 주 가입.
2003년은 루이지애나 구입 200주년이었지만 하필이면 대통령이 조지 W. 부시. 이라크전 반대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방미하지 않았다. 그리고 2년 뒤인 2005년, 최악의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에 몰아닥쳤다.

5. 여담


루이지애나가 미국령으로 공식적으로 선포된 1819년 3월은 이른바 세 깃발의 날(Three Flag Day)이라 불린다. 미국의 루이지애나 구입 이후에도 실질적으로는 스페인 행정관이 루이지애나를 통제했는데[22]이 날 '''스페인 ->프랑스 ->미국 순서대로 ''' 국기 하강식, 게양식이 열려 최종적으로 성조기가 게양되었다. 루이지애나의 소유권을 스페인에서 프랑스,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이전하는 퍼포먼스인셈.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2013년 재퍼슨이 영국과 동맹하겠다는 거짓 정보를 흘려서 팔았다는 이야기를 방영했는데 사실과는 거리가 멀 가능성이 높다.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 개척을 중단한 것에는 당시 열대 숲모기전염시키던 전염병 황열병도 있었다. 이걸 가지고 황열병이 없었다면 나폴레옹은 루이지애나를 팔지 않았을 것이고, 패전 후 엘바 섬에서 탈출해서 팔지 않은 루이지애나, 즉 "누벨 프랑스"로 가서 미국과 전쟁을 벌였을 지도 모른다. 이것이 대체역사만약에의 한 가정 에피소드.

