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린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안종린은 1867년 12월 6일 경기도 화성유수부 공향면 제암동 넘말(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넘말)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5일 향남면 발안 장날을 이용하여 안진순, 안상용, 안종락, 강태성, 안정옥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했다. 그는 이날 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터를 행진해 일본 경찰과 충돌했다. 경찰이 무차별 발포로 3명을 부상시키자, 군중은 분노해 투석으로 대항하여 일본인 순사부장이 돌에 맞아 죽고 많은 일본인 거주자들도 부상당했다.
이에 분노한 일제는 헌병과 경찰 혼성부대를 파견하여 수촌리를 급습해 김교철, 차인범, 정순영, 이순모 등을 체포하고 진압 과정에서 집을 불태우고 많은 주민들을 살상했다. 그 결과 제암리의 이웃 마을인 수촌리는 전체 42채의 가옥 중 38채가 불탔고, 그 외에도 4월 2일부터 14일까지 8개면 29개 마을에서 소실된 가옥이 348호, 사망자 46명, 부상자 26명, 검거인원 442명에 달했다. 4월 15일 400여 명이 발안 장터에 모여 만세 운동을 전개하자, 발안 주재 순사는 이들을 해산시켰다. 일제 경찰은 이와 같은 만세 운동의 주동자가 향남면 제암리의 기독교도와 천도교도라고 파악하고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4월 15일 정오,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의 아리타 중위가 이끄는 보병 13명이 제암리 주민들에게 알릴 일이 있다고 속이고 제암리와 인근 마을의 주민 약 20여 명을 제암리 교회로 모이게 했다. 아리타는 주민들을 교회 안에 가둬놓고 출입문과 창문을 잠근 채 부하들에게 불을 지르고 교회에서 탈출하려던 이들을 향해 집중 사격하게 했다. 이로 인해 안종린을 비롯한 주민 20여 명이 참혹하게 죽었다. 아리타 중위는 이어 제암리 마을의 가옥들에 불을 질렀고 이웃 마을인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 신자 6명을 나무에 묶어 총살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안종린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82년 9월 대대적인 유해 발굴 사업을 진행한 뒤 발굴된 유해를 23위의 묘로 안장했고, 1983년 7월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과 기념탑을 건립했다.