[1] 2012년 미화로 환산해보면 230~240억 달러(25조) 상당이다.[2] 단순히 기존 영토의 두 배에 달하는 땅을 헐값으로 사들였다는 것만이 아니다. 루이지애나를 구입하여 서부개척시대가 열리면서, 미국의 영토는 캐나다와 함께 북아메리카 전체를 양분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즉, 본격적으로 국력이 성장할 수 있는 기초적인 요소인 광대한 영토를 획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이 루이지애나 구입을 계기로 미국의 본토가 태평양까지 뻗어나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미국은 바다를 거치지 않고서는 침략자체를 할 수 없는 천혜의 요새가 되어버렸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미국은 유럽이 한창 식민지 쟁탈전과 땅따먹기 싸움으로 혼란했던 상황에서도 먼로 독트린을 주장하며 고립주의를 바탕으로 내실을 다질 수 있었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초기에 관망만 한 채 무기를 팔아 거대한 이득을 볼 수 있었고, 세계 1위의 초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즉, 이 사건은 미국이 초강대국이 되는 가장 큰 계기였던 셈.[3] 정확히는 6000만 프랑을 내고 1500만 프랑은 미국이 프랑스 채무를 변제를 해줬다.[4] 그러나 이후 이 기록은 깨지는데 허드슨 베이 컴파니는 루퍼츠랜드라고 무려 39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땅을 캐나다 정부에 30만 달러에 팔았다. 앞의 기록은 그나마 1 제곱킬로미터당 몇달러지만 여기서는 그냥 1달러당 몇 제곱킬로미터 수준이다.[5] 즉, 루이지애나 = 구입 전 미국 영토라는 뜻이다.[6] 뉴올리언스는 지금도 루이지애나의 최대 도시이다. 당시 큰 루이지애나의 중심지는 당시부터 해안가의 미시시피 강 하류 항구 도시인 뉴올리언스였다.[7] 물론 이게 깃발만 꽂고 점점점으로 개척촌을 세운 수준이긴 했다. 그 나머지는 모두 아메리카 원주민과 공존했다.[8] 북미 전역프랑스-인디언 전쟁이라고도 한다.[9] 특히 신생주인 켄터키테네시. 그 이남의 하류지방은 아직 주가 없었다.[10] 참고로 프랑스가 넘겨받기 직전 루이지애나를 통치했던 스페인은 1795년 미국과 핑크니 조약(Pinckney's Treaty)을 체결하여 미국-스페인 양국간 하천의 항해를 보장하고, 통상을 정지하지 않기로 합의를 한 상태였다.[11] 미시시피 강에 대한 의존은 남북전쟁 때까지도 여전해서, 북부 연방이 미시시피강 하류를 봉쇄하자 남부동맹의 해외 무역 90% 이상이 막혔다.[12] 근데 이 부분부터가 제대로 따지면 전쟁으로 갈 시비의 여지가 큰 부분이라, 살짝 협박성에 가깝다. 그쪽 항구 지역 통행세 내는 게 거슬렸던 미국에서 일단 통행 허가를 요구했던 것. 눈치 빠른 나폴레옹은 가뜩이나 루이지애나 주변 영국 식민지 때문에 거슬렸기도 하고, 프랑스가 가장 많이 지원했으며 독립전쟁으로 사이가 매우 좋아진 미국과 이 일로 사이가 틀어질까봐 두려워졌다고 분석된다.[13] 문명 게임을 해 본 사람들이라면 '언제든 적의 손에 넘어갈 수 있는 건너 대륙의 점령 도시를 우호적 문명에게 싸게 팔아치워 우호도도 올리고 이익도 취한 후 신경 꺼버리는' 플레이를 종종 했을텐데, 정말이지 역사 현실과 거의 같은 플레이를 한 거다. 알래스카도 이와 비슷하게 얻은 거다.[14] 실제 나폴레옹은 미시시피강의 해운에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뉴올리언스에 군대를 파견했지만 중간에 아이티에서 예상 외의 손실을 입고 계획을 수정할 상황이 되었다. 본토에서 거리도 멀고..[15] 멕시코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를 보고 미국의 영토팽창 욕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감안하면 그냥 줘버리는 게 나았다. 물론 멕시코와는 달리 프랑스는 강국이라 미국이 섣불리 전쟁을 일으켰을지는 또 미지수지만 뭐 어차피 이역만리 프랑스와 코앞의 미국이 같나.[16] 또한, 그 당시 교통 수준을 잘 생각해보면 프랑스와 대서양을 건너서 저 멀리 아메리카 루이지애나까지 간다는 것은 암만 봐도 무리가 있다. 더군다나 프랑스는 해군력이 딸려서 당시로서는 루이지애나까지 가는 프랑스 선박 등을 관리하기가 어려웠기에 그냥 그럴 바에는 파는 게 나았을 것이다. 식민지를 강력하게 유지하려 했던 당시의 해양 초강대국 영국조차도 미국의 독립을 인정해야만 했는데 뒤처진 프랑스가 미국과 싸우면? 기왕 지금까지 사이 좋았는데 싸워서 관계도 깎고 돈 날리지 말고 차라리 돈 받고 "너 알아서 처리해!" 하며 넘긴 다음 거기서 철수해서 확보한 여력을 다른 곳에 투입하는 게 좋다. 특히 혼란의 연속이던 프랑스 제국 입장에서 또 다른 적을 만들 여유라곤 전혀 없었다.[17] 미국도 이를 기대하고 사절단과 구매 금액까지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18] 오늘날 16억 7000만 달러.[19] 조약에 변경은 없었다.[20] 오클라호마는 이 자치주 문제로 가장 늦게 가입한 주 가운데 하나이다.[21] 남북전쟁 기간에는 네브래스카의 가입이 보류되면서 준주 지역이 네브래스카, 콜로라도 주, 다코타(1861.3), 몬태나(1864.8) 등으로 구분되면서 사실상 주가 들어설 텃밭이 닦였다.[22] 나폴레옹은 아랑후에즈 조약으로 스페인으로부터 루이지애나를 뜯어냈지만, 실질적으로 프랑스 관료들이 파견되기에는 거리도 멀고 시간도 부족했기에, 뉴올리언스에 파견된 프랑스 총독과 세인트루이스의 스페인 행정관이 공존하는 구